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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널을 지나 환희의 건어물 시장을 보며
이 승전 / 경파
광주 양동 市場은 농식품부터 수산물은 물론 품과 까지 호남의 대표적인 시장이다.
조선시대는 무성한 습지대여서 이곳에는 크고 작은 샘들이 많아 이름을 샘물이라 부르기도 하였으며 일제 강점기 때는 이라고 불렀다.
1928년을 전 후하여 광주 川(천)가에는 큰 과 작은 장들이 여기 저기 들어섰는데 해방직후 모든 장을 합쳐 어질고 순한 마음으로 살아가라는 의미로 양동으로 바뀌어 부르기 시작하였다.
1969년 시장으로 출발한 양동은 지금까지 변함없이 전통시장으로 이어가고 있다.
100여 년 전 맥을 이어온 시장은 여러 물품 중 6번째로 건어물시장을 분류하여 별도의 시장을 형성하고 목조 건물로 설계하여 바깥쪽은 물건을 진열하여 소매 할 수 있게 만들고, 안쪽은 살림을 할 수 있는 주거지를 만들었다. 지금은 주거 공간이 창고 개념으로 전환하였을 뿐 일부 건물은 원형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시장 형성은 농어촌에서 생산된 물품을 상인들이 조금씩 사 가지고 와서 가게 앞에 펴 놓고 소매를 하였으며, 가난에 몸부림쳤던 부인들은 머리에 이고지고 이 골목 저 골목 돌아다니며 행상을 시작하였다.
지금도 그때의 습관이 남아 간혹 행상하는 사람을 볼 수가 있다.
지구 온난화와 기술이 향상되어 모든 지역이 양식이 가능하지만 옛날에는 완도 지방을 중심으로 남해안 지방만 청정지역으로 수온이 적합하여 발육이 잘 되였다. 김도 송. 죽. 매. 로 분류하여 일본으로 전 량을 수출의 호황기를 맞아 김도 완도 김 미역도 완도미역 멸치도 완도멸치 하며 상품화가 되였다.
1970년을 맞이하면서 물량이 많아져 수협이 관장하고 경매를 시장인 양동에서도 주산을 흔들어 공개 입찰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때 아는 지인이 투자주를 등에 업고 위탁 업에 손을대 돈을 많이 벌어 사장이 되여 잘살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뜻밖에 1984년 서울 결혼 예식장에서 10여년 만에 광주에서 잘 나간다는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예식장이 끝나고 조용한 찻집에서 정담을 나누는 순간 명함을 내민다. 그리고 서울 오는 길에 동원식품 대리점 관계로 화사에 갈일이 있어 혹여 돈이 부족할 줄 모르니 돈을 빌려달란 부탁을 하고 바로 송금하겠다한다.
의심할 여지가 없어 쥐꼬리만 한 월급을 즉시 송금하겠다하여 빌려주웠다. 그러나 소식이 없자 궁금하여 광주를 내려갔다. 동업하였던 투자주가 개인 사정이 있어 그만 두게 되여 형편 이야기를 하면서 동업을 권장한다.
나의 직업과는 전혀 다른 길이여서 망설이다 좋은 사업인 것 같아 마음이 끌려 결정을 하였다.
직업을 전환하고 새로운 사업을 처음 시작하여보니 어려운 일이 했다. 수협에서 내수시장과 가격 차이가 벌어지자 검문소 마다 수협의 차로 가로 막아 수산물은 이 아니 된다면서 일제 강점기 때 있던 유통 규정을 적용하여 시켰다. 상인들은 차를 밀어 가기도 하고 몸싸움이 비일비재하였다.
생산자가 수협에 항의하고 특별한 규정이 없어 수협은 막을 수가 없었으며 전국 상인들이 모여드니 수산물 역시 충청도, 전북, 전남 모든 지역에서 들어와 시장 좁은 골목길은 돌아 설 틈조차 없었으며 생산자가 집에 갈대는 옷이면 옷, 보약이면 보약, 한 보따리씩 싸가지고 가서 양동의 다른 품목도 호황기를 맞이하였다.
시장이 번창하니 말을 사면 종을 데리고 싶은 속담같이 건어물은 부피가 커서 너무 가게들이 협소하여 외부에다 창고를 얻어 장사를 해보지만 너무 번거려워 이 어려움 속에서도 집 주인들은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해마다 임대료만 올리느라 갑질을 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리듯이 반발이 시작하였다.
집 세를 절반으로 내려주지 안으면 넓은 곳으로 이사 가겠다고 정식 건의를 했다. 그러나 집 주인들은 어디 한번 가봐라 하고 배짱을 부린다.
