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팩backpack
유 병 덕
2015harrison@naver.com
오랜만에 공항 문이 활짝 열렸다. 수많은 이가 삼삼오오 공항으로 몰려든다. 수화물 부치는 창구에 짐 꾸러미가 산더미 같다. 어떤 이는 이민 가려는 듯 짐 보따리가 꽤 크다. 우리 가족은 조그만 백팩을 하나씩 메고 바로 탑승했다. 봄비가 촉촉이 내리던 길을 달려왔는데 하늘에 오르니 딴 세상이다. 하얀 솜털 구름 사이로 비행기가 헤집고 나간다. 손녀는 구름이 예쁘다며 연신 사진을 찍고, 손자 녀석은 스쳐 가는 구름을 잡으려 안간힘을 쓴다. 구름 속을 날던 비행기가 섬에 내려놓았다.
섬은 하루해를 삼키고 있었다. 붉게 물들어가는 서녘 하늘에 해가 지자 땅거미가 내려앉는다. 공항 수화물을 찾는 곳에 사람들이 북적북적한다. 컨베이어벨트 주변에 도열하여 자기 짐 찾느라 눈이 바삐 움직였다. 뒤꽁무니에서 슬슬 따라가다 보니 앞에서 어떤 이가 허둥댄다. 짐이 모두 빠지고 수화물 컨베이어 벨트가 멈추자 자신의 짐이 없다며 당황해하는 표정이다. 불현듯 부에노스아이레스 공항에서 겪었던 내 모습이 스쳤다.
한때 외국을 밥 먹듯 들락거렸다. 국제교류단체를 방문하거나 무역사절단을 이끌고 다녀야 했기 때문이다. 지구의 반대편에 있는 남미를 다녀오는 일정이었다. 직항이 없어 파리노선을 택했는데 바로 이어지지 않아 공항에서 댓 시간 노숙하다가 남미행 비행기에 올랐다. 내 짐이 바르게 옮겨 실렸는지 궁금했으나 공항 자동수화물처리시스템으로 움직여서 알아볼 재간이 없었다. 기내에 들어서니 낯선 이들뿐이다. 장거리 비행이라 조금 넓게 앉아보려고 비상구 좌석을 어렵사리 구했다. 자리에 앉아 지도를 보니 갈 길이 아득하다. 영화를 몇 편 보고 기내식을 여러 번 먹었는데도 대서양 상공에 떠 있다. 허리가 아프고 오금이 저려와 안절부절못하는데 기내 방송이 흘러나온다. 이윽고 부에노스아이레스 공항에 떨어졌다.
손가방 하나 달랑 들고 공항을 빠져나가는 이가 부러웠다. 나는 큰 보따리 두 개를 찾아야 했다. 남미 여행이 처음이라 노심초사하여 싼 짐이다. 하나는 상품을 전시하도록 도와준 이에게 인사할 선물이고, 또 다른 하나는 내가 보름간 남반부에서 입을 옷을 챙긴 짐이다. 공항 수화물 찾는 곳에 가 보니 인산인해다. 그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 짐을 찾느라 한 시간가량 서성였다. 대부분 짐이 빠져나가고 수화물 컨베이어벨트가 멈추더니 바로 다음 비행기 수화물 안내 문자가 뜬다.
신경이 곤두섰다. 환승을 여러 번 해보았으나 처음 겪는 일이다. 홍콩에서 갈아타고 아프리카로 가거나 시애틀에서 갈아타고 미국이나 캐나다 도시를 다녀보았으나, 짐 보따리를 찾지 못한 적이 없었다. 황급히 공항 수하물 안내 창구로 가서 어눌한 영어로 물으니 알아들을 수 없다는 표정이다. 그들이 사용하는 에스파냐어는 한 마디 못하는 벙어리다. 답답한 마음에 종이에 몇 자 적어 도움을 청해보았으나 모르겠다는 답변뿐이다.
짐 때문에 계획한 일정을 취소할 수 없는 노릇이다. 빈손으로 공항을 나와 예약한 호텔전시장으로 달려가 보니 무역사절단 일행이 와 있었다. 코트라 직원의 협조를 받아 현지 바이어와 연결해주고 한숨 돌렸다. 마침 국립외교원에서 알게 된 주아르헨티나 대사가 찾아와서 격려다. 고마운 일이다. 그는 점심시간이 되자 인근에 재키 클럽으로 나를 데려갔다. 유럽풍의 고급 식당이다. 부끄러웠지만, 공항에서 짐을 찾지 못한 일을 이실직고했다.
