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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진실과 역사의 울림
―황우진 시집 『별밭 서정』, 심지, 2026.
1. 맑고 투명한 서정
황우진의 시집 『별밭 서정』은 한국 서정시의 맑고 투명한 전통 위에 서 있다. 그러면서도 이 시집에 실려 있는 그의 시는 격변하는 우리 시대의 현실과 함께하는 역사의식을 넉넉하게 담아내고 있다. 시집의 제목이 보여주듯이 그의 시는 일상이라는 지상의 서정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항상 하늘의 별밭을 우러르는 마음을 잃지 않고 있다. 개인이 느끼는 서정에 머물지 않고 더 높은 세계, 더 나은 세계를 지향하는 여정의 고난과 수난을 끌어안는 것이 그의 시세계이다.
이때의 고난과 수난이 대한민국 공동체에까지 이르러 있음은 불문가지이다. 이는 그의 시적 화두가 개인의 서정을 넘어 국가의 고난과 수난을 구원하려는 의지에까지 이르러 있음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모두 6부에 걸쳐 펼쳐지는 이 시집의 시들은 계절의 흐름, 고향의 정경, 시대의 격랑, 인간 존재의 근원적 물음 등을 씨실과 날실로 엮어 깊고 넓은 울림을 보여준다. 이처럼 깊고 넓은 울림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그의 시세계는 한국 서정시의 맑고 투명한 전통을 잊지 않고 있다. 우선은 이를 증명할 수 있는 그의 시부터 살펴보자.
숨이 막힌다 숨이
미풍의 햇살에
가만히 열리는 하늘의 속살
순정의 하늘이 다하고
삼라만상 숨죽인 가슴에
연초록 눈물이 흐른다
거친 풍랑 가지에 잠재우고
연분홍 심장
자꾸만 떨리는 봄날에.
―「매화꽃 봄날」 전문
이 시에서 시인은 먼저 “미풍의 햇살에/가만히 열리는 하늘의 속살”을 들여다본다. 이때의 감흥을 그는 “숨이 막힌다 숨이”라고 말한다. 이어지는 구절에 따르면 그는 새봄을 맞아 매화꽃이 피고 싹이 트는 것을 “삼라만상 숨죽인 가슴에/연초록 눈물이 흐른다”고 명명한다. 그가 보기에는 매화꽃이 피는 지금이 “거친 풍랑 가지에 잠재우고/연분홍 심장/자꾸만 떨리는 봄날”인 것이다. 새봄의 계절과 함께하는 자연의 질서에서 “순정의 하늘”의 뜻을 읽는 그의 마음이 미쁘다.
“순정의 하늘”은 때로 이번 시집의 그의 시에서 “눈부신 향기로/인사하는 그대”의 모습을 취하기도 한다. 물론 이때의 “눈부신 향기로/인사하는 그대”는 5월의 이팝꽃을 가리킨다.
출근길 눈부신 향기로
인사하는 그대는 누구신가요
겨우내 쌓아놓은 켜켜 묵은
고운 정이 하얀 눈꽃으로 피네요
함박눈처럼 고운 이 드러내고
수줍게 웃음 짓는 그대의 모습
별처럼 분주한 도시의 근심
모두 다 사라지네요.
―「5월의 이팝꽃」 전문
시인은 이 시의 서두에서 “출근길 눈부신 향기로/인사하는 그대는 누구신가요”라고 묻는다. 그러한 뒤 이어지는 구절에서는 이때의 그대를 두고 “겨우내 쌓아놓은 켜켜 묵은/고운 정이 하얀 눈꽃으로 피네요”라고 노래한다. 다음 구절에서 “순정의 하늘”이기도 한 ‘5월 이팝꽃’은 “함박눈처럼 고운 이 드러내고/수줍게 웃음 짓는 그대”의모습을 취하기도 한다.
따라서 ‘5월의 이팝꽃’이 “분주한 도시의 근심/모두 다 사라지”게 하리라는 것은 당연하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분주한 도시의 근심”을 씻어주는 것이 “순정의 하늘”이라고도 불리는 자연의 질서인 것이다. 자연의 질서를 바라보는 이러한 태도는 그의 시 “꼭두새벽 이른 아침/푸른 가슴 노란 눈망울”을 뜨며 “새벽보다 일찍 잠 깨어난”(「산수화 꽃피는 새벽」) 산수유꽃을 두고 “네 이름은 누구냐”라고 묻는 구절에 의해서도 확인된다.