몇몇 위탁인이 화가 치밀어 광주시청에 건의해 보았지만 예산이 없다는 이유로 반응이 없자 추진위원을 결성 3인 공동 대표를 선정하였다
양동 가까운 장소는 찾을 수가 없어 풍암동 광주시에서 책정한 자동차 부품단지 일부 부지로 옮기려고 결정하고 설계까지 마쳤지만, 양동 집 주인들이 어떻게 시에서 결정한 부지를 건어물이 이사 갈 수 있느냐? 어느 대표가 컨설팀과 돈 관계가 있다는 등 기자들을 동원하여 거짓 투고를 하여 서부경찰청에 불러가 대표들만 서너 차례 조서 받고 결국 무산 되어버렸다.
화가 치밀어 이번 기회에 꼭 이주 하겠다는 신념으로 허허 벌판 중고차 매매 단지로 확정 짖고 부지가 너무 커서 처음엔 직영 계획이였으나 A. B동은 건어물이 C동은 컨설팀이 분양하기로 2003년 계약을 끝마쳤다.
그리고 모든 회원이 올수 있게 기업은행과도 대출 문제까지 의논을 하였다.
순조롭게 땅 고르기 부터 시작하였지만 중간에 2층 개인 화장실 문제 때문에 계약이 파기 직전까지 도달하여 3인 대표를 광주 건어 유통 법인을 결성하고 공휴일에도 감리사와 열심히 지켜보았지만 도면 한 폐지마저 볼 줄 모르는 저로서는 눈뜬장님이지만 이것저것 감독을 하였다.
드디어 2005년 어려운 시련을 넘어 건축이 완성되어 시장님과 사 의장 경찰청장 서구 청장 모든 기관장은 모시고 성대한 준공식을 거행하였다.
매월동 건어유통은 도매 시장으로 자리를 잡고 양동은 소매 시장으로 상호 협력 하여 날로 번성하는 순간 큰 사건이 터졌다.
우연한 컨설팀과 식사 자리에서 C동을 분양을 하여 주라고 어느 책임자에게 거금 10억을 주웠는데, 지금도 분양이 안 되고 있으니 그 돈을 다시 되돌려 받겠다는 것이다.
깜짝 놀랐다. 처음 다른 장소로 옮기려고 할 때도 책임자가 무슨 특혜를 받았다는 집 주인들이 밀고를 하여 몇몇 책임자가 서부 경찰청에 출두하여 두세 번 조서를 받는 사실이 있었기에 건축하면 그때 일이 연상되었다.
나는 경매와 서기까지 겸임하여 운영을 하였기에 시간에 쫓겨 공동 대표라도 경위만 들어보곤 하였다.
만약 그 자리에 동참하였다면 믿음과 신용으로 걸어 왔던 본인은 큰돈을 보고 어떤 처신을 하였을까? 하고 양심을 돌아보는 기회다.
의심스러워 다시 컨설팀과 가장 친한 친구를 대동하고 다시 확인을 하였지만 똑같은 이야기다. 했던 친구에게 확실한 진의를 파악하기 전에는 발설하지 말라고 심신 당부를 하였다.
그러나 사무실도 도착하기 전 같이 갔던 친구가 바람 부는 바람따지에 쌍 나팔을 불어 버렸다. 시장이 갑자기 여기서 수근 저기서 수근 걷잡을 수가 없었다. 그 돈 때문에 분양 가격이 높아 졌다는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아 임시 회의를 소집하여 발설한 사람을 추진 대책위원장으로 선정하였다.
별도의 팀 구성은 하였지만 대표이사로써 책임이 있어 한 번 더 필요성을 느껴 기부 형식으로 얼마를 주라 하였으니 타협을 해보겠다 한다.
그렇다면 누구와 나누워 먹었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연락을 주겠다고하였다. 그 후 소식이 없자 회의를 열어 진행 중 주먹이 오고 가 난투극이 되어 버렸다.
분위기가 험악하여 쌍방 고소가 되었고, 그때의 소득세는 수산물은 면세 사업자로 인정과세로 부가하여 납부하는 시절인데 상항이 급변하니 서로 탈세하였다고 으스렁 되어 이러다가는 시장이 종말이 올 것 같아 밤잠 이루지 못하고 고민하다 설득하여 희사금으로 얼마의 돈을 공증을 받고 상호 소를 취하 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회고를 하여 본다면 처음 공동 대표로 부지를 선정할 때 나는 가게 경매와 서기까지 일을 하여 죽자한들 죽을 시간 여유가 없어 참석 못함이 청백과 믿음의 신용으로 살아온 사람으로 큰돈을 보고 어떤 처신을 하였을까? 하고 되돌아본다, 지금도 어떤 회원은 공동 대표로써 한 푼도 안 먹었단 말은 믿을 수가 없다한다.
