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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아먹기 전에 한 번 생각을 p.249
그들도 생명이다. 부모와 자식이 있고,
슬픔과 기쁨이 있고, 옳음과 웃음이 있고, 분노와 고마움이 있고,
옳고 그름이 있다. 개(犬)들 말이다.
며칠 전에 텔레비전에 사라져가는 전통(傳統) 장터가 나왔다. 포항 인근의 5일 장 모습이었다. 한 할머니가 귀여운 강아지를 샀다. 끌려가지 않으려고 네발로 브레이크를 거는 강아지를 목에 줄을 매고 질질 끌고 가고 있었다. 무슨 용도(用道)로 사셨느냐는 기자(記者)의 질문(質問)에, 버스를 기다리던 할머니의 대답(對答)은 강아지를 한 마리 키우고 있는데 비실 비실거려서, 자기 몸이 안 좋은 참에 잡아먹으려고 샀다는 것이다. 잡아먹기 전에 미리 대체(代替) 강아지를 산 것이었다. 용의주도(用意周到)한 할머니였다. 안 끌려가려고 기를 쓰고 버티는, 팔려 가는 강아지는 동족(同族)을 향한 이 늙은 암컷 인간의 천견공노(天犬共怒)할 무시무시한 흉계(凶計)를 눈치챘거나 느낀 것일까? 그래서 안 끌려가려고 버틴 것일까? 치료해 주거나 보약은 못 해줄망정, 잡아먹으려고 생각하다니!
정말 비극적인 일은, 속셈 할머니가 집에 돌아가면 그 비실거리는 개가 아무것도 모르고 반갑다고 꼬리를 흔들어댈 것이 분명하다는 사실이다.
세계적인 천문학자 닐 디그래스 타이슨(Neil deGrasse Tyson)이 직접 확인한 천재적인 개가 있다. [유튜브로 시청 가능. 개 이름은 '체이서(Chaser)'이다]. 이 개는 무려 1,000개의 인형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 타이슨이 "Find Monkey (몽키를 찾아와)"라고 명령을 내리면 이 개는 인형 더미로 가서 정확히 해당 인형을 찾아 물고 온다. (인형에 각각 이름이 적혀있다). 아마 이 개는 1,000개의 음성 단어와 1,000개의 (인형)냄새를 둘씩 짝지어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이것만도 놀라운 일인데 더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타이슨이 개가 전혀 모르는 '아인슈타인'이라는 낯선 이름이 적힌 새 인형을 개가 이미 이름을 알고 있는 다른 인형 10개와 섞어놓은 다음, 개에게 "Find Einstein(아인슈타인을 찾아와)"이라고 명령을 내린다. 개는 인형들이 놓인 소파 뒤로 가지만 시간이 한참 지나도 나오지 않는다. 몰래카메라로 보면, 개는 여기저기 뒤적거리지만 찾지 못한다. 포기하고 나와서 타이슨을 쳐다본다. 마치 "당신, 명령을 제대로 내린 게 맞아?"하고 묻는 눈치이다. 재차 타이슨이 같은 명령을 내리자, 타이슨이 실수로 엉뚱한 명령을 내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개는 즉시 그 아인슈타인 인형을 물고 나온다. 이름을 아는 인형을 다 골라내고 남은 낯선 (냄새의) 인형이 아인슈타인 인형이라고 결론을 내린 것이다! 정확히, 사지선다(四枝選多) 시험을 잘 보는 비결이 아닌가? 추론하는 개의 출현이다!
타이슨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똑똑하다고 칭찬을 해주자, 이 개는 아인슈타인 인형을 문 채로 고개를 좌우로 빠르고 힘차게 흔들며 말할 수 없이 기뻐한다. "우하하하! 난 정말 똑똑하다니깐! 난 아인슈타인이야!"하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자신의 총명함에 엄청난 자부심을 느끼는 듯하다. 정말 신기한 개다.
개가, 어느 날 갑자기 잡아먹히더라도, 인간과 같이 사는 이유는 잡아먹히는 날까지 배를 곯지 않고 잘 얻어먹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거지 근성을 지닌 늑대들이 음식쓰레기를 얻어먹으려고 인간 주위를 어슬렁거리다가 개로 진화한 것이다. 이 똑똑한 개(犬) 체이서는 거지 같은 조상을 두었다는 죄밖에 없다. 더 성능 좋은 컴퓨터(뇌)만 갖춘다면, 즉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노벨상도 문제없어 보인다.
그러니 여러분은 어떤 개이든지 잡아먹기 전에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란다. 죽는 순간 개들이 원망할지 모른다. "잠깐!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어요. 맨날 '어이 똥개 워리 워리'만 했지, 해준 게 뭐 있어요? 저도 제대로 된 교육을 해주기만 하세요. 1,000개는 몰라도 100개 인형 이름 기억은 문제없다니까요?"하고 불평하고 있을지 누군들 알겠는가? 체이서의 놀라운 능력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그의 동족들이 그리 생각할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개가 음식과 돌연사(突然死)를 맞바꾸는 것은 인간도 다를 바가 없다. 인간도 아름다움ㆍ젊음ㆍ사랑ㆍ학문ㆍ능력ㆍ이념ㆍ사상ㆍ인생관ㆍ양심ㆍ의리를 권력이나 부와 바꾸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개가 음식을 탐내다가 결국은 음식이 되는 것처럼, 인간도 그릇되고 비열하게 부와 권력을 탐내다가 마침내 그릇되고 비열한 부(富)와 권력이 되고 만다.
몽테뉴 성의 지혜로운 영주이자 위대한 수필가인 몽테뉴는, 일찍이 400년 전에, 다른 개도 이 똑똑한 개 체이서가 보유한 추론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증언한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으로 유명한 플루타르코스와 『박물지』의 저자 플리니우스가 언급한 동물우화가 있다. (무대를 조금 각색했다.)