자연의 질서를 이렇게 읽는 것은 고추장에서 “빛깔 좋은 태양의 에너지”를 읽는 자세, “밤하늘에 별빛 연서를 쓰던 소년의/애타는 달빛 가슴”(「고추장」)을 읽는 자세를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자연을 바라보는 이러한 그의 태도는 전통을 바라보는 그의 태도와도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이때의 전통이 오랫동안 계속해온 마을공동체의 인습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은 덧붙여 설명할 필요가 없다. “우리 집 장독대에는/가장 큰 항아리 단지 하나 있지요/숨기 장난하던 시절 작은 몸/가장 잘 숨겨주던 대장 항아리”(「어머니 간장」)라고 노래하는 시도 전통을 재발견하려는 그의 의지를 읽을 수 있는 예라고 할 것이다.
다음은 맑고 투명한 서정과 동시에 서정시의 전통적 가치를 이어 가려는 그의 의지를 읽을 수 있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 시는 한국현대시의 전통적 소재를 그 나름의 심미적 안목으로 새롭게 형상화하고 있는 예이기도 하다.
찔레꽃 찾아가자 하얀 찔레꽃
농무를 춤추며 그리움 찾아가자
그리운 사람 가신 초록 산길에
찔레꽃 눈처럼 하얗게 피어 있네
소근소근 수군수군
사과꽃 복숭아꽃 피고 지는 정겨운 고향
그리운 찔레꽃 향기
가슴 가득 차오르고
찔레꽃 무덤가에는 반가운 얼굴들
이 생각 저 생각 마음 자꾸 깊어지네
낙타 타고 오신 발길
낙타 타고 가신다니
멀어지는 발길에도 하얀 찔레꽃
눈물로 적시며 향기가 깊어가네.
―「찔레꽃」 전문
이 시의 중심 대상은 ‘찔레꽃’이다. ‘찔레꽃’은 한국현대시의 가장 오래된 소재, 곧 가장 전통적인 소재이다. ‘어머니’가 그렇듯이 ‘찔레꽃’도 거개(擧皆)의 시인이 한 번쯤은 시로 노래한 적이 있는 대상이다. 일단 시인은 “찔레꽃 찾아가자 하얀 찔레꽃/농무를 춤추며 그리움 찾아가자”고 노래한다. 그렇다면 찔레꽃은 어디에 피어 있나. 이 시에서 그는 “그리운 사람 가신 초록 산길에/찔레꽃 눈처럼 하얗게” 핀다고 노래한다. 다음의 구절로 미루어 보면 “찔레꽃 눈처럼 하얗게 피어” 있는 곳은 “사과꽃 복숭아꽃 피고 지는 정겨운 고향”이기도 하고 고향의 “무덤가”이기도 하다. 물론 그곳은 “반가운 얼굴들”로 가득한 곳이기도 하거니와, 한편으로는 “멀어지는 발길”과 함께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들 논의에서처럼 이번 시집에서 그는 맑고 투명한 서정을 노래하면서도 전통을 재발견하려는 태도를 잃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시가 단지 그러한 세계를 노래하는 데서 멈춰 있는 것은 아니다. 격변의 시대에서 느끼는 간곡한 충정뿐만이 아니라 위기에 처한 국가 공동체의 제반 사연에 대해서도 그 나름의 서정적 감흥을 담아내고 있는 것이 그의 시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의 시가 굳건한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2. 격변의 시대 혹은 굳건한 역사의식
앞에서 말한 것처럼 시인 황우진의 이번 시집은 일상의 서정적 감흥을 잃지 않으면서도 격변의 자기 시대를 바라보는 굳건한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 또한 그의 시가 더욱 주목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라고 할 수 있다. 강조하거니와, 단순한 개인의 서정뿐만이 아니라 자기 시대를 살아가며 느끼는 간곡한 충정을 포함해 위기에 처한 국가 공동체의 제반 문제에 대해서도 그 나름의 진실한 감흥을 담아내고 있는 것이 이번 시집의 그의 시이다. 그렇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공동체의 집단적 기억과 아픔을 끌어안으면서도 상처 난 존재의 치유를 다각적으로 모색하고 있는 것이 이번 시집에 실린 그의 시의 중요한 축이다. 바로 그러한 점에서 그의 시의 화자는 때로 ‘시대의 증언자’로 기능하기도 한다. 국민 주권의 시각에서 이 나라 이 민족의 혼이 이룩해온 한국 현대사를 서정적으로 압축하고 있는 다음의 시가 특히 이를 잘 징험한다.
