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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5년 1월 19일 주일
[(녹) 연중 제2주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오늘은 연중 제2주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께 십자가의 수난을 겪게 하시어 인류를 하느님과 화해시키셨습니다. 이 주일 잔치에서 거룩한 교회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변화되어, 주님이시며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맺는 영원한 혼인의 기쁨을 맛보게 해 주시기를 청합시다.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예루살렘을 두고, 민족들이 그의 의로움을, 임금들이 그의 영광을 보리라고 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 주신다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처음으로 갈릴래아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표징을 일으키신다(복음).
제1독서
<신랑이 신부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라.>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62,1-5
1 시온 때문에 나는 잠잠히 있을 수가 없고
예루살렘 때문에 나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그의 의로움이 빛처럼 드러나고 그의 구원이 횃불처럼 타오를 때까지.
2 그러면 민족들이 너의 의로움을, 임금들이 너의 영광을 보리라.
너는 주님께서 친히 지어 주실 새로운 이름으로 불리리라.
3 너는 주님의 손에 들려 있는 화려한 면류관이 되고
너의 하느님 손바닥에 놓여 있는 왕관이 되리라.
4 다시는 네가 ‘소박맞은 여인’이라,
다시는 네 땅이 ‘버림받은 여인’이라 일컬어지지 않으리라.
오히려 너는 ‘내 마음에 드는 여인’이라, 너의 땅은 ‘혼인한 여인’이라 불리리니
주님께서 너를 마음에 들어 하시고
네 땅을 아내로 맞아들이실 것이기 때문이다.
5 정녕 총각이 처녀와 혼인하듯 너를 지으신 분께서 너와 혼인하고
신랑이 신부로 말미암아 기뻐하듯
너의 하느님께서는 너로 말미암아 기뻐하시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한 분이신 같은 성령께서는 원하시는 대로 각자에게 나누어 주십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12,4-11
형제 여러분, 4 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성령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5 직분은 여러 가지지만 주님은 같은 주님이십니다.
6 활동은 여러 가지지만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활동을 일으키시는 분은 같은 하느님이십니다.
7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
8 그리하여 어떤 이에게는 성령을 통하여 지혜의 말씀이,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에 따라 지식의 말씀이 주어집니다.
9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 안에서 믿음이,
어떤 이에게는 그 한 성령 안에서 병을 고치는 은사가 주어집니다.
10 어떤 이에게는 기적을 일으키는 은사가,
어떤 이에게는 예언을 하는 은사가,
어떤 이에게는 영들을 식별하는 은사가,
어떤 이에게는 여러 가지 신령한 언어를 말하는 은사가,
어떤 이에게는 신령한 언어를 해석하는 은사가 주어집니다.
11 이 모든 것을 한 분이신 같은 성령께서 일으키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각자에게
그것들을 따로따로 나누어 주십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예수님께서는 처음으로 갈릴래아 카나에서 표징을 일으키셨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11
그때에 1 갈릴래아 카나에서 혼인 잔치가 있었는데,
예수님의 어머니도 거기에 계셨다.
2 예수님도 제자들과 함께 그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으셨다.
3 그런데 포도주가 떨어지자
예수님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포도주가 없구나.” 하였다.
4 예수님께서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5 그분의 어머니는 일꾼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하고 말하였다.
6 거기에는 유다인들의 정결례에 쓰는 돌로 된 물독 여섯 개가 놓여 있었는데,
모두 두세 동이들이였다.
7 예수님께서 일꾼들에게 “물독에 물을 채워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이 물독마다 가득 채우자, 8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다시,
“이제는 그것을 퍼서 과방장에게 날라다 주어라.” 하셨다.
그들은 곧 그것을 날라 갔다.
9 과방장은 포도주가 된 물을 맛보고 그것이 어디에서 났는지 알지 못하였지만,
물을 퍼 간 일꾼들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과방장이 신랑을 불러 10 그에게 말하였다.
