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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언약의 일꾼, 새 언약의 성도
본문 렘31:31-33절
3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31:32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1:33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설교 작성노트
하나님은 “보라 날이 이르리니 새 언약을 맺으리라”하시고 사도는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다”고 말씀한다. 그러면 “새 언약”의 내용은 무엇이며, “새 언약의 일꾼”의 사명은 무엇인가고 묻게 된다. 이를 증언하려는 것이 내용목적이다. 그리고 “새 언약의 일꾼”이 “새 언약”을 증언하여 양육한 “새 언약의 성도”는 어떤 자들이 되어야 하는가에 적용목적이 있다 할 것이다.
강론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언약의 관계”입니다. “언약(言約)의 관계란 믿음의 관계”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말씀하는 “믿음”은 신념(信念)과 달라서 언약에 대한 반응, 즉 언약을 믿고 의탁하는 것이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언약”(言約)이 없으면 믿음도 성립이 되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도 성립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31절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1)하십니다. 이는 성경 상 중대한 분기점(分岐點)이 되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옛 언약과 새 언약, 주전(主前)과 주후”를 가르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의 우리들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새 언약”의 관계요, 우리의 믿음은 “새 언약을 믿는 믿음”인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내 증인이 되리라”하신 설교자들은 “새 언약의 일꾼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 언약”이 무엇인가? 그 내용에 확고해야만 바른 일꾼, 바른 믿음, 바른 성도가 될 수가 있기 때문에 오늘 말씀이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음 절인 32절에서는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 즉 옛 언약과 같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탐구(探究)해야 할 요점은 3가지입니다. ㉠ 첫째는 “옛 언약”은 누구와 누구 사이에 맺은 언약이며, “새 언약”은 누구와 누구 사이에 맺은 언약인가 하는 점이고, ㉡ 둘째는 “옛 언약과 새 언약”이 어떤 점에서 다른 것인가 하는 언약의 내용이고, ㉢ 셋째는 “새 언약”을 세우시는 목적, 즉 기대하시는 바가 무엇인가 하는 점니다. 이점에 확고해야만 올바른 “새 언약의 일꾼, 새 언약의 성도”가 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① 먼저 “옛 언약”은 누구와 누구 사이에 맺은 언약이며, 언약의 내용은 어떤 내용인가 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옛 언약”은 출애굽한지 3개월 쯤 지난 시내 광야에서 세워주셨습니다. 왜냐하면 바로의 노예였던 자들이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 구속함을 받아 하루아침에 신분이 하나님의 백성들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노예근성에 저저 있던 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 세워주신 것이 옛 언약인 것입니다. 법이 없으면 무법천지가 될 것이 아닙니까?
㉡ 그러면 언약의 내용이 무엇인지 출애굽기 24:7-8절을 보겠습니다. 모세가 “언약서를 가져다가 백성에게 낭독하여 듣게 하니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遵行)하리이다”합니다. 그러자 모세가 언약의 피를 백성에게 뿌리면서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고 선언합니다. 이처럼 “옛 언약”은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맺은 언약이었고 내용은, “우리가 준행(遵行)하리이다”한 행위(行爲)언약이었습니다.
② 그렇다면 여러분은 “새 언약”은 누구와 누구 사이에 맺은 언약인지 말해줄 수가 있습니까?
㉠ 히브리서 9:15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새 언약의 중보자”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디모데전서 2:5절에서는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합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보자가 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사람”이 되셨다는 뜻입니다.
㉡ 그러면 “중보자”의 역할이 무엇입니까? 주님은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고 말씀하십니다. 이점이 주님의 대제사장 기도에 분명히 나타나는데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다”(요 17:6)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택하신 자들을 자기 아들에게 주시면서 이들의 죄를 “대속하라”고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대속제물이 되시는 것, 이것이 중보자의 사명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들의 죄를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대신 죽으시겠다는 약속이 성부와 성자 간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언제입니까? “창세 전에”!!
㉢ 그리하여 주님은 십자가를 앞에 놓고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요 12:27)하시고, 우리를 대표해서 “새 언약의 피”를 흘리셨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최후만찬 석상에서 제자들에게 포도주 잔을 주시면서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7-28)고 말씀하셨는데 “흘리는 바 나의 피”란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내 피를 마시라”하신 것은 “새 언약”에 참여시키는, 즉 새 언약을 믿으라는 뜻인 것입니다.
