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는 본래 척박한 만주 땅에서 성장한 국가였고 아무리 농사를 지어봐야 쌀 한 톨 나질 않으니 자연스럽게 노략질에 눈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그로 인해 그들의 군사력은 삼국 중 제일을 차지했고 그만큼 문관보다는 무관을 우대했다.
또, 대막리지란 직책을 국무총리격으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대막리지는 국방부장관에 가깝다. 연남생의 묘지를 보면 비석에 '그 조부인 연태조와 부친 연개소문은 모두 병법에 능하고 철을 잘 다루었으며... (이하 생략)'라고 나온다. 어딜 봐도 선정이니 뭐니 하면서 문관같은 인상은 남기지 않는다.
이렇게 그 당시 최고직책마저 무관들이 겸임하던 시대에 과연 최후방의 마지막 전선을 수비하던 자가 문관이었을까?
한 마디로 어불성설이다. 고려시대와 고구려시대는 비교가 되질 않는다. 고려시대 김부식이 묘청을 토벌한 것은 순전히 '병력빨'이다. 묘청의 병력과 수나라의 병력은 비교가 되질 않는다. 김부식은 그냥 총대장이었을 뿐, 한 것은 개풀도 없다.
하지만 고구려시대, 그것도 수나라나 당나라와 전쟁을 벌이던 시기에 총대장이 병법을 모르는 문관이었다면 고구려는 당나라까지 갈 필요도 없이 수문제가 쳐들어왔을 때 망했을 것이다.
강감찬 역시 문관이지 않았느냐?
그렇다. 강감찬도 문관이다. 하지만 귀주대첩과 살수대첩은 격이 다르다. 적들의 병력이 무려 30만인 을지문덕이 훨씬 불리하며 귀주대첩은 도망치는 적들을 몰살시킨 것이나 살수대첩은 진격해오는 적들을 몰살시킨 것이다.
귀주대첩의 상황을 생각해보자. 병사들이 패주하는 도중에 적을 만났고 거기에 탁류에 휩쓸렸다. 제 정신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살수대첩 때 우문술군은 결코 패잔병들이 아니었고 명색이 수나라의 '정예군'이었다. 비록 탁류로 군대의 허리를 끊어놓았다고 해도 그 많은 병사들을 몰살시키려면 적어도 장수의 병법이 보통은 아니어야 한다. 살수의 탁류에 휩쓸려 죽은 병력이 얼마나 되겠는가? 거업나게 많이 잡아 십만이라고 해봐야... 적들은 이십만이나 남는다.
또, 당시 고구려의 병력이 오히려 수나라군보다 더 많을 수도 있지 않냐고 물을까봐 미리 말한다.
당시 고구려의 여분 병력은 모두 요동성 라인, 즉 천리장성에 배치되어 있었다. 수양제 역시 그것을 노린 것이었고 을지문덕은 승산없는 싸움을 피하기 위해 여덟 번이나 후퇴해야 했다. 또한, 우문술과 우중문 역시 좌우익대장군이란 것들이 바보는 아닐 터, 그들이 아무런 의심없이 뒤쫓았을 만큼 을지문덕이 이끄는 부대는 철저히 작은 규모였다.
자신들보다 배로 많은 병력을 상대하려면 병사들의 사기도 높아야하고 지휘관의 용병술도 남달라야 한다. 그런데 문관이 병사들을 고무시키는데 뛰어날까? 아니면 용병술이 뛰어날까?
글쎄... 을지문덕에 관한 기록이 미약하다고는 하지만 그가 문관이라고 단정짓는 것 역시 내가 보기에는 근거가 미약하다.
저도 그와 비슷한 이야기를 어느 책에선가 본적이 있네요..강감찬장군은 문관이었다는 이야기로 시작해서.. 을지문덕장군도 문관출신이라는...그런데..삼국시대에 고구려나 백제, 신라에 대한 사료가 많지않고 더군다나 고려에 대한 자료또한 충분치않아서 딱히 판정지울수는 없을꺼라 생각합니다..
즉.. 귀족 자제들은 어릴적에 문무에 걸쳐 양쪽 모두를 교육받고 훈련하면서 성장했다고 생각이 드네요..실제로도 그러했고..삼국시대 인재들의 교육에서도 귀족자제들은 문무양면에 다 교육을 받는 문무일치였다는 점이 문관과 무관이란 출신으로 구분짓는게 어렵다고 봅니다..사실상 무관시험이란것도 고려후기에
대표적인 전략가로는 육손이나 만총, 이전 등을 들 수 있습니다. 그들은 내정과는 거리가 멀고 전장에서 종사하는 것이 대부분이지요. 하지만 그들이 직접 칼을 들고 싸움을 지휘하지는 않습니다. 또, 그래서는 군의 사기가 높을 수가 없고 큰 숫자의 적을 막아내기란 무리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살수에 휩쓸린 적들이 아무리 많다해도 아직 수나라의 병사는 배가 넘었습니다. 그런데 후방에서 급하게 끌어모은 고구려군이 그 배로 많은 병력들을 물리치려면? 당연히 장수의 용맹이나 용병술이 빛을 발휘하는 것이죠. 제갈량이나 기타 문관들이 적은 군사로 많은 군대를 물리친 적이 있다고는 하나
어느 정도 상대가 될 법한 머릿수가 가춰져있고 또 물리치더라도 '전멸'까지는 시키지 못합니다. 그런 기적적인 짓거리는 대부분 무장들이 앞장을 서지요. 유수구의 감녕이라던가, 합비의 장료라던가... 수십배, 수백배 되는 적진을 헤짚으며 적들을 격퇴하는 건, 문관들의 배짱으로는... 제 생각엔 힘들 것 같습니다
첫댓글 전 뭐가 을지문덕이 문관이라는 주장인지 모르겠군요 /./... 위인전에 을지문덕이 무관이 아닐까요 ..
