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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 아림사 선용스님 | |
![]() 거창을 가면 거창보다 아림(娥林)이라는 이름을 더 자주 만난다. 아림초등학교, 아림로, 아림 숲 등등. 거창의 옛 별호(別號)였다는 아림은 아림사(娥林寺)라는 절 이름에서 유래했다. 몽고 전란 때 불탔다는 아림사의 흔적은 이름과 함께 지금 거창 시내 한복판에 서있는 석탑에 남아있다. 그리고 새 절 아림사가 그 맥을 잇고 있다.
신도들 절 한 번 시키려면 나는 열 번을 해야 한다
“도제양성 역경은 포교 기반위에 성립
포교 잘하면 우수한 수행자 들어올 것”
거창 읍내에 자리한 현재의 아림사는 지은 지 10년을 약간 넘긴 신생 사찰이지만 거창을 대표하는 사찰로 발전했다. 공무원, 교사, 학생들은 아림사에서 법회를 보고 아림사를 고향으로 여긴다. 절을 창건한 아림사 주지 선용스님 때문이다.
유달리 춥고 눈이 많았던 올 겨울 추위가 한 풀 꺾이기 시작하던 지난 2월23일 거창은 봄날처럼 따뜻했다. 전날까지 영하를 맴돌던 수은주는 하루 새 18도를 가리킬 정도로 기온이 급상승했다. 읍내에서 약간 벗어난 거창 삶의 쉼터에는 어렵게 찾아오는 봄을 맞이하려는 듯 많은 주민들이 나와 운동을 하고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관장 선용스님은 이날도 삶의 쉼터를 둘러보며 이용객들과 인사를 나누고 불편함이 없는지 살폈다. 스님을 대신해 삶의 쉼터를 관장하는 사무국장 일광스님으로부터 일과를 보고 받고 아림사로 향했다.
길 위에도 가게 간판에도 온통 아림이다. 아림사는 작지만 알찬 느낌을 주는 사찰이다. 이름만 옛 절 아림사로 이은 것이 아니다. 거창의 불교는 아림사의 불교, 선용스님의 불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스님이 거창과 인연을 맺은 지 30여 년이 됐다. 그냥 맺은 인연이 아니다. 거창포교당 주지로 20년 가까이 재직하며 어린이 청소년 포교에 헌신했다. 서울, 부산 등 대도시에서도 막 도심 포교운동이 움트기 시작하던 1980년대 초다. 스님은 아이들을 모아 불교를 가르치고 함께 뒹굴며 놀았다. 아이들에게 포교당은 공부방이며 놀이터였다. 심지어 서로 사귀는 남녀 학생들도 부처님 앞에서 밀어를 속삭였다.
아이들이 자라 서울로 부산으로 대구로 가서 사회 지도층으로 자라났다. 많은 아이들이 거창에 남아 고장을 지키는 역군이 됐다. 그 아이들이 아이들의 부모가 돼 지금 아림사를 이루고 있다. 삶의쉼터 사무국장 일광스님과 금강산 신계사 도감을 지낸 제정스님이 거창포교당 학생회 출신 수행자다. 제정스님은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거창포교당 학생회 출신 중에서 제정스님, 일광스님 등 비구 5명 비구니 7명이 있다. 이 중 3명이 상좌로 들어왔다. 학생회 출신들이 지금 아림사의 중추가 돼있다. 교사, 공무원, 사업가 등 다양하다. 한 때 거창포교당 학생회 출신이 대구 대불련을 주도할 정도로 수가 많았다.”