추호도 오해 없길 바라며 단, 유감의 후회는 상해죄로 벌금을 물었던 주주께 이사장 자리를 그만두어 일어난 일이라 개인 돈으로 납부 하였단 소식에 미안함을 항시 가지고 있다. 지금은 평온을 되찾아 양동은 소매 시장으로 매월동은 도매시장으로 자리를 잡고 번창함을 지켜보며 흐뭇한 마음이다.
다행이도 기모란 80이 되면서 문학의 길에서 은발의 향기의 한 폐지나마 담게 되여 감사하고, 인생의 후반에서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사방을 살피며 의 삶 낭만의 시간을 보내고자 한다.
끝으로 빛고을건강타운 글쓰기반 회원들과 까꿍 교수님께 감사를 드린다.
2018.경파 이승전
양동시장 흔적을 찾아
이승전/경파
광주 양동시장은 농식품부터 수산물은 물론 祭需品(제수품)과 혼수까지 호남의 대표적인 시장이다.
조선 시대에는 무성한 늪지대였는데 이곳에 큰 샘들이 많아 이름을 샘물이라 불렀고 일제 강전기 한때는 泉町(천장) 즉 우물이 많은 밭두렁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한다.….
1928년 지금의 광주 川(천) 가에는 큰 場(장)과 작은 장들이 들어섰는데 모두 합쳐 해방 직후 억센 시장터를 어질고 순한 마음 자세로 살아가라는 의미로 良洞(양동) 으로 바뀌어 부르기 시작 하였다 한다. 1969년 민영시장으로 출발한 시장은 지금까지 변함없이 전통 시장으로 이어지고 있다.
100여 년 끊임없이 지켜온 시장은 여러 품목 중 6번째로 건어물을 분류하여 별도의 시장을 형성하고 건축을 목조건물로 설계하여 바깥쪽은 물건을 진열하여 팔 수 있게 만들고 안쪽은 살림할 수 있는 주거 공간으로 만들었다. 지금은 주거 공간이 창고 개념으로 전환하였을 뿐 일부 건물은 원형 그대로 유지 되고 있다.
처음 시장의 형성은 농어촌에서 생산된 물품을 조금씩 사서 와 가게 앞에 펴 놓고 소매를 하였으며 가난에 몸부림쳤던 부인들은 머리에 이고 지고 이 골목 저 골목 돌아다니며 행상했다. 그때의 습관이 지금도 남아 행상을 하는 사람들을 간혹 볼 수가 있다.
그때 시골길은 전부 비포장이라 물건을 구입 하려가면 하루 이틀이 걸린다.….
지금은 지구의 온난화와 기술 발전으로 모든 지역이 양식을 하여 생산이 가능 하지만, 옛날에는 완도 지방을 중심으로 남해안 부근만 청정해역으로 수온이 적합하여 발육이 잘되어 김도 송,죽,매로 등급을 하여 일본 수출을 하였기에 그때부터 김도 완도 김 멸치도 완도 멸치 미역도 완도산하고 브랜드가 되어. 지금도 상품화되고 있다.
1970년으로 접어들면서 모든 수산물이 양동으로 모여, 발 없는 말 천 리를 달린다는 말이 있듯이, 서울, 부산. 대구. 강원도 등 각 지역에서 상인들이 모여들어 양동 근처에는 하숙집도 얻기 힘이 들었으며. 좁은 골목길엔 돌아설 틈조차 없었다. 생산자가 돌아갈 때는 옷이면 옷 보약이면 보약 한 보따리씩 사서 간다.….
….
양동시장 부근의 다른 품목도 흥행을 이루워 다른 지역에서 생산된 해산물이 광주로 몰려 수협하고는 입찰 가격 차이가 벌어졌다,動向(동향)을 지켜본 수협은 투기를 시작했다, 일제 강점기에 있든 수산물 유통 규정을 인용하여 검문소마다 搬出(반출) 못 하게 직원을 파견시켰고, 골목을 차로 막고 있었다.
상인들은 저항하며 몸싸움이 벌어졌고 심지어는 지키고 있는 수협 차를 밀어 버리고 가는 일도 비일비재하였다.
어민들이 함께 투쟁하여 특별한 조례가 없어 막는 것을 포기하였지만, 이런 어려움 속에도 집 주인들은 해마다 임대료만 올린다. 돈은 때국놈이 벌고 고생만 죽도록 하여 임대료 조정을 건의한다.….
