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글라데시 오지에서 10년간 사랑과 희망의 전도사 역할을 감당했던 박세종 선교사가 2051년 1월 14일, 새벽 5시 35분. 세브란스 병원 중환자실에서 영원한 안식에 들어갔다. 향년 66세.
故 박세종 선교사는 제2의 이태석 신부, 벵골의 성인이라 불리는 등 한 평생 소수자와 한국의 이주자들의 인권향상을 위한 일에 평생을 바쳤다. 특히 그가 방글라데시로 떠나기 전, 안산 이주노동자들의 인권향상의 투쟁을 담은 자서전 ‘사랑해, 알리(I love you, Ali)’는 이미 우리에겐 다문화 사회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서로 널리 알려져 있다. 또한 이 책은 우리에게 사랑의 실천, 즉 행함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깨닫게 해준 책이라 할 수 있겠다.
고인이 이주자와 동남아시아를 품을 수 있게 된 때는 그의 대학시절로 돌아가야 한다. 그가 처음 이주노동자와 한국의 다문화 사회에 대한 비전을 품고 발을 내딛은 곳은 경산에 위치한 경산이주노동자센터(현, 경북 이주노동자연대 본부) 부터였다. 그는 그 곳에서 만 2년간 활동하며, 이주노동자와 함께하는 한국 사회를 꿈꾸게 되었다. 그는 한글교육과 노동 상담일을 하며,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제대로 찾지 못하는 현실과 찾아주지 않는 한국 사회에 분노하였으며, 남이 하지 않는다면 자신 스스로가 먼 이국땅까지 일하러 온 이들을 평생 섬겨야 하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그는 이러한 다짐으로 법률가의 뜻을 품게 된다. 당시(2012년)는 한국 법률사회에 로스쿨제도가 도입되던 초창기였기에 로스쿨에 대한 주위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뜻을 위해 당당히 서울대 로스쿨에 합격하게 된다. 서울대 로스쿨에서 노동법과 국제인권법을 전공한 그는 안산에서 본격적인 이주노동자와 이주여성에 대한 인권향상 운동에 뛰어들게 된다. 처음엔 무수히 많은 로펌에서 제의가 들어왔지만, 그의 완곡한 뜻을 꺾을 순 없었다. 당시 회고는 그의 저서 ‘사랑해, 알리’에도 잘 나타나있다. “법무법인 로고스 대표 한모 변호사가 나에게 직접 찾아왔다. 연봉 1억이상에 플러스 알파. 하지만 나는 그의 달콤한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나에겐 평생 품은 소중한 큰 꿈이 있었기 때문이다.”
안산에서의 이주민에 대한 권리운동은 ‘이주민과 함께하는 착한 사회 만들기 운동’을 통해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다. 이 운동의 결실로 이주노동자의 정주권이 실현되었으며, 그들의 대표가 안산 시의원에도 당선되는 등의 믿기지 않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이주노동자 출신 첫 정치가인 무하마드 알리(한국명, 김알리)씨가 당선된 것은 한국 정치사에 길이 남을 사건이라 할 수 있겠다. 그에게도 몇 번의 정치출마 건의가 있었지만, 매번 정치출마의 뜻을 마다한 그는 그 시점부터 선교사의 길을 본격적으로 준비하게 된다.
장로회 신학대학원을 졸업한 그는 변호사가 아닌, 선교사라는 이름으로 자신이 가야할 곳, 평생 품고 있었던 동남아시아로 떠나게 된다. 여러 교회와 사회단체, 이주노동자연대의 후원으로 방글라데시의 한 작은 마을에 학교를 설립하게 된다. 이 학교는 단순히 배움의 목적보다는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에 대한 근본적 성찰을 먼저 하게끔 먼저 아이들에게 가르쳤다. 또한 예수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 작은 교회를 지어 단순히 종교적 건물이 아닌, 빈민 구제소의 역할을 병행하게 하였다.
사랑의 실천자 故 박세종 선교사는 평생을 남에게 자신을 드러내 보이는 삶을 원치 않았다. 현대인들은 저마다의 노력과 실력으로 남보다 앞서는 자가 되기 위해 애쓴다. 경쟁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살고 있다. 이러한 세상 속에서 故 박세종 선교사의 생애는 모든 사람들이 본받아야 할 바람직한 삶을 살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이러한 변할 것 같지 않던 대한민국도 변화의 바람들이 일고 있다. 이주민들이 직접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제도와 기관이 생기고, 자신들의 의사를 대변하는 정치인도 뽑혔다. 또한 서울에는 그의 뜻을 기리는 사람들이 십시일반 후원하여 세종 재단(Se Jong Foundation)이 설립되었다. 이 재단은 앞으로 방글라데시를 비롯한 동남아시아의 교육과 한국의 다문화 가정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노력할 것이다. 항상 정의와 사랑의 실천을 강조해 온 故 박세종 선교사. 그는 죽었지만, 그의 뜻은 아직 남아 이 세상을 환하게 비추고 있는 것이다.
사단법인) 세종 재단 후원문의 : 02-000-0000
첫댓글 세종씨, 세종재단은 서울 말고 053 지역에 두는 게 어떨까?
사회에 '분노'하였다... 좋네요.. 공부하는 것도 분노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제가 지금 공부하는 목적이죠 사회에 대한 분노ㅎㅎㅎ부족한 글이라 부끄럽습니다 ㅠㅠ
형 제목을 보고도 전혀 어색함이 없었어요. 지금도 이주민을 위해서 활동하는 형을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2의 이태석 신부가 아닌 또 다른 이태석 신부로 형의 꿈과 뜻과 애정과 열정을 보여주세요^^
다음에 누군가의 세종씨의 삶을 보고 "제 2의 박세종 선교사"가 되겠다고 할것만 같습니다. :)
과찬이십니다 ㅠ 사실 이 글을 손 좀 봐야하는데 ㅠㅠ
울지마 톤즈처럼 또 다른 톤즈가 있을 겁니다. 후우... 이 친구가 나중에 저 세상에서 형을 만난다면 형께선 뭐라 얘기하시겠어요? ㅎㅎ
이곳은 영원히 고통받지 않고 기쁨과 행복만이 가득한 곳이니 이제 울지마! 라고 할거야 ㅎㅎ
세종재단에도 후원을 해야겠군요 ㅎㅎㅎ 꿈꾸는 그대 멋집니다.
좋아요 ㅎㅎㅎㅎ 근데 평소에 약자를 위해 살면서도 조명받지 않겠다는 마음가짐은 이제 사라진건가요
튀지 않으려 많이 노력하는데~ 그렇지 않게 보이나봐?? ㅋㅋ 아직 나도 많이 부족하지 ㅠㅠ 기도해줘 ㅎㅎ
마지막 순간까지 진지한 삶을 살았던 형은 영원히 재미없는 순위 1순위입니다! ^^ 당신의 선교활동을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
고마워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