당시 거창에서 서울로 가기 위해서는 김천으로 버스를 타고 가서 기차로 갈아타야하는 오지였다. 시골 작은 절이라서 돈 나올 데도 없었다. 하지만 스님은 아이들을 데리고 서울 놀이공원 구경을 시키는 등 아끼지 않고 보살폈다. 여름이면 해인사 수련회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아이들은 성철스님 뵙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 3000배를 하는데도 많은 아이들이 수련회에 참석했다. 성철스님을 뵙기 위해서였다.” 성철스님도 아이들을 좋아했다. 3000배를 마치고 스님을 친견하면 “너거 3000배 했나”하며 묻고는 “찬불가 함 불러 바라”며 아이들을 세웠다. 스님은 “큰 스님께서 아이들 찬불가 소리를 참 좋아하셨다’고 말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스님은 아이들과 함께 땀 흘리며 3000배를 했다. “상좌들에게 ‘신도들로 하여금 절 한 번 하게 하려면 나는 10번을 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나 역시 신도들과 아침 저녁 함께 기도하며 땀 흘린다. 스님들이 신도와 함께 할 때 감동을 받고 따르게 된다.”
스님은 거창을 지키는 한편 총무원과 해인사에서 여러 차례 소임을 살았다. 1980년대 초부터 시작한 총무원 소임은 교무국장, 규정국장(지금의 호법국장), 사회국장을 두루 거쳐 2002년에는 총무부장과 총무원장 권한대행까지 맡았다. 해인사에서도 핵심 소임을 모두 거치고 주지 직무대행까지 역임했다.
그 과정에서 여러 차례 대처(大處)의 큰 절 주지로 나갈 기회가 있었지만 거절했다. 1980년대 중반 도심 포교당 운동이 시작될 무렵에는 총무원에서 소임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이왕이면 서울에서 포교당을 하라는 제안도 있었다. 하지만 스님은 거창과 스님을 바라보는 아이들 곁을 떠나지 않았다.
“상좌들이 나더러 ‘바보’라고 한다. 비록 대행이지만 총무원장과 해인사 주지까지 역임하고 그 많은 중요 소임을 살았으면서도 큰 절 주지 한번 못한 것을 두고 하는 말인 줄 안다. 실제 좋은 절 주지를 갈 기회가 여러 차례 있었다. 총무원 소임을 살면 다른 기회도 자꾸 생긴다. 관리 등 소위 말하는 높은 사람들과도 자주 만나게 되고 돈도 생긴다. 몰라도 되는 정보도 많이 알게 된다. 그런데 공부하는 수행자가 그 분위기에 젖어들면 안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다른 거창한 이유는 없다. 그냥 그렇게 살아서는 안된다는 생각에다 거창포교당에서 평생 살다가 죽어야겠다고 마음 굳혔기 때문에 다른 절은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 스님이 아림사로 온 것은 1998년이다. 종무회의 때 왜 거창포교당 주지를 한 사람이 오래하냐는 이야기가 나왔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스님은 곧바로 방장스님을 찾아가 자리를 내놓았다. 아무 대책 없이 나와 한동안 이곳저곳을 물색하다가 아림사와 인연을 맺었다. 포교당 신도들이 오지 못하도록 포교당에서 오면 기도 축원도 해주지 않고 등도 못 달게 했다. 섭섭하다며 울었지만 고집을 꺾지 않았다. 2년이 넘었는데도 신도들 역시 굽히지 않고 발길을 끊지 않자 ‘금지’를 풀었다.
아림사 불사, 신도 포교를 하면서 지난해 말 부터는 삶의쉼터 관장을 맡아 지역 복지에 나서고 있다. 늘 포교 현장을 떠난 적 없는 스님의 실천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스님은 포교가 최우선이 돼야한다고 강조한다. “아림사와 같은 절은 30년 후면 지킬 사람이 없어 도태될 것이 뻔하다. 포교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그렇다는 말이다. 우리 종단 3대 지표 중 도제양성과 역경은 모두 포교 기반 위에서 성립된다. 포교를 잘하면 우수한 수행자들이 다수 들어올 것이다”는 스님은 “수행은 곧 실천이다. 병원에 가서 환자들 손 한번 잡아주고, 복지관에서 어르신들과 눈을 마주치며 인사를 나누는 것 등이 수행이며 포교”라고 강조한다.