반응이 없자 몇몇 상인들이 선동하여 추진위원을 구성하고 적당한 장소부터 찾아다녔다, 건어물은 부피가 커서 최하 2000평을 매입하여야 회원을 수용할 수가 있어 적당한 땅 이란 하늘에 별 찾기다.
묘안이 없어 광주시에 협조 요청을 하여 보았지만, 예산이 없다 한다. 할 수 없어 허허벌판 매월동 자동차 매매 단지를 선정하였다.
매입하려니 부지가 5000평이 넘어 처음엔 직영할 계획이었지만 용지가 너무 커 아파트 분양 형식으로 A.B는 건어물이 C동은 건축주가 분양하기로 계약을 하고 2004년 시공을 하였지만 2층 화장실 不(불) 移行(이행)에 계약 취소 직전까지 이르러 총회를 열어 대표 단일 체제로 바꿔 공사가 다시 시작되었다, 공휴일에도 감리사와 함께 열심히 지켜보았지만, 도면조차 볼 줄 모르는 저로서는 눈뜬장님과 다를 바가 없다.
2005년 파란곡절 끝에 광주시장님, 시의회 의장, 경찰서장, 각 기관장을 모시고 준공식을 거행하였다. 축사가 끝나고 인사말에 건어물 만은 광주가 생산의 집산지요, 소비지로 중요한 역할을 하여 지역발전의 한 축이 되겠다는 말을 하고 이 지역에 있는 서부 농수산 공판장과 건어물은 먹는 식품을 취급한 곳이니 50m 거리에 있는 명성환경 쓰레기 소각장을 다른 곳으로 옮겨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대답만 하였을 뿐, 그 후 소식이 없다, 매월동과 양동은 뿌리가 같아 처음엔 의견 충돌이 약간 있었으나 매월동은 도매시장으로 양동은 소매 시장으로 활발하게 제 모습을 찾아가고 있는 순간 큰 사건이 터져 버렸다. 분양한 건설팀이 건축 전 C동 분양을 책임지기로 어느 책임자에게 10억을 지급하였다고 한다. 처음에 믿을 수가 없어 가장 친한 지인을 대동하여 확인한 결과 똑같은 말이다.
깜짝 놀랐다. 처음 옮기고 싶은 욕망에 시에서 자동차 부품 단지로 책정한 땅을 그쪽이나마 가고 싶어 공정한 분배를 하고자 특정 지역은 통제하였음에도 불구 모 책임자가 컨설팅과 짜고 도면도 공개되기 전 분양 받았다는 소문이 오고 가 양동 집 주인들이 알았는지 이사를 막기 위하여 서부경찰서에 투서하여 책임자가 3번 이상 조서를 받고 ,무산되었던 그때가 떠 올랐다.
본인 이야기를 듣고 싶어 발설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였건만 사무실에 가기도 전에 바람 부는 바람 따지게 쌍나팔을 부러 버렸다. 갑자기 시장이 무슨 난이 일어나듯이 그 돈 때문에 분양가 가 높아졌다고 일 보는 놈들 모두 도둑놈이라고 걷잡을 수가 없어 찾아가 사실관계를 물어보았지만 사실무근이라 펄쩍 뛴다….
주주들의 흥분을 진정시키고 개인적으로 만나 건축물의 雅致(아치)를 설치하고 홍보에 사용하겠다고 얼마를 주라 하였더니 타협을 하여 보겠다 한다, 그렇다면 어느 누구와 나누어 먹었다는 말이 아닌가? 연락하여 주겠다하였지만, 소식이없자, 주주 회의를 소집하여 고발하기로 하는 날 주먹이 오고 가 진단서가 첨부되어 쌍방 고소를 하게 되었다.
와중에 수산물은 면세 사업자로 세금은 알아서 인정과세로 내는 시기였는데 서로 트집 잡아 세금 문제까지 병행하였다.
나는 대표이사로서 일주일은 잠 못 이루고, 이러다가는 시장이 끝날 것 같아 고민하다 상호 합의를 이루어 공증을 받아 몇억에 고소를 취하하여 평온을 되찾았다.
그 후 건어물시장은 활발하게 도매시장으로 발전하였지만 ,일부 회원들이, 모두 밝혀졌음에도, 한 푼도 안 받았다는 것은 이해가 안 된다는 사람도 있었다, 다행히도 은발의 향기 한 페이지나마 양심과 믿음을 호소하게 되어 감사를 드리고 조용히 시장을 마무리 하고, 남는 시간은 허용하는 순간까지 이웃과 더불어 지낼것을 다짐하며 되돌아본다. 2019년 시끄러 왔던 시장을 도라보며. 경파 이승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