주인과 같이 제주도 오름을 산책하던 개가 딴짓을 하다가 그만 주인을 놓쳤다. 주인이 남긴 냄새를 추적해서 주인을 찾아가던 개가 세커림질(세 갈래 길) 에 당도했다. 왼쪽 길을 킁킁거리며 가더니 되돌아왔다. 이번에는 가운데 길로 킁킁거리며 가더니 다시 돌아왔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전혀 킁킁거리지 않고 쏜살같이 오른쪽 길로 달려갔다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의 초점은 개가 오른쪽 길에서는 전혀 냄새를 맡으려고 시도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몽테뉴는 이 우화의 개가 삼단논법인 추론 능력이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개의 삼단논법은 다음과 같다.
1. 주인은 세커림질 가운데 하나의 길로 갔다.
2. 주인은 왼쪽 길과 가운데 길로 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주인의 냄새가 없으므로).
3. 따라서 주인은 오른쪽 길로 간 것이 틀림이 없다. (그래서 냄새를 확인할 필요조차 없다.)
체이서는 우화에 등장하는 개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한 위대한 개다. 몽테뉴가 논증한 바와 같이, 체이서는 개가 추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 사실을 세계적인 천문학자 타이슨으로부터 직접 검증을 받았다. 이 개는 전설적인 영웅이 진짜로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모든 개의 자존심을 살리는 일대 위업을 이룩했다.
그러므로 개를 잡아먹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해 보시기 바란다. 정말 꼭 이 지성적인 동물을 잡아먹어야 하는지를. 올해도 어김없이 복(伏)날-사람이 개를 잡아먹는 날-이 다가오고 있다. 인간에게 무조건적인 사랑과 충성을 바치는 견공(犬公)들의 운명이 걱정되지 않을 수 없다. 불볕더위에 뜨거운 가마솥으로 들어가야 하는 운명이!
예전 개들의 운명은 정말로 비참했다. '복날 개 패듯' '복날 개 잡듯' '복날 개 맞듯'이라는 야만적인 표현들이 이를 증언하고 있다. 나무에 대롱대롱 매달려, 입맛을 다시며 가하는 사내들의 몽둥이 채찍질에 산 채로 맞아 죽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비명을 지르다 혀를 길게 빼물고 죽었다. 그렇게 몽둥이 채찍질을 한 이유가 허망하다. 그래야 더 맛이 있다는 것이다. 필자의 어린 시절만 하더라도 이런 일이 흔히 벌어졌다. 예전보다 많이 나아지기는 했지만, 체이서로 인하여 견권(犬權)이 획기적으로 신장하기를 기원한다.
무엇이든 얻어먹는 자의 운명은 비참하다. (인간도 전혀 예외가 아니다) 인간 주위를 얼씬거리다가 비명횡사하는 것이다. 그동안 얻어먹은 것을 자기 살과 뼈로 다 갚는 것이다. 중생계(衆生界)의 비정한 계산이다.
개에 대한 우화는 칼 세이건의 [에덴의 용] 259쪽에서 인용.
행복의 법칙 : 보조수단 p.254
- 어떤 일이든 배우지 않으면 일정 수준을 넘을 수 없다. -
그렇다면 행복해지는 법을 배우지 않고도 무척 행복할 수 있을까?
불행해지는 법을 배우지 않아도 몹시 불행할 수 있을까?
행복한 경험은 인간의 행복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러므로 행복해지고 싶다면 행복한 경험을 만들려고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 인생에선 오히려 끔찍하고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운 불행한 일이 일어나는 등, 행복한 경험을 만드는 것이 생각만큼 쉽지 않을 때는 강력한 보조수단이 있다. '3층 고통 극복법'을 소개한다. 이것은 3가지 원리로 구성되어 있다.
1. 인간은 한순간에 한 가지 생각밖에 하지 못한다. p.254
인간은 한 번에 여러 가지 생각을 하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여러 가지 생각이 교대(交代)해서 나타나는 것이다. 특정한 한순간에는 한 생각밖에 하지 못한다. 이것은 텔레비전 화면에 하나의 영상만 뜨는 것과 동일하다. 혹은 사진 화소(畫素) 하나에는 하나의 영상만 대응하는 것과 같다. 다시 말해서 하나의 화면으로 [닥터 지바고]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동시에 관람할 수는 없다. 따라서 하나의 생각이 일어나는 순간 이 생각은 다른 모든 무수한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막는다.
예외처럼 보이는 사례가 있기는 하다. 한 몸에 두 개의 머리가 달린 샴쌍둥이는 한순간에 두 개의 서로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다. 뇌가 즉 모니터가 두 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의 뇌에는 하나의 스크린만 있다. 우리 뇌에는 1,000억 개의 뇌 신경세포가 있다. 뇌가 활동할 때 이들 중 일부가 여러 집단을 이루어 전기적(電氣的)으로 활성화된다. 수많은 뇌 신경세포가 활성화되지만, 우리의 표면 의식이라는 스크린 또는 모니터에 나타나는 결과(생각ㆍ표상ㆍ영상)는 한순간에 하나뿐이다.
뇌 신경세포들의 활동은 하나뿐인 영사관 스크린에 자기 작품을 상영시키기 위한 치열한 경쟁이다. 상영되지 못하는 작품들은 폐기 처분되거나, 사장(死藏)되어 잠재의식 창고로 들어가 기나긴 동면(冬眠)을 하게 된다.
2. 모든 생각(경험)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강도(强度)가 약해진다. p.255
그러므로 나쁜 생각은 생각하더라도 나중에 할수록 유리하다. 생각도 식으면 효력이 약해지는 것은, 식은 음식이 맛없는 것과 동일한 현상이다. 전형적인 무상(無常)의 법칙이다.
무상(無常)은 두 종류의 무상이 있다. 공간(空間)에 따라 약해지는 무상과, 시간(時間)에 따라 약해지는 무상이 그것이다. 전자(前者)가 중력ㆍ전자기력ㆍ약력ㆍ강력 등 물리적인 힘이라면, 후자(後者)는 幸ㆍ不幸(행불행)을 결정하는 경험과 생각이 유발하는 감성적인 힘들이다. 또한 전자(공간에 따라 약해지는 무상)는 시간에 대한 불변이며, 후자(시간에 따라 약해지는 무상)는 공간에 대한 불변이다. 중력의 법칙, 즉 돌의 무게는 어제나 오늘이나 시간과 무관하게 동일하지만, 기분 나쁜 경험이나 생각은 집에서 하나, 음식점에서 하나, 혹은 한국에서 하나, 미국에서 하나, 장소와 관계없이 똑같이 기분 나쁘다. 물론, 기분 좋은 경험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3. 행복은 '떠오르는 행복한 생각의 총량'과
'떠오르는 불행한 생각의 총량' 간의 비율로 결정된다. p.256
이 비율이 1보다 충분하게 크면 행복이다. 물론 1보다 넉넉하게 작으면 불행이다. 1 근처는 무덤덤한 상태이다. 즉, 행복한 생각이 불행한 생각보다 더 많이 떠오르면 행복한 것이다.
