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노인세대에 바라는 소원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습니다.
하룻밤은 한패의 도적들이 보석상을 덮쳤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물건을 훔치는 대신 가격표를 다 바꾸어 달아 놓았습니다. 다음날이 되자 사람들은 어떤 것이 진짜 값이 나가고 어떤 것이 싸구려인지 구별할 수가 없어졌습니다. 값비싼 보석이 갑자기 싸구려가 되고 실제로는 값도 나가지 않은 인조 보석이 갑자기 비싼 물건이 되었습니다. 고객 중 자기는 매우 값진 것을 샀다고 생각한 사람은 가짜를 샀고 너무 비싸 값싼 물건을 산 사람은 귀한 보석을 안고 상점을 떠났습니다.
지금 우리도 이런 가치관의 혼란 속에 살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북한 동포를 감싸 안아야 한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퍼주면 나라가 망한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우크라이나를 도와야 한다고 말하고 또 어떤 사람은 도우면 결국은 그 나라의 전투에 나설 젊은이만 죽이는 일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범죄자도 대통령이 될 수 있다고 말하고 또 어떤 사람은 광장의 목소리만 뭉치면 외고집 대통령도 탄핵해서 물러나게 할 수 있다고 합니다. 노조 파업은 힘없고 가난한 노동자를 돕는다고 말하고 또 어떤 사람은 노조 땜에 기업이 망하고 해외로 떠난다고 말합니다. 무엇이 옳을까요?
성경에는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 1:5)라는 말이 있습니다. 빛과 어두움은 너무나 대조적입니다. 그래서 삼척동자도 빛을 어두움으로부터 구별하지 못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삶과 죽음만큼, 의인과 죄인만큼 너무나 대조적인 용어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어두움이 빛을 깨닫지 못했을까요? 여기서는 제삼자가 이 둘을 구별하지 못한 것이 아니고 어두움이라는 주체가 빛이라는 객체를 깨닫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는 어두움뿐이었습니다. 자기가 전체였습니다. 그는 정복하지 못한 게 없었습니다. 그는 승승장구 권력도, 탐욕도, 명예도, 돈도, 여자도, 집도 자기가 원하는 것은 다 가질 수가 있었습니다. 어두움 속에서는 장님이 길을 걷듯 보이는 게 없었으므로 온갖 일들이 마음대로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빛이 그 어둠 속에 나타난 것입니다. 광야에서 외치던 세례 요한은 그 빛이 하나님과 타락한 인간을 화해시킬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했습니다. 어두움 가운데서 나오는 길은 옳고 그름이 분명한 빛을 받아드리는 것입니다. 우리 고령(시니어) 세대의 기독교인은 6‧25를 극복하고, 가난과 병마를 신앙으로 이기며 새벽마다 무릎 꿇고 힘든 가족과 분단된 나라와 세계 평화를 위해 기도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에게 복을 주시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부활과 50일 만에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성도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어 복음을 들고 세상에 흩어지게 한 것을 믿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무엇이 참이고 거짓인지를 깨닫게 하는 빛을 들고 흩어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초고령 시대에 접어들어 자기들보다 많은 인구를 2030시대가 책임 지고 살 수밖에 없는 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노인들이 그들에게 아이폰 어떻게 쓰는지, 카톡은 어떻게 하는지, 유튜버들의 동영상 어떻게 옮기는지, 그런 것만, 배워서 소일하면 되겠습니까? 그들은 AI에게 묻고 어려운 일은 로봇에게 맡기고 규제와 구속을 싫어하는, 프리랜서 스타일의 젊은이들입니다. 성령 강림 일(5/19)을 지내면서 빛 속에 살아온 기독교 노령 세대만이라도 교회에 나가 마루만 두들기다 오지 말고 진리의 지렛대를 가지고 세상에 나가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가 복을 받는 그런 꿈과 비전을 제시하는 꼰대 아닌 참 어른, 기독교인이 되어 살다 천국에 가면 안 될까요?
첫댓글 주 하나님 진리의 빛이 우선 한국의 시국을에 비치도록 해야 할 책무가 기독교인들에 있다면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고 봅니다. 전광훈 같은 얼긴이와 각종 사이비 종교와 그 교주놈들, 그리고 윤석렬과 김건희와 같은 무지하고 악랄한 저능아들을 제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올바른 기독교 신자라면 구체적으로 순조롭게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도록 길을 열어야 할 책임이 있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