3·1 만세 운동 때 나부끼던
태극기 꽃잎, 가슴 깊이
새롭게 피어나고
무명 저고리에 튀던 4·19 혁명 때의 피
지금도 백설 가슴 얼룩져 있나니
아, 밀물처럼 밀려와
그대 치맛자락 앞에 쓰러지던
민족의 혼이여!
가엾어라 슬픈 가슴, 가슴 애달픈 노래여
늠름하여라 만년 빙하보다 굳세던 지조의 향기,
창대하게 펼쳐지던 민족의 기상,
팔월의 뜨거운 태양 아래
억조창생의 가슴, 가슴마다
조각조각 새겨지던 저 무궁화 꽃잎
한 잎 한 잎, 삼천리 강토를 적시며
다시 또 피어나고 있구나.
―「무궁화―민족의 혼」 전문
이 시의 중심 소재는 제목 그대로 ‘무궁화’이다. 하지만 이 시는 부제로 드러나 있는 것처럼 무궁화로 표상되는 ‘민족의 혼’을 노래하는 데 초점이 있다. 무궁화라는 이미지를 매개로 하여 면면하고 유구한 민족의 혼을 형상화하려는 것이 시인의 기본 의도라는 것이다. 무궁화를 두고 그가 “3·1 만세 운동 때 나부끼던/태극기 꽃잎, 가슴 깊이/새롭게 피어나고” 운운하는 것도 다름 아닌 그러한 발상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3·1 만세 운동”의 정신이 “4·19 혁명”의 정신으로 이어진다는 것은 국민 주권의 역사관에서는 항상 해오던 말이다. 물론 시인 황우진의 역사의식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시의 다음 구절인 “무명 저고리에 튀던 4·19 혁명 때의 피/지금도 백설 가슴 얼룩져 있나니”와 같은 구절이 특히 이를 잘 말해준다. 하지만 이때까지는 그의 이 시처럼 “밀물처럼 밀려와/그대 치맛자락 앞에 쓰러지던” 것이 “민족의 혼”이다.
이처럼 좌절하고 패배하던 이 나라의 현실에 대해 “가엾어라 슬픈 가슴, 가슴 애달픈 노래여”라고 통탄해오던 것이 그이다. 그렇지만 그는 다른 한편으로는 “늠름하여라 만년 빙하보다 굳세던 지조의 향기”라고 하며 독자들에게 용기를 불어넣는다. 그가 생각하기에는 얼핏 좌절하고 패배하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실제로는 “창대하게 펼쳐”져온 것이 “민족의 기상”이다. “팔월의 뜨거운 태양 아래/억조창생의 가슴, 가슴마다/조각조각 새겨”져온 것이 “저 무궁화 꽃잎”인 것이다.
한국 현대사의 역사적 사건에 대한 시인 황우진의 서정적 관심은 물론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른바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서도 그가 자신의 시에서 적극적인 관심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있었던 이른바 ‘광주민주화운동’ 말이다.
충청남도 공주 출신인 그로서는 광주 출신의 다른 많은 시인처럼 ‘광주민주화운동’을 직접 경험했을 리 만무하다. 그러니만큼 그에게는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서정적 탐구가 간접적인 경험을 통해 받아들여졌을 수밖에 없다. 이때의 간접적인 경험은 1980년 광주 밖에서 살던 사람들에게는 아무래도 보편적인 경험으로 자리할 수밖에 없다. 그의 마음이 보여주는 이러한 특징은 다음의 시를 통해 여실하게 확인된다.