물론, 생각의 총량은 개별 생각의 강도를 고려한 가중합산(加重合算)이다. 즉, 강력한 생각이 약한 생각보다 더 많이 반영되는 합산이다.
기분 좋은 생각에는 '+'값을 주고, 기분 나쁜 생각에는 '-'값을 준다. 이 합 T가 양(陽)이면 행복이요, 음(陰)이면 불행이다. 생각에 가중치를 두어야 하는 이유를, 예를 들어 설명하면 이렇다. 100만 원짜리 복권에 열 번 당첨되더라도, 단 한 번의 1억 원짜리 사기를 당하는 것이 훨씬 더 기분 나쁜 것은 불문가지(不問可知)이기 때문이다.
설사 아무리 험악한 경험을 했더라도 그것이 생각나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그 경험(에 대한 기억)으로 인한 고통을 겪지 않는다. 중증 치매에 걸린 사람은 기억이 없어지므로, 항상 현재의 순간에 산다. 그래서 불행한 경험이 생각으로 일어나지 않고, 그 결과로 행복하다. 진짜 불행해지는 이들은 치매 환자 가족과 주변 사람들이다. (우리는 가끔 뜻하지 않는 순간에 갑자기 과거에 겪었던 불쾌한 일이 떠올라 잠시일지라도 불쾌한 느낌이 생겨난다. 다행히도, 보통 이내 사라지긴 한다. 반면에 어떤 나쁜 경험들은 자주 떠올라 끈질기게 파괴적이고 해로운 감정을 유발한다)
하지만 좀 덜한 나쁜 경험을 했더라도 '자주' 떠오르면 상당히 고통을 받게 된다. 심지어 선악을 초월한 단순한 음악적인 멜로디가 반복해서 계속 뇌에 떠올라도(이런 멜로디를 귀 벌레 ear worm 또는 뇌 벌레-brain worm- 라고 한다) 고통을 받는 것에 비추어보면, 좋거나 나쁜 생각의 떠오르는 양에 의해서 행ㆍ불행이 결정된다는 이론은 합리적인 주장이다 : 생각의 질 역시 중요하므로 사실은 생각의 양과 질에 의해서 결정된다.
감기약을 먹으나 안 먹으나 치료 시간은 똑같이 걸린다. 감기약은 단지 증상을 완화하는 기능을 한다. (흔히 듬뿍 처방하는 항생제는 감기의 원인인 바이러스에는 작용하지 못하는 무용지물이다. 환자를 안심시키는 위약효과를 유발하는 정도일 것이다. 물론 약사들과 의사들 주머니를 두둑하게 하는 효과도 발생시킨다) 감기약을 먹으면 인후통, 두통, 근육통, 콧물 흐름, 코막힘 등의 감기 증상으로 고생하지 않고 (자연) 치료가 된다.
만약 다른 일이나 다른 생각을 함으로써 불쾌한 고통스러운 경험을 한동안 떠올리지 않을 수만 있다면, 충분히 시간이 흐른 뒤에는 설사 그 생각이 떠올라도 생각하는 힘이 약해졌으므로 큰 고통을 주지 못할 것이다. 다른 일과 다른 생각은 정확히 감기약(의 진통 효과)과 같은 구실을 하는 것이다.
미국의 투자회사 '르네상스 테크놀로지' 사의 회장 제임스 사이먼스 James Simons는 10여 년 전인 60대에 사랑하는 두 아들을 사고로 잃었다. 조 단위 재산 billion dollars의 부자이고 연봉 역시 조 단위인 그도 자식을 잃는 슬픔은 극복하기 힘들었다. 극심한 고통 속에서 그가 택한 고통 극복의 방법은 '수학을 하는 것'이었다. 그는 젊어서 '천-사이먼스 정리'라는 그의 이름이 붙은 미분기하학의 중요한 정리를 증명한 촉망받는 유명한 수학자였으나, 뜻한 바가 있어 40대 초반에 버클리 대학 수학 교수를 그만두고 월가로 가서 투자자로 거듭났다. 그리하여 크게 성공했지만, 두 아들을 잃는 비극을 당한 것이다.
그는 다시 수학을 연구함으로써 자식을 잃은 슬픔을 극복했다. 수학 문제가 그의 뇌에 달라붙어 잃어버린 자식에 대한 (고통스러운) 생각이 일어나지 않게 한 것이다. 수학 문제가 생각나는 순간에는 자식 생각이 나지 않는다. : 1번 정리의 응용이다. (사람은 한순간에 한 가지 생각밖에 하지 못한다) 이런 식으로 (수학 문제가 뇌를 대부분 점령하여) 자식 생각이 줄어들고, 충분히 시간이 흐르자, 2번 정리로 자식을 생각하는 고통스러운 강도가 줄어든 것이다. 그러면 고통스러운 생각의 총량이 감소하여 불행을 극복하게 된다. : 3번 정리의 응용이다.
누구나 결국 죽지만 살아있는 동안에는 행복하게 살아야 하는 것처럼, 어떤 생각이건 결국은 강도(强度)가 약해지고 망각(忘却)이라는 강에 휩쓸려 소멸하겠지만 그때까지는 고통스런 경험이 일으키는 생각에 될 수 있으면 고문당하거나 고통을 받지 않고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
물론 필자가 제안하는 '3중 고통 극복법' 또는 '3층 불행 극복법'이 실행하기에는 생각보다 어려울 순 있다. 하지만 조금만 노력해 보면 그리 어렵지 않다는 것을 체험으로 알 수 있다. 이 방법은 사실은 역사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던 방법이다. 필자가 편찬한 것뿐이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일에 몰두함으로써 실연의 아픔, 자식이나 부모님 상실의 아픔을 극복했으며, 또는 다른 지방으로 이사가거나 외국으로 이사나 이민을 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자신을 정신없게 만들어, 과거의 고통스러운 경험에 대한 생각이 안 일어나게 함으로써 극복했다. 없으면, 잃어버리면, 또는 못 보면 당장 죽을 것 같던 사랑의 경험도 (실연을 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을 얻어 같이 살더라도) 시간이 가면 무디어져 가므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시간이 흘러가게 하는 것이 요점이다.
