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평 상경기-2
무엇이 되어보겠다는 꿈을 꾸게 해주었던 인천 부평시장 안 부창 상회는 나에게 많은 추억을 남겼다. 먹고 재워주는 일자리를 얻었으니 일단은 마음이 편해졌다. 그러다 보니 잠시 잊었던 고향 친구들과 놓았던 공부가 생각났다. 점점 넓혀진 시내의 지리를 익혀 새로운 것을 보는 것도 나에게는 새로운 것이었다. 처음으로 접한 도시의 분위기에 익숙해져 갔다. 그 와중에도 서점을 찾아가 공부에 필요한 책을 구입했고 틈틈이 보았다. 공부는 공부처럼 해야 했다. 난 빨리 지치고 빨리 후회하는 단점이 있다. 집중과 남다른 노력을 위한 투지가 부족했다. 특히 공부만큼은 끈기 있는 지구력을 요했지만, 난 그렇질 못했다. 그러면서 난 또 다른 나의 가능성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 맹아는 사십 줄에 들어서서야 나의 한 부분으로 찾아왔다. 부창 상회 창고에서 밤이면 잉크를 찍어 잡문을 휘갈겼다. 무 방향의 글쓰기가 시작된 것이다. 때론 일기가 되기도 했고 때론 홀로 만의 연서를 쓰기도 했다. 그러다 몽근 하게 밀려오는 고향에 대한 향수가 그리움으로 쓰였다. 때론 대학노트에는 듬뿍 머금은 펜을 흩뿌려 절반을 접었다 펼치면 예쁜 환상의 무늬가 만들어졌다. 데칼코마니였다. 검정 잉크와 펜촉을 가지고 노는 일이 즐거웠다. 종종 그림으로도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내 가슴에는 나도 모르는 문향이 자라고 있었다. 지금도 그때의 노트에 쓴 글을 가지고 있어 꺼내 읽어보면 웃음이 실핏 비집고 나온다.
사장님 댁에는 권보라는 늦둥이가 있었다. 당시 다섯 살 정도로 기억이 된다. 간혹 가게에 그 아이를 데리고 나왔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 아이가 정말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아이구나 싶다. 늦둥이에 온통 하는 짓이 예뻐서 사모님의 눈빛이 아이에게 흠뻑 젖어있었으니까. 그 위로 중학교엘 다니는 여자아이가 있었다. 그 집 아이들 둘이 귀엽고 지금 생각해보면 예뻤다. 그 아이들도 이미 중년의 나이에 접어들었을 것이다. 참 세월이 빠르다는 것을 실감한다. 그 여자아이에게 간간이 이모라는 대학생이 드나들었다. 그때만 해도 과외가 금지되어 그냥 이모로 통했다. 아마 그 이모라는 대학생은 내 또래거나 위 정도였을 것이다. 부창 상회 사장님은 제대로 벌어 아이들을 교육하는데 재투자를 하고 있었다. 내가 어른이 되어 돌이켜보니 박창호 씨란 분은 대단한 열정이 있는 분이었다. 거기다 근검했다. 상당한 재력이 있는데도 당시 포니를 옆집에서 빌려 타고 처가댁 모임을 갔으니 말이다. 우린 새벽에 일어나 차에 물건을 싣고 나면 간혹 사장님 댁에서 아침을 먹었다. 아마 사장님의 배려였을 것이다. 식당에서 대어놓고 먹는 음식에 힘들어할까 봐 그랬을 것이다. 간혹 회식도 해주었던 것 같다. 부평 시내에 데리고 가 회식을 하면 선배들과 술잔을 나누었다. 생각해보면 아이와 어른의 차이는 별다른 것이 없다. 그 기준은 어른 다운 일을 할 때는 어른 대우를 받는다는 걸 알았다. 스무 살 아이 같은 나도 어른처럼 술을 공개적으로 마실 수 있었다. 술 한잔을 마시면 부평 시내가 뒤집히는 듯 건물이 거꾸로 서 다가왔다. 술이 약했다. 지금도 부평 하면 생각난 음식은 해물 모둠찌게다. 삥 둘러 먹던 그 사람들과 술잔을 기울이고 싶다. 좀 더 시간이 지나 기회가 되면 부평을 찾아가 부창상회도 들러보고 싶고 천주교 성당 앞 창고도 돌아보고 싶다. 만약에 그때 집에 지금도 그분이 살고 있다면 예전처럼 내가 차에 물건을 싣고 다녔던 코스를 한 바퀴 돌아보고 싶다.
