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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생길은 그리 쉬운 길이 아닙니다. 아니, 아주 힘든 길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물질을 구하기 위해 가고 있습니다. 돈 벌고, 땅 사고, 집 사고, 이렇게 물질을 얻기 위해서 가고 있는 게 인생길입니다. 또 내 사람을 얻기 위해서 가고 있는 게 인생길입니다. 경봉큰스님도 우리 중생은 물질 아니면 사람, 사람 아니면 물질, 이 두 가지 길을 간다고 늘 법문하셨습니다. 경제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물질을 얻으려 하고, 정치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사람을 얻으려고 합니다. 내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는 피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자기 편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가정에서도 어린아이들처럼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하고 묻습니다. 아이 하나를 놓고 부모님이 경쟁합니다. 그러니까 사람을 얻고 물질을 얻기 위해서 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 다음에는 자기 뜻을 펴기 위해서 엄청나게 노력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나는 이것만은 꼭 해 보고 싶다.' 고 해서 다른 사람이 알아 주든 몰라 주든 노력합니다. 그것이 음악이든, 미술이든, 건축이든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이 사는 것을 보면 재물로 사는 재생財生이 있고, 사람으로 사는 인생人生이 있고, 자기 생각으로 사는 의생意生이 있습니다. 자기 의지, 자기 뜻을 펴는 게 삶의 길입니다.
그런데 가도 가도 끝이 없습니다. 구해도 구해도 채워지지 않습니다. 얻어도 얻어도 부족합니다. 그 어떤 사람도 다 구하고 죽은 사람은 없습니다.
무한한 허공을 나는 기러기는 날다가 죽습니다. '조금만 더 가면 허공 끝이 있겠지.' '조금만 더 가면 도달하겠지.' 하는 마음으로 갔다가는 날다가 죽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도 '이것만 얻으면 되겠지.' 하지만 소용없습니다. 왜냐하면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빈 가슴이 있기 때문입니다.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래서 인생은 구하다 죽고, 기러기는 날다 죽습니다. 자기 생각으로 살고, 사람으로 살고, 물질로 사는 이런 길은 오솔길이 아니고 여러 사람이 가는 큰 길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오솔길이 하나 있습니다. 오솔길은 보이지 않는 길입니다. 고속도로 같은 넓은 길이 아니라서 잘 보이지 않습니다. 또 오솔길은 지름길입니다.
또 가면 갈수록 재미있고, 가도 가도 지치지 않아서 쉽게 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인생의 오솔길이 무엇이냐? 마음을 보는 길이 인생의 오솔길입니다.
세상이 확실히 달라졌습니다. 1980년대에는 택시를 타면 택시기사들이 거의 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택시기사들은 대부분 노인입니다. 그리고 승객에게 묻는 게 아니라 자기 말을 하기 바쁩니다. 얼마 전에 택시를 탔는데, 타자마자 기사가 자기 자랑을 늘어놓았습니다. 묻지도 않았는데 자기가 행정고시에 합격해서 정부 고위직 공무원으로 있다가 택시 운전한 지 얼마 안 됐다고 했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가장 빠른 길로 목적지에 태워다 주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것은 필요 없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운전 잘할 생각은 않고 계속 자기 이야기만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빠른 길을 놔두고 돌아서 갑니다. 아니면 길을 잘 몰라서 길 모르는 것을 들킬까 봐 쓸데없는 소리를 늘어놓았던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택시를 타면 젊은 사람들이 운전하다 보니 승객들에게 묻는게 종종 있었습니다.
한번은 조계사에서 정릉 쪽으로 가려고 택시를 탔는데, 그 택시기사가 제게 물었습니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돈을 벌기 위해서 살 수도 있고, 출세를 하기 위해서 살 수도 있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 살 수도 있는데, 스님은 어째서 스님의 길을 가십니까?"
맹랑하면서도 딱 맞는 말이었습니다. 그런 것이 예전의 택시문화였습니다.
요즘은 그런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설사 젊은 기사이더라도 대화가 없습니다. 젊은 사람은 대화가 없고, 나이 든 기사는 자기 자랑 하느라 바쁩니다. 참 이상합니다. 왜 사람이 나이가 많으면 아무도 그걸 들으려고 하지 않는데 자기 자랑을 하는 걸까요?
다른 사람의 자기 자랑 듣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런 것이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빈 가슴의 주인공들입니다. 속이 꽉 차면 말이 없어집니다. '먹은 놈은 말이 없다.' 라는 속담도 있습니다. 가질 만큼 다 가진 자족감이 있는 사람은 말이 없습니다.
그 기사의 '여러 길을 놔두고 왜 스님의 길을 가느냐?' 는 질문에 자세한 설명을 할 수 없어 "나는 다른 사람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가 보고 싶어서 갑니다." 라고만 대답했습니다.