인사동 갤러리 인덱스에서
뜻밖에 충격적인 광주 이야기를 듣네
주검의 세월이 흘러 43주년이라니
영원히 기억 속에 멈춰버린 그날이
43년 전이었다며
사진들이 펼쳐지네
애간장 파고드는 가여운 목소리
총성, 마구잡이 기관총, 울부짖는 목소리
주검들, 아무렇게나 널려진 주검들
떨리던 목소리를 이제 다시 듣는다
43년 전 주검의 밤에
시체 속에 살아남은
그 목소리 다시 듣는다
“이 청년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어 죽은겨
북한 사람 아니래 몇 번 검증했지
그날 밤, 정말 무서웠어
여기 있던 사람들 다 죽었어”
매부리 같은 당신의 눈빛은 아직도 살아있구나
그대의 떨리는 심장에는
아직도 방아쇠가 장전되어 있구나
인사동 갤러리에서
43년 만에 듣는 생생한 증언을
격동하는 피의 현장을, 요동치는 심장의 떨림을
너에게 눈물로 말하네
광주여 광주여 안타까운 광주여
이제 눈물을 멈추자 피눈물을 닦자
이제 그만 눈물을 훔치자.
―「오월 광주」 전문
이 시에서 시인은 “인사동 갤러리 인덱스에서/뜻밖에 충격적인 광주 이야기를 듣”는다. “주검의 세월이 흘러” 광주민주화운동 “43주년이”되던 날에 말이다. 그는 이날 ‘광주민주화운동’ 사진전을 관람한 듯하다. 이 시에서 그는 “영원히 기억 속에 멈춰버린 그날이/43년 전이었다”고 노래한다. 그는 지금 “애간장 파고드는 가여운 목소리/총성, 마구잡이 기관총, 울부짖는 목소리 /주검들, 아무렇게나 널려진 주검들/떨리던 목소리를 이제 다시 듣”고 있는 것이다.
마침내 그는 “인사동 갤러리에서/43년 만에 듣는 생생한 증언을/격동하는 피의 현장을, 요동치는 심장의 떨림을” “눈물로 말하”는 소리를 듣는다고 노래한다. “43년 전 주검의 밤에 /시체 속에 살아남은/그 목소리 다시 듣”는 것이 이 시에서의 그이다. 이러한 그가 이 시를 마무리하며 “광주여 광주여 안타까운 광주여/이제 눈물을 멈추자 피눈물을 닦자/이제 그만 눈물을 훔치자”라고 노래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국민 주권의 역사적 희망을 잃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1980년 5월의 ‘광주민주화운동’의 정신이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정신으로 이어진다는 것은 따로 강조할 필요가 없을 정도이다. 주권재민의 역사에서는 1894년 ‘동학혁명’의 정신이 1919년 ‘3·1 만세 운동’의 정신으로, ‘3·1만세 운동’의 정신(「삼월의 날개」)이 1960년 ‘4·19 혁명’의 정신으로, ‘4·19 혁명’의 정신이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의 정신으로, ‘광주민주화운동’의 정신이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정신으로 이어진다는 것은 덧붙여 설명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일까. 시인은 1894년 ‘동학혁명’에서부터 1919년 ‘3·1 만세 운동’, 1945년 8·15 광복(「무명 저고리―광복 80주년 기념시」), 1987년 ‘6월 민주항쟁’, 2016년의 촛불 혁명(박근혜 대통령 탄핵), 2025년의 빛의 혁명(윤석열 대통령 탄핵)을 시로 노래하는 일에 이르기까지도 매우 부지런하다.
우선은 그가 1987년 ‘6월 민주항쟁’과 관련하여 “유월의 검은 대로(大路)여/들끓는 바다여 부서지는 파도여/나는 너의 심장을 어루만지며 오열하느니/그대 누구를 위해 아직도 이 뜨거운 거리/누워 있느냐 사랑하는 친구여”라고 노래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거리에서 붉은 피, 쏟아내던 나의 친구여/그대는 무엇을 위해/아름다운 영혼과 청춘을, 붉은 심장을/6월의 검은 포도 위에 바쳤느냐/아, 뜨거웠던 함성으로 파도치던/87년의 여름이 벌써 서른일곱 해나 지나가도/나의 심장은 그날처럼 파도치”(「유월의 민주대로에서」)는구나 라고 노래하는 것이 그라는 것이다.