“누구든지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놓고,
손님들이 취하면 그보다 못한 것을 내놓는데,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남겨 두셨군요.”
11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처음으로 갈릴래아 카나에서 표징을 일으키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첫 번째 기적으로 알려진 카나의 혼인 잔치 이야기입니다. 이 기적의 시작점은 성모님이십니다. 먼저, 성모님께서는 혼인 잔칫집의 곤란함을 재빨리 알아차리셨습니다. 성모님께서 그 잔치에 즐기는 이로 계셨는지 아니면 일손을 보태어 돕고 계셨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뒤에 일꾼들을 부리시는 그분의 솜씨로 보아 잔치 준비에 큰 도움을 주고 계셨겠다고 짐작할 수 있을 뿐입니다.
이어서 성모님께서는 그 집의 곤란한 사정을 아들 예수님께 신속히 알리십니다. 성모님의 역할은 중재자이십니다. 곤란한 이의 사정을 아들 예수님께 부지런히 전달하시는 것이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단호히 거절하십니다.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요한 2,4). 그러나 신뢰의 어머니 마리아께서는 실망하시지 않고 일꾼들에게 이르십니다.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2,5). 예수님의 뜻을 따르시면서도, 예수님께만 신뢰와 희망을 두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직 당신의 때가 오지 않았음을 밝히시며 거절하시고도, 어머니의 의탁과 간절한 희망을 보시고는 그 때를 앞당기시어 당신의 계획을 바꾸십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사랑에 대하여 가르치시면서 자주 말씀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사랑은 상대방을 위하여 시간을 내는 것이며, 필요하다면 그를 위하여 자신의 계획을 내려놓는 것’이라는 점입니다(「모든 형제들」, 63.101항 참조). 예수님의 첫 번째 기적은 당신의 계획을 내려놓으시고 응답하심으로써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이 사랑으로 우리에게 오신 구세주의 표징입니다. 우리도 주님과 이웃에게 시간을 내줄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꼭 필요하다면 자신의 계획을 내려놓을 수 있는 관대한 마음, 열린 마음, 흔쾌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까?(김동희 모세 신부)
우리의 신앙도 성모님의 신앙처럼 끊임없이 성장해야 합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카나 혼인 잔치에서 벌어진 예수님과 성모님 사이의 대화는 너무나 많은 복선과 의미가 깔린 내용이기에 잘 새겨서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모님께서 예수님께 드린 청부터 좀 이상합니다.
성모님은 평소 아들 예수님의 성숙한 동반자로서 부담을 주거나 분위기를 난감하게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특별합니다. 꽤 부담스러운 청을 예수님께 드리고 있습니다. “포도주가 없구나.”(요한 2,3)
성모님의 은근한 압박에 맞선 예수님의 대응도 만만치 않습니다.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요한 2,4) 예수님께서는 아직 아버지로부터 공생활을 시작하라는 신호를 받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직은 세상 사람들 눈에 띄면 안 되는 것입니다. 아직 공개석상에서 기적을 행할 때가 아니었기에 어머니의 부탁을 넌지시 거절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따라 성모님도 물러서지 않으십니다. 결국은 자신의 의도를 관철시키십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완전한 동의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일을 계속 진척시킵니다. 지혜로운 어머니셨기에, 예수님께 또 뭐라 한마디 하면 서로 난감해질 것이 뻔하니, 이번에는 일꾼들을 불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 2,5)
어찌 보면 오늘 우리 각자를 향한 성모님의 권고 말씀입니다.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오늘 우리는 부단히 질문을 던져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내게 시키는 것이 무엇인지? 예수님께서 오늘 내게 바라시는 바는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성모님을 향해 사용하신 호칭, “여인이시여”라는 표현이 꽤 마음에 걸립니다. “여인이시여”라는 호칭은 그동안 예수님께서 성모님에게 사용해 오셨던 호칭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의 갑작스러운 호칭 변화에 성모님께서도 꽤 당혹감을 느끼셨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여인이시여” 라는 말씀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이런 것이 아닐까요. 이제 예수님과 성모님 사이는 서서히 새로운 관계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육의 관계를 넘어 영의 관계로 옮아가는 것입니다. 종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차원의 모자 관계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머지않아 예수님의 본격적인 공생활이 시작될 것입니다. 성모님의 영적 여정 역시 가야 할 길이 꽤 남아있습니다. 성모님의 믿음 역시 더 쇄신되고 더 깊어져야 할 과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아직도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으셨던 성모님이셨습니다. 아직도 세밀한 하느님의 계획을 완벽하게 파악하지 못하셨던 성모님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포도주를 많게 하시는 기적을 통해 일단 성모님의 인간적 체면을 살려주시지만, 진정한 의도는 그게 다가 아니었습니다.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라는 말씀을 통해 기적이나 체면을 살리기보다 아버지의 뜻에 순명하는 것이 더 우선적이고 더 중요한 일이라는 강조하십니다. 성모님의 완곡한 청을 거절하지 않으면서도 “여인이시여”라는 호칭을 통해 살짝 거리를 두는 예수님의 모습은 성모님에게는 새로운 하나의 초대입니다.