사실, 그 위인전이라는 것이... 주업적을 제외한 거의 모든 게 허구라는 것입니다. 삼국사기의 고구려본기에서 을지문덕이란 이름은 열 번도 나오질 않는 걸로 압니다. (더 많이 나올지도 모르지만...)
저도 그와 비슷한 이야기를 어느 책에선가 본적이 있네요..강감찬장군은 문관이었다는 이야기로 시작해서.. 을지문덕장군도 문관출신이라는...그런데..삼국시대에 고구려나 백제, 신라에 대한 사료가 많지않고 더군다나 고려에 대한 자료또한 충분치않아서 딱히 판정지울수는 없을꺼라 생각합니다..
조선시대 경우 사료가 분명해서..무과시험까지 있는 내용이 있는바 조선시대에 양반을 구성하는 요인도 문반과 무반을 칭하여 양반이라 했던것처럼 자료가 충분하다면 유추해볼만하지만...그래서..전 동북아시아의 유목민들의 전쟁사를 보면서 느낀점을 바탕으로 유추해보건데..
당시 삼국시대..그리고 중국에선 위진남북조 시대에서 수당으로 넘어간 시대 이 시기에 각 나라의 정치구도상이나 내용면에서 딱히 문관과 무관을 구별하지는 않았다고 봅니다..다만 그들이 정치에 입문하면서 벼슬의 직위에 따라 자신의 역활이 분류되었다고 생각이 드네요..
즉.. 귀족 자제들은 어릴적에 문무에 걸쳐 양쪽 모두를 교육받고 훈련하면서 성장했다고 생각이 드네요..실제로도 그러했고..삼국시대 인재들의 교육에서도 귀족자제들은 문무양면에 다 교육을 받는 문무일치였다는 점이 문관과 무관이란 출신으로 구분짓는게 어렵다고 봅니다..사실상 무관시험이란것도 고려후기에
등장하는 것도 그러하고...결론적으로...당시 시대상으로 고구려는 무를 숭상하면서 자제들을 문무양면에 걸쳐 교육하고 양성했다는 점에서..문관 무관으로 구분짓는것 자체가 성립이 안된다고 봅니다..
별님 말에 찬성 전쟁을 수행하는 문관인지 내정을 하는 무관인지 그 구분자체가 성립안된다는..
문관 무관 구별이 안되었다구요? 그러면 왜 무신정변이 일어났는지요? 결정적으로 문무차별이 있었기 때문에 무신난이 생긴건 아니고요? 무신들도 불만이 많았을 겁니다
참고로 김부식인가? 그 삼국사기 쓴 분 있죠? 그분 아드님이 정중부한테 못된짓을 했지요 ㅇㅂㅇ;; 수염을 태웠다나? 그래서 정중부의 원한을 사고그후 정중부 -> 경대승 -> 이의민 -> 최충헌 -> 최우 그다음 ???의 60년 최씨정권이 시작되지요
바보냐? 무신정변은 고려때잖아!!
문관과 무관의 구분이 뚜렷하지 않다라... 그렇진 않습니다. 같은 문관이라도 '전략가'와 '정치가'의 차이가 있었고요. 삼국지를 보면 엄연히 그 차이가 납니다. 물론 태사자같은 몇몇 특종(?)들이야 자신이 정치도 하고 전투도 합니다만...
대표적인 전략가로는 육손이나 만총, 이전 등을 들 수 있습니다. 그들은 내정과는 거리가 멀고 전장에서 종사하는 것이 대부분이지요. 하지만 그들이 직접 칼을 들고 싸움을 지휘하지는 않습니다. 또, 그래서는 군의 사기가 높을 수가 없고 큰 숫자의 적을 막아내기란 무리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살수에 휩쓸린 적들이 아무리 많다해도 아직 수나라의 병사는 배가 넘었습니다. 그런데 후방에서 급하게 끌어모은 고구려군이 그 배로 많은 병력들을 물리치려면? 당연히 장수의 용맹이나 용병술이 빛을 발휘하는 것이죠. 제갈량이나 기타 문관들이 적은 군사로 많은 군대를 물리친 적이 있다고는 하나
어느 정도 상대가 될 법한 머릿수가 가춰져있고 또 물리치더라도 '전멸'까지는 시키지 못합니다. 그런 기적적인 짓거리는 대부분 무장들이 앞장을 서지요. 유수구의 감녕이라던가, 합비의 장료라던가... 수십배, 수백배 되는 적진을 헤짚으며 적들을 격퇴하는 건, 문관들의 배짱으로는... 제 생각엔 힘들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