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도로 보는 중동이야기] 가나안에 정착한 아브라함의 후예
우마이야 왕조의 수도
다마스쿠스에 도착한 나를 처음 맞이한 것은 갈색의 거대한 산이었다. 예상치 못한 광경에 놀란 나는 잠시 그 자리에 서서 거대한 산을 다시 한번 바라봤다. 이 산은 '아담과 이브의 아들 카인이 동생 아벨을 돌로 쳐죽인 장소'로 전해진다. 표고 1220미터의 바위산으로 훗날 정부의 대규모 식수사업으로 위압적인 모습은 많이 사라졌지만, 당시의 충격적인 첫인상은 지금도 생생하다.
다마스쿠스는 정말로 오래된 도시로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도시' 라는 시 당국의 홍보 문구가 딱 들어맞는 곳이다. 예로부터 대상들이 거쳐가는 주요 거점도시로 번창했으며, 기원전 2000년경에는 아람인이 세운 왕국의 수도가 됐다. 이 도시는 기원전 732년, 아시리아에 정복되기전까지 크게 발전했다.
아브라함이 다마스쿠스를 통과한 사실은 분명하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아이를 갖지 못했다. 아브라함은 이를 한탄해 "나는 자식이 없는 몸입니다. 가문의 대를 이을 사람이라고는 다마스쿠스 사람 엘리에젤밖에 없는데, 나에게 무엇을 주신다는 말씀입니까? 나를 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자식 하나도 점지해주지 않으셨습니다. 내 대를 이을 사람이라고는 내 집의 이 종밖에는 없지 않습니까?" (창세기 15:2~3)하며 신에게 하소연했다. 가나안에 정착한 지 10년, 아브라함이 85세 때 이야기다.
신은 아브라함의 이런 한탄을 받아들여 그의 아내 사라로 하여금 하갈이라는 여종을 아브라함의 침소로 보내도록 했다. 하갈은 이스마엘이라는 사내아이를 낳았으며 사라도 이를 기뻐했다. 그러나 결국 신은 아브라함이 100세, 사라가 90세 때 사라를 통해 아들 이삭을 낳게 했다. 성서에 따르면 아브라함의 집에서 나온 이스마엘은 오랜 세월 광야를 떠돌며 ‘활 쏘는 자'가 됐고, 어미 하갈의 고향 이집트에서 자손을 낳아 길렀다.
이슬람 구전에 따르면 아랍의 조상인 이스마엘은 아브라함과 함께 아라비아 반도의 히자즈까지 여행하다 이곳에서 일행과 떨어져 메카의 카바 신전을 건설했다.
창세기에서 유일하게 거론되는 아브라함의 종은 엘리에젤이다. '가문의 대를 이을 사람' 이라고 할 정도로 아브라함의 신망을 얻은 자였다. 엘리에젤은 '다마스쿠스' 출신으로, 아브라함은 아마도 다마스쿠스에 머물던 중 엘리에젤을 만났을 것이다.
다시 다마스쿠스 이야기로 돌아가자. 다마스쿠스는 레바논 국경에 있는 레바논 산맥과 함께 남북을 가로지르는 안티레바논 산맥 끝에 펼쳐진 전형적인 오아시스 도시다. 안티레바논 산맥에서 흐르는 바라다 강의 물줄기는 7개의 작은 강으로 나뉘어 도시 구석구석까지 적셔주고 있다. 강물은 교외에 위치하는 구타 오아시스라 불리는 거대한 과수원 지대까지흐른다.
