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여수 손죽도 이대원 팽나무
남해의 아름다운 섬 손죽도(巽竹島)는 화살 만드는 전죽의 섬이지만, 1591년 2월 전라좌수사가 된 이순신이 이대원(1566∼1587)을 잃은 섬 손대도(損大島)라 했고, 주민들이 품었다.
이대원은 평택에서 태어나 1583년 열일곱에 무과에 급제, 선전관을 거쳐 1586년 지금 고흥 녹동의 녹도만호가 되었다. 임진왜란 다섯 해 전인 1587년 2월 교토와 히라도 지역 왜구의 왜선 20여 척이 남해에 왔다. 2월 10일 왜선 다섯 척이 녹도에 이르자, 이대원은 곧장 출전, 두 척을 대파하고 적장까지 사로잡았다. 전투가 끝나고 이대원은 여수의 전라좌수영으로 갔다. 좌수사 심암은 전투 보고를 받고 왜구 격퇴 전공을 자신의 것으로 하자고 했다. 이대원이 녹도 수군의 전공이라며 거절하자, 앙심을 품었다. 이때 남은 왜구가 손죽도에 모여들자, 심암은 쉴 틈도 주지 않고 이대원을 척후장으로 내세워 출전시키고 곧 뒤따라 가겠다고 했다.
2월 17일, 이대원은 좌수영을 먼저 나와 손죽도에 이르렀고 전투가 벌어졌다. 녹도 수군 1척의 판옥선은 왜선 세끼부네 18척과 사흘여를 용감히 싸웠다. 하지만 심암의 좌수영 함선은 끝내 오지 않았다. 스물둘의 젊은 장수 이대원은 마침내 부상을 입고 붙잡혀 왜선 돛대에 매달렸다. 왜장이 항복하면 살려주겠다고 회유했으나 단호히 거부하고 흉탄에 순절하였다.
이 어이없는 전투가 군율을 어긴 것임을 잘 아는 심암은 왜구의 기세가 대단하다며 군사 파병을 요청하는 거짓 장계를 올렸다. 이에 우참찬 김명원이 도순무사가 되어 녹도에 왔으나, 이미 왜구는 물러간 뒤였다. 또 신립과 변협이 전라 좌·우 방어사로 내려오고 전라감사 홍여순은 나주에서 각 읍의 군사동원 명령을 내렸다.
이에 전라좌도인 남원 등지의 관군은 순천에 진을 쳤고, 전주 등지의 관군은 낙안에 진을 쳤다. 또 전라우도의 각 읍 관병은 모두 해안으로 나아가 진을 쳤다. 그런데 5, 6일이 지나도 왜구의 흔적을 찾을 수 없어 마침내 군사를 해산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조정은 심암이 자신의 잘못을 덮기 위해 꾸민 거짓 장계였음을 알게 되었고 목을 베어 효시하였다.
그리고 이에 앞서 이대원의 승전을 알린 전라관찰사의 장계로 심암 대신 이대원이 전라좌수사에 임명되었으나, 이 또한 임명장이 도착한 것은 안타깝게도 이대원이 전사한 뒤였다.
손죽도 전투를 앞두고 있을 때이다. 이대원은 심암의 수군이 오지 않음에 일이 틀렸음을 알고 위 속옷을 찢은 뒤 손가락을 베어 흐르는 피로 시 한 수를 썼다. 집에서 데려온 종에게 ‘이것을 가지고 돌아가서 장례를 지내라’고 했다. 바로 ‘진중에 해 저무는데 왜구 바다 건너와/ 병사는 외롭고 힘은 다하여 이네 삶이 서글프다/ 임금과 어버이 은혜 모두 갚지 못하니/ 한 맺힌 저 구름도 흩어질 줄 모르네.’라는 절명시이다. 또 섬마을에 ‘어허 슬픈지고/ 녹도만호 이대원은/ 오로지 나라 위해 충신이 되었도다/ 배가 바다로 들어갈 제 왜적들은 달려들고 수사는 물러나니/ 백만 명 진중에 빈주먹만 휘둘렀도다.’라는 노래가 생겼다.
이대원의 고향 평택 확충사에 피로 쓴 절명시로 묘를 쓰고 충신정문을 세웠다. 1597년 정유재란에 왜가 이 확충사에 불을 질렀지만, 곧 비가 내려 태우지 못했다. 또 녹동 녹도진성 쌍충사에 후임 녹도만호 정운과 함께 모셨다. 그 평택 확충사와 쌍충사의 소나무, 그리고 손죽도 충렬사의 왜국을 향해 두 눈 부릅뜬 초상화와 두 아름 반의 세 그루 팽나무 앞에 선다.
1590년 세워진 옛 초가 충렬사가 1983년 태풍에 허물어지자 마을 부녀자들이 다시 기와로 세웠다. 그뿐인가? 매년 3월 3일 제를 올리며 스물둘 앳된 얼굴의 동상과 묘까지 잘 지키고 있다. 이 아름다운 섬 손죽도에 이르면 누구든 그 의로움에 절로 고개가 숙어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