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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저우 여행6 - 옛날 남송 거리에서 송나라를 회상하고는 걸어서 허팡제로 가다!
2023년 11월 1일 항저우 彭埠(팽부) 역에서 원데이 패스를 15위안에 구입해 1호선을 타고
무역박람성을 구경하고는 다시 지하철로 항저우 올림픽 스포츠 엑스포시티(杭州奥体
博览城) 에 내려 항저우 스포츠 파크 경기장(奥体博览中心主体育场) 경기장을 구경합니다.
‘큰 연꽃’으로 불리는 주경기장과 ‘작은 연꽃’으로 불리는 테니스 경기장은 지붕이 회전식으로 열고
닫을수 있도록 설계돼 연꽃이 피어나는 모습을 나타냈으며 항저우와 베이징을 잇는
징항(京杭) 대운하, 량주(良渚) 고성 등 3개의 세계문화유산을 보유하고 있는 항저우는
아시안게임 마스코트 3개를 형상화해 ‘충충(琮琮) ’과 ‘롄롄(蓮蓮)’, ‘천천(宸宸)’ 을 만들었습니다.
다시 지하철을 타고 2정거장을 가서 장링루역에 내려 1호선으로 환승을 하여 4정거장을 가서는
딩안루역에 내려 D 출구로 나와 오른쪽으로 100여미터를 걸어서 오른쪽 거리로
우회전을 하니 건물이 오래되어 고풍스러우니 이른바 남송거리인 난쑹위제 (南宋御街) 입니다.
마음이 놓이니 문득 이헌재 스포츠 전문기자는 동아일보에 “올림픽 金보다 사랑 택한 자오즈민
‘남편과 함께 있는게 행복’” 이라는 기사를 올린게 떠오르는데.... 자오즈민 씨(60) 는
세계 최강 중국에서도 최고의 탁구 선수였다. 1986년 아시아경기 여자 단식에서
금메달을 땄고, 1988년 올림픽에서는 여자 복식 은메달과 여자 단식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창 전성기에 선수로서의 성공 보다 사랑을 택했다. 1989년 안재형 한국 프로탁구리그 위원장
과 결혼하며 탁구채를 놓게 된 것. 목표로 삼았던 올림픽 금메달을 따지 못한 채 은퇴한 그는
“아쉬움이 남아서인지 몇 년간은 대표팀에서 훈련하는 꿈을 꾸곤 했다” 고 말했다.
이후 한국 주니어 탁구 대표팀 코치를 맡았으나 출산과 함께 탁구와의 인연도 멀어지게 됐다.
이후 그는 잠시 탤런트 생활을 했다. 1996년 2월부터 6개월간 KBS에서 방영된 일일드라마 ‘며느리 삼국지’
에서 중국 베이징에서 시집온 며느리 역할을 맡았다. 자오 씨는 “한국말을 썩 잘하지 못할 때인데 대사가
많고 어려웠다.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그냥 대사 자체를 통으로 외웠다. 다시 하라면 절대 못 할 것” 이라 했다.
2000년대 초반부터 그는 중국에서 사업가로 변신해 크게 성공했다. 은퇴 후 지도자 생활을 하던 안 위원장
이 골프를 하는 아들 안병훈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미국, 유럽 등을 다니는 동안 자오 씨는 중국에서
휴대전화 연결음과 음악, 게임 등을 서비스하는 사업을 했다. 중국에서 유명인인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같은 서비스를 하는 회사가 많아졌는데, 우리 회사를 선택해 주시는 분들이 많았다” 며 웃었다.
약 20년간 떨어져 살던 자오즈민- 안재형 부부는 최근 집을 다시 합쳤다. 중국 사업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온 자오 씨는 “정말 오랜만에 한국에서 남편과 함께 있으니 막 결혼했을 때의 기분이 든다” 고 했다.
탁구로 맺어진 인연이지만 부부는 성향이 다른 편이다. 안 위원장이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는
스타일 이라면 자오 씨는 집에 있는 걸 선호한다. 안 위원장이 집에서 가까운
서울 서대문구 안산 봉수대를 맨발로 오르내리는 동안 자오 씨는 집에서 홈트레이닝을 한다.
그런 두 사람이 요즘은 안 위원장이 서대문구 신촌의 한 건물에 만든 ‘아이핑퐁 탁구클럽
(I Ping Pong)’ 에는 함께 간다. 자오 씨는 “탁구공이 빠르게 오가는 걸 너무 오랜만에
보니 처음엔 좀 어지러웠다” 며 “오랜만에 탁구를 즐기며 재미있게 지내고 있다” 고 말했다.