‘어머니, 그간 저를 돌봐주시느라 참으로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쉽고 안타깝지만 떠나갈 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어머니께서도 잘 준비하셨으면 합니다. 이제 어머니의 신앙이 한 차원 승화될 순간입니다. 이제 인간적인 눈이 아니라 영적인 눈, 육적인 관계보다는 영적인 관계, 세상적인 뜻보다는 아버지의 뜻을 먼저 생각하셔야 할 것입니다.’이런 의미를 함축한 표현이 “여인이시여”가 아닐까, 하는 묵상을 해보았습니다.
우리의 신앙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성모님의 신앙처럼 끊임없이 성장해야 합니다. 하느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성모님과 예수님 사이처럼 역동적이어야 하고, 진취적이어야 합니다. 서로를 속박하고 자신 안에 가두어두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를 자유롭게 해주고, 서로를 키워주는 그런 관계여야 할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 사목회 송년 모임 때입니다. 한국에서 보내준 ‘영상’을 보여주었습니다. 영상의 내용은 봉사자의 자세와 믿음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4분가량의 영상 중에 제게 큰 울림을 준 부분이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능력 있는 사람에게 직분을 맡기시는 분이 아니라는 내용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선택한 사람에게 그에 합당한 능력을 주신다는 내용입니다. 평소에 많은 능력을 갖췄다고 생각하는 봉사자는 교만하지 말고 겸손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평소에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봉사자는 능력을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위로와 용기를 가지면 좋겠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질그릇 같은 우리 속에 이 보화를 담아 주셨습니다. 이것은 그 엄청난 능력이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한테서 나온다는 것을 보여주시려는 것입니다.” 저는 언론과 방송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중학생 때 신문 배달을 해 본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럼에도 교구장님은 제게 가톨릭평화신문 미주지사의 일을 맡겨 주셨습니다. 코로나의 힘든 시기를 견디며 신문사를 운영할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께서 제게 능력을 주셨고, 좋은 직원을 보내 주셨기 때문입니다.
노래방에 가면 18번이 있습니다. 늘 즐겨 부르는 노래입니다. 가수들도 18번 노래가 있습니다. 조용필의 노래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돌아와요 부산항에’입니다. 이선희의 노래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아 옛날이여!’입니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조용필이 무명의 시대를 벗어나 인기가수로 발돋움한 노래입니다. ‘아 옛날이여!’는 제가 군대에서 듣던 노래입니다. 군대에서 기상 음악으로 선임들이 ‘아 옛날이여’를 틀어 주었습니다. 지금은 내가 군인이라는 정체성을 알 수 있게 해 준 노래입니다. 제가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 잘될 거야!”입니다. 어떤 분들은 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무책임하다고 느꼈다고 합니다. 지금 해야 할 일이 많고, 넘어야 할 산도 아직 많이 남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들은 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기분이 좋았다고 합니다. 비록 지금은 힘들고 어렵지만, 앞으로는 좋은 일들이 생길 거라는 희망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다 잘될 거야!”라는 말을 하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여러분의 18번은 무엇인가요? 저는 최성수의 ‘해후’를 좋아합니다.