한국 현대사의 각종 현장에 대한 그의 서정적 관심은 물론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번 시집에서는 박근혜 대통령과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이 이루어지기까지의 역사적 사건도 그의 시의 중요한 소재가 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대한민국 현대사의 가장 중요한 현장이었던 ‘광화문’을 서정적 대상으로 하는 것이야말로 그의 시가 지닌 그러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이 시에서 그는 우선 광화문과 관련해 장엄한 목소리로 “찬란하구나/불빛에 비친 한민족 역사의 자화상/광화문의 얼이여/진실로 아름답구나/어떤 애인이 그리도 오랜 세월/애틋하고 지극한 사랑 받을 수 있으랴”라고 노래한다. 이는 무엇보다 그가 “눈 내리는 짧은 겨울 햇살은/서산마루에 걸려 있”는데, “수십만 반짝이며 흐르는 응원봉의 물결을/심장에서 터져 나오는 함성을/광화문에서 보고 듣”(「광화문 함성」)고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를 국민 주권의 시각으로 바라보면 지난 시기에 있었던 크고 작은 각종 사건이 새롭게 이해될 수밖에 없다. 주권재민의 시각으로 바라보면 이념이나 정파와 관계없이 역사가 새롭게 해석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으로 유명한 골령골의 학살을 따듯한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2편의 시도 그러한 맥락에서 읽을 수 있는 예이다. ‘진실의 카메라’라는 부제가 달린 「골령골」이라는 제목의 시에서 “하늘을 뒤덮은 사악한 용의 마력도/시간의 사슬에 묶이면/녹슬고 허물어지기 마련/어이없는 그들은 보도연맹의 그물로/그렇게 많은 영혼을 땅속에 묻었다”라고 노래할 수 있는 것도 한국 현대사와 관련해 그가 국민 주권의 시각을 잃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이라는 부제가 달린 또 다른 시 「골령골」은 그곳에서의 학살이 좀 더 섬세하게 진술되고 있어 더욱 관심을 끈다.
산내에 가면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이 있다
누구도 엄청난 진실이 두려워 말하지 못한 무덤
시인도 통곡하는 뼈의 진실 앞에
영혼이 떨려 한 줄의 詩도 쓰지 못했다
진실을 말하는 순간
너도 나도 골로 가니까
우리는 반쪽짜리 나라 신하가 되기 위해
그렇게 신神의 이름으로 원죄를 저질렀다
좌익이 무엇인지 우익이 뭔지도 모르고
그저 쌀을 준다고 하니
비료를 준다고 하니
보도연맹 회원이 되어 목숨을 잃었다
개돼지만도 못한 이유로, 국가라는
거룩한 이름으로 죽었다 끽소리 못하고 죽었다.
―「골령골―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 전문
이 시에는 이른바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이”라고 불리는 ‘골령골’의 학살과 관련된 이런저런 에피소드가 리듬 있는 언어로 그려져 있다. 우선 그는 그곳이 “누구도 엄청난 진실이 두려워 말하지 못한 무덤”이라고 밝힌다. 그러면서 그는 “통곡하는 뼈의 진실 앞에/영혼이 떨려 한 줄의 詩도 쓰지 못했다”고 덧붙인다. 물론 그가 “한 줄의 詩도 쓰지 못”한 까닭 중에는 “진실을 말하는 순간/너도 나도 골로 가”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의 말처럼 “반쪽짜리 나라 신하가 되기 위해/그렇게 신神의 이름으로 원죄를 저질렀다”면 이는 차마 통탄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이곳에서 학살당한 사람들 대부분이 “좌익이 무엇인지 우익이 뭔지도 모르고/그저 쌀을 준다고 하니/비료를 준다고 하니/보도연맹 회원이 되어 목숨을 잃었다”는 것도 또한 그로서는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가 보기에는 이곳 골령골에서 죽은 사람들이 “개돼지만도 못한 이유로, 국가라는/거룩한 이름으로 죽었다 끽소리 못하고 죽”은 것이다. 