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6.01
약학과를 졸업하고 종로에 약국을 경영하여 성공한다.
그의 집안은 불교집안이었고 약을 팔아 그 돈을 가지고 도봉산 기슭에 절을 지었다. .
그의 약국이 유명해지고 전국의 약사들이 팔고 있는 약을 나눠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60 약국에 약을 제조해 조달했다.
그러나 그로 인해 무허가 제약으로 보건범죄단속법에 걸렸다. 그는 전국 절을 찾아다니며 도피생활을 했다.
그러다 양산 통도사로 도망갔었는데, 이곳에서 인생을 ?내고 싶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6개월전 자신에 관한 신문기사를 발견하고 자신의 억울한 형편이 생각되어 울었다.
그런던 그의 입에서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왔다. 그리고<왜 자기가 그곳에서 그 신문기사를 보게 되었을까?> 생각한다.
그는 눈물 흘리는 가운데 기도하며 인생처음으로 그곳에서 하나님을 영접하게 되었다.
그 리고 자수를 하고 법의 처벌을 받고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한다.
그리고 성경공부를 라고 구원의 확신을 갖고 기도가운데 새로운 사업을 계획한다.
그리하여 ‘참존화장품’이 탄생하였다.
그는 십일조를 제대로 하자 놀라운 축복을 체험하게 되었다.
그는 여러 도움이 필여한 단체, 개척교회 등에 후원금을 보내고 있다.
참존화장품은 창업 15년만에 화장품업계에 주목받는 기업으로 성장하고 있다.
2. 이삭토스트 대표 - 김하경 집사
조그만 가게로 시작, 이제는 900여개의 가맹점을 둔 기업의 CEG,
순전히 다른 어려운분들을 유익을 위한 기업의 확장
1995
년 남편의 병으로 가족의 생계를 위해 조그만 토스트점을 열었다. 그리고 토스토 음식에 대해 지식이 없던 그는 하나님께 기도로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리자 한 여성 고객이 “아줌마, 소스를 이렇게 한번 만들어 보세요. 그러면 훨씬 맛있을 거예요” 한 말을 듣고 새롭게 소스를 만들어 성공하여 현재의 이삭토스트 소스가 탄생되었고 장사가 잘 되었다.
2000년에 남편이 병에서 회복되자 가게를 처분하고 대전으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전도시 알게된 어려운 처지에 있는 분을 돕기위해 8000만원 들여서 토스트점을 차려주었다. 이때 관청등록에 필요한 상호로 기도가운데 이삭토스트이라고 지어주었다. 이것은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라는 말씀에 기초한 것이다. 그 후 그는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2호점과 3호점을 내어서 일하도록 도와주었다. 아렇게 도와주고자 세운 것이 지금은 전국에 900개의 체인점이 있다. 그리고 프렌차이즈 체인점을 운영해 각 곳의 지점이 동일한 값으로 원료를 공급해 받도롤 해주고 노우하우를 나눠주고 있다.
그는 이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축복과 기쁨 속에서 삶을 살기 바란다.
그는 학교시절에 성경을 읽다가 욥기를 읽고 영적인 눈이 뜨이어 신앙생활을 시작하였다.
이 이삭토스트 가맹점을 통해 여러가지형태로 현재로 도움이 되고있다. 중간에 다른 분에게 경영을 넘기고 쉬려고 했었으나 전 가맹점들이 반대하였다. 그런중에 기도가운데서 하나님은 그에게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지 말라 하셔서 다시금 운영을 맡아 법인체로 등록을 하였다.
그는 일이 없는 다른 사람들에 할 일을 창출해 주는 것이 최고의 자선임을 깨달았다고 하였다
4. 박성철 장로(신원그룹 회장)의 간증
박 성철 회장은 전남 신안의 한 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재산 탕진르로 가난하여
먹을 것이 없는 가정에서 자랐다. 친구 두명를 따라 무료로 공부한다고 하는 목포의 중앙국립감화원에 갔다. 지금의 소년원 비슷한 곳이다.
어느날 선생님이 불러 소년 박성철을 전도했다. 초등학교를 다니면서 학교공부후 동네에서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를 하기도 했다. 그리고 산에서 소나무를 붙잡고 "어려울때
승리하여 민족위해 큰 일꾼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서울로와 신문사에서 교정일을 하다가 기자로서
국회취재를 하다고 같은 고향 출신 김대중 의원의 눈에 뛰어 공보비서도 했다. 그 당시 그는 술담배를 하고 주일을
안지키고 하나님을 멀리했다. 71년엔 국회의원 출마를 지원했으나 유진산 파동으로 공천을 못받았다.
그는 그후 보세공장 들어가서 힘들게 일하다 건강을 상했다. 그리고 쓰러져 병원에 입원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일어났다. 이때 하나님을 소홀히 한 것을 회개했다. 그리고 하나님이 도와 주시면 일년에 백명이상 전도하고 100개 이상 교회를 세우며 100 명이상의 신학생 뒷바라지할 것을 서원했다. 그 나이 34세때였다. 회사문제와 병등 여러 어려움을 함께하여 주신 것 모두 다 감사제목이라며, 하나님께서는 36년동안 새벽기도를 한번도 안빠지게
하셨다고 간증했다.
기사: 석봉토스트의 김석봉 장로간증
김 장로는 전북 정읍 내장산 기슭에서 먹을 것이 없는 가난한 불교 가정에서 6남 2녀의 하나로 자랐다. 그리고 양자로 갔다가 싫어서 그냥 돌아왔다.
가정부 일하러 도시로 갔던 누나가 초등 3학년때 처음으로 그에게 예수님을 전했다. 집안에서는 난리가 났다. 불교 가정에 기독교를 들였다고 교회를 데리고 간 누나는 매를 맞았다. 그러나, 그는 교회에 가서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했다. 초등학교 졸업후 다른
형제들처럼 돈벌이에 나선다. 자동차 정비
공장에 취직했고 그 후 인천에서 합판공장, 조선소. 컨테이너 공장, 과일행상이며 막노동, 용접공 등을 했지만 학력때문에 승진이 안되었다. 그런가운데도 열심히 교회를 다녔다. 그리고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였다. 그리고 검정고시로 중학교, 고등학교 졸업하고 87년에는 신학대학에 진학했다. 그리고 기도 응답으로 그의 온 형제 자매들과 부모님들은 다 신앙으로 돌아왔다.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어린이선교사로 사역하고 생계를 위해 노점상으로 토스트점을 한다.
97
년 처음 시작해 3년 간 하다 허름한 옷을 벗어버리고 대신 요리사복을
입었다. 얼굴을 가리기 위해 썼던 모자를 벗어버리고 요리사 모자를 썼다. 그리고 손님들을 위해 환하게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그는 중국어, 영어 일본어를 손님 대접을 할수 있는 기본 대화를 구사랄 수 있게 익혔다. 그리자 국제적으로도 알려진 토스트점이 되었다.
“2002
년은 저에게 특별한 해였어요. 위암 급성이라 위험했다. 벌써 위의 절반이 암세포로 뒤덮여 있었다. 그는 생명은 하나님께 달린 것이니 고아원에 가서 토스트를 구워주기로 했던 약속을 지켰고 그 날 저녁 탈북자를 대상으로 한 강의약속도 지켰다. 다음날은 주일이라 교회에 갔다. 그리고 월요일에 입원했다.
그해 12월, 위의 반을 잘라내는 대수술은 무사히 끝났고 2003년 6월 검사결과는 정상으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