2000년 전입니다. 가나에는 혼인 잔치가 있었습니다. 하객들은 많이 왔는데 잔치에 준비한 포도주가 그만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난감한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포도주를 많이 준비하지 못한 것을 비난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면서 혼인 잔치의 주인을 탓하였습니다. 그런 비난과 평가는 혼인 잔치에 큰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혼인 잔치에 필요한 포도주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아들 예수님에게 이야기합니다. ‘혼인 잔치에 필요한 포도주가 부족합니다.’ 마리아는 지난 과거에서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지 않았습니다. 아들 예수님에게서 미래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아들 예수님은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렸습니다. 예수님은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우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물은 포도주로 만들었습니다. 혼인 잔치는 성대하게 마무리되었습니다. 이 혼인 잔치에 대해서 영국의 시인 바이런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물이 주인을 만나니 얼굴이 붉어지는구나!” 정말 아름다운 표현입니다.
저의 큰형은 예술적인 재능이 뛰어났습니다. 글을 잘 쓰고, 그림도 잘 그렸습니다. 음악도 잘해서 곡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형의 예술적인 재능이 부럽기도 했고, 자랑스럽기도 했습니다. 작은형은 운동 신경이 좋았습니다. 체격도 좋았고 양복을 입으면 잘 어울렸습니다. 싸움도 잘해서 형과 다니면 걱정이 없었습니다. 여동생은 무엇보다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 주었습니다. 어머니와 30분을 통화하는 가족은 동생밖에 없을 것입니다. 어머니는 하루에 있었던 일들을 동생에게 이야기하시고 좋아하셨습니다. 큰형처럼 예술적인 재능이 없었기에, 작은형처럼 좋은 체격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동생처럼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 주지 못했기 때문에 저는 저를 ‘미운우리새끼’처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제게도 좋은 것을 주셨습니다. 글 읽는 것을 좋아하고, 가능하면 긍정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들었던 것처럼 성령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소중한 능력과 재능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서로 다른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면 하느님의 꽃밭을 꾸미는 아름다운 꽃이 될 것입니다.
아름다운 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주님!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도록 용기를 주시고, 할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는 겸손함을 주시고,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사람아 나의 사람아>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물독에 물을 채워라.”(요한 2,7)
사람아
그대의 삶에
그대를 채우시게
기쁜 그대뿐만 아니라
슬픈 그대까지도
믿음직한 그대뿐만 아니라
못미더운 그대까지도
희망하는 그대뿐만 아니라
절망하는 그대까지도
사랑 넘치는 그대뿐만 아니라
증오 가득한 그대까지도
열정적인 그대뿐만 아니라
무기력한 그대까지도
날아오르는 그대뿐만 아니라
추락하는 그대까지도
사람아
그대의 삶에
다른 누가 아니라
다만 그대를 채우시게
나 기꺼이
그대의 삶에 담긴 그대를
내 품의 나의 사람으로 만들리니
오늘의 성인
성 요셉 세바스티아노 펠차르(Joseph Sebastian Pelczar)
신분 : 주교, 설립자
활동지역 : 프셰미실(Przemysl)
활동연도 : 1842-1924년
같은이름 : 세바스띠아노, 세바스띠아누스, 세바스찬, 세바스챤, 세바스티아누스, 쎄바스띠아노, 쎄바스띠아누스, 요세푸스, 요제프, 조세푸스, 조세프, 조셉, 조제프, 조제프, 주세페, 쥬세페, 펠짜르, 호세
성 요셉 세바스티아누스 펠차르(Josephus Sebastianus Pelczar, 또는 성 요셉 세바스티아노 펠차르)는 1842년 1월 17일 폴란드(Poland) 남서부 지방 코르취나(Korczyna)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고향에서 전통적으로 신심 깊은 폴란드인 가정의 분위기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성장했다.