도시는 몇몇 지역으로 나뉘는데, 구시가지의 중심은 당연히 우마이야 모스크다. 이슬람교는 다마스쿠스를 메카. 메디나. 예루살렘과 함께 4대 성지로 꼽는다. 로마 제국 시대에 세운 성 요한 교회를 우마이야 왕조 제5대 칼리프인 아브드 알 말리크가 모스크로 개조했으며, 705년 제6대칼리프인 왈리드 1세가 대대적으로 개보수했다. 우마이야 왕조(661~750)권력 절정기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우마이야 왕조는 메디나에 세워진 이슬람 정권이었는데, 예언자 마호메트가 죽은 뒤(632) 수도 다마스쿠스를 중심으로 번성했다. 칼리프는 아라비아어로 예언자 마호메트의 후계자를 의미하며, 우마이야 왕조의 역대 지배자들은 칼리프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당시 우마이야 왕조는 서쪽으로는 스페인, 동쪽으로는 중국 국경에 다다른 대제국의 수도로 로마 제국의 위용을 능가했다. 그리고 우마이야 모스크는 제국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었다.
사각형의 바실리카 양식"에, 외부와 내부에는 로마네스크 건축 등에서 볼 수 있는 상하 2단의 줄기둥이 늘어서 있고, 내·외벽은 비잔틴 양식의 모자이크로 꾸며졌다. 남북에 각각 이슬람교 사원의 첨탑인 미나레트가 세워져 있는데, 남쪽 탑은 그리스도교 시대의 탑이고, 북쪽 탑은 우마이야 왕조의 칼리프 알 왈리드 시대의 건축으로 보인다.
우마이야 모스크의 회랑
이슬람의 4대 성지
이슬람교도들에게 가장 성스러운 곳은 메카의 카바다. 아브라함이 만든 이곳을 천국의 기쁨과 힘이 닿는 곳이라고 믿고 있다. 다음은 예언자의 성전이 있는 메디나다. 그리고 세 번째로 성스러운 곳은 마호메트가 하늘로 승천한 예루살렘이다.
그리고 마호메트 이후 유럽과 아프리카, 인도에 이르는 광활한 영토를 지배했던 우마이야 제국의 수도였으며, 그 구심점 역할을 했던 우마이야 모스크가 있는 다마스쿠스다. 또한 우마이야 모스크 바로 옆에는 시아파 최초의 순교자이자 실질적인 시아파의 창시자인 마호메트의 외손자 후세인이 묻혀 있어 시아파의 주요 성지 중 하나로 꼽힌다.
대리석을 깐 사원 한가운데에 정원이 하나 있다. 이 정원은 세 방향이 코린트식 기둥으로 세워진 회랑이고 나머지 한쪽은 예배소로 만들어져 있다. 예배소는 정원의 3분의 1 정도 크기인데, 바닥이 깔린 내부 모습은 한눈에도 100미터는 족히 돼 보이는 넓이다. 맞은편 벽은 너무 멀어 또렷이 보이지 않을 정도다. 선명한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한 모스크 출입구는 곧바로 수크(재래시장)로 통한다. 수크 길을 따라 남쪽으로 똑바로 내려가다 보면 동서를 가로지르는 넓은 도로를 만나게 된다. 이 도로는 『신약성서』에 나오는 유명한 '곧은 길' 로, 기독교의 사도 바울이 회개한 역사적 사건이 이곳에서 일어났다(사도행전 9).
기독교는 바올에 의해 민족적 종교에서 보편적 종교로 거듭나게 된다. 바올은 원래 기독교도가 아니었다. 성서에는 그가 오히려 기독교인들을 박해하고자 다마스쿠스로 파견되던 중 실명하여 사흘간 보지도, 먹지도, 마시지도 못했다고 기록돼 있다. 하지만 신은 아나니아를 보내 그의 눈을 뜨게 했다. 아나니아가 바울의 눈 위에 손을 얹자 그의 눈에서 비늘같은 것이 떨어졌고, 이후 바올은 열렬한 기독교도가 됐다.
이 ‘곧은 길’은 과거 다마스쿠스가 성벽에 둘러싸여 있을 때 시내를 동서로 관통하는 중심 도로였다. 성벽 동쪽 끝에는 로마 시대에 세워진 동문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그리고 이 문 바로 옆에 성 아나니아 교회가 자리 잡고 있다.