거대하고 단단한 바위도 시간이 가면 섬섬옥수 같은 물에 깎이어 금강산 상팔담과 백담사 계곡이 만들어지듯이 그리고 미국 그랜드캐니언이 만들어지듯이, 시간은 모든 정신적 경험을 깎아 먹어 힘을 빼앗는다. 시간은 뻣뻣한 배추의 힘을 죽이는 소금이다. 시간은 우리 삶에서 기억의 독기를 제거하여 살 만하게 만든다. (동시에 옛 경험으로부터 자극을 박탈하여 새로운 경험에 대한 용기와 욕망을 부여한다.)
종교적으로는 불행한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천수다라니 능엄신주 등의 주력(呪力)이나 다라니를 떠올리는 관상 명상법(이것이 본래 염불의 의미이다), (념, 송) 화두를 챙기는 방법, 『금강경』 『반야심경』을 외우는 방법 등이 있다. 옛날 할머니들은 안 좋은 일이 일어날 때마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하고 되뇌었다. 종교적인 소리와 뜻과 이미지로 마음을 채워 불행한 생각이 떠오르지 못하게 하며, 설사 떠올라도 머무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생각을 지켜보는 관법 수행도 있으나, 강력한 집중력이 동반되지 않으면, 오히려 무주공산 빈 마음 공간에 생각이 치고 들어오는 역습을 당할 위험이 있다. 108배, 500배, 1,000배, 3,000배, 10,000배 등의 절을 해서 몸을 수고롭게 함으로써 불행한 생각을 차단하는 방법도 있다.
선(禪)이나 사념처(四念處) 수행 등의 보다 근본적인 수행이 있으나, 목표를 너무 높게 잡으면 탈이 나는 법이다. 일단은 과도한 고통을 처리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잡초 우거진 나대지는 먼저 정지(整地) 작업을 하고 그 위에 집을 지어야 한다. 마음도 그와 같다. 마음은 신비한 물건이기도 하지만, 정확히 공학적인 설계나 작업이 가능한 대상이기도 하다. 그래서 더욱 신비한 것이다.
독자의 편의를 위해서 필자의 '3층 불행 극복법'을 간명하게 핵심만 기술하면 다음과 같다.
1. 인간은 한순간에 한 가지 생각밖에 하지 못한다.
2. 모든 생각(경험)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강도가 약해진다.
3. 행복은 '떠오르는 행복한 생각의 (가중) 총량'과 '떠오르는 불행한 생각의 (가중) 총량' 간의 비율로 결정된다. : 행복한 생각이 불행한 생각보다 더 많이 떠오르면 행복한 것이다.
행복하려면 공격적(적극적)으로 행복한 일을 만들어 나가야 하며, 방어적(소극적)으로는 이미 일어난 나쁜 일의 영향력을 최소화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필자가 제안하는 3층 불행 극복법'이다.
이것은 부처님이 가르치신 '이미 일어난 악행은 그치라'는 가르침에 해당한다. 필자는 관점을 '악행'에서 '악행에 대해서 떠오르는 생각이나, 악행의 기억으로서의 심리적인 영향력'으로 옮겨 설명한 것뿐이다. : 부처님은 "이미 일어난 선행은 육성하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악행은 일어나지 않게 하라"고 가르치셨다. 여기서 선행과 악행을 '선행의 영향력'과 '악행의 영향력'으로 바꾸면 심리학적인 해석이 될 것이다. 모든 행은 어김없이 우리 마음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그래서 우리의 행ㆍ불행을 결정한다는 면에서, 이런 관점은 유효하다.
사족을 좀 붙이자면 이렇다. 위에 소개한 필자의 '3층 불행 극복법'은 사실은 '3층 행복 증진법'으로 볼 수도 있다. 이것은 불행한 생각이 덜 떠오르게 하는 대신, 행복한 생각이 더 자주 떠오르게 하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앞서 인용한 부처님 말씀 중에 '이미 일어난 선행은 육성하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선행은 일어나게 하라'에 해당한다.
하지만 인간의 속성이라는 것이' 같은 값이라면 얻는 기쁨보다 잃는 고통이 더 크므로'(예를 들어 집을 한 채 더 얻는 기쁨보다는, 있는 집을 한 채 잃어버리는 고통이 훨씬 더 크다) 아무래도 고통을 없애는 방법에 더 중점을 둘 수밖에 없다.
주문을 외우거나, 기도하거나, 절하거나, 경전을 읽거나, 참선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경험과 기억이 떠오를 틈을 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매우 효과적이다. 물론 이런 종교적인 수련은 선업(善業)을 증진하는 적극적인 덕-德-virtue,바라밀이지만, 동시에 이미 (자기 마음 또는 뇌에) 있는 악업의 발현을 막는 방어책이기도 하다.
운(運)과 노력(努力) : 퀀텀(양자) 인욕과 퀀텀(양자) 자비 – 중도 인과 p.262
당신의 성공이 죄다 당신이 잘한 덕인가? 그렇다면 당신이 그렇게 잘난 사람이란 말인가?
당신의 실패가 죄다 당신이 잘못한 탓인가? 그렇다면 당신이 그렇게 못난 놈이란 말인가?
이 세상에 인과(因果)만 존재한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운(우연, 행운, 불운)도 존재한다. 지금부터 예를 들어 보이겠다.