③ 그런데 중요한 요점은 새 언약이 옛 언약과 다르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보라 날이 이르리니 새 언약을 맺으리라”하시면서, “옛 언약과 같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 그러면 “새 언약”이 옛 언약과 어떻게 다른 것이며, 어찌하여 옛 언약과 다른 “새 언약을 맺으라”하시는가? 다시 말하면 “새 언약”을 세워주시는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인가를 인식해야만합니다. 이를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새 언약”을 말씀하시는 시점(時點)을 주목해야만합니다.
“새 언약”을 증언한 예레미야 선지자를 눈물의 선지자라 하는데 왜냐하면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성전이 불타고,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가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일 때 그들을 “돌아오게 하리라”고 회복시켜주실 것을 말씀하시는 문맥에서 “새 언약”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느냐 하면, 구원이 “우리가 준행(遵行)하리이다”한 인간의 행위로는 불가능함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자력구원의 불가능성이 판명이 된 시점에서 하나님께서는 “내가 새 언약을 세우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은 “새 언약”으로만이 가능해진다는 말씀입니다.
㉡ 그러면 옛 언약과 새 언약이 어떻게 다른 것인가를 살펴보겠습니다.
㉮ 첫째는 언약의 중보자가 다르다는 점입니다. 옛 언약은 모세를 중보자로 하여 세운 언약이었으나 새 언약은 자기 아들을 중보자(히 9:15)로 하여 세운 언약인 것입니다. 이를 가리켜 “그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시라”(히 8:6)고 말씀합니다.
㉯ 그러므로 둘째로 다른 점은 “언약의 피”가 다르다는 점입니다. 옛 언약은 짐승의 피로 세웠으나, “새 언약”은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8)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피로 세우셨다는 점이 다른 것입니다. 다시 상기시키면서 강조합니다만 “흘리는 바 나의 피”란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다는 대속적인 죽음을 의미합니다. 옛 언약은 짐승이 죽었으나 “새 언약”은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대신 죽어주셨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만합니다.
㉰ 셋째로 다른 점은 옛 언약은 “다 준행하리이다”한 행위언약이었으나 “새 언약”의 내용은 “이 잔을 마시라”, 즉 “믿으라”하신 은혜언약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하신 요한복음 3:16절은 “새 언약”의 내용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요 3:36),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요 5:24),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요 6:47)하십니다. 이것이 “새 언약”입니다.
이 놀라운 축복이 어떻게 해서 가능해진 것입니까?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대신 흘리신 언약의 피”로 말미암아 가능해진 것입니다. 그런데 마시기를 거부하는 자들이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새 언약의 피를 흘려주셨어도 마시지 않는다면, 즉 받기를 거절한다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 넷째로 다른 점은 옛 언약은 돌비에 기록하였으나 세 언약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31:33)하리라 하신 점이 다른 것입니다. 오늘 설교는 여기에 강조점을 두고 작성이 된 것입니다.
④ 하나님은 “새 언약을 세우리라”하시는 것만이 아니라 “새 언약”을 우리들의 “생각과 마음에 기록하리라”고 말씀하신다는 점을 명심 또 명심해야만합니다. 왜냐하면 현대교회의 모든 문제와 원인이 “새 언약”이 마음에 기록되지 않는데 있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새 언약의 일꾼, 새 언약의 성도들”은 이 주제를 통찰력을 가지고 살펴보아야만합니다. 진리의 성령께서 잘 깨닫게 해주시기를 간구합니다.
㉠ 그러면 어찌하여 “새 언약을 마음에 기록하리라”하시는가? 본문 31:32절을 다 같이 봉독하겠습니다.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옛 언약)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기”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 “내 언약을 깨뜨렸다”는 것은 “다 준행하리이다”한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행위로는 구원에 이를 수가 없기 때문에 “새 언약”을 세워주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않은 것은 구약교회만이 아닙니다. 인류의 시조(始祖)도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하신 약속을 깨뜨렸던 것입니다. 신약의 성도들인 우리들도 하나님의 뜻을 다 준행하지를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점을 로마서 3:20절에서는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합니다. “그의 앞에”란 하나님 앞입니다. 사람 앞에는 성현(聖賢)이라는 사람들이 혹 있지만 하나님 앞에는 “의인은 없나나는 하나도 없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새 언약”을 세워주신다는 말씀입니다.
⑤ 그러면 31:33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점에서 명심해야 할 점은 31절만을 주신 것이 아니라 33절도 주셨다는 점입니다. 현대교회의 문제와 원인이 이를 모르거나 망각한데 있기 때문입니다.