당시 한 달이면 한 번 정도를 쉬었다. 규정은 그랬지만 사람 마음대로였다. 타이탄 운전기사들이 말썽을 피웠다. 곤조를 부린다고 한번씩 제끼는 것이다. 참 정당한 대가를 지불해가며 속앓이를 해야하는 사장님도 하고 싶은 말을 아끼는 듯했다. 당시는 차 운전도 고급 기술로 통했다. 나와 한팀인 철마산 아래 화란 농장 쪽에 사는 김 기사가 있었다. 한마디로 성격이 상당히 까칠했다. 서로 그분과 일을 함께하지 않으려 피했다. 내가 가장 서열이 낮았으니 나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천상고진에다 수가 틀리면 하루 종일 같이 다니지만, 말 몇 마디 정도였다. 거기에다 무거운 물건을 파는데 도와주질 않았다. 당시는 가게들이 골목 안쪽에도 많았다. 차가 들어가지 않는 곳이 많았다는 뜻이다. 요즘은 라면 박스도 한 박스래야 몇 개 들어있지도 않지만, 그 당시는 삼양라면 한 박스에 오십 개가 들어있었다. 이걸 십여 미터나 더 나쁠 경우는 이십 미터도 들고 들어가야했다. 간혹 시간을 아낀다고 한 번에 열박스를 들고 날랐다. 또 일종에 과시욕도 있었다. 와장창 길바닥에 처박아 버린 경우도 있었지만, 횟수가 거듭되면서 가능한 일이 되었다. 상상해보시라. 거의 곡예 수준에 상당한 요령이 필요한 고난도 이것이 어찌 보면 기술이었다. 그런 김 기사와 일하다 보면 한 달로 치면 불편한 날이 열흘은 되었다. 그 사람도 나중에는 미안해서였는지 물건을 날라주며 도와주는 날이 많아졌다. 시간 앞에 벽창호는 없다는 것을 알았다. 나와 함께 근무한 기사가 세분이었다. 가장 무던했던 기사가 윤 씨 아저씨였다. 고향이 충청도랬다. 가무잡잡한 얼굴에 깡말라 보여 간혹 측은한 마음이 들어 요령껏 돼지고깃값을 주머니에 넣어준 적이 있었다. 타이탄이란 차는 준 화물차였다. 힘도 좋았고 기아에서 나온 엘프라는 차는 다른 차종보다 힘이 더 좋았다. 그런 차도 꼼짝 못할 때가 있었다. 당시만 해도 비 포장도로가 많았고 거의 도시 외곽까지 저인망식으로 판매하고 다녔다. 눈이 엄청 오던 날 경인에너지가 있었던 경서동으로 기억된다. 동네와 동네가 농로로 연결되어 있던 시절이었다. 도시화가 진행되기 전 단계의 부평이란 곳의 주변이 그랬다. 황톳길을 따라가다 패여 진 곳으로 차 바퀴가 빠져버린 적이 있었다. 눈밭에 빠진 차 바퀴는 난감하다. 스베르를 해서 바퀴 밑 눈을 쓸어내 보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허다허다 별짓 다 해보다 눈밭을 헤집어 찾아낸 돌을 가져다 넣어 운 좋게 빼내고 나면 몇 시간은 훌렁 지나가 버렸다. 막말로 그날 장사는 끝난 거나 마찬가지였다. 차를 끌고 다니는 코스에 이미 다른 대리점 애들이 쓸고 가버렸을 테니까. 이래저래 기운도 빠지지 맥 풀린 나와는 아랑곳하지 않은 듯 차 적재함에 가득 실린 라면이나 미원 포대가 속도 없이 빳빳이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장사란 것이 시간에다 열정이었고 그것이 돈으로 정확히 환산되는 것을 알았다. 장사한 전대에서 나온 돈을 헤아리며 사장님과 사모님의 얼굴은 웃음을 띠고 있지만, 웃음의 의미가 달랐다. 그 날 장사한 만큼만이었다. 이럴 땐 정말 난감했다. 뭐 그렇다고 맨 날 그런 것은 아니었다. 하루에 두 차 분도 거뜬히 해치웠던 때도 있었다. 그런 날은 기분이 거나해졌다. 그런 횟수가 많아질수록 월급도 올라갔다. 그렇게 일 년 정도 지나다 보니 난 그 계통에서 그래도 알아주는 축에 끼었다. 능력 있는 판매원이 되어 눈독을 들인 곳도 있었다. 지금도 난 왜 한 길을 지켜가지 못했을까 후회스러울 때가 있다. 만약에란 것은 없는 거지만, 그 길을 갔더라면 하는 상상을 해본다. 난 인생을 살아오며 몇 번의 기회가 있었다. 번번이 내 앞에서 정차한 인생이란 버스에 올라타지 않고 생각 없이 지나쳐 여기까지 왔다.