인생의 오솔길은 마음을 보는 길입니다. 돈을 벌려고 하는 것도 마음이 하는 일이고, 사람을 얻으려고 하는 것도 마음이 하는 일이고, 자기 뜻을 펴는 것도 마음이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밖으로 구하기만 하지, 구하는 마음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차는 갈증을 없애려고 마십니다. 그것을 차라고 보고, 차를 마시면 몸에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마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그게 차인 줄 알며, 무엇이 차를 마시면 갈증이 없어진다고 아는가? 구하는 마음과 구하는 마음이 무엇인지 보는 것이 마음을 보는 것입니다. 또 꽃을 보고 그 꽃이 좋다고 느낍니다. 그런데 무엇이 알고 무엇이 느끼는가?
그것을 보는 게 마음을 보는 것입니다. 구하는 마음을 채우려고 하는 것은 물질을 위해서, 사람을 위해서, 뜻을 펴기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구하려는 마음을 채우려면 끝이 없습니다.
이것을 '생사가 끝날 날이 없다.'라고 합니다. 구하는 마음을 바로 보았을 때 비로소 끝이 납니다. 구하는 마음을 보면 다 해결됩니다.
채워서 해결하려면 해결되지 않고, 구하는 마음을 보면 바로 해결됩니다. 이 길이 오솔길입니다. 빠른데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들어가면 지루하지 않고 재미있습니다.
채워서 해결하지 말고 구하는 마음을 보아서 해결하라는 것이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이런 법문을 모든 경전이나 도인 스님들이 다 하셨습니다.
그중에서도 달마대사의 안심법문安心法門이 널리 회자되고 있습니다.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법문입니다. 마음 편하다는 것은 구하는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구하는 마음이 없을 때 마음이 편안합니다.
有自不有 유자불유
自心許作有 자심허작유
見一切法無 견일체법무
無自不無 무자불무
自心許作無 자심허작무
일체법이 있다고 보지만
있는 것이 스스로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 마음이 분별하여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일체법이 없다고 보지만
없는 것이 스스로 없는 것이 아니고
자기 마음이 분별하여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면 구하는 이것이 있는 것이냐? 다 부수어서 가루로 만들면 그때도 있느냐? 이 몸이 있는 것이냐? 화장해서 훌훌 날려 버리면 그때도 있느냐? 이것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 것도 아니고, 불가사의 실상입니다. '있다.'는 것은 스스로 있는 것이 아니라 '있다.'고 분별하는 생각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없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없는 것도 스스로 없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분별해서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분별계교分別計較를 떠나면 그것이 적멸자성심寂滅自性心입니다. 적멸자성심에 들어가면 불가사의해탈不可思議解脫밖에 없습니다. 『금강경』에서 말하는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이 바로 분별계교이고, 그것을 떠나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입니다. 그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불가사의해탈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어떤 것을 열심히 구하는 것은 구할 것이 있다고 내가 분별계교하기 때문에 구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취하고 버리기를 계속하는데 취하는 것은 좋다고 분별하니까 취하고, 버리는 것은 나쁘다고 분별하니까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자체가 좋은 것이고 나쁜 것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불가사의해탈입니다. 이것을 실상實相이라고 합니다. 불가사의해탈인 실상법계입니다. 법의 세계에는 시간이 없습니다. 일찰나가 무량겁이고, 무량겁이 일찰나입니다.
장소도 없습니다. 그래서 한 티끌이 삼천대천세계이고, 삼천대천세계가 한 티끌입니다.
이것이 불가사의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해탈解脫 피안彼岸의 세계입니다.
분별계교의 저편은 무엇이냐? 분별계교는 이쪽 세상이고, 분별계교를 넘어선 불가사의해탈인 실상법계는 저쪽입니다. 그러면 그 불가사의해탈법계에 들어가면 어떻게 되는가? 그것뿐입니다. 예를 들면 차안此岸에서 피안彼岸으로 건너가는 것이 바라밀波羅蜜입니다.
그러면 피안으로 가면 어떻게 되느냐? 피안으로 간다는 말만 있지 피안으로 가서 무엇을 했는지 소식이 없습니다. 피안에 가서 무엇을 하는지 물어야 합니다.
가면 거기는 피안뿐입니다. 일념이 무량겁이고 무량겁이 일념, 그것뿐입니다.
자기가 분별해서 생각해 놓고 자기가 취하고, 자기가 분별해서 생각해 놓고 자기가 버리는 것을 전도몽상顚倒夢想이라고 합니다. 피안에 한번 들어가면 피안뿐, 차안은 없습니다.