그의 비범한 능력을 인식한 부모는 그가 코르취나 지역 학교에서 2년의 초등교육을 마치자 학업을 계속 할 수 있도록 제슈프(Rzeszow) 지역의 마을로 보냈다. 여전히 어린 나이였지만 펠차르는 하느님을 섬기는데 헌신할 것을 결심했다.
1864년 7월 17일 사제품을 받은 펠차르 신부는 프셰미실 교구의 삼보르(Sambor) 본당으로 발령을 받아 1년 반 동안 부주임으로서 사목생활을 했다. 1866년 그는 로마(Roma)로 유학을 떠나 2년 동안 오늘날 그레고리안 대학교(Gregorian University)로 알려진 로마 학당(Collegium Romanum)과 라테란 대학교(Lateran University)로 불리는 성 아폴리나리스 협회(the Institute of St. Apollinaris)에서 수학했다.
로마에서의 유학으로 그는 지식의 외연을 넓혔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마음 안에 교회와 교회의 가시적인 으뜸인 로마 교황에 대한 깊고도 변치 않는 사랑을 가득 채울 수 있었다. 그는 신학과 교회법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폴란드로 돌아와 두 군데 본당의 부주임으로 잠시 사목한 후 프셰미실 대신학교의 교수로 활동했다(1869-1877년). 이후 그는 크라쿠프(Krakow)에 있는 야기엘로니아(Jagiellonia) 대학교의 교수로 임명되어 22년간 봉직했다(1877-1899년).
교수이자 신학과의 학과장으로서 펠차르 신부는 현명한 학자이자 유능한 조직가, 젊은이들의 친구라는 명성을 얻어갔다. 그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대학 당국은 그에게 학장직을 맡겼다(1882-1883년). ‘폴란드 신부는 국민들에게 헌신한다.’는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펠차르 신부의 노력은 학문적 영역에만 제한되지 않았다.
그는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the St. Vincent de Paul Society)나 국민들의 교육을 위한 모임(the Society for the Education of the People) 등과 같은 사회적 자선 활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대학교 총장으로 16년간 재임하는 동안 그는 여러 도서관을 세우고, 수많은 무료 강연과 천여 권이 넘는 책을 출판 배포했으며, 하인들을 위한 학교를 세웠다.
1891년 펠차르 신부는 성모의 형제회(the Fraternity of Our Lady)를 설립했다. 성모의 형제회는 종교적인 활동 외에도 가난한 이들과 고아들, 도제공과 하인들, 특별히 병들거나 실직한 이들을 돌보기 위한 기초를 놓았다. 펠차르 신부는 자신의 시대에 이런 사회 문제들이 존재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을 찾을 수 있는 기회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1894년 크라쿠프에서 예수 성심의 사랑의 왕국을 전파할 목적으로 예수 성심의 시녀회(the Congregation of the Sister Servants of the Most Sacred Heart of Jesus)를 설립했다. 그는 예수 성심의 시녀회가 소녀들과 병자, 그리고 도움이 필요한 모든 사람들을 위한 사랑의 징표이자 도구가 되기를 원했다.
그로부터 5년 후인 1899년 펠차르 신부는 프셰미실 교구의 보좌주교로 임명되었고, 이듬해 솔레키(L. Solecki) 주교가 선종한 후 프셰미실 교구의 교구장이 되었다. 교구장으로서 25년의 재임기간 중 그는 착한 목자로서 널리 존경을 받았으며, 그를 믿고 따르는 모든 이들에게 헌신했다.