다마스쿠스 여행에서 놓칠 수 없는 곳이 바로 다마스쿠스 국립박물관이다. 매번 찾을 때마다 정비·확장되고 있는 이 박물관에는 마리에서 출토된 점토판과 조각들, 마리의 쐐기 모양 문자판, 팔미라의 여러 출토품 등 볼거리들이 많다. 그중에서도 『구약성서』의 주요 사건들을 그린 벽화 ‘두라유로포스의 시나고그(유대인의 교회당)' 는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다. 두라유로포스는 시리아 동쪽 유프라테스 강가에 위치한 옛 마을이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은 뒤 셀레우코스 1세가 기원전 4세기 말에 건설한 곳으로, 두라는 성벽, 유로포스는 셀레우코스 1세가 태어난 마케도니아의 지명으로 알려져 있다. 셀레우코스 왕조가 쇠퇴하면서 지금의 이란 북동부 호라산 지방을 본거지로 성장한 파르티아에 패배하자, 기원전 2세기 말 두라유로포스는 파르티아의 손에 넘어갔다. 이후 기원전 64년 시리아는 로마의 지배를 받았지만, 이곳까지는 로마 제국의 손길이 미치지 않았다.
이후 두라유로포스는 로마와 파르티아 두 강국 사이에서 불안정한 시기를 보냈는데, 시리아 사막에서 팔미라가 세력을 확장하자 팔미라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팔미라가 272년 로마 황제 아우렐리아누스에 의해 멸망하면서 두라유로포스도 함께 쇠락의 길을 걷는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인 1921년, 이곳을 점령한 한 영국군 대위가 폐허 속에서 팔미라 신전의 벽화를 발견한 후 1936년까지 대대적인 발굴 작업이 이어졌다. 성벽에 둘러싸인 도시와 15개에 달하는 신전, 과거 주거지들이 2000여 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들 신전은 아시리아 · 그리스 · 로마 · 페르시아 · 팔미라 같은 동서 문화의 융합을 보여주는 국립박물관의 대표적인 유물이다. 이 안에는 시나고그도 있었다. 시나고그는 유대인들의 교회당으로, 이곳에 구약성서의 주요 사건들을 그린 벽화가 있었다. 이 벽화가 오늘날 다마스쿠스 국립박물관에 복원 · 전시돼 있다.
이 벽화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아브라함의 그림들을 찾아볼 수 있다. 아들 이삭을 신에게 제물로 바치는 아브라함의 그림을 보면, 해와 별 · 달이 머리 위에 있고, 그 아래에 두 팔을 옷으로 덮고 서 있다. 이 그림은 『구약성서』에 없는 장면이다. 아마도 태양신과 달의 신에 대한 숭배 유혹에 번민하는 아브라함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이 유적을 조사한 저명한 역사학자 앤 파킨스는 저서 『두라유로포스의 예술(The Art of Dura-Europos)』에서 “이 벽화가 유명해진 것은 양호한 보존 상태 때문만은 아니다. 학계와 종교계의 주목을 받게 된 이유는 그림 속에서 아브라함이 우상 숭배를 금지한 십계의 두 번째 항목을 무시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야훼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마라"는 십계의 두 번째 항목은 우상 숭배를 철저히 배척하고 있다.
하지만 이 벽화에는 신과 우상 사이에서 갈등하는 아브라함과 모세의 모습이 버젓이 그려져 있다. 앤 파킨스는 "오늘날 유대주의의 전통과 모순되는 이 현상을 설명하려는 수많은 학자의 시도는 번번이 실패로 끝났다”고 했다. 특히 태양과 달 . 별 아래서 기도하는 아브라함의 그림은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이슬람 성전 『코란』 6장 76~79절에는 아브라함이 별 · 달 · 태양이 잇달아 떠오르는 것을 보고 이들 우상과 신 사이에서 갈등하는 내용이 기록돼 있다. 하지만 이 그림이 그려진 시점으로 추정되는 250년 전후에는 이슬람교가 존재하지 않았다. 훗날 예언자 마호메트는 스스로 종교의 원점을 아브라함에서 찾았는데, 이 그림은 마호메트의 주장을 증명하는 상징적인 존재다.
