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암사의 신비를 찾아서
조 인 숙
나서길 잘했다. 망설였던 지난 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초록의 풍경에 탄성이 절로 나온다. 친구 진영이가 갑작스럽게 하루 여행 제안을 했다. 여행 날짜가 주말이라 쉴 생각으로 있던 내게는 예정에 없던 일정에 선뜻 답하지 못했다. 전화기 너머 친구는 “봉암사 가고 싶다 했잖아, 봉암사 가자.” 귀가 번쩍 뜨였다. 내가 벌써 몇 번이나 봉암사 얘기를 해 두었던 터라 친구는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봉암사는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희양산 자락에 자리 잡은 조계종 특별 선원이다. 한 해 한 번 부처님오신날 단 하루 산문(山門)을 개방한다. 친구가 봉암사 홈페이지 공지를 보고 연락을 해 온 거다. 올해는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연등 접수 및 참배를 위해 2주 미리 방문하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고 해서다.
여행 당일 아침 일찍, 친구 회사 주차장에서 만났다. 우리는 열일곱 살 소녀가 된 듯 설레는 마음으로 하루 여행길에 오른다. 봉암사가 있는 문경은 15년간 살았었고, 지금도 가까이 아버지가 계시는 곳이기도 하다. 시내를 벗어나자 펼쳐지는 풍광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내가 살았던 곳 가까이 이런 곳이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웅장한 산세에 연신 환호가 터져 나온다.
그동안 밀린 이야기를 하다 몇 번을 놓쳐 돌아가기를 반복하며 우리는 봉암사에 도착했다. 입구에 차단기가 설치되어 있어 방문자 확인을 해야 했다. 입구에 계신 분이 친구를 반갑게 대해 준다. 나중에 들은 얘기로 홈페이지 공지도 사실이지만 한국전력 문경지사에 직장을 두고 있는 친구가 사찰이 필요로 하는 곳에 도움을 주고 있어 입장이 가능하다 한다. 미리 연락을 해두었단다. 괜히 덩달아 대접받는 기분이다.
봉암사는 스님들의 기도 참선 도량으로 전파가 차단되어 있기에 휴대전화 사용이 불가능했다. 부처님오신날 당일은 가능하단다. 지나가는 기도객들만 몇 보일 뿐 사찰은 말 그대로 절간이다. 고요한 가운데 계곡의 물소리 바람 소리만 들려와 수행하기에 안성맞춤이겠다.
드디어 봉암사가 살포시 속살을 드러냈다. 대웅전 가는 길의 풍경이 아름답다 못해 신비롭기까지 하다.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인데 기암괴석의 바위와 청초한 꽃들이 피어나고 있었다.
희양산 정상의 웅장한 바위 봉우리가 일품이다. 고풍스러운 절집 당우들과 함께 절터는 시원함을 느낄 정도로 크고 넓다. 일반인이 출입할 수 없는 까닭에 계곡물은 그냥 떠먹을 정도로 깨끗하다.
봉암사는 일반 사찰처럼 대중 법회나 제사의식을 일절 안 하고 오직 수좌 스님들이 일 년 내내 수행만 하고 있는 사찰이다. 청정도량으로 유지하기 위해 산문을 굳게 닫고 사찰에서부터 희양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부지 일대를 막아 일반인의 접근을 엄격하게 통제해왔다 한다.
대웅보전에서 부처님께 예를 올리고 바로 천년 숲이 우거진 계곡을 따라 마애미륵여래좌상이 있는 곳으로 가본다. 평지를 지나 풀숲 사이로 마애불이 보인다. 마애불상을 볼 수 있다는 것은 내가 봉암사를 찾고 싶어 했던 가장 큰 이유다. 불자가 아니더라도 그 신비로움에 저절로 마음이 숙연해진다. 기운이 좋아 소원성취를 기원하는 신도들이 찾고 있기도 하다. 나도 원을 하나 빌었다.
희양산 백운대에 자리한 마애미륵여래좌상은 1693년 조선 현종 때 제작되어 기록이 분명하고, 고증이 가능한 몇 안 되는 마애불로 2021년 보물 제2108호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둥글고 갸름한 얼굴에 귀와 코는 큼지막하고 부드러운 눈매, 단정히 다문 입 등이 자비롭고 인자한 인상을 풍긴다.
봉암사가 최적의 수행 환경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본시 수행 사찰인 데다가 희양산이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해 지난 20여 년간 출입을 통제해왔기 때문이라 한다. 회양산은 스님들의 노력 덕분에 2002년 산림 유전자 보전림으로 지정되어 엄격히 보호되고 있다 한다.
발걸음, 숨소리도 수행 중인 스님들에게는 불편할 것이다. 절을 둘러보는 짧은 시간 동안에도 10개월 결사에 들어간 스님들은 끝내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천천히 산을 내려간다. 마을로 들어서자 휴대전화의 문자음이 요란하다. 절에서는 휴대전화가 연결되지 않아서일 것이다. 내가 조금 전에 있었던 곳은 이 세계가 아니었던 말인가! 천년을 두고 다시 속세로 돌아온 건가, 잠시 시간이 멈춘 듯하다.
커피가 간절했다. 폐역을 그대로 보존해 만든 ‘가은역 카페’에 들러 아이스커피와 지역 특산품인 문경 사과로 만든 쿠키를 주문했다. 연신 ‘맛있다!’를 외치는 내게 친구는 얼마 전까지 산사에서 며칠 지내고 싶어 한 사람 맞냐며 깔깔댄다. 나도 마주 보며 웃는다. 주말이 직장인에게는 얼마나 귀한 시간인 줄 알기에 나를 위해 일부러 시간을 내어 준 친구가 새삼 귀하다.
말없이 흐르는 물과 바람이 흔들리는 푸른 잎사귀의 떨림, 유난히 산뜻한 단풍나무 잎 그림자 등이 뒤섞인 풍경의 봉암사는 평온했다, 언제 다시 봉암사를 찾을지는 모르겠다.
단풍이 곱게 물드는 가을 다시 찾자며 친구와 약속을 했지만, 이내 마음을 비웠다. 굳이 늦가을의 단풍 보자고 천 년도 넘게 이 절집을 지켜온 수행자들의 적요를 깨뜨릴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우리는 한참 더 얘기를 나누다 아쉬운 마음을 한 해에 딱 하루가 주는 기다림이 있는 절집 그곳, 봉암사에 두고 다음 여행을 기약하며 차에 오른다. 노을을 등지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