두 사람이 복권을 산 것은 노력이요, 둘 중에 한 사람만 당첨된 것은 운(運)이다. 주사위가 우주의 업력(業力)을 받아서 1,2,3,4,5,6 중의 특정한 숫자를 들어낼 리는 만무하므로 운이다 : 그런 일은 뉴턴의 운동법칙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당신이 고층빌딩 100층에서 실족했는데, 초당 1mm의 엄청나게 느린 속도로 추락하는 것이 (그래서 털끝 하나 다치지 않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이 일 역시 불가능하다.
힘들게 일해서 번 돈으로 복권을 죽을 때까지 매주 열 장씩 30년 동안이나 산 것은 노력이요, 오히려 한 장만 산 사람이 덜컥 일등에 당첨된 것은 운(運)이다. 그렇게 열심히 산 당신이 당첨이 안 된 것은 정말 불운(不運)이다. 복권 당첨 번호를 결정하는 추첨 기계는 물리학의 역학으로 작동하므로 우주의 업력이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복권을 아예 한 장도 안 사면 절대 당첨될 일이 없으므로, 그 점에서 당첨은 '인과(因果)는 인과(因果)이다'. 그러므로 복권 당첨은 인과와 운의 오묘한 결합이다.
어떤 여인이 이상형의 남자를 소개받은 자리에서 기어코 나오려는 방귀를 용을 써가며 참는 것은 노력이요, 하필이면, 남자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가 아니라, 식사 중에 방귀가 터진 것은 운이다. 특히 냄새가 지독하다면 더욱 그렇다. 그것도 화장실에 가서 처리하려고 의자에서 엉덩이를 드는 순간에 터진다면, 정말 운이다. 절묘한 타이밍의 악운(惡運)이다. 남자가 호감을 표하는 중에 터졌다면 그리고 끔찍한 냄새가 반경 수 미터를 포위했다면, 정말 비운(悲運)이다. 이런 여인을 비운의 여인이라 부른다.
평소 다이어트. 요가, 산책, 등산, 골프에다가 독서로 다지고 쌓은 건강과 교양은, 종종 방귀 터짐 같은 '순수한' 순운(純運) 앞에서는 한없이 무기력하다. 나(날씬하고 교양 있는 여자)는 상대방이 아주 마음에 드는데 상대방은 오히려 뚱보와 속된 여자를 좋아한다면, 그런 웃기는 상황은 분명 희운(戱運)이다.
지인(知人)이, 무인 속도측정기가 없던 시절, 경부고속도로를 달리다가 경찰에게 속도위반으로 잡혔다. 앞뒤로 쌩쌩 달리는 차들의 호위를 받으며 안심하고 과속하다 벌어진 일이다. 묻혀 달리면 안 잡힐까 싶어, 빠르게 달리되 다른 차들에 묻혀 달린 것은 노력이요, 하필이면 자기만 잡히는 것은 운이다. 다른 차들은 놔두고 왜 자기만 잡느냐는 항의에 교통경찰이 하는 말, "세렝게티 초원에서 사자가, 죽어라 도망가는 물소를 몇 마리나 잡습니까? 그중 딱 한 마리만 잡지요." 살아오면서 경찰에게서 들은 가장 지혜로운 말이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하필이면 잡힌 물소가 자기라니, 그게 바로 고운(苦運)이다.
그런데 지인의 항변이다. "속도위반 딱지를 떼이는 것을 꼭 운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라는 것이다. 이분이 20여 년 전에 포항에서 울진으로 가는 국도에서 교통경찰에게 속도위반으로 걸렸다. 선처해달라고 애원하자, 멋진 흰색 할리데이비슨(Harley-Davidson-오토바이)을 탄 검은색 선글라스의 경찰이 하는 말, "안 됩니다. 한 사람 잡기가 얼마나 힘든 줄 아십니까? 당신을 다섯 시간이나 기다렸어요. 요즘 운전자들이 여간 영악한 게 아니에요. 어떨 때는 하루 종일 기다려도 한 사람도 못 잡아요. 그러니 그냥 보내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수고비(?)로 경찰 조직에 5천 원을 기부했다고 한다. 대단히 설득력 있는 논리였다. 그런데 그건 교통경찰의 입장으로 볼 때 노력이지, 지인 입장으로는 운이 아닌가? 독자 여러분의 의견은 어떠하신가?
한 사람은 양산 만드는 기술을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나막신 만드는 기술을 익힌 것은 노력이나, 그 후 오랫동안 비가 오지 않아 나막신 갖바치가 망한 것은 건운(乾運)이다. 운이 말라버린 것이다.
부지런한 종갓집 며느리가 수십 명분 대가족 김장을 때맞추어 마친 것은 노력이요, 이상 기후로 그래 겨울이 유난히 따뜻해서 김치가 죄다 일찍 쉬어버린 것은 기운(氣運)이다. 기후 예측용 인공위성이 없던 조선시대에 특히 그러하다. 운은 과학의 발달에 따라 점점 더 먼 변경으로 쫓겨난다.
열심히 운동하고 소식하며 육식을 줄인 것은 노력이나, 하필이면 캐나다 여행 중에 별미라고 해서 모처럼 먹은 쇠고기 스테이크로 광우병에 걸려 요절한 것은 광운(狂運)이다. 그날따라 입맛이 당겨서 먹은 오리고기로 조류 독감에 걸려 죽는 것도 운이되, 비운(飛運)이다. 다 같이 먹었는데 자기만 걸렸다면 더욱 고약한 운이다. 물론, 고기를 먹은 것은 인(因)이나, 먹은 후에 자기만 탈이 난 것은 운(運)이다. 세상은 인과가 운을 이끌며 추는 탱고이다. 운(運)은 가끔 미쳐 날뛴다. 그러니, 그런 운은 광비운(狂飛運)이라 아니할 수 없다.
겨냥한 것은 인과(因果)요 바람은 운(運)이다. 바람은 어디서 불어와서 어디로 불어갈지 아무도 모른다. 바람이 왜 하필이면 그때 그 순간 그 방향으로 부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므로 활을 쏘아 과녁에 맞히는 것은 인과가 우연과 추는 왈츠이다.
