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천함을 통해 일하시는 하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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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장실에서 최정숙. |
사랑의 빛
많은 사람이 정숙의 독신 생활을 궁금해했다. 비신자들은 호기심으로, 동료들은 열렬한 지지자로 불편해 하거나 응원해 주었다. 보통 중년의 나이가 혼인을 완전히 포기하기에 어중간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세월이 더해가면서 오히려 가족들은 그것이 정숙의 숙명인 양 받아들였다. 그리고 사회 활동을 넓혀가면서 많은 지인은 독신을 통한 신앙의 고결함을 존경하기에 이르렀다.
정숙은 아주 처음부터 지녔던 그 마음, 김 아나타시아 수녀와 이 곤자가 수녀의 손을 잡고 성모상 앞에서 가졌던 그 순수한 마음을 한 번도 잊은 적 없었다. 힘들고 막막할 때 그 시절을 떠올리면 힘이 솟고 미소가 배어 나왔다.
정숙은 언제나 성모님께 모든 이야기를 해드렸다. 이미 모든 것을 알고 계시지만 정숙은 자신의 생각과 고민과 마음을 성모님께 털어놓았다. 인자하신 성모님은 늘 정숙에게 든든한 위로가 되어 주셨고 자애로운 답을 주셨다.
정숙은 마음먹은 일이 도저히 해내기 어려울 때면 먼저 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정숙은 매주 토요일마다 고해성사를 보기 위해 학생들과 함께 고해소 앞에 줄을 섰다.
학생들은 성심이 넘치시는 교장 선생님이 매주 거르지 않고 고해성사 보는 것을 궁금해하면서도 한없이 존경했다. 정숙은 자신이 행정적으로 수도자가 되지 못했지만 주님과 성모님 앞에서 이미 처음부터 수도자였다.
정숙은 재속 프란치스코회 회원으로 광주 회합에 참석하기 위해 먼 길을 혼자 다녔다. 문득 정숙은 제주에도 마땅히 자신과 같은 신앙의 프란치스칸들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을 살펴보았다. 정숙의 생각이 옳았다.
어느 곳이나 주님의 손길을 찾고 함께하기를 소망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어떻게 주님과 만나는지 모를 뿐이고 주님의 빛을 기다릴 뿐이었다. 정숙은 자신의 일이 바로 이런 사람들을 모아 함께하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정숙은 신심이 깊은 신자들과 레지오 마리애를 조직하고 쁘레시디움과 꾸리아 단장을 맡아 활동했다. 많은 사람이 모였다. 정숙은 주님과 만나는 길에서 머뭇거리지 않았다.
갈 곳 없는 아이들
정숙이 신성여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유학을 강행하지 않았다면 공부는 그것으로 끝이었을 것이었다. 제주에는 진학할 학교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 시간이 많이 흘렀음에도 교육 현장은 달라지지 않았다.
여고가 없어 신성여중은 졸업생들을 그대로 맡아 고교 수업을 진행했다. 무리한 처사였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계속 공부하고자 하는 아이들을 고등학교가 없으니 학교가 생길 때까지 가정에서 가사를 돕거나 애를 보라고 할 수 없었다. 분명 학생들에게 학업을 계속하지 못하는 일이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정숙은 신성여고의 설립을 추진했다.
전쟁 직후라 모든 것이 어려웠다. 광주교구장 현 하롤드 주교는 전쟁의 혼란 속에도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공산당으로부터 신자들을 지키고 교구를 돌보았다. 현 주교는 그때 정숙과 신성여중이 보여준 아낌없는 희생을 직접 눈으로 보며 고마워했었다.
그래서 신성여고를 설립하고자 하는 정숙의 뜻을 힘을 다해 도와주었다. 마침내 신성여중은 신성여고를 설립하게 되었다.
일본제국에 의해 강제 폐교당한 신성여학교가 다시 문을 열고 유치원을 만들고 중학교에 이어 고등학교까지 설립하게 되었으니 사람이 계획해서 된 일이 아님을 다시 한 번 일깨우며 주님께 감사드렸다.
신성여고 초대 교장에 최정숙이 발령받았다. 중학교 교장 취임할 때의 거부감과 달리 모든 사람이 정숙을 마땅하다고 여겼고 정숙도 열악한 재정의 부담을 덜고자 흔쾌히 받아들였다.
하느님은 우리가 무언가를 하기 원하시면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방법과 수단도 주신다. 만일 수단과 방법이 보이지 않으면 그것은 주님이 바라시는 일이 아니었다.
정숙은 오랫동안 불가능한 일을 하나하나 해결하면서 섭리를 알게 되었다. 이렇게 하느님은 우리를 걱정하시고 배려하신다.