펠차르 주교는 병약한 몸에도 불구하고 교구의 종교적 · 사회적 필요를 위해 쉬지 않고 노력했다. 그는 교구 신자들을 격려하고 신앙심을 성장시키기 위해 정기적인 사목 방문을 하고 성직자들의 윤리적 · 지성적 의식을 고양하기 위해 특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무엇보다 그는 스스로 열심한 신앙생활의 모범이 되었고, 이는 예수 성심과 동정 성모께 대한 헌신으로 표현되었다. 또한 성체성사의 열렬한 흠숭자로서 교구의 많은 이들이 성체조배에 참여하도록 격려하고 용기를 북돋웠다.
그의 사목적 노력을 통해 많은 수의 성당과 경당이 증가했고, 또한 파괴되거나 폐쇄되었던 많은 성당들이 복구 또는 회복되었다. 그는 당시의 열악한 정치적 환경에도 불구하고 세 차례의 교구 시노드(Synodus)를 개최하였다.
항상 교구 신자들의 요청에 성실히 응답한 그는 특별히 가장 가난한 이들을 돌보았다. 많은 어린이방, 무료 급식소, 노숙자 쉼터, 가난한 시골 소녀들을 위한 학교, 가난한 신학생들의 교육을 위한 수업료 지원 등은 그가 이룬 업적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부당한 대우를 받는 노동자들과 어려운 경제적 상황으로 인해 이민을 갈 수밖에 없는 이들에 대해 깊은 연민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사회문제를 다룬 최초의 회칙인 교황 레오 13세(Leo XIII)의 “노동헌장”(Rerum novarum)에서 표현된 교회의 사회교리를 시행할 필요성에 대해 강조하였다. 또한 그는 풍부한 문학적 재능을 통해 수많은 신학 · 역사 · 교회법 서적과 사목서한, 강론집, 훈화집, 기도서와 교과서 등을 저술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데 있어서 많은 장애 요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펠차르 주교는 이 모든 일을 성실히 수행하다가 1924년 3월 28일 밤, 거룩한 삶의 향기를 풍기며 선종하였다. 그의 유해는 장례예식을 마친 후 프셰미실 주교좌성당에 모셔졌다.
그는 1991년 6월 2일 폴란드의 제슈프에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으며, 2003년 5월 18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같은 교황에 의해 시성되었다. 그의 축일은 1월 19일에 기념하고 있다.
성 헨리코 (Henry)
활동년도 : +1156년
신분 : 주교, 순교자
지역 : 웁살라(Uppsala)
같은 이름 : 앙리, 하인리히, 헨리, 헨리꼬, 헨리꾸스, 헨리쿠스
로마(Roma)에 살던 영국 태생의 성 헨리쿠스(Henricus, 또는 헨리코)는 후에 교황 하드리아누스 4세(Hadrianus IV)가 된 교황대사 브릭스피어(Nicholas Breakspear) 추기경을 수행하여 1151년에 스칸디나비아(Scandinavia)로 갔다가 다음 해에 스웨덴 웁살라의 주교로 축성되었다. 그는 핀란드(Finland) 사람들이 웁살라를 침략했을 때, 스웨덴의 국왕 성 에리쿠스(Ericus, 5월 18일)와 함께 그들을 격퇴하였다. 그 후 성 헨리쿠스는 핀란드이 복음화를 위해 노력하다가 1156년 1월 20일 핀란드인 개종자이자 거부였던 랄리(Lalli)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는 ‘스칸디나비아의 사도’로 불리며, 핀란드의 수호성인으로 1158년 교황 하드리아누스 4세(Hadrianus IV)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가누토 4세(Canute IV)
활동년도 : +1086년
신분 : 왕, 순교자
지역 : 덴마크(Denmark)
같은 이름 : 가누또, 가누투스, 카누또, 카누토, 카누투스, 카누트, 크누드, 크누토, 크누트
덴마크의 국왕 스웨닌 어스트릿슨(Sweyn Estrithson)의 아들이며, 당시 영국을 지배하던 크누드 왕의 조카인 성 카누투스(Canutus, 또는 카누토)는 1075년에 성공적으로 왕위를 계승하여 카누투스 4세로서 덴마크의 국왕이 되었다. 그는 플랑드르(Flandre)의 로버트 백작의 동생인 아델라(Adela)와 결혼함으로써 성직자와 선교사들을 적극 지원하였고 또 많은 성당을 지었다.