결혼한지 30년이 넘었지만 떨어져 있던 시간이 많았기 때문인지 두 사람은 알콩달콩 지낸다. 대화는 한국어와
중국어를 섞어서 한다. 가끔 말이 통하지 않을 때도 있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자오 씨는 “연애 시절
에도 서로 말이 안 통했지만 서로 사랑하게 됐다. 말이 아닌 느낌으로 서로를 잘 이해하며 살고 있다” 고 말했다.
자오 씨의 걱정은 자나 깨나 안 위원장의 건강이다. 그동안 건강검진을 제대로 받지 않았던 안 위원장은
자오 씨의 성화에 종합 건강검진을 받기로 했다. 자오 씨는 “남편과 함께 지내는 것 자체가 행복이다.
남편이 없으면 절대 못 산다. 그러기 위해선 건강해야 한다. 온 가족의 건강 말고는 바라는 게 없다” 고 했다.
송나라 건물들을 보노라니.... 1127년, 요나라를 멸망시킨 금나라는 송나라 수도 카이펑을 점령하고 천자인
흠종과 상황 휘종을 포함한 황족과 신하들을 포로로 잡아간다. 이로써 북송은 멸망 하였으며 금나라는
송나라의 신하 장방창(張邦昌)을 초제 (楚帝) 로 내세운 괴뢰 국가 대초(大楚) 를 세우고 군사를 철수시켰다.
새로운 천자로 옹립된 조구는 1127년 응천부 (應天府, 허난성 상추시) 에서 송고종으로 즉위해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하였으나 금은 대규모로 남하하기 시작했다. 금의 공격이 맹렬하여지자
고종은 응천부를 버리고 양저우(楊州), 항저우(杭州), 원저우(溫州) 등으로 고종은 계속해서 달아납니다.
이렇게 절망적인 상황은 1130년 남송의 명장 한세충이 1130년 4월 강중에서 최초로 금군을 대파하고 5월에는
악비가 금군을 대파했으며, 1133년 악비가 강광의 군도를 평정하자 1142년 진회의 협상으로 양국은
휴전했고 1162년에 금나라 해릉양왕이 재침을 계획했으나 남송의 명신 우윤문에게 채석기에서 가로막힌다.
이렇게 남송과 금나라 모두가 서로를 정복할 역량은 없는 상태에서 어느새 강성해진 몽골이 금을 압박
하기 시작했고, 남송에서는 금을 경제적으로 도와서 몽골을 막게 해야 한다는 주장과 금을 접수
하여 힘을 키워 몽골을 막아야 한다는 주장이 대립하게 되었다. 당시 여론은 후자가 우세했지만
어쨌든 남송은 양측 의견을 절충해서 금나라에 바치던 세폐를 끊지만 금나라를 공격하지는 않기로 한다.
그런데 남송이 조용하고 싶어도 금나라가 가만있질 않았다. 몽골에 패배해서 영토를 크게 잃은 금나라가
그나마 만만해 보이는 남송을 공격해서 자신이 잃은 만큼 뜯어낸다는 발상을 한 것. 아무리 순망치한
이라지만 남송이 고분고분 침공을 용납할 수 없던 건 당연했고 충돌에서 양측의 국력 소모는 극심해진다.
남송과의 싸움에서 처음에는 금나라가 대산관을 점령하는 등 선전하였으나 맹종정, 호재흥, 가섭 등에
의해 가로막혔다. 여기서 가섭은, 산동 일대의 홍오군과 연계하여 고토수복을 노리기도 했다.
결국 두 손 든 쪽은 몽골과 국경을 맞댄 금나라였는데 애종이 즉위하고 나서 남침 행위를 중단하고 송나라와
평화 협상을 제안하지만 남송은 금나라의 멸망은 돌이킬 수 없으니 괜히 금나라를 도와서 몽골을 자극
할 바엔 차라리 몽골과 우호관계 맺어서 전쟁 준비할 시간을 버는 게 낫다고 판단하여 몽골과 동맹을 맺는다.
게다가 상황이 나빠지자 금 애종도 결국 다시 남송의 사천 일대를 취해서 근거지를 확보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삼봉산 전투후 금 애종이 채주로 천도하였다. 그러나 채주에서도 버틸 수 없었고, 삼봉산 전투
에서 살아남은 무선이 사천 일대를 점거해 재기하려 했으나 맹공의 선무공작으로 인해 실패하고,
결국 전군이 복멸당하고 말았다. 그는 홀로 도주한 뒤 1234년 금 멸망 이후 몽골 수비병에게 잡혀 죽게 된다.