비유하자면 꿈속에서는 아주 역력하지만 꿈을 깨고 나면 꿈은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냥 그대로 꿈 깬 세상일 뿐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눈을 찾으려고 산에도 가고, 들에도 가고, 시장에도 가고 세상을 헤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자기 눈이 본래 모든 것을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면 그때는 산도 자기 눈이 보는 산이고, 물도 자기 눈이 보는 물이고, 사람도 자기 눈이 보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눈을 찾기 전에는 눈이 없습니다. 종이를 보면 종이만 있지 눈이 없고, 나무를 보면 나무만 있지 눈이 없고, 사람을 보면 사람만 있지 눈이 없습니다. 그런데 눈을 알면 종이를 보는 것도 눈이고, 사람을 보는 것도 눈이고, 티끌을 보는 것도 눈이고, 어둠을 보는 것도 눈이고, 밝음을 보는 것도 눈뿐입니다.
눈을 알기 전에는 어두우면 어둠만 보고, 밝을 때는 밝은 것만 보지, 눈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깨달음이라는 것은 한번 크게 웃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눈을 찾으려고 산으로 들로 바다로 헤매던 사람이 '아! 산이나 들이나 바다를 본 것이 내 눈이었구나.' 하고 반갑고 허탈해서 크게 웃는 것입니다. 그래서 깨달음이란 크게 웃는 것입니다.
왜 웃느냐? 한편으로는 허망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반갑기 때문입니다. 반갑고 허망해서 웃는 것입니다. 그래서 깨달음이란 무엇을 알아내는 게 아니라 한번 웃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항상 거기 있었는데 몰랐기 때문입니다.
깨달음을 꿈에다 많이 비유하는데, 저도 글을 하나 지었습니다.
睡夢睡語卽不無 수몽수어즉불무
皆是寢席寢中事 개시침석침중사
於此唯有臥眠人 어차유유와면인
開眼合眼常自在 개안합안상자재
꿈과 잠꼬대는 곧 없지 않으나
모두 잠자리에서의 일이다.
여기에는 오직 누워 자는 사람만 있어
눈을 뜨든 눈을 감든 항상 자재하다.
잠을 자도 보면 꿈도 꾸고, 잠꼬대도 합니다. 하지만 잠자리에서 자는 것일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여기에는 오직 누워서 자는 사람이 하나 있는데, 눈을 뜨든 감든 그냥 자유자재할 뿐입니다. 꿈에서 깨기 전에는 꿈만 있고 자기가 없는데, 꿈을 깨서 자기로 돌아간 후에는 자기 하나뿐입니다. 꿈꿀 때도 자기이고, 깨어 있을 때도 자기입니다.
자기가 꿈꾼 것입니다. 꿈꾸는 나와 꿈에서 깬 나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눈을 감고 자는 것도 자유자재이고, 눈을 뜨고 일하는 것도 자유자재입니다.
자유자재한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잠꼬대라든지 꿈속이라든지 하는 것은 전부 잠든 사람의 일일 뿐입니다. 꿈 하나 꾸고 꿈 해몽해 달라고 하지 마십시오. 꿈이 꿈일 뿐인데 거기에다 무슨 해몽을 합니까? 꿈이라는 것은 잠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지, 다른 것 없습니다.
자다 보면 꿈도 꾸고 자다 보면 잠꼬대도 하는 것입니다. 죽고 살고 하는 이게 무엇이냐?
불가사의해탈 실상법계 하나뿐입니다. 있는 것도 없고, 없는 것도 없고, 없다는 것도 없습니다. 없다고 하면 없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없습니다. 그 말은 왜 하느냐? 잠꼬대입니다.
법에 있어서는 어떤 말도 잠꼬대입니다. 우리가 밥을 왜 먹습니까? 내 몸에 힘을 얻으려고 먹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있다. 없다.' 이 소리를 왜 하느냐? 깨닫게 하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배를 타는 것은 물을 건너가기 위해서입니다. 배를 타는 데 의미가 있는 게 아니라 물을 건너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이런 모든 이야기가 깨달음을 얻게 하기 위해서 하는 말이지, 그 말 자체에 무슨 목적을 두는 것이 아닙니다. 배를 타는 데 목적이 있는 게 아니고, 밥을 맛보는 데 목적이 있는게 아닙니다. 그것은 방편이고, 수단이고, 과정입니다. 모든 방편이 마음을 보는 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점을 항상 놓치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릇이다.' 하면 그릇인 줄만 알지, '그릇이다.' 하고 아는 내 마음을 놓칩니다.
'이것이 그릇이다.' 하고 좇아가는 것은 밖으로 구하는 것입니다. '그릇이라고 보는 내 마음은 무엇인가?'를 보아야 합니다. 거기서 모든 것이 다 해결됩니다.