“가사정대경진겁(假使頂戴經塵劫) 신위장좌편삼천(身爲狀座三千) 약불전법도중생(若佛傳法度衆生) 필경무능보은자(畢竟無能報恩者) 머리 위에 경전이고 몇 겁을 산다 해도, 부처님 제자 되어 삼천세계를 돈다 해도, 부처님 법 전하여서 중생제도 못하면, 필경에 부처님 은혜 갚을 수 없네.” 스님이 늘 강조하는 가르침이다.
스님의 포교는 그림자며 물 같다. 소리 없이 스며 들어가 함께 어울린다. 거창에서 만나는 스님은 친구 같고 선배 같다. 복지관 어르신들이 친근하게 다가와 인사한다. 병원에서 환자들과 스스럼없이 만나 위로하고 손을 잡는다. 길흉사(吉凶事)를 빠트리지 않고 찾는 친근한 이웃이다. 사람들이 막걸리를 주면 막걸리를 마시고 고기를 주면 고기를 먹는다. 신도가 중심이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도 말씀하셨다. 신도들이 주면 주는 대로 먹으라. 단, 음식에 욕심을 내지마라. 선용스님 역시 주는 사람 성의를 우선 생각하는 수행자다. 어느 스님이 말했다고 한다. “선용스님은 종비생으로 부처님 은혜는 갚은 것 같다.”
거창=박부영 기자 chisan@ibulgyo.com
■ 선용스님은…
1946년 경남 남해에서 태어나 1962년 해인사에서 정도원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도봉산 망월사 선원에서 수선 안거했으며 해인사 강원 대교과와 동국대 승가학과를 나왔다. 1981년 총무원 규정국장을 시작으로 사회국장 교무국장 중앙종회의원 초심호계위원 총무부장 총무원장 권한대행 등을 역임했다. 1983년부터 1997년까지 거창포교당 주지를 지냈다. 해인사 주지, 총무원장 표창을 받았다.
[불교신문 2603호/ 3월6일자] 2010-03-03 오전 10:56:29 / 송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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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거창은 제가 태어난 곳입니다. 거창 읍내에서 태어나, 한 살 때까지 있다 돌 지날 무렵 아버님께서 부산으로 발령이 나서 저도 함께 갔다고 하지요...
그래서 거창은 고향이긴 하지만, 기억이 하나도 없어요. 그렇지만 아버님 떠나신 후 5년 뒤 어머님 떠나실 때까지 비교적 자주 내려갔지요. 지금은 고속도로가 뚫려 함안 가는 길에 거창으로 바로 들어가지만, 그 때는 김천에서 버스를 바꿔타고 들어갔지요. 거창 가는 길 차창 옆으로 펼쳐지는 시골을 바라보며, 이 길을 수없이 다니셨을 어머니를 생각했답니다. 그 때는 포장도 안된 길이었지요. 1976년 청년이 된 후 처음으로 고향 갈 때도 비포장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절 하나 세우는 게 평생 서원이셨습니다. 그것도 폐사된 절을 하나 만나 꼭 복원시키고자 하셨는데, 서원을 못 이루시고 그만 가셨지요. 법당 하나 세울 돈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꼭 간직하셨는데, 그리고 그 서원이 이뤄질 뻔도 했는데, 어리석은 자식들 탓에 그만 서원을 못 이루고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고이 아껴두신 돈은, 그만 자식들 차지(?)가 되어 이리저리 흩어지고 말았고...
어머니의 그 서원을 기억하고 있는 자식들은 6형제 중에 과연 몇 분이나 게시는지...
이제는 모두 중산층 이상은 되는 처지라, 형제들이 마음을 모으면, 법당 하나는 그래도 이룰 수 있을텐데, 무심한 세월만 흘러갑니다...
지극한 원은 생명도 연장됨을 보았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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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마하반야바라밀() 나무아미타불()
나무마하반야바라밀........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