보시 등 육바라밀을 닦으며 사는 것은 노력이요, 그렇게 열심히 살던 사람이 길을 가다 보도로 돌진한 벤츠에 치여 죽은 것은 운이다. 잘 차려입은 운전사도 죽었는데 알고 보니 그가 무보험에다가 빚만 잔뜩 있는 사람이었다면, 피해자는 보상받을 길이 없으니, 유족은 지독히 운이 없는 것이다. 이런 운은 벽운(霹運)이라 불린다.
열심히 일을 해서 돈을 많이 번 것은 노력이요, 그 돈으로 모처럼 쇼핑하러 간 백화점이 무너진 것은 운이다. 백화점 주인 입장으론 붕운(崩運)이요, 손님 입장으론 압운(押運)이다.
두 사람이 밭에 나갔다. 밭에서 일하던 중에 한 사람은 수박만 한 운석이 자기 발밑에 떨어지고, 다른 한 사람은 자기 머리 위에 떨어졌다. 두 사람이 밭에 나가 열심히 일한 것은 노력이고, 발밑에 떨어진 운석으로 횡재(橫財)하는 것과 머리 위에 떨어진 운석으로 횡사(橫死)하는 것은, 둘 다 '뜻밖(橫)'으로 평등한 횡운(橫運)이다.
나무가 햇빛 받기 경쟁을 하며 열심히 자란 것은 노력이요, 씨앗 시절에 울진 대왕 소나무 옆으로 날려온 것은 운이다. 유명 소나무사진작가 장국현이 대왕 소나무의 멋들어진 풍채를 가린다고 주변 나무들을 베어 버렸다. 장국현의 唆嗾(사주)를 받은 시골 사람들에 의해 톱질을 당한, 그런 운 없는 소나무가 10그루가 넘었다. 그가 그런 짓을 할지 누가 알았겠는가? 사람도 모를진대 하물며 소나무이랴! 그러므로 순운(純運)이다. 이 진짜 운 없는 나무들은 풍운(風運)의 소나무들이다.
이것저것 열심히 준비해서 해외 유학에 나선 것은 노력이나, 결국 학업을 중단시킨 IMF 사태가 터진 것은 흉운(洶運)이다.
서봉수가 조훈현이 태어날 무렵에 같이 태어난 것은 상서(祥瑞)롭지 못한 운이지만, 뽑아도 뽑아도 다시 솟아나는 잡초처럼, 좌절하지 않고 넘어질 때마다 다시 일어나, 세 판에 한 판 정도로 판맛을 본 것은 노력이다. (2010년 현재 조. 서 승률은 246:120)이다. 많이도 싸웠다!)
만약 조훈현이 없었다면 국내 타이틀은 모두 서봉수 차지였겠지만, 세계 최고 국제기전 응씨배 우승은 불가능했으리라. 서씨가 조씨에게 패하면서 배운 것이 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상(不祥)한 서봉수가 조훈현을 만난 것은 행운(辛運)이다.
그(녀)를 만난 것은 운이요, 서로 증오하게 된 것은 인과이다. 얼마나 서로 간에 상대방 마음을 후벼파는 말들을 해댔겠는가? 마찬가지로 그(녀)를 만난 것은 운이지만 서로 사랑하게 된 것은 인과이다. 서로 위해주는 마음이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랑과 전쟁'은 '인과와 운의 놀이터'이다.
얼굴도 모르는 처녀(총각)에게 장가들라는 부모의 명령에 순종한 것은 노력이나, 첫날밤 어여쁜 색시(잘생긴 신랑)의 얼굴을 확인한 것은 운이다, 절대로 복(福)이 아니다. 반대의 (밉고 못생긴) 경우도 평등하게 같은 횟수로 발생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반듯한 용모와 제정신에다) 성품까지 좋다면 대운(大運)이며, 반대의 경우는 대단한 불운(大凶)이다. 이 점에서 모자란 부인을 얻은 퇴계 선생은 불운했다. 하지만 드높은 도(道)로 운(運)을 극복하고 평화로운 삶을 유지했다. 그래서 도를 닦아야 한다. 불운소화제로는 道보다 나은 것이 없다. 그걸 도운(道運)이라고 한다.
비행기 시간에 늦게 일어났지만, 부랴부랴 준비해서 열심히 공항으로 나간 것은 노력이요, 그날따라 비행기가 연착해서 비행기를 놓치지 않은 것은 행운(幸運)이다. 행운에서 대들보(-)를 하나 빼면 간당간당 위태로운 행운(辛運)이다. 탑승 전 심한 배탈로 화장실에 가서 한참 차례를 기다린 끝에 일촉즉발의 위기를 넘기고 겨우 변기에 엉덩이를 올렸으나, 시간이 너무 지체되어 그만 비행기를 놓쳤는데, 그 비행기가 이륙 후 추락했다면 행운(辛運)이다 : 행승(辛乘) (변기를 어렵게 탐)이고 행운(辛運)이다. 배탈이 아니라, 그 전날에 돌아가신 어머님이 현몽하셔서 탑승을 막았다면 행운(辛運)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4년 6월 5일 밤에 미군 공수부대가 노르망디로 뛰어내린 것은 노력이었으나, 하필이면 그날 밤에 불이 난 농가가 밤하늘을 환하게 밝혀서 독일군에게 조준 살해당한 것은 악천후(惡天運)이다. 그런데 교회 첨탑에 걸려 살아난 존 스틸 이등병은 천운(天運)이다.
K2 암벽등반 중 설사가 터지면, 줄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로, 바지를 벗고 개미가 개미굴 침입자에게 강산성(强酸性) 액체를 발사하듯이 급히 발사해야 한다. 등반 장비와 줄로 얽힌 등산복을 낑낑대며 벗는 것은 노력이요, 그런 사람 바로 밑에 자리 잡고 줄에 매달린 채로 똥 벼락을 맞는 것은 운이다. 이와 비슷한 일이 8,000미터 이상의 14좌 완등(完登)에 빛나는 세계적인 등반가 엄홍길에게 일어났다고 한다. 뒤집어쓴 인분이 살을 에는 추위에 얼어붙는 것은 참을 수 없는 불운이다.