그러니 주권재민의 역사의식을 지닌 시인으로서 그가 이 시에서 거듭 통탄스러워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시인으로서 그가 역사의 현장과 관련하여 “진실의 눈동자로 증언의 자리를 지”(「골령골―진실의 카메라」)키려 해왔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가 자신의 시를 통해 ‘진실의 카메라’가 되려고 해왔음은, 나아가 “진실의 눈동자로 증언의 자리를 지”키려 해왔음은 다른 많은 시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비상계엄」, 「키세스 설야(雪夜)」, 「세월호」, 「개미 고개 전사(戰史)」 등의 시가 바로 그 예이다. 역사적 현장에 대한 진실한 그의 관심은 전통적이면서도 문화적인 유산까지도 시적 대상으로 포함한다. 이 또한 그의 가슴에 내재화해 있는 애국심 혹은 애민심의 발로라고 이해된다. 이러한 면에서도 그가 이른바 애기애타(愛己愛他)의 정신에 충실한 시인이라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3. 문화유산 혹은 전통 의식의 재발견
황우진의 이번 시집이 보여주는 또 하나의 특징은 끊임없이 이 나라의 문화유산 혹은 전통적 가치에 대한 재발견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문화유산 혹은 전통적 가치에 대한 재발견은 이 나라의 오래된 인문지리적, 역사적 공간의 재발견과 함께하고 있다는 점에서 돋보인다. 이를테면 인문지리적, 역사적 상상력과 함께하고 있는 것이 그의 이번 시집의 시들이 보여주는 또 하나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들 특징은 문화유산의 재발견 혹은 전통 의식의 재함양이라는 가치와 깊이 연관되어 있어 더욱 돋보인다. 그의 시 가운데 인문지리적, 역사적 상상력과 함께하는 공간, 곧 장소로는 얼핏 홍릉, 백련암(白蓮菴), 고왕암(古王菴), 미륵사(彌勒寺), 칠연의총, 덕유산(德裕山), 성안길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이들 공간 의식, 곧 장소 의식은 시인이 살아가는 세종시의 각종 지명까지도 호명해 서정적 흥미를 북돋운다.
그의 인문지리적, 역사적 상상력과 함께하는 세종시의 각종 지명으로는 참샘, 수국정원, 비단강, 청벽강, 덕성서원, 운주산(雲住山), 전월산, 이응다리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이뿐만 아니라 그는 국가 공동체의 과거 및 미래와 관련해 홍범도, 이응로, 노무현 등 역사적 인물에 대한 서정적 그리움도 자주 호명해 낸다. 사적이고 개인적인 맑고 투명한 정서에 의지하고 있는 것이 그의 시라고 하더라도 그가 끝내 국가 공동체의 과거 및 미래와 관련해 공적인 마음을 잃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일단은 먼저 조선조 말 비극적으로 최후를 마친 명성황후 민 씨를 추모하고 있는 시부터 읽어 보기로 하자.
산국이 노랗게 가을산 물들이는
만추(晩秋)의 계절
홍릉의 언덕에서
비극의 황후 생각에 가슴을 여미네
햇살은 모과나무에 매달려
주렁주렁 노랗게 익어가고
가을 낙엽 하나
바르르 한(恨) 서린
하늘 모퉁이에서 몸서리치네
애절한 가을밤 목멱산 봉화는
저 혼자 혼절하여
검붉은 눈물로 타올랐으리
을씨년스러운 세월 서러운 하늘은 가고
산비둘기만 조상하며
찬 바람 부는 낙엽 위에서 울고 있다네.
―「홍릉(洪陵) 가을 숲에서」 전문
이 시의 제목은 「홍릉(洪陵) 가을 숲에서」이다. 홍릉은 조선조 제26대 왕인 고종황제(1852~1919)와 그의 정실부인인 명성황후(1851~1895)의 묘소이다. 시인은 “산국이 노랗게 가을산 물들이는/만추(晩秋)의 계절”인 “홍릉의 언덕에서/비극의 황후 생각에 가슴을 여미”고 있다. 이 시에서 말하는 “비극의 황후 생각”은 이른바 조선말 을미사변(乙未事變)에 관한 생각, 곧 ‘1895년 일본 자객들이 경복궁에 난입하여 명성황후를 죽인 사건’에 관한 생각을 뜻한다. 따라서 “비극의 황후 생각”은 잃어버린 나라에 관한 생각을 가리키지 않을 수 없다.
