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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6년(연산군 12년)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이 주도한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은 쫒겨나고 그의 이복동생
진성대군이 왕위(중종)에 오르는데, 여기서 두 사람의 폐비 신(愼)씨가 나온다. 한 사람은 연산군의 왕비였던 신씨(이하 폐비1)이고,
다른 한 사람은 진성대군 부인으로 새롭게 왕비에 오른 신씨(이하 폐비2)이다.
그런데 폐비1은 당연지사일 것이나, 폐비2는 새롭게 보위에 오른 국왕의 정실(중전)인데 어째서 폐비가 된 것일까...???
반정 당시 좌의정이자 실권자였던 신수근(愼守勤, 거창 신씨, 1450-1506)은 세종대왕의 4남 임영대군의 외손으로, 당대 최고의 로열(혼맥)패밀리였다.
신수근은 박원종으로부터 반정 참여를 권유받았으나 이를 거절하여 반정 당일 표적 피살되었는데...
폐비1은 그의 누이동생이고 폐비2(훗날 단경왕후로 추존, 1487-1558)는 그의 딸이다.
다시 말하면 신수근은 연산군의 손위 처남인 동시에 중종의 장인이고, 폐비1-폐비2는 [고모-조카] 관계가 된다(시집인 왕가에서 보면 '형님-아우' 관계).
반정세력은 폐비2가 중전자리에 그대로 머문다면 언젠가 보복을 당할 수 있기 때문에 그 후환의 싹을 잘라버려야 했다.
이에 박원종 등이 역적의 딸은 왕비가 될 수 없다며 폐위를 거듭 주장하자 중종은 이를 받아들였고, 폐비2는 입궐 7일만에
중전자리에서 물러나 인왕산 아래 사직골 옛 거처로 쫓겨나 살게 되었다.
폐비2의 입장에서 보면, 남편은 국왕이 되었지만
자신은 쫒겨나고 친정 집안까지 멸문지화를 당하는 통탄할 일이 벌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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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회루에서 바라본 인왕산 치마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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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산 치마비위/최기곤 작픔
중종은 대군시절 금슬이 좋았을 뿐만 아니라 매우 지혜로웠던 부인을 그리워하며 인왕산 쪽을 자주 바라보곤 하였는데...
이 사실을 전해 들은 폐비2는 인왕산 바위에 자신의 다홍치마를 펼쳐놓고 애틋한 정을 전달했다고 한다.
인왕산 [치마바위]는 바로 이런 사연을 품고 있는데, 이는 야사나 설화로 전승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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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릉(溫陵)/단경왕후릉
폐비2 신씨(1487-1558)는 20살에 대궐에서 쫓겨나 무려 51년을 혼자 살다가 향년 71세로 사거하였는데...
그로부터 180여 년이 지난 영조대에 이르러 [단경왕후]로 추존되면서 지금의 온릉(경기도 양주시)으로 이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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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거창군부인 쌍묘
한편 폐비1 신씨(거창군부인, 1476-1537)는 강화도 교동도 유배지에서 반정 2개월만에 사망(1506)한 연산군보다 31년을 더 살다가 연산군묘역(서울 도봉구 방학동)에 나란이 뭍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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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언 인왕산도.
강희언은 겸재에게 사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