바람이 돌연 진로를 변경하고, 그 바람에 낙하하던 물똥이 얼굴을 향해 돌진하면 대단한 불운이다. 그런 불운은 사바세계 최고의 불운이라 해도 조금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만약 일을 본 등산가가 여성이었다면 등반 사고로 동료들이 다 죽지 않는 한 절대 시집을 못 가리라. 그 복수(複數)의 간지러운 입을 막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무슨 날벼락 같은 불운이랴. 이런 운은 온 세상에 고약한 액체를 뿌리는 설운(泄運)이라 불리어야 합당하다.
그럼, 인과론은 엉터리인가? 그렇지 않다. 확률적으로 보면 된다. 우리 삶에는 무수한 일들이 일어난다. 이 가운데 우연으로 일어나는 일보다 인과관계로 일어나는 일이 훨씬 더 많다. 특히 다단계의 인과적 고리로 연결된 복합사건은 우연으로 이루어질 확률이 희박하다. 전체 사건이 일어날 확률은 개별사건이 일어날 확률들의 곱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범사에 철저해야 한다. 곱의 확률에서는, 하나라도 확률이 낮으면 나머지에, 즉 전체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극단적으로 하나가 0이면, 전체도 0이다. 어떤 수에도 0을 곱하면 0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과는 '곱의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그리고 이렇듯, 여러 운(運)의 합동으로 일어나기에, 몹시 일어나기 힘든 운이 발생하는 것을 '승운(乘運)을 입는다'라고 한다. 물론, 부정적으로는 '승운을 못 입는다'라고 표현한다. 참고로, 승(乘)은 곱할 승자이다.
기가(棋家)에서 말하기를, '대마가 죽는 건 기적'이라고 한다. 살길이 무수했으나, 즉 한 번만이라도 살길을 택했으면 되는데, 수십 번의 살길을 놓치고 수십 번을 모두 죽을 길로 갔으니 그 얼마나 어려운 일이냐는 말이다. '확률의 곱의 법칙' 측면에서 보더라도 대단히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프로 아마추어 가릴 것 없이 수없이 죽어본 사람들의 자조적인 한탄이다. 바둑이건 인생이건 수없이 생사를 거듭해 보면, 즉 수없이 윤회를 해보면 지혜가 생기는 법이다.
일본의 전설적인 승려 바둑기사 초대 본인방(本人坊) 산사(算砂, 1559~1623)가 죽음이 다가오자 내뱉은 명언이 있다. "이게 바둑이라면 패라도 걸어볼 텐데"
그뿐만 아니라 運은 우리의 통제력 밖에 있으나 因果는 그렇지 않다. 인과는 법칙이므로 스위치를 올리고 내리는 것과 같다. 스위치를 올리고 내림에 따라 어김없이 불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처럼 인과도 그러하다. 사람과 달리 인과는 배신이 없다. 그리고 스위치를 올리고 내리는 것은 우리 의지(意志)이다.
무명(無明)은 운이요, 해탈은 노력이다. 오해가 없게 자세히 표현하면 이렇다. : 초기치(initial value(최초의 상태)로서의 무명(無明)(번뇌를 일으키는 어리석음, 연기와 인과에 어두운 것) 은 運이요, 최종값(final output)으로서의 解脫(번뇌에서 벗어남, 연기와 인과에 밝은 것)은 노력이다. 해탈한 중생이 퇴락해서 무명(無明) 중생이 되었을 리는 천부당만부당하므로, 중생(衆生)은 무명으로부터 출발한 것이 명명백백하다 :
따라서 주어진 初期値(초기치)로서의 무명은 운(運)이다. 태어날 때 머리가 안 좋게 태어난 것은 운(運)이지만, 열심히 노력해서 번뇌를 해탈한 것은 노력이다. 그러므로 '무명'의 풀이는 다음과 같이 바꿈 직도 하다 : 무명(無明)은 연기(緣起)와 인과(因果)와 그리고 '運'에 어두운 것이다. 가끔, 運에 절망한 나머지 인과마저 버리는 일이 있기에, 더욱 그러하다.
부처님 제자 중에서 머리가 나쁘기로 유명한 주리반특을 보라. 주리반특은 한 문장도 외우지 못할 정도로 우둔했으나, 열심히 노력해서 아라한이 되었다. 아둔하기 이를 데 없는 우리 불자들이 귀감으로 삼아야 할 사람은 용수보살이나 성철 스님이 아니라 주리반특이다. 뱁새가 황새 따라가다가는 가랑이가 찢어지는 법이다. 불상을 만들어 세울 바에야, 절마다 주리반특 상을 세우고 모범 모델로 삼아야 한다. (그 앞에서 머리를 조아릴 때마다 聲聞(성문) 주리반특은 말씀하신다. "너희는 나보다 훨씬 총명하므로 깨달음이 보장되어 있다. 그러니 열심히 정진하라." 어찌 고맙고 따사로운 우직한 격려가 아닐쏘냐!) 그런데 주리반특 불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여자(남자)의 적은 여자(남자)라더니, 우둔한 중생의 적은 우둔한 중생들이다.
그러므로 부처님 제자로서 우리가 할 일은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다. 세상일도 그렇고 영적 수행도 그렇고 모두 노력이다. 그러고도 안 되면 '이번에는 운이 없는가 보다' 혹은 '지독히도 운이 없구나'라고 생각하고 다시 노력하면 된다. 그런데 언제까지 해야 할까? 정답은, '운이 찾아올 때까지'이다. 그러면 안 되는 일이 없다. 윤회론이 사실이라면 우리에게는 무한한 시간이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노력하면 반드시 성취된다. 언젠가!
'운을 운(運)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도(道)이다. 도는 절대로 불평하지 않는다. (道無不評, 不運不關, 常維持捨, 卽平常心, 或陽或陰, 都無相關, 向上一路, 是爲精進). 노력이 부족하거나 단지 운이 없기 때문이다. 해탈은 노력으로 오지만, 노력에 결과가 안 따라주어도, '운이 없는 것이려니'라고 생각하면서, 초연하게 다음 노력을 하는 것이 道이다. 세상사도 마찬가지이다.