파란만장한 사건으로 점철되어왔던 이 나라의 어제와 오늘을 생각하면 지금 세계를 바라보는 시인의 마음이 온전할 리 만무하다. 그러니 그에게는 햇살이 “모과나무에 매달려/주렁주렁 노랗게 익어가”더라도 “가을 낙엽 하나/바르르 한(恨) 서린/하늘 모퉁이에서 몸서리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 그가 “애절한 가을밤 목멱산 봉화는/저 혼자 혼절하여/검붉은 눈물로 타올랐으리”라고 상상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지나간 시절의 국가 공동체에 대한 차마 어찌하지 못하는 마음은 이 시를 매조지 하는 “을씨년스러운 세월 서러운 하늘은 가고/산비둘기만 조상하며/찬 바람 부는 낙엽 위에서 울고 있다네”와 같은 구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잃어버린 나라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마음은 또 다른 그의 시 「고왕암(古王菴)에서」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시의 서두에서부터 “가을바람 깊어가는/천지만홍(天地滿紅)의 계절/신원사 고왕암에서/백제의 슬픈 역사, 반추(反芻)해 보네”라고 노래하고 있는 것이 그이기 때문이다. 그가 보기에는 “깊은 바위산자락/숨겨진 고왕암 뜨락/비운의 백제 이야기, 아직도 펼쳐져 있”는 곳이 ‘고왕암(古王菴)’인 것이다.
잃어버린 나라에 대한 측은지심은 그의 또 다른 시 「백련암(白蓮菴)을 찾아서」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이 시를 통해 그 자신과 국가 공동체의 설움을 “휘돌아 흐르는 맑은 물결”로 씻어내려고 하기 때문이다.
낙엽 지는 가을에는 태화산 그늘
백범 자취 찾아 마곡으로 가자
하얀 연꽃으로 피어 신화처럼 살고 싶어
아련히 고갯길 넘어 백련암 찾아가네
산사를 휘돌아 흐르는 맑은 물결
가마를 내려놓자 탐심(貪心) 맑아지네
바위에 새겨진 해탈의 미소
가을바람 소소히 낙엽들 날리네
낙엽 흩날리자 가을 내음은 짙어가고
산사의 음악 몽환 속으로 감미롭게 여울지네
풍경소리 먼바다로 굽이치자 목어(木魚)가 울고
태화산 가을 하늘가에 백련꽃 피어나네.
― 「백련암(白蓮菴)을 찾아서」 전문
이 시의 중심 대상인 ‘백련암(白蓮菴)’은 공주시 태화산 마곡사 산하의 작은 암자이다. 이 작은 암자는 일제강점기 초기 백범 김구 선생이 일본인 경찰을 살해한 후 숨어 살던 곳이기도 하다. 시인은 이 시의 앞자리에서 “낙엽 지는 가을에는 태화산 그늘/백범 자취 찾아 마곡으로 가자”라고 권유한다. 물론 그 자신은 일단 “하얀 연꽃으로 피어 신화처럼 살고 싶어/아련히 고갯길 넘어 백련암 찾아”간다고 노래하지만 말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이 시에서 노래하고 있는 ‘신화’가 김시습의 소설 『금오신화』를 가리킨다고 덧붙이기도 한다.
이 시의 다음 구절에 이르면 “산사 휘돌아 흐르는 맑은 물결”로 “탐심(貪心)”을 씻어내고 있는 시인과 김구 선생의 모습이 겹쳐 드러나기도 한다. 이어지는 구절의 끝 부문에 이르러 펼쳐지는 장면들, 가령 “풍경소리 먼바다로 굽이치자 목어(木魚)가 울고/태화산 가을 하늘가에 백련꽃 피어나네”로 미루어 보면 그의 시의 화자가 어디를, 무엇을 지향하는지 잘 알 수 있다.