그래도 추억 몇은 더 꺼내놓고 싶다. 강화 쪽 검단의 시골 마을까지 나는 상품을 팔러 다녔다. 그곳은 겨울이 오기 전 군인들이 나와 배추를 수확해 가곤했다. 김장을 할 준비를 하는 것이다. 며칠이 지나 찾아가면 배추포기가 있던 밭에는 하얀 눈이 덮여있었다. 그런 시골의 풍경은 낯선 만큼 편하게 다가왔다. 촌놈에게는 시골이 가장 익숙한 풍경이기에 그랬다. 김장 하는 날이면 가게 주인아줌마가 내 손을 붙잡았다. 앉아 맛깔스런 배추 속에다 양념을 듬뿍 버무려놓고 김포 막걸리를 부어주며 돌돌 말아 주었다. 항상 무언가 챙겨주는 듯한 그런 품새가 꼭 고향 엄마처럼 느껴졌다. 내 고향 인심이 그랬다. 엄마 같은 그분의 얼굴을 목탄으로 그려간다면 더 기억이 또렷해질 것 같다. 추억은 자꾸 떠올려야 선명해지는 것 같다. 벌써 삼십 육년 전의 그 시절이 엊그제처럼 내 기억 속에서 이야기의 타래를 내밀고 있다.
부평은 나에게는 고등학교 때 잠시 도망쳐 하루 만에 붙잡혀 집으로 되돌아 온 곳이다. 인연이라면 인연이 많은 곳이었다. 마침 시골 친구 중 종덕이가 부평에 있었다. 그 친구 지금은 운수업을 하고 있다. 친구는 운전병으로 입대해 장래에도 운전을 하겠다고 생각을 굳힌듯했다. 그 당시 운전학원 등록비를 내가 절반을 대 주었다. 운전면허를 따면 나중 내가 장사할 때 차를 몰아주겠다는 약속을 뒤로하고 군 입대를 했다. 전방 어디에선가 꿈을 야무지게 키워 제대 후 이제는 나보다 먼저 사장이 되어있다. 그 친구 지금도 그때 일을 다 기억하고 있다. 여하튼 나로 인해 장사를 배워 지금껏 장사에 올인하는 고향의 인석이 조카가 있다. 고향에서 인생의 길을 찾아 나왔지만, 다 갈 길이 따로 있었다. 스무 살에 고향의 족쇄에서 풀려나 처음으로 사회에 나와 나의 꿈을 키웠던 것처럼 다음 해인가 야간 통금이 해제되었다. 난 부평 시내에 이유 없이 좋아 밤을 새우며 쏘다녔다. 내 또래 아이들과 몇 잔의 술을 더 마셨고 덜 여문 언어로 미래에 대한 꿈을 진지하게 나눴다. 잘 말린 담배가 서서히 타들어 가는 밤이었다. 80년의 봄은 나에게 푸르러만 갔다. 지나고 보면 나는 80년을 반쪽만 알고 살아온 셈이 되었다. 똑같은 그해에 더 많은 일이 광주에서 벌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