금나라와의 전쟁은 1234년 남송이 몽골 제국과 연합하여 금나라를 멸망시킬 때까지 계속되었다.
송은 뛰어난 관료제와 중앙집권화 성공, 풍성한 경제력, 꽤 넓은 국토, 많은 인구에도 불구
하고 군사력이 이상하리만치 실속이 떨어졌다. 실제 송의 국방력은 소홀했다고 보기엔
그 규모가 꽤나 방대했는데..... 송나라 후기의 병력수는 무려 126만명에 달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물론 이 병력은 송 인종 시기에 서류상의 병력이었고 실제 병력은 이보다 더 적다고 여겨지긴 하나, 그래도
결코 적은 규모는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다. 허나 현실은 이런 규모가 무색하게 실제 전투에서
송군이 승리한 횟수는 생각보다 많지 않았고, 특히 정복 왕조와 전쟁에서는 상당수가 처참하게 패했습니다.
이러한 문제가 생긴 원인 중 하나는 송 조정이 당나라 이래로 무인(절도사) 들의 힘이 강해
져서 통제를 잃어버리고 심지어 반란까지 일으켜 왕조를 갈아치우는 사태를
경험했기 때문에 이를 방지하기 위해 무관 대신 문관을 사령관으로 임명했지만....
문제는 이 문관들이 전투 경험이 없고 군대를 잘모르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이 크게 기여했다.
지휘관과 병사들이 서로 잘 모르는데다가 의견도 일치되지 않아 군대의 단합이 도무지 안되었던 것.
한 예가 바로 동관과 서희이다. 반면 한 · 당은 이세적, 이정 같이 사령관을 무관으로
임명하거나 군대를 잘 아는 문관을 임명했기에 흉노, 돌궐과의 전쟁에서 충분한 대응을 할 수 있었다.
그러고는 큰 문을 나서니 큰 도로와 마주치는데 여기서 부터는 이른바 河坊街(허팡제) 또는
淸河坊 칭허판) 이라고 부르는 거리인데..... 저 위쪽의 남송거리는 좀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였던데 비해여기는 화려하고 떠들썩한데 관광객들로 인산인해 입니다.
그러니까 여러 잡화들을 쇼핑을 하거나 음식점이며 놀고 즐길 거리가 가득한지라 관광객들이
마음 편하게 돌아다닐수 있으니 여행사에서도 이 거리에 사람들을 풀어놓는 모양입니다?
오래된 옛날 거리를 돌아다니며 이런저런 옛 기물들을 보노라니 문득 김상운 문화부 차장이 동이일보
‘광화문에서’ 라는 칼럼에 “韓中日 칠기에서 본 ‘문화변형’ 의 힘” 이라는 기사가 떠오릅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한중일 칠기(漆器) 특별전’ 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삼국삼색 (三國三色)’
이었다. 목기에 옻칠을 하는 칠기 공예품은 다른 문명권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동아시아
의 독특한 문화유산이다. 한중일 3국에서 자생하는 옻나무 수액은 다른 지역과 구별
되는 깊은 윤기를 띠어 신석기시대부터 목기를 장식하고 내구성을 높이는 천연 도료로 사용됐다.
중국 항저우 콰후차오(跨湖橋) 유적에서 발견된 칠궁(漆弓·옻칠을 한 나무 활)은 기원전 6000년경 제작된 세계
최고(最古) 의 칠기로, 중국에서 유래된 칠기 제작 기술이 한반도와 일본 열도로 전해진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특별전에 전시된 14∼19세기의 3국 칠기는 같은 뿌리에서 유래됐다고 보기 힘들 정도로
각기 독특한 멋을 자랑한다. 예를 들어 1부 전시의 백미로 꼽히는 중국
청나라 ‘조칠 산수· 인물무늬 운반상자’ 는 그 자체로 한 폭의 정밀한 산수인물도를 방불케 한다.
중국 특유의 조칠(彫漆· 여러 번 옻칠을 한 뒤 다양한 무늬를 새겨넣는 것) 기법에 따라 붉은색 옻칠
위에 산과 정자, 버드나무가 늘어진 정원, 산책하는 선비 등이 생동감 있게 표현돼 있다.
이에 비해 2부 전시의 꽃인 조선 시대 ‘나전 칠 쌍봉·매화무늬 옷상자’ 는 봉황을 둘러싼 자개
들이 모자이크를 이루며 영롱한 무지갯빛을 뿜어내 중세 유럽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를 떠올리게 한다.
3부에선 일본 무로마치 시대에 제작된 ‘마키에 칠 연못무늬 경전상자’가 옻칠 위에
금가루를 뿌려 장식하는 화려한 마키에(蒔繪) 기법의 정수를 보여준다.
