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주의 지리
청주의 지세를 보면 동쪽과 남쪽에는 산이 있고, 중심지로부터 북쪽과 서쪽이 평야 지대로 이루어져 있다. 청주의 평야 지대에는 미호천(美湖川), 무심천(無心川) 2개의 천이 흐르는데 미호천은 북쪽에서 서남 방향으로 흘러 금강으로 들어가고, 무심천은 서북 방향으로 흘러 청주 시내를 동과 서로 나누면서 미호천으로 들어가는데 그 모양이 ‘ㅅ’ 자 모양처럼 되어있다. 이 2개의 천 유역에는 여러 유적과 문화가 발견된다.
= 청주와 선사시대
두루봉동굴 유적은 청주시 남쪽인 상동구 문의면에 있는 구석기 유적으로 새굴, 처녀굴, 흥수굴 등 여러 굴에서 주먹도끼, 사냥돌, 찌르개 등 사냥·도살용 도구들과 화석들이 발굴되었다. 1983년에는 광산 소장 김흥수씨가 채굴 도중 2개의 어린아이 유골을 발견하고 그중 1개의 유골이 동아시아에서 발견된 사람의 유골 가운데 가장 온전한 모습으로 발굴되었다. 이 유골은 발견자의 이름을 딴 ‘흥수아이’로 알려져있다. 이 유골은 4만년 전에 살았던 구석기인이며 당시 나이는 5~6세 정도로 추측되고 있다. 키는 110~120센티미터이고, 지금의 인류와 비슷하다. 발굴 당시 주변에 인골 주변에 국화꽃 화석이 나왔는데 이는 선사시대 당시의 장례 풍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고 있다.
소로리 유적은 청주시 북쪽 흥덕구 옥산면 소로리에 있는 신석기 유적으로 이 유적에서 출토된 볍씨는 지금까지 밝혀진 자료로 보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볍씨로 밝혀졌다. 볍씨의 기원이 중국 호남성 도현 옥섬 유적에서 출토된 1만 1,000년 전 볍씨가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있었지만 소로리에서 발견된 볍씨는 그보다 1만 3,000년~5,000년 전 볍씨로 밝혀져 현재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 가치가 충분하다는 의견이 제시되고 있다.
청주시 청원군 내수읍 학평리 생활유적지 일대에 청동기 전기의 유구와 유물이 무더기로 출토되었다. 학평리의 고인돌은 성혈이 10개나 존재하였고 그 일대에 정동기 주거지 1동, 목곽묘 1기, 토광묘 2기 등 다양한 유구가 발견되었다. 이들 3개의 유구에서는 방추차, 무문토기, 비파형 동검, 마제석검, 마제석촉, 반월형돌칼, 철도끼, 이중구연토기(겹아가리토기) 등 한반도 청동기시대 유물이 한꺼번에 발굴됐다. 이 유적지에서는 고조선의 표지 유물이 고인돌 부장품이 아니라 생활유적지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에 주목하였다. 청주시 상당구 월오동 일대에 청동기시대 고인돌 25기가 무더기로 발굴되어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이 고인돌 유적에서 주목할 점은 북방식 고인돌과 남방식 고인돌이 같이 나왔다는 것이다. 무너진 고인돌 무덤을 다시 쌓은 흔적과 고인돌의 조성 과정을 알 수 있는 채석장도 주변에서 확인되었다.
= 백제 상당현
청주 지역은 삼한시대(원삼국시대)에 마한, 삼국시대에 백제의 상당현(낭비성 또는 낭자곡){『신증동국여지승람』} 또는 서원현(『삼국사기』 「지리」 ‘백제’ 조)으로 불렸는데, 이는 학계의 통설이다. 청주에는 상당산성, 구녀성, 청주 읍성, 정복동토성, 부모산성, 우암산토성 등 여러 성이 발견되었는데 청주의 가장 대표적인 산성은 상당산성이다.
상당산성은 청주시 산성동에 있는데 이 성은 오목한 분지를 에워 싼 산등성이를 둘러싼 산성이다. 둘레는 4.2km, 성안 면적은 22만 평이다. 이 산성의 축조 연대는 삼국시대로 보는데 백제 때부터 이미 이곳에 토성이 있었다고 한다. 이름 또한 백제 상당현에서 비롯되어있어 백제의 산성이다. 또한 이 산성은 충청도를 거쳐 영호남으로 갈 때 핵심이 되는 길목에 있어서 교통의 요충지로 상당히 중요한 거점이었다.