33절은 “그러나”하고 시작이 됩니다. 이는 돌비에 기록한 “옛 언약”으로는 깨뜨렸으나 “그러나”, 마음에 기록하는 “새 언약”에 해답이 있다는 뜻이 됩니다. 이점을 3방면으로 살펴보겠습니다. ㉮ 첫째로 궁금한 점은 우리들의 마음에 새 언약을 누가 기록을 한단 말인가? ㉯ 둘째는 새 언약을 성도들의 “마음”에 기록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가? ㉰ 셋째는 “새 언약”이 성도들의 마음에 기록이 되면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가고 묻게 됩니다.
㉠ 첫 번 질문인 “우리들의 마음에 새 언약을 누가 기록을 하는가”에 대해 사도 바울은,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靈)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 판에 쓴 것이라”(고후 3:3)고 “성령”(聖靈)께서 기록하신다고 대답합니다.
㉡ 그러면 둘째 질문인 “새 언약을 성도들의 마음에 기록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가”하는 점은 분명해집니다. 새 언약이 마음에 기록이 되었다는 것은 복음을 진심(眞心)으로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런 믿음은 “성령”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를 “마음에 기록한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이점을 요한1서 4장을 들어 설명하면 분명해집니다. 4:16절에서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합니다. “아는 것”은 머리로 아는 지적(知的)인 작용입니다. 그런데 “믿음”은 마음으로 믿는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머리로 인식하는 것을 “믿음”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4:17절을 보겠습니다. 마음으로 “믿는 것”을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요일 4:17)이라고 말씀합니다.
이점을 로마서 5:5절에서는 “우리에게 주신 성령(聖靈)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요약을 하면 “새 언약이 마음에 기록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히 이루어진 것이요,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에 부어졌다”는 뜻인 것입니다.
그러면 묻습니다. 하나님의 어떤 사랑이 마음에 부어졌다는 것입니까?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한 그 사랑이 마음에 부어지고 온전히 이루어졌다는 말씀입니다.
㉢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성도들의 “마음에 부어졌다”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强勸)하시는도다”(고후 5:14), 즉 그리스도의 사랑이 자신을 잡아끈다고 말씀합니다. 어디에 있는 사랑입니까? 마음에 부어진 사랑이 말입니다.
옛 언약의 성도들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렘 31:32), 즉 정절(貞節)을 지키지 않았다고 말씀하시는데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에 부어지고 온전히 이루어진” 새 언약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변절(變節)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나를 위해 대신 죽어죽신 주님,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는 순교자적인 신앙이 될 것입니다.이처럼 변화된 자들이 “새 언약의 성도들”인 것입니다.
⑥ 이제 결론 부분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성도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지기만”한다면 무엇을 더 바랄 것이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이것이 어떻게 가능해지는 것이냐고 묻고 싶을 것입니다. 무슨 비결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 설교자가 하나님의 사랑의 결정체인 “새 언약”, 즉 복음을 무엇보다 먼저, 무엇보다 더 많이 그리고 자주자주 전해줄 때에 성령(聖靈)께서 듣는 자들에게 믿음을 주시고, 거듭나게 하시고, 새 언약을 마음에 기록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에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 10:14), 복음을 전해주지 않는데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마음에 부어질 수가 있단 말이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 현대교회의 문제(問題)와 원인(原因)과 책임(責任)이 어디에 있는가는 분명해진 것입니다. 새 언약을 망각하고 옆으로 밀어놓고 증언하지 않는 설교자의 책임인 것입니다. 이처럼 지도자의 책임이라는 점은 구약시대, 주님 당시, 현대교회, 어느 시대나 동일합니다. 심지어 신학자들 중에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이신칭의(以信稱義)교리가 현대교회를 이처럼 타락시켰다고까지 말합니다.
이는 책임을 하나님께 전가시키는 황당한 오해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을 새 언약의 중보자로 세우셔서 언약의 피를 흘리게 하시고 그리고 성령을 보내셔서 새 언약을 성도들의 “생각과 마음에 기록하게 하신다”고 말씀하시는데 말입니다.
설교를 마치면서 당부할 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주일에 예배당에 나와 앉아 있는 것으로 족한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마 15:8)하시면서,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라”(잠 23:26)고 요구하십니다.
둘째는 “새 언약”이 마음에 기록되고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에 부어지는 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목회서신에서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 이 일을 계속하라”(딤전 4:16)고 격려합니다.
저와 같은 설교자에게 도전적인 질문을 함으로 마치고자합니다. 하나님은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렘 31:33)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새 언약”이 마음에 기록이 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백성”이 되지 못한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묻습니다. 성경은 분명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형제는 “새 언약의 일꾼”이 분명합니까? 혹시 철학자, 인문학자, 심리학자인 줄로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설교자 모두가 명심하십시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골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