불경을 보관한 상자답게 극락정토에 핀다는 연꽃을 잎맥 까지 정교하게 묘사했다.
한중일 3국 칠기의 이런 독특한 분화·발전은 문화에서 원형(原型)에 대한 모방 이상으로 자신의 시각
으로 이를 해석, 변형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후지와라 마코토
(藤原誠) 일본 도쿄국립박물관장이 이번 특별전 도록에서 “공통된 소재를 대하는 3국의 관점
차이가 (칠기에서) 다채로운 기법과 디자인이라는 결실을 이뤄냈다”고 평한 것도 비슷한 맥락일 것이다.
이는 비단 전통문화에만 한정된 얘기는 아니다. ‘주말의 명화’와 VHS 비디오 등을 보며 자란 한국의 ‘할리우드
키드’들이 최근 세계 콘텐츠 시장을 주름잡고 있는 데에는 인류 보편의 소재에 한국적 현실을 가미해
성공적인 문화 변형을 이뤄낸 영향이 크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달동네와 반(半)지하방, 한우
짜파구리 등과 같은 지극히 한국적인 소재로 사회 양극화라는 보편적 주제를 흥미롭게 다룬 것이 대표적이다.
최근 영국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오른 황석영의 ‘철도원 삼대’나 애플TV 드라마로 제작돼 주목받은
이민진의 ‘파친코’, 미국 하퍼콜린스가 2억 원에 판권을 사들인 이미리내의 ‘이름 없는 여자의
여덟 가지 인생’은 그동안 세계인들이 주목하지 않은 한국 근현대사를 정면으로 다룬 소설들이다.
엔데믹 이후 한국 영화의 흥행 성적이 저조하다.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강세와 스크린 독과점 등이 원인
으로 지목되지만, 올 5월 칸 영화제에서 경쟁부문에 초청된 한국 영화가 한 편도 없는 등 작품성이 예전만
못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삼국삼색의 한중일 칠기에 담긴 문화 변형의 힘이 다시 펼쳐지기를 기대해 본다.
오래된 거리를 둘러보다 보니 문득 성균관대의 이준식 교수가 동아일보
‘이준식의 한시 한 수’ 칼럼에 쓴 “이방인의 주점” 이란 글이 떠오릅니다.
서역 아가씨가 연 주점, 밤이면 시끌벅적 악기 연주 요란하다.
붉은 양탄자엔 초승달 달빛이 깔리고, 담비 털옷 손님들은 무서리 내린 정원에 앉았다.
옥쟁반에는 갓 썰어 온 잉어회, 금빛 솥 안에는 막 끓어오르는 양고기.
귀빈들은 자리 뜰 줄 모른 채, ‘낙세낭’ 노랫가락을 듣고 있다.
(胡姬春酒店, 弦管夜鏘鏘. 紅毾鋪新月, 貂裘坐薄霜. 玉盤初鱠鯉, 金鼎正烹羊. 上客無勞散, 聽歌樂世娘.)
―‘주점의 서역 아가씨에게 보내다(증주점호희·贈酒店胡姬)’ 하조(賀朝·당대 초중엽)
실크로드로 중원에 밀려든 서역 문화. 신장위구르에서 서아시아까지 아우른다. 호희(胡姬) 는 바로 서역
이나 북방 출신의 여인. ‘오랑캐 지역 여자’라는 뜻이다. 한족이 아닌 이민족을 얕잡아 부른 명칭이지만
이방인을 통칭한다. 이방인이 연 주점이니 음주가무를 도락으로 여겨온 선비들이 허기심을 품었음 직하다.
이백의 시에도 ‘(부잣집 자제들) 낙화 밟기가 끝나면 어디로 갈까. 시시덕대며 호희의 주점
으로 들어가지’ (‘소년의 노래’) 라 했고, ‘꽃처럼 어여쁜 호희, 봄바람 속에 술청을
지키고 있으니..… 그대 오늘 어찌 취하지 않고 돌아가겠소’ (‘술통을 앞에 놓고’) 라 했다.
이 주점의 분위기도 여간 별스럽지 않다. 요란한 음악, 붉은 양탄자, 번쩍이는 기물에 고급 음식 까지
곁들였으니 꽤 호화롭고 거한 자리다. 손님을 붙잡아두려는 듯 호희의 노랫가락이 한껏 주흥을
돋우고 있다. 남 얘기하듯 묘사한 것으로 보아 주점 풍경은 시인의 상상 아니면 귀동냥에서 나왔을 성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