“여행길은 인생길과 같죠. 짐이 가벼울수록 좋아요.”
그는 와인을 따라주며 웃는다. 그러면서 지구촌 어디를 가나 사람 사는 세상이라며 빈 몸으로 다녀도 아무런 문제가 없단다. 내가 짐을 찾지 못해 불안해하니 걱정하지 말라며 한 달 후쯤 집으로 돌아갈 거라고 안심시켰다. 그는 그곳을 떠나올 때 쇠가죽으로 만든 작은 백팩 하나를 건네주며 가볍게 여행하라고 덧붙였다. 아르헨티나를 떠나 칠레의 산티아고와 브라질의 상파울루 일정을 무리 없이 마치고 돌아왔다.
그 대사의 말이 맞는다. 부에노스아이레스 공항에서 찾지 못한 짐이 혼자서 세계 일주를 마치고 녹초가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짐을 열어보니 성한 게 하나 없어 모두 버렸다. 하나 얻은 게 있다. 버린 짐 보따리 무게만큼 삶의 고뇌의 무게를 내려놓았다. 숨겨놓았던 비밀이다. 노후에 도움이 될까 하여 조그마한 상가와 오래된 주택을 사 놓았었다. 상가 임차인은 장사가 되지 않는다고 임대료를 내려달라 하고, 옛날 집에 사는 이는 춥다며 보일러를 갈고 천장을 낮추어달라고 아우성쳤다. 배보다 배꼽이 커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끙끙 앓다가 헐값에 넘겨버렸다. 그 순간은 아쉬웠으나 지나고 보니 가슴에 뭉친 응어리가 풀린 듯 마음이 가볍고 후련하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젊은 날 아등바등하여 쌓은 명예나 부가 부질없어 보인다. 그 순간은 눈으로 지켜보아 감동을 줄지 모르나 지난시간의 순간은 머리로 읽어 감흥이 없다. 오히려 짐이 되어 나의 자유를 빼앗는 것 같다. 그 대사의 말처럼 가볍게 돌아다녀야 세상이 보이고 즐겁다. 짐 보따리를 바리바리 꾸려간 이들은 애면글면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장소를 옮길 때마다 텐트를 펴고 접고 짐을 풀고 싸느라 바빴다. 또 쓰레기를 분리하고 처리하느라 난감해하는 표정이었다. 나는 백팩 하나 메고 구름처럼 바람과 함께 날아다녔다.
하늘 아래 내가 받은 가장 커다란 선물은 오늘이다. 오늘따라 아침 햇살이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붉게 물든 아침노을 사이로 햇살이 나오라고 손짓한다. 물 한 모금 백팩에 넣어 메고 사부작사부작 걸어 길을 나선다.
첫댓글 올려주신 수필 <백팩>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향기 높은 작품을 읽으며 몇 번 다녀온 해외 여행을 떠올렸습니다.
자주 좋은 수필 올려주셔요
졸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유수필가님.
올려주신 작품 "백팩" 잘 읽었습니다.
여행을 소재로 한 글인데도 예사글이 아닙니다.
문장이 치밀하고 구성력도 좋습니다.
입맛이 당기는 매력이 있습니다
유수필가님과 함께 여행을 하며 세상구경을 하고 싶어지는군요.
짐을 다 내랴 놓고 백팩 하나만 들고 떠나고 싶습니다.
다른 이들에게 읽어보라고 꼭 권하고 싶은 작품입니다.
교수님
그동안 문학에 대하여 지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문학에 문외한이라 글을 쓰려고 보니 어려운 것 같습니다. 문학개론부터 읽으며 기초를 다지고 있습니다. 모든 꽃이 봄에만 피는 줄 알았습니다만, 여름에 피는 해바라기도 있고 가을에 피는 코스모스도 있고, 겨울에 피는 동백꽃을 보며 힘을 얻습니다. 거듭 감사인사 올립니다.
유병덕 수필가님을 응원합니다.
유수필가님은 이미 문학에 입문하셨고
특히 수필 문학에 대해서는 머지않아 일가를 이루려는 중요한 시점에 서셨습니다.
노력도 많이 하시고,특히 바탕이 튼튼하셔서 향기 나는 수필로 문단을 뜨겁게 달굴 준비가 되신 분입니다.
더욱 열정을 가지시고 좋은 작품을 쓰셔요.
저는 유수필가님과 함께 문학 동지가 되어 걸어가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