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4주간 화요일 - 성 아타나시오 축일 (5월 2일)
전례독서: 요한 10:22-30
부활의 생명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착한 목자와 양떼>의 관계는 우리 신앙의 근본을 되새겨 줍니다. 오늘 복음 본문을 살펴보면,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못마땅해 하고 불편해하는 기색이 역력해 보입니다. 주님은 평안을 주시는 분이기보다는 ‘마음을 졸이게 하는 분’으로 등장합니다.
불편함과 평안함은 종이 한 장 차이입니다. 신뢰하면 그 사람을 만나는 일이 평안합니다. 자신을 내세우기보다는 그 사람에게 기준을 두기 때문입니다. 신뢰를 주지 않으면 스스로 불편합니다. 자신을 기준으로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같은 사람이라도 신뢰에 따라 달라집니다. 신앙은 불편을 무릅쓰고 신뢰하는 일입니다. 그때 신앙은 성장하고 성숙합니다. 다시 말해, 자기 편한 대로 신앙생활을 하면 신앙이 깊어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잠시 불어오는 바람에도 쉽게 흔들리거나 넘어집니다.
오늘 주님 말씀을 되새겨 듣습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라온다”(10:27).
첫째, 신앙인은 ‘듣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교회의 가르침을 듣는 사람입니다. 듣지 않고는 배움이 없습니다. 가르침을 듣고 배우지 않고서는 주님의 말씀인지 유혹하는 사탄의 말인지 구별할 수 없습니다. 이때 주님의 말씀은 쓰고 불편하지만, 사탄의 말은 편안하고 달콤합니다. 주님과 교회의 가르침을 알아들으려면 계속 훈련하고 익숙해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취향과 감정이 나서서 스스로 주님인 체합니다.
둘째, 주님은 누가 듣는 신앙인이지 ‘아십니다.’ 온 마음을 다하여 듣는 사람과 듣는 척하는 사람은 다릅니다. 금방 보기에는 표가 나지 않아도, 주님 보시기에는 대번에 드러납니다. 한 사람은 말씀과 가르침을 되새기고 되씹어서 마음에 새깁니다. 그의 언행은 주님 뜻에 맞추려 언제나 조심스럽습니다. 다른 사람은 자기 생각에 맞는 말만 골라 들으려 합니다. 그것이 충분하지 않으면 불평합니다. 그의 언행은 수다스럽고 요란하지만, 결국은 자기 자랑입니다.
셋째, 신앙인은 ‘따르는’ 사람입니다. 따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만 앉아서 발을 거는 사람이 있습니다. 교회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 그 자체입니다. 그러니 주님처럼 행동하고 주님처럼 살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살아있는 몸이니 앞으로 걸어 나가야 합니다. 자꾸 뒤를 돌아보거나, 앞으로 걷는 사람의 발을 잡아 끌어당겨서는 그 몸이 제대로 움직일 수 없습니다. 생명을 피워낼 수 없습니다. 어렵고 힘들어도 주님의 약속을 믿고 희망 안에서 걷고 따르는 교회에 생명이 있습니다.
오늘은 4세기의 성인 아타나시오의 축일입니다. 성인은 교회가 박해 시대를 벗어난 뒤, 교회의 신앙과 신학의 안정을 두고 논쟁이 극심한 때를 살았습니다. 특히, 어려운 삼위일체 교리에 관하여, 많은 사람이 대충 알아듣기 쉬운 설명에 머무르려 할 때, 성인은 삼위일체 하느님이 이루시는 일치의 신비와 구원의 활동을 더 깊이 되새겼습니다.
그는 젊은 부제였지만, 나이와 명망이 높던 다른 신학자, 성직자와 논쟁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큰 문제가 아닐 듯한데도 세심하게 따지고 드는 성인이 얼핏 건방지고 차가워 보이기도 했겠지요.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새로운 신앙을 옛 종교의 편안한 논리에 허망하게 내줄 수는 없었습니다. 그 투철한 용기와 섬세한 신학 때문에 그는 주교로 임명되었지만, 오히려 그 이후로 더 많은 오해를 받고, 다섯 번에 걸친 유배의 고초를 겪었습니다.
성인의 삶과 복음의 여러 말씀이 겹칩니다. 사람들은 주님의 가르침을 두고 ‘이렇게 말씀이 어려워서야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하며 핀잔합니다. ‘마음을 졸이게 한다’고 불평합니다. 진실은 자주 귀와 마음에 거슬리고는 합니다. 조금 어렵더라도 더 대화하며 깊이 배우고, 불편하더라도 마음을 열어 귀를 기울일 때, 생명의 진리에 다가갈 수 있습니다. 이때 주님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주님을 따르는 신앙의 기쁨이 선물로 다가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