그러나 그는 1085년에 영국 침공을 계획하고 준비하던 중, 귀족들에 대한 무거운 세금이 그의 동생 올라프(Olaf)로 하여금 반란을 일으키게 함으로써 결국 전쟁을 그만두고 푸넨(Funen) 섬으로 도망가야만 했다. 그는 여기서 그의 부하들과 함께 성 알바누스(Albanus) 성당에서 반란자들에 의하여 무참히 살해되었다. 그의 지지자들은 그를 순교자로 보았다. 그의 무덤에는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났으며, 그의 경건한 신앙생활은 높이 평가받아 왔으므로 교황 파스칼 2세(Paschalis II)는 1101년 그에 대한 공경을 허락하였다. 그는 크누토(Knute)로도 불린다.
성 마리오와 가족 순교자들
성 마리오 (Marius)
신분 : 순교자
활동연도 : +270년
같은이름 : 마리우스
성 마르타 (Martha)
신분 : 순교자
활동연도 : +270년
같은이름 : 마르따 말따
성 아바쿰 (Abachum)
신분 : 순교자
활동연도 : +270년
같은이름 : 아바꿈
성 아우디팍스 (Audifax)
신분 : 순교자
활동연도 : +270년
같은이름 : 아우디빡스
페르샤의 귀족인 마리오와 그의 아내 마르타 그리고 2명의 아들인 아우디팍스와 아바쿰은 크리스챤으로 개종하여 가난한 이들에게 도움을 베풀고 살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로마를 순례하여 사도들의 무덤을 찾아보고 신앙을 더욱 돈독히 하였다.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크리스챤 박해를 명하므로써, 수많은 신자들이 화형이나 참수치명하고 또 화살에 맞아 숨지기도 하였는데, 이들 가족 역시 체포되었다.
마리오와 그의 두 아들은 참수당하였으나, 마르타는 물에 던져 죽였다.
이들은 모두 비아 고르넬리아에 묻혔다.
페르시아 귀족출신으로 아내 성 마르따와 아이들, 성 아바코, 성 아우디파체를 데리고 로마로 이주했다.
로마에 도착한 그들은 온가족이 함께 소중하고 거룩한 일을 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박해받던 신자들을 돌보던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쌀라리아 길거리에 방치된 순교자들의 시신을 밤중에 몰래 가져다가 땅에 묻어주곤 했는데 어느날 그것이 발각이 되었다.
그리하여 온가족 4명이 모두 순교당했다.
성 불스타노 (Wulstan)
신분 : 주교 수도승
활동지역 : 우스터(Worcester)
활동연도 : 1008-1095년
같은이름 : 불스타누스 울프스탄 불스탄 울스탄
울프스탄(Wulfstan)으로도 불리는 성 불스타누스(Wulstanus, 또는 불스타노)는 영국 잉글랜드(England) 워릭셔(Warwickshire)의 롱 이칭턴(Long-Itchington)에서 태어나 이브즈햄(Evesham)과 피터버러(Peterborough) 수도원에서 공부한 후 우스터(Worcester) 교구에서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 후 그는 그곳의 수도원으로 들어갔으나 1062년에 우스터 교구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지극히 단순하고 거룩했던 성 불스타누스는 웨스트민스터 시노드(Synod of Westminster)에서 주교 자질이 부족하다는 평을 들었지만 그의 성덕을 칭송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그는 빌리암의 영국 침략 때에 주교좌를 지킨 유일한 주교로 높은 신뢰와 사랑을 받았다.
그는 노르만족(Norman)의 학정에 대하여 공적으로 반대하고 항의하였다.
그는 32년 동안이나 교구를 다스린 위대한 주교였다.
그는 1203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Innocentius III)에 의해 시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