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상이 손에 쥔 수정염주와 여의주
푸른 바다가 철석이는 시퍼런
소리를 들으며 의상(義相)은 기도하고 있었다.
당나라 유학을 다녀 와 관음보살이 머물고 있다는 곳을
찾아 다니다가 정착한 곳은 동해안의 깍아지른 듯한
절벽 아래 관음굴이었다. 의상은 이곳에서 기어이
관음의 진신(眞身)을 친견하리라는 원력을 세웠던 것이다.
그는 첫 눈에 이곳이 관세음보살의 주처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백척의 절벽아래 바다물이 들었다 나갔다를
하염없이 반복하는 굴은 범접하지 못할
기운으로 휩싸여 있었다. 그는 굴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관세음보살을 친견해
설법을 들을 때까지 물러서지 않을 작정이었다.
굳은 마음. 의상은 그러한 마음을 담은
발원문을 지어 아침 저녁으로 관세음보살님께 고했다.
간절한 자신의 마음이 투영되어 마침내
홀연히 들려주실 그 설법을 기다리며.머리숙여 귀의하옵고,
본사(本師) 관음대성의 대원경지를
관하며 또한 제자의 성정본각을 살피 옵니다.
본사가 갖추신 수월장엄(水月莊嚴) 무진상호(無盡相好)와
제자가 가진 공화신상(空花信相)과 유루형해(有漏形骸)는
의보(依報)와 정보(正報)의 맑고
더러움과 고통과 즐거움이 같지 아니합니다.
이제 관음 거울 속의 제자 몸이
제자의 거울 속 관음대성에게 목숨 바쳐 귀의하옵니다.
간절한 발원의 말씀 사뢰오니 가피의 힘 드리워 주옵소서.
오직 바라옵건대 제자는 세세생생토록 관세음을 칭송하며
스승으로 모시고 보살이 아미타불을
정대하듯 저도 또한 관음대성을 정대하겠습니다.
열 가지 크나 큰 서원과 여섯가지 회향,
그리고 천수천안과 대자대비가 모두 다 같아서 몸을 버려
새 몸 받는 이 세계와 다른 국토 머무는 곳마다 그림자가
형상을 따르듯 항상 설법을 듣고 참된 교화를 돕겠습니다.
널리 법계의 일체중으로 하여금 대비주를 외우고 보살명호
염하여 다 함께 원통삼매(圓通三昧)에 들게 하여지이다.
또한 원하옵나니, 제자는 이 생의 과보가 다할 때 대성이
빛을 놓아 이끌어 주심을 친히 입어서 모든 두려움 떨쳐 버리고
몸과 마음 안락하게 한 순간 백화도량에 왕생하여
여러 보살과 함께 정법을 듣고 진리의 샘에 함께 들어가
생각생각이 더욱 밝아져 여래의 크나큰 무생인 드러나게 하옵소서.
발원을 마치고 관자재보살마하살께 귀명정례 하옵니다.
실로 의상의 발원문은 관음대성과 제자인 자신이
다르지 않음을 깊이 인식한 귀명의 마음 그 자체였다.
관음은 의존만 하는 타력신앙의 대상이 아니라 스스로
관음의 몸과 천수천안을 얻어 그 행화를 빛내는 것임을
다짐하는 의상의 신앙적 의지가 오롯이 담긴 발원이었던 것이다.
목숨을 건 발원. 목숨을 건 기도였기에 발원문인들
그렇게 절명의 언어가 아닐 수 있었겠는가.
현생의 목숨만 건 것이 아니라 다음 생 또 다음 생, 억겁생의
목숨을 다 걸고 백화도량으로 들어 갈 것을 서원했으니
그가 기도하는 시간에는 동해 철석이는 파도도 숨을 죽이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의상은 바닷가 바위에 자리를 잡고 앉아
14일을 기도했다. 신새벽 해풍의 저 멀리서 찬란히 떠 오르는
해를 보면서 관음의 옷자락을 만지는 듯 간절히 기도했다.
밤이면 드넓은 하늘을 수 놓는 별무리를 보면서
관음의 빛나는 위신력을 온 몸으로 받으며 기도했다.
그러나 만날 수 없는 성인. 관음의 진신을 볼 수 없었다.
진신을 볼 수 없음에 그 청량항 법문도 들을 수 없었다.
"내 정성이 부족한가. 관음의 진신을 볼 눈이 없는가.
한량없는 축복의 법문을 들을 귀를 갖지 못했는가."
의상은 목숨을 건 기도로도 관음진신을 만날 수 없음이
자신의 수행이 부족한 때문이라 생각했다.
"차라리..."의상은 저 넘실대는 바다. 관음굴로 들어감이
마땅하리라 생각했다. 물 속 깊이를 따라 온 몸을 던지고 나면
그 어느 곳에선가 대성인의 법체를 만날 수 있으리란 생각이었다.
그런 생각에 그는 몸을 아낄 겨를조차 생각할 수 없었다.
"아, 관음대성이여..."의상은 바다로 몸을 던졌다.
<복원이 끝난 낙산사 원통보전>
관음굴로 들어가고자. 그러나 그때
바다에서 그를 다시 땅으로 떠 받쳐 올리는 힘이 있었다.
동해 용인가. 관음의 법체가 목숨을 던지는 그 순간에
감응하여 나투심인가."내 몸은 직접 볼 수가 없다.