카인이나 아벨이나 둘 다 열심히 농사짓고 목축을 한 것은 노력이나, 야훼 하나님이 카인의 곡물을 거절하고 아벨의 고기를 받은 것은 카인 입장에서는 運이다. 야훼가 고기(태우는 냄새(燔祭)를 좋아할지 누가 알았겠는가? [구약]에 보면 야훼에게 바치는 음식이 상세히 열거되어 있는데 모두 고기이고 채소는 없다. (야훼가 잡식성이었다면 그런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니, 이것도 운(運)이라면 運이다. 이 경우 카인과 아벨은 사이좋게 합동으로 야훼에게 제사를 지낼 수 있었다. 제사상은 좌곡우육(左穀右肉)으로 차리면 된다. 아니면 양 머리 국밥으로 통일하든지, 차라리 양 날고기 비빔밥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미리 메뉴를 주문받은 것도 아니고....그렇다고 해서, 하나뿐인 형이 바로 밑 동생을 죽이다니 도(道)가 낮아도 한참 낮다. 도가 중간 정도만 되어도, '에이, 운이 없네'하고 말 일이었다.
우리가 동양에 태어나 사생자부(四生慈父) 부처님의 가르침을 만나 타인과 동물에 대한 자비심을 가지고 사는 것은 홍복(洪福)이다. 하지만, 이 일은 상당 부분 운(運)이다. 이게 運이 아니라면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받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불경]에서 말하기를 '불법(佛法)을 만나는 것은 맹귀우목(盲龜遇木)처럼 어려운 일'이라고 한다. 별로 복을 지은 바 없는 우리가 이슬람, 기독교, 힌두교, 공산주의 국가가 아닌 한반도 중에서도 남쪽 반토막인 대한민국에 태어나 불법(佛法)을 만난 것이 바로 '맹귀우목'이다. 즉 다름 아닌 우리가 맹귀(盲龜)이다. 그러므로 불법을 만난 이런 홍복은 맹렬(盲烈)한 맹운(盲運)이다.
'운(運)을 운(運)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인욕(忍辱)과 자비심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전생이나 현생에 스스로 만든 업으로 인해서 생긴 '마땅히 받아야 할 욕됨'을 참는 것보다는, 오히려 '양자역학적인 불확정성(quantum uncertainty)으로 발생한 무작위(random) 욕됨'을 참는 것이 진정한 인욕이다. 이것을 무연인욕(無緣忍辱), 무연자비심이라고 한다. 인과의 사슬을 벗어난 운(運)으로 일어나는 일이기에, 함부로 양자역학 용어를 빌려와 '양자인욕(量子忍辱-퀀텀 인욕)' 또는 양자자비심(퀀텀 자비심)이라고 해도 크게 어긋나지는 않으리라.
예수는 "가족을 사랑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나,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그렇지 않다"라고 했다. 운(運)이 존재하기에 인간은 진정한 인욕(忍辱)을 닦을 수 있다. 그리고 진정한 자비심(慈悲心)이 가능하다. 보복과 보답이라는 인과(因果)관계를 벗어나는 것이, 진정한 인욕이자 자비심이다. 소위 無爲 인욕과 無爲 자비심이다.
운이건 불운이건 간에 우리에게 던져진 그 운, 불운을 바라보고 포용하는 시각과 마음은 온전히 우리 몫이다. 그래서 구도(求道)와 해탈이 가능한 것이다.
극단적인 인과론은 '모든 것이 인과이고, 운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이론이다. 이 극단적인 인과론의 대척점(對蹠點-antipode)에는 극단적인 우연론이 있다. 모든 일이 우연이라는 것이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라는 유전학과 '우주를 인과적으로 설명하는 학문'인 현대과학의 눈부신 성공은, 극단적인 우연론을 부정한다. 이렇듯 극단적인 우연론은 명백히 거짓이므로, 그 대척점에 있는 극단적인 인과론 역시(양자역학이 말하듯) 거짓일 가능성이 상당히 크다. 흔히 자연은 쌍으로 존재하고, 쌍 사이에는 대칭성(symmetry)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극단적인 형태의) '인과와 우연'은 하나의 쌍이기에 한쪽이 거짓이라면 다른 쪽도 거짓일 가능성이 크다는 말이다. 즉 인과론은 극단적인 형태로서는 거짓일 가능성이 크다. 다시 말해서, 세상은 인과(因果)와 운(運)이 공존(共存)한다는 말이다. '인과(因果)가 주인이 되어 운(運)을 이끈다'는 이론이 中道因果論이다.
극단적인 인과론에 빠지면, 자신의 불행을 모두 전생의 업보로 돌리는 결정론 내지는 패배주의로 흐를 수 있다. (증시에서 깡통 계좌에 근접하면 만회하는 것이 극도로 어려워지듯이, 큰 악업을 쌓은 사람은 인과의 힘만으로는, 즉 자력만으로는 원위치로 돌아가는 것이 극도로 어려워질 것이다. 그래서 절망하고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의인이나 귀인을, 즉 선지식이나 부처를 遭遇(조우) 하는 것은 급등주처럼 대단한 행운이다) 또는 불행하고 고독한 자들에 대한 동정심이 사라지고, 반대로 돈과 권력을 남용하는 사람들에 대한 관용과 동경이 생길 수 있다.
극단적인 인과론에 의하면, 그들은 그런 큰 복을 누릴 좋은 업을 쌓은 것이 분명하고, 그렇지 못한 자기는 좋은 업을 쌓지 못한 열등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런 철학은 정치, 경제, 사회제도의 개혁과 발전을 가로막는다. 중도인과론(中道因果論)의 장점은 이런 결점을 완화하고 동시에 숨을 턱턱 막히게 하는 인과론의 톱니바퀴에서 벗어나게 하는 해방의 멋이 있다. 그리고 운(運)을 허용하면 우리가 흔히 불합리하다고 느끼는 현상인 '선인이 망하고 악인이 성공하는 현상'을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다. 인과론이 이런 일을 설명하려고 고안된 이론이기는 하지만, 상대적으로 운도 이런 일을 설명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인과관계가 대부분을 차지하는 우주에, 운이 좀 섞이는 것이 우주를 부드럽게 돌아가게 만든다.
중도인과론은 한마디로 표현하면, '우리 숨 좀 쉬고 삽시다'이다.
출처 : 강병균 교수 역저. 어느 수학자가 본 기이한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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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에 대한 많은 것을 배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