상당산성은 낭자곡성(娘子谷城) 또는 낭비성(娘臂城)으로 불리는데 『삼국사기』 「백제본기」 ‘다루왕 36년(63)’ 조에 “겨울 10월에 왕이 영토를 개척하여 낭자곡성(지금의 청주)에 이르렀다. 곧 사신을 신라에 보내 만나기를 청하였으나, (신라왕이) 듣지 않았다.”고 말하는데 낭자곡성을 상당산성으로 본다면 청주는 초기 백제의 영토였다. 후기 백제 시대로 가면 신라가 고구려 낭비성을 침공해 5,000명을 벤 곳(『삼국사기』 「김유신열전」)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낭비성을 상당산성으로 본다면 후기 삼국시대에는 백제가 고구려에게 이 성을 빼앗기고 신라가 고구려를 공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내용으로 상당산성이 삼국의 격전지였음을 알 수 있다.
또 청주의 신봉동, 봉명동, 송절동, 가경동 등지에는 백제고분군이 다수 발견되었는데, 청주 송절동 유적의 무덤 발굴 조사에 따르면 좌우로 170여 기가 질서정연하게 나누어져 있었고 청주시 남쪽에 흐르는 금강을 따라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또 500여 기가 넘는 수혈주거지와 유구, 30여 기의 제련유구가 발견되었다. 그 유물의 연대는 서기전 3세기~서기 2세기로 보고 있다. 이 정치세력에 대해서 학계는 마한과 마한의 속한 백제국으로 보고 3세기 후반 또는 4세기가 되어서 백제가 처음 진출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학계의 풍토는 『삼국사기』의 백제 초기 기록뿐만 아니라 고구려, 신라의 초기 기록을 불신하는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을 따른 것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따르면, 백제 온조왕 재위 27년(서기 9)에 마한은 백제에게 멸망하지만 이 기록을 부정하고 서기 1세기부터 서기 3세기까지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 조의 마한에 속한 54개 소국 중 하나로 보는 관점이다. 다시 말해 백제의 건국과 초기 기록을 부정한 것이다. 그러나 2000년에 국립문화재연구소가 풍납토성에서 출토된 유물 13점에 대해 탄소연대를 측정한 결과 빠른 것은 서기전 2세기이고 늦은 것은 서기 3세기로 측정되었는데, 이러한 연대 측정의 결과로 풍납토성의 축조연대를 서기전 2세기로 볼 수 있다. 그래서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초기 기록은 고고학적으로 부정할 수 없지만 여전히 학계는 백제 초기 기록의 의문점이 많은 것을 근거로 믿을 수 없는 것으로 보고 있다.
청주 신봉동 고분군은 백제의 고분으로 1982년 3월 고분의 존재가 처음으로 알려졌는데 그 결과 돌방무덤 4기, 돌덧널무덤 3기, 움무덤 327기, 독무덤 1기 등 상당한 수의 무덤이 다양하게 발굴되었다. 또한 무덤 안에서 많은 수의 토기와 철제 갑옷과 철제 무기류, 말갖춤새, 장신구 등이 출토되어 강력한 철기 세력이 존재했다는 것이 밝혀졌는데 당시 전투에서 희생된 병사들이 묻힌 것으로 보고 있다. 그 연대는 대체로 3~5세기인데 백제 중기 시대에 해당된다.
= 신라 서원경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통일신라시대에는 신라 영토에 9주5소경을 설치했는데 5소경 중 하나인 서원소경은 신라 신문왕 재위 5년(685)에 설치하고 신라 경덕왕 재위 16년(757)에 서원경으로 승격시켜 충청도 지역의 중심으로 삼았다.
1933년 일본 황실의 수장고인 정창원에서 한자와 숫자가 가득 적힌 고문서가 화엄경전 두루마기 속에 발견되었는데 신라장적으로 밝혀졌다. 신라장적은 헌덕왕 7년(815) 을미년에 작성된 문서로 서원경(현 청주)과 그 주변 3개 촌락의 3년간 인구 동태, 가축 사육, 촌락 단위의 과표와 세율, 뽕나무, 유실수(잣, 가래나무), 삼베[麻] 등 지역 특산품의 수, 소와 말을 사육하는 수 등을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서원경의 중심지로는 지금의 청주 읍성으로 추정하고 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에는 군사적인 목적보다는 행정적인 목적으로 평지에 읍성을 쌓아올린 것으로 보고 그 읍성을 지금의 청주 읍성으로 본 학설이다. 또한 이곳에서 통일 신라 때 쌓은 성벽도 발견되었다.
첫댓글 와 ~ 볼거리가 정말 많네요
가보고싶딩~~
엘리자선생님 다음에 기회되면 같이가요 ! 갔다오고나서 사진이랑 후기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