다만 굴 위의 대나무 한 쌍이 솟아난 곳이 나의 이마 위이다.
거기에 절을 짓고 상을 봉안하라."
던져진 몸이 다시 땅위로 솟구쳐진
찰라에 의상은 꿈결처럼 들려 오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손안에 쥐어지는
수정염주와 여의주, 그리고 옥을 느낄 수 있었다.
"필시 관음대성이 나를 살려 주심이고
동해 용이 여의주와 수정을 주심이로다.
이로써 나는 대성을 친견함이리."의상은 뛸 듯이
기쁜 마음을 수그리고 관음의 명호를 부르고 또 불렀다.
그리고 절벽 위로 올라가 보았다.
그곳에서 또 하나의 가피를 확인했다.
전에 없던 대나무 한 쌍이 솟아나 있었다. 청정한
기품의 대나무. 관음의 징표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대나무가 선 자리에 불전을 짓고 수정염주와 여의주를 봉안했다.
그리고 옥으로 관음성상을 조정해 봉안하니,
누구도 이곳이 관음의 주처임을 의심할 수 없었다. 절 이름도
관음이 상주하는 보타락가산을 그대로 옮겨와 낙산사라 했다.
의상이 낙산사를 짓게 된 그 절명의 사건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그 소문은 원효의 귀에도 들어갓다.
원효는 도반이 관음대성을 친견하고 그곳에 불전을
지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 나서지 않을 수없었다.
그가 낙산사를 향해 발길을 놓은 지 여러날,
드디어 바다내음이 물씬 풍기는 양양땅에 당도했을 때
원효는 벼 베는 한 여인을 만났다.
"그 벼를 내게 주시겠소?""흉작이라 드릴 벼가 없소이다."
바람처럼 건듯 걸었던 농담을 받아치는 냉냉한 여인의
말을 뒤로하고 원효는 다시 길을 재촉했다.
철석이는 바다물 소리가
들릴 것만 같은 어느 곳에서 원효는 또 한 여인을 만났다.
그녀는 다리 아래서 월수백(月水帛, 생리대)을 빨고 있었다.
"물 한모금 주시오."
목 축일 한 모금의 물을 청하는 나그네에게
여인은 그 빨래물을 덤벙 떠주는 것이 아닌가.
원효는 그 더러운 물을
버리고 스스로 맑은 물을 떠 미시고 있었다.
그때 근처 소나무에서 파랑새 한마리가 "제호를
마다한 화상아"라 한탄 어린 말을 한 뒤 날아가 버렸다.
이상한 생각에 나무 아래로 가 보니 신발 한짝이 버려져 있었다.
그러나 원효는 아무일 없었다는 듯 길을
재촉해 드디어 의상이 창건한 낙산사에 도착했다.
동해 용으로부터 받은 옥으로 조성했다는 관음대성의 상을
가장 먼저 친견했는데 아, 의상은 흠칫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관음상 앞에 있는 한짝의 신발. 그것은 파랑새가 자신을 향해
"제호같이 맛있는 물을 마다한 사람"이라 한탄하던
조금전의 그 나무 아래서 본 것과 같은 것이 아닌가.
원효는 단박에 알 수 있었다.
벼 베던 여인도 빨래하던 여인도 힐난하던 파랑새도
모두가 관세음보살의 응화신임을.
그러나 때는 늦어 버렸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여인의 옛터에는 띠풀이 섬돌을 덮었고원효의 유적에는
나무가 하늘에 닿았도다. 누대에 올라 상사의 꿈 맺고자
한다면 꿈속에서도 응당 냉천을 뜨리라.
고려시대 문신 정추(鄭樞)는 원효가 여인에게 물을
얻어 마시고자 했던 그 냉천이 있는 낙산사 인근을 지나며
이같이 읊어 시절 인연이 닿지 않아
관음대성을 친견하지 못한 원효와 자신을 위무했다.
낙산사와 수정염주 의상스님이 조성한 관음보살상과
관음보살로부터 받았다는 수정염주,
그리고 동해 용이 주었다는 여의주는 어디에 있을까.
사료에 따르면 관음보살상은 후일 범일스님이
봉안한 정취보살상과 함께 13세기 중엽
몽고군의 침입 때 파손되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수정염주는 파손이나 잃어 버린 것이 아니라
몽고에 헌납(사실은 무기력하게 빼앗김)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삼국유사>권3은 이렇게 전한다.
몽고군의 침입을 받자 당시의 낙산사 주지였던
아행(阿行)이 두 보주를 은함에 넣어 도망하려 했다.
이를 본 절의 종 걸승(乞升)이 빼앗아 당 속에 깊이
묻었는데 아행은 몽고군에 의해 죽고 걸승은 살았다.
전쟁이 끝난 후 걸승은 묻었던
두 보주를 파내어 명주도 감창고에 보관했다.
그로부터 4년뒤인 1258년 11월 기림사 주지 각유선사의 청으로
조정에서 두 보주를 받아 어부(御府 왕의 물건을 넣는 곳)에 모셨다.
그러나 고려사 권 27 원종14년조에는 "
경오일에 마강이 돌아감으로 송분에게 수행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황후가 일찍부터 관음여의주를 보고자
했다고 하므로 송분에게 그것을 헌납케 하였다"고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