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70주년특집 9부작
박경석
한국전쟁문학협회 회장
국제PEN 한국본부 고문
제6부. 중공군 개입과 통일의 좌절
인천상륙작전과 함께 낙동강 전선에서의 총반격작전은 국군과 유엔군에 있어서 파죽지세(破竹之勢)라 할 정도로 승승장구 속전속결(速戰速決)의 여러 기록을 세웠다.
9월23일 이후 전선에서 북한 인민군은 후퇴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때부터 서부 전선에서는 유엔군이 경부 축선과 호남 우회로를 따라 진격했고, 국군은 중부와 동부 지역에서 중앙선 축선과 동해안로를 따라 진격하였다.
주공인 미 제1군단은 진격개시 3일만인 9월26일 22시에 오산 북방에서 인천상륙부대인 미 제7사단, 제31연대와 연결하였고 다음날인 9월27일에는 인천 상륙부대가 서울을 탈환하고 한국 해병대의 한 소대장이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하였다.
한편 동해안으로 북상한 육군 제1군단은 반격을 개시한지 14일만에 9월30일에 강릉을 지나 38선에 도달하였으며, 육군 제2군단은 이날 원주를 점령하고 38선을 향해 북상했다.
국군과 유엔군의 신속한 기동작전으로 혼비백산한 인민군은 그들의 퇴로가 차단된 채 많은 병력의 손실을 입어 2만3천여 명이 포로로 잡히는 등 전투조직은 거의 마비된 상태였다.
그러나 여기에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미처 철수하지 못한 일부 부대와 패잔병들이 지리산,오대산,태백산 등 산악지역으로 도피 잠입하여 그 후 게릴라전을 전개하게 됨으로써 후방지역 불안의 요인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38선 이남을 완전히 회복한 국군과 유엔군은 10월 1일을 시작으로 38선을 넘어 북한지역으로 총진격작전을 개시하였다. 이때의 기동계획은 미 제1군단이 주공으로서 서부의 사리원-황주를 경유하여 평양을 목표로 진격하고, 국군 제1군단은 중동부 전선 및 동해안 지역에서 원산 방향으로 진격하며, 국군 제2군단은 중부에서 평강-양덕을 경유하여 청천강선으로 진격하고, 미 제10군단은 원산에 상륙 후 그 일부를 서진시켜 서부전선의 미 제8군과 연결하는 것이었다.
이때에 북한군은 서해안 방어 사령부와 전선사령부가 38선 북방에 방어선을 설정하여 국군과 유엔군의 북진을 저지하면서 그들 철수부대를 수습하고 있었으나 그 저지력은 국군과 유엔군의 진격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국군과 유엔군의 북한지역 진격은 북한 인민군이 한강을 도하하여 남진했던 속도에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무풍지대를 질주하여 10월23일에는 청천강선인 회천까지 도달했다.
청천강선에 도달한 국군과 유엔군은 10월 24일 한·만 국경선을 향해 총진격전을 개시하였다. 이 진격은 작전이라기 보다 부대 이동에 가까울 정도로 순탄하게 이루어졌으며 모두 통일이 눈앞에 다가왔다고 낙관하고 있었다.
10월 25일, 국군과 유엔군이 박천-울산-온정리 회천을 연하는 선까지 진출하였을 때 불의에 중공군의 기습을 받게 되었다. 국군은 물론 미국의 정보기관이나 미군의 군사정보 기관에서도 중공군 개입에 관한 사전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한국전쟁 발발 최초의 상황처럼 전혀 캄캄한 상태였다.
일부에서 소련이나 중공의 군사개입을 염려하는 소리도 가끔 있었지만 미군 당국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중공군 대부대는 울산, 온정리, 회천 방면으로부터 은밀히 침투하여 국군 및 유엔군 공격부대를 후방에서 차단하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10월26일에는 육군 제6사단의 전투부대가 압록강변 초산에 도달하였으며 서부 지역의 미 제1군단 예하 미 제24사단은 11월1일에 신의주 남방 27km 지점인 정거동까지 진출했다.
중공군은 국군과 유엔군의 진격에는 개의치 않고 후방 깊숙이 침투를 계속하고 있었다. 중공군은 그들의 관용전술 (慣用戰術:usage tactics)인 「후방 치단 후 포위하여 뒤통수를 치는 전법」을 구사하기 위해 은밀히 움직일 뿐이었다.
그 수조차 정확히 알 수 없는 중공군의 기습공격으로 국군과 유엔군은 순식간에 혼란에 빠졌다. 공세가 좌절된 것은 물론 병력과 장비의 손실이 막대하였다. 통일을 눈앞에 두고 흥분에 들떠 있던 국군에게는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다. 생전 듣지도 못한 이상 야릇한 피리소리와 함께 징, 꽹과리, 북 등을 치며 사방에서 공포심과 함께 혼을 빼는 소란을 피워가며 포위망을 좁혔다.
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의 참전으로 야기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자 중공군 지역에 대한 공중공격을 강화하는 한편 후방으로부터 미 제9사단을 청천강선에 추가로 투입하여 전력을 보강하고 11월24일을 기하여 다시 총공세를 폈다. 이때까지도 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의 참전규모와 그들의 기도를 정확히 판단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당시의 중공군을 과소평가하여 국지적인 전투임무를 띤 제한된 병력으로 오산하고 있었다.
유엔군의 판단과는 달리 중공군의 규모는 추정수의 10배가 넘는 6개 군단 18개 사단 규모의 1차 투입병력에다 추가로 12개 사단이 증강되는 등 무려 30개 사단, 42만명의 대병력이었다. 이에 국군과 유엔군의 공세는 무참히 꺾이고 11월30일을 고비로 철수가 가속화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이때부터 전선은 교착상태로 전환되고 있었으며 전투는 국지전 형태에서 피아 소모전만 반복하게 되었다.
이렇게 됨으로써 한국측은 실망과 좌절에 빠지게 되었다.왜냐하면 국토통일의 기회를 상실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측에 강력한 항의를 하는 한편,국군만의 북진 결행으로 사태를 반전시키겠다고 위협했지만 미국의 국익과 세계 여론이라는 두 장벽에 부딪쳐 우리의 염원은 관철되지 못하였다. 이는 한국과 한국인에 있어서 비극의 또 다른 시작이었다.
첫댓글 박경석장군님 반갑습니다.
실록 그날을 읽어보
았던 세대입니다.
초등학교때는 용영일
중대장과 이재태중대장의 월남전 참전수기를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최근에는 구글어스나
지형정보체계를 이용하여 북한 지형을 살펴보는데 무척 험한 산악지형
인데 북한으로 진격시 도로만을 이용하여 진격했던 안일함을
생각하게 됩니다.
양쪽은 가파른 산악
지형이고 길은 외길
인데 차단되거나 포위되었을때를 생각하지 못한 지휘력의 부재에도 생각이 미칩니다.
조금만 더 신중했으
면 어땠을까? 통일에 대한 강박이 없이 현실을 직시하는 예리함을 갖추었으면 어땠을까도 생각해
봅니다.
좋은 글 잘 읽고 있어
감사드립니다.
반갑습니다.
용영일 대위, 이재태 다위를 기억하다니 대단한 가역력이네요.
참 군인이지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