그러니까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없는 그 적멸한 자성심自性心으로 돌아가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전부 꿈속의 일입니다. 그리고 밖으로 보이는 모든 것이 꿈속의 일입니다. 밖으로 보이는 경계도 꿈속의 일이고 내가 그것을 좇아가는 생각도 꿈속의 일이라, 오직 불가사의해탈 실상법계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오솔길입니다. 그런데 이 길을 놓치고 물질을 얻고, 사람을 얻고, 뜻을 얻기 위해서 갑니다. 오솔길은 보이지 않는 길이지만 빠릅니다.
출발지를 떠나지 않고 목적지에 바로 가 버립니다. 보통 보이는 길은 출발지를 떠나서 목적지에 도달하는데, 이 길은 출발지를 떠나지 않고 목적지에 바로 도달하니 얼마나 빠릅니까?
털끝 하나도 움직이지 않고 목적지에 도달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0도와 360도의 차이입니다. 0도와 360도는 다릅니다. 못 깨달으면 0도인데, 깨달으면 360도입니다. '못 깨달음'에서 '깨달음'으로 가는 것이 움직이지 않고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솔길이라고 합니다. 0도에서 360도로 가는 길만 알면 하나도 구하는 것 없이 모든 것을 다 얻습니다. 그것이 마음을 보는 것입니다.
무량억겁을 살아도 그게 아무것도 아닌 그 삶이 마음을 보는 길입니다.
이 마음을 보아서 불가사의해탈 법계에 들어간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요즘은 세계 부자들의 순위가 있다고 합니다. 열심히 죽자살자 돈을 벌었는데 순위에서 뒤로 밀리면 얼마나 기분 나쁘겠습니까? 그런데 1등을 한다고 해도 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이 몸이 죽으면 그 재산은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쓰지도 못할 돈 벌기만 하다 죽는 것처럼 어리석은 게 없습니다.
내가 필요한 돈을 버는 것은 좋지만, 내가 쓰지도 못할 돈 벌다가 죽어 버린다면 참 허망하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니까 밖으로 얻는 것은 저 허공의 한 점 티끌에 불과합니다.
이 구하는 마음을 하나 탁 보면 '무량겁이 일찰나요, 일찰나가 무량겁이라. 일미진이 대천계요, 대천계가 일미진이라.' 이게 불가사의해탈 경계입니다. 그러면 어디로 가야 하느냐?
오솔길입니다. 내가 구하는 마음, '이것이 무엇인가?' 하고 구하는 마음을 돌이켜보는 것입니다. 구하는 마음을 좇아가서 채우는 게 아니라, 구하는 마음을 돌이켜서 그 마음을 보는 것입니다. 반조자심返照自心, 자기 마음을 돌이켜 보면 다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보는 마음이 무엇이냐? 자꾸 더 보려고 하는 게 아니라 멈추고 돌이켜 봐야 합니다.
자꾸 더 들으려고 하는 게 아니라 멈추고 돌이켜 들어야 합니다. '듣는 이 마음이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떠오르면 눈앞에 보이는 것이나 자기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나 똑같이 티끌입니다. 안에 있는 티끌이 올라오면 그 생각을 좇아가지 말고, '아! 지금 내가 생각을 일으키는 이것이 무엇인가?' 라고 해야 합니다.
보고 듣고 기억하는 것이 전부 똑같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무엇인가?
보는 마음, 듣는 마음, 기억하는 마음이 다른 마음이 아니라 한마음이 여섯 가지 문으로 항상 나옵니다. 일심一心이 육문六門이지 육문이 전부 다른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항상 이것 하나뿐입니다. '보고 듣고 생각하고 기억하고 움직이고 하는 이것이 무엇인가?' 거기서 다 됩니다. 이것이 인생 오솔길입니다. 마음을 보는 길입니다.
그러니까 경전을 볼 때 경전을 보는 게 목적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자기 마음을 깨닫는 게 목적입니다. 밥을 먹는 게 목적이 아니라 밥을 통해서 건강을 얻는 게 목적이고, 배를 타는 게 목적이 아니라 배를 타고 건너가는 게 목적입니다. 부처님이 마음을 보는 길인 인생 오솔길을 가시고, 그것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불교입니다.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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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방정토 극락도사 아미타불()()()

첫댓글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_()_
보고 듣고 생각하고 기억하고 움직이고 하는 이것이 무엇인가?' 거기서 다 됩니다. 이것이 인생 오솔길입니다. 마음을 보는 길입니다.
그러니까 경전을 볼 때 경전을 보는 게 목적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자기 마음을 깨닫는 게 목적입니다.....감사합니다 무량공덕이 되소서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극락도사 아미타여래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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