그의 시가 보여주는 이러한 정신 지향은 또 다른 시 「덕유산(德裕山)」의 “운무에 휩싸인 덕유산 향적봉에 올라/격조 높은 인생의 도(道)를 논하네”와 같은 구절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산처럼 무거운 것”이 “세상의 넓은 도(道)”이거니와, 그는 그것이 “하늘로 멀어져 세속의 인간사/전생의 이야기인 듯 가물거리네”라고 노래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시 「덕유산(德裕山)」에 드러나 있는 장면들 또한 그의 시가 추구하는 인문지리적, 역사적인 상상력과 함께하는 것은 당연하다. 어쩌면 그는 지금 자신의 시를 통해 “거미줄처럼 이어진 미로에서/과거를 찾아 헤매고 있”(「성안길을 걸으며」)는지도 모른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번 시집 『별밭 서정』에는 그의 생활 기반인 세종시와 그 주변의 자연도 중요한 시적 대상이 되고 있다. ‘신행정수도’인 세종특별자치시의 의미를 단순한 물리적 공간이 아닌 민족의 이상과 염원이 투영된 새로운 정신적 고향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시에서의 그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세종시를 관통하는 금강(錦江)과 주산인 전월산(轉月山)은 그에게 매우 중요한 서정적 원천이자 배경이다.
그의 이 시집에서도 ‘금강’은 ‘비단강’, ‘청벽강’ 등의 이름으로 바뀌어 불리고 있다. 다음은 금강이 ‘비단강’이라는 이름으로 창작된 시이다.
강이 내게 말하네
물처럼 흐르라고 말하네
바위에 부딪히고 둑에 막혀도
아침 햇살처럼 반짝이며
미소 띤 얼굴로
흐르라고 말하네
강은 내게 또
바람이 되라고 말하네
산처럼 구름처럼
어깨동무 노래하며
실버들 푸른 바람으로
부드럽게 살라 하네.
이 시 「비단강」에서 강물은 시인에게 순응과 포용의 정신을 가르치는 스승으로 존재한다. “물처럼 흐르라고 말하”는 것이 이 시에서의 스승인 강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어지는 구절에서 스승인 강은 “바위에 부딪히고 둑에 막혀도/아침 햇살처럼 반짝이며/미소 띤 얼굴로/흐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스승인 강은 지금 시인에게 시련을 극복하는 자세, 삶을 긍정하는 자세를 일깨워 주고 있는 셈이다.
이 시의 다음 연에서 그가 “강은 내게 또/바람이 되라고 말하네”라고 노래하는 것도 마찬가지의 맥락에서 이해된다. 말하자면 그에게는 “산처럼 구름처럼/어깨동무 노래하며/실버들 푸른 바람으로/부드럽게 살라”고 노래하는 것이 그의 스승인 강이다. 세종시의 자연유산인 ‘전월산’을 노래하고 있는 그의 시에서도 이러한 태도는 그대로 이어진다. “강물과 산맥이 흐르고 뭉쳐/삼태극 전설이 쌓이는 합강마을/달빛은 구르다 떨어지고/바람은 구름을 몰고 바다로 간다”(「전월산」)라고 노래하는 것이 이 시에서의 그이기 때문이다.
그의 생활 터전인 세종시의 전월산이나 이응다리가 기본적으로 둥근 이미지, 곧 원형 이미지를 갖고 있다는 것도 또한 기억해야 한다. 당대의 현실에 굳게 뿌리내리고 있는 것이 그라고 하더라도 그가 끊임없이 둥근 세상, 곧 원형(圓形)의 가치를 잃지 않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에게는 세종시의 전월산이나 이응다리가 원형의 구조를 이루며 시작과 끝이 없는 순환, 통합, 합일의 상징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얘기이다. 따라서 그가 정작 꿈꾸는 세상도 ‘시간의 징검다리’가 끊임없이 서로 이어지는 삶, 곧 과거, 현재, 미래가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삶이 가능한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이 시집의 시에서 세종특별자치시 건설의 첫 삽을 뜬 노무현 대통을 두고 “밀짚모자 눌러쓰고/바람같이 살다 간/그리운 임아 막걸리 한 잔/자전거 두 바퀴로/천하를 주유하던/다정한 임아”(「그리운 바보」)라고 노래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해야 할 가치이리라. (황우진 시집 『별밭서정』, 심지, 2026. 01. 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