이스라엘의 탄생
아브라함은 175세에 죽었다. 그는 아내 사라가 127세에 숨진 후에도 38년을 더 살았다. 아들 이삭과 이스마엘은 사라가 묻힌 가나안 헤브론의 막벨라 동굴에 아버지 아브라함을 묻었다(창세기 23:19, 25:9). 막벨라 동굴이 있는 마므레라는 지역은 헤브론에서 북쪽으로 3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이다. 막벨라는 '이중 동굴' 이라는 뜻으로, 막벨라의 동굴은 아브라함이 헤테인(히타이트인)으로부터 처음 구입한 토지다. 신은 종종 “너의 자손들에게 이 땅(가나안 땅)을 주겠다”고 약속했는데(창세기13:17, 26:3, 28:13), 이는 신의 약속이 처음 이뤄진 것이다.
이삭도 천수를 누려 180세까지 살았으며 그 또한 헤브론의 마므레에 묻혔다. 이삭의 아들 야곱에게는 12명의 아들이 있었다. 야곱은 얍복 강가에서 천사와 씨름해 이긴 후에 신으로부터 ‘이스라엘' 이라는 이름을 얻었는데, 그의 열두 아들은 이스라엘 열두 부족의 조상이 된다. 야곱은 열두 아들 중에서도 가장 사랑하는 아내 라헬로부터 얻은 열한 번째 아들 요셉을 각별히 총애했다. 성서에는 야곱이 요셉을 총애하는 모습이 다음과 같이 묘사돼 있다. "이스라엘은 요셉을 늘그막에 얻은 아들이라고 해서 어느 아들보다도 더 사랑하였다. 그래서 장신구를 단 옷을 지어 입히곤 하였다" (창세기 37:3). 요셉에 대한 이런 총애는 당연히 다른 아들들의 반감을 샀다.
어느 날 요셉은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형들이 양을 치는 모습을 보러 밖으로 나온다. 형들은 요셉을 구덩이에 빠트리고, 지나가는 이집트 상인에게 팔아넘기기로 했다. 하지만 형들은 차마 동생을 팔아넘기지 못했고, 마침 이곳을 지나던 미디안 상인이 구덩이에 떨어진 요셉을 발견했다. 미디안 상인은 요셉을 이집트인에게 노예로 팔았고, 요셉은 또다시 파라오의 경호대장인 보디발에 팔려간다. 보디발로부터 재능을 인정받은 요셉은 그의 재산을 관리하는 중책의 자리에 올랐으나 요셉을 유혹하려던 보디발 부인의 계략으로 강간죄의 누명을 쓰고 감옥살이를 하게 된다.
요셉에게는 꿈을 해석하는 특별한 재능이 있었는데 어느 날 파라오는 일곱 마리의 건강하고 살진 소를 일곱 마리의 마르고 약한 소가 잡아먹는 꿈을 꾼다. 파라오는 그 다음 꿈에서, 줄기 하나에서 일곱 이삭이 나와 토실토실 여물어 가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뒤이어 돋아난 일곱 이삭은 샛바람에 말라 여물지 못했고, 그 마른 이삭이 토실토실하게 잘 여문 일곱 이삭을 삼켜버렸다.
꿈에서 깨어난 파라오는 이 꿈을 해석할 사람을 찾았다. 파라오 앞에 끌려온 요셉은 “이집트가 7년간 풍년을 맞은 후 곧이어 7년간 나라가 멸망할 정도의 흉년을 겪을 것"이라고 풀이했다. 요셉은 그 대책으로 풍작이 이어지는 7년간 수확 작물의 5분의 1을 거둬들여 곧이어 올 7년간의 기근에 대비해야 한다고 진언했다. 요셉의 신통력에 감탄한 파라오는 그를 재상에 임명했다.