학교는 해마다 늘어나는 학생들로 교실이 턱없이 부족했다. 교재나 기자재도 마찬가지였다. 정숙은 그런 어려운 사정을 현 주교에게 가감 없이 부탁했다.
더러 학교 사업보다 성당 건립과 보수가 더 급하다고 불평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현 주교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이 나라에 무엇보다 교육이 우선임을 강조하며 정숙을 도와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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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황 훈장’ 받고 찍은 기념 사진. |
성모 성월
정숙은 학교 일로 문을 닫았던 정화의원을 다시 열었다. 학교 업무가 많아 거의 병원에 나갈 수 없었지만 문이 닫힌 병원 앞에서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이 무작정 정숙을 기다리고 있었다.
정숙은 그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 자신의 잠을 줄여서라도, 자신의 사적인 일을 줄여서라도 환자들의 아픔을 해결해 주어야 했다.
5월은 아름다운 성모 성월이다. 성모님은 예수님과 인간 사이에서 구원에 이르도록 중재해 주시는 분이다.
4월이 되면 천주교 신자들은 5월을 매괴 성월 또는 성모 성월이라 하여 거룩하게 보내기 위해 9일 기도를 하는 등 성모님을 더욱 특별히 모시기 위해 많은 준비를 한다.
1955년 4월, 정숙도 다른 신자들처럼 아름다운 성모님을 위해 묵상하고 기도하며 성모 성월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날 광주의 현 주교에게서 전화가 왔다. 곧 제주에 오겠다고 했다.
불과 한 달 전 신학기의 학생들을 축복해주고 가셨는데 무슨 일로 다시 오려는가 정숙은 잠깐 생각했다. 4월 10일, 미국 출장 중이었던 현 주교는 놀랍고도 기쁜 소식을 듣고 곧바로 귀국하였다.
가톨릭 신자로서 최대의 영예인 ‘교황 훈장’을 최정숙이 받게 된 것이었다. 제주로 온 현 주교는 교황을 대신해 최정숙 교장에게 ‘교황 훈장’을 수여했다.
학교장을 무보수로 역임하고 빈민 구제 사업과 병원 사업을 펼쳐 희생적인 가톨릭 정신을 모범적으로 보여 준 공로였다.
정숙과 함께 교황 훈장을 받은 또 한 사람이 있었는데, 목포 산정 교회의 김 바오로 옹이었다.
그는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교회를 지켰고 6ㆍ25 전쟁 때는 공산당의 위협에도 교회와 사제 신변을 끝까지 지키다가 총살형을 당했는데, 시쳇더미 속에서 기적적으로 되살아났다고 한다.
이 두 사람에 앞서 1951년 당시 장면 국무총리가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교황 훈장을 받았다. 두 번째는 6ㆍ25때 묵호 경비사령관을 지낸 백기조 해군사령관으로, 많은 동포를 구하고 교회를 보호한 공적이 커 훈장을 받았다.
정숙은 스스로 상을 받을 자격이 없고 그런 상에 대한 욕심도 없었다. 사실 그런 상이 있는 줄도 몰랐다. 상을 받으려고 한 일이 아니었다.
배우고자 하는 불쌍한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면 배움을 줄 수 있을까 고민하고 해결해 주려 하였다. 아픈 사람들을 보면 낫게 해주고 싶었다. 정숙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정숙에겐 오히려 그리스도로 보였다.
굶주린 그리스도에게 먹을 것을 드리고 배우려는 그리스도에게 배울 기회를 주었다. 아프거나 죽어가는 그리스도를 보살폈을 뿐이었다.
정숙은 스스로 아무것도 아니며 주님이 부르시기 전에는 하찮은 존재일 뿐이었다. 상을 받으실 분은 마땅히 주님이었다.
변하는 세상
아버지 최원순이 세상을 떠나자 정숙은 고령의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겉으로 보기에 연로하신 어머니를 나이 든 딸이 모시고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어머니는 바쁜 정숙을 대신해 살림을 돌보아 주셨다.
정숙은 버는 것마다 도와 달라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약품 대금은 늘 빚으로 남았다. 빚이 한바탕 모여 어머니가 알게 되면 조용히 밭을 팔아 갚아 주었다. 어머니는 빚이 있어도 내색을 하지 않는 정숙의 적자생활을 헤아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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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을 긷는 아이들 모습. |
1960년 5월 16일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 국가재건최고회의라는 정부기관이 생겨났다. 제주에도 현역군인이 도지사로 부임해왔다. 박정희 최고회의의장은 제주에 상수도를 보급하였다.
제주의 여성과 아이들이 눈만 뜨면 하는 일이 물 긷는 일이었다. 한참을 걸어 물 한 허벅(물을 길어 나르는 통, 제주도 사투리)을 지고 오는 고된 일이 집집마다 수도꼭지를 돌리면 맑은 물이 나왔다. 새로운 세상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