요셉이 예언한 대로 이집트에 기근이 닥쳤다. 요셉은 모든 창고를 열고 이집트 사람들에게 곡식을 팔았다. 가나안에 살고 있던 야곱과 가족들도 극심한 기근에 시달렸다. 이집트에 곡식이 있다고 전해들은 야곱은 요셉의 친동생인 베냐민을 제외한 아들 모두를 이집트로 보내 곡식을 구해오도록 했다. 요셉은 자신 앞에 무릎을 꿇은 형들을 한눈에 알아봤지만,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았다. 대신 어려운 질문을 던져 형들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요셉은 곡식을 판매하는 조건으로 형들에게 가나안에 남아 있는 막내 베냐민을 데려와 달라고 요구했다. 가나안에 돌아온 형들은 아버지에게 이집트에서 있었던 모든 일을 전했다. 늙은 야곱은 총애하는 아들 베냐민을 보내야 한다는 생각에 반대했으나 곡식을 구해야 한다는 설득에 밀려 베냐민을 포함한 아들 모두를 다시 이집트로 보냈다. 베냐민을 만난 요셉은 그가 들고 온 곡물 주머니에 자신이 아끼는 은 술잔을 몰래 넣어, 형제들을 도둑으로 몰았다.
그러나 요셉의 복수는 여기까지였다. 이 모든 것이 신의 섭리임을 깨달은 요셉은 “신은 당신들의 생명을 구하려고 나를 먼저 이곳으로 보냈다”며 형들에게 자신의 신분을 밝히게 된다. 결국 요셉은 아버지 야곱도 이집트로 불러들여, 나일 델타의 고센 지방에 정착해 함께 살게 했다.
'창세기' 는 파란만장한 요셉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맺고 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 땅 고센 지방에 자리를 잡았다. 거기에서 땅을 차지하고 자손을 많이 낳아 크게 불어났다. 야곱은 이집트 땅에서 십칠 년을 더 살았다. 그래서 야곱이 산 햇수는 모두 147년이 되었다" (창세기 47:27~28). 야곱의 유해는 유언에 따라 가나안의 조상묘에 매장됐다.
고대 이집트가 중왕국에서 신왕국으로 바뀌는 제2중간기(기원전 1786-1567)에 접어들 무렵 힉소스라 불리는 셈계 아시아인들이 가나안을 비롯한 이집트 전역을 지배하게 됐다(기원전 1730-1567). 힉소스란 고대 이집트어로 '이방의 지배자' 라는 뜻이다. 15대 왕조, 6명의 힉소스왕(기원전 1674~1567)은 나일 강 하구 지역 아바리스에 수도를 두고, 이곳에서 이집트 전역과 팔레스타인 시리아까지 통치했다.
유목민들이 이미 오래전부터 비옥한 나일 델타와 가나안 지역을 오간 것은 역사적으로 증명된 사실이다. 성서에도 아브라함이 기근을 피해 한번은 이집트에 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팔레스타인과 이집트 사이에는 대상들이 다니는 길이나 군용도로가 일찍부터 정비돼 있었음이 분명하다. 또 이 시절 가나안 남부의 유목민들 역시 기근 때마다 난민으로 이집트에 유입됐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집트 자료에 따르면 중왕국 시대부터 로마 시대에 이르기까지 시리아나 가나안, 또는 유목민 출신들이 종종 이집트의 고위 관리직에 올랐다. 그중에서도 제19대 왕조 말인 기원전 1200년경, 이집트에서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던 아시아인의 이야기는 유명하다. 일부 성서 고고학자들은 당시 힉소스 왕이 같은 셈어를 구사하는 민족들을 특별대우했을 것이며, 이 과정에서 요셉이라는 역사적 인물이 존재할 수 있었다고 분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