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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재밌어서 잠 못 드는 세계사
이 책은 일본 최고의 입시학원에서 스타강사로 활동 중인 우야마 다쿠에이(宇山卓榮)가 2016년에 쓴 것인데, 3년 뒤인 2019년 12월에 우리나라에서도 출간되었다. 저자는 자신을 소개하듯이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역사의 본질을 공부하려면 난해하고 두터운 학술서나 전문서적의 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일반인에게는 너무 높은 장벽이지요. 독자에게 역사의 본질을 알기 쉽게 전하는 한편 수박 겉핥기식으로 너무 단순하지 않고, 또한 물렁거리지도 않으면서 딱딱하지도 않게, 아쉬움이 남을 만큼 짧지도 않고 지루할 만큼 길지도 않게, 그렇게 균형을 맞춘 세계사 해설이 바로 이 책입니다.”라고.
사실 세계사는 아주 복잡하고 길기도 하다. 왕조를 보다 보면 백성의 삶이 궁금해지고, 전쟁사는 재미있지만, 결과가 점점 궁금해지고, 고대는 고대대로, 중세는 중세대로, 근대는 근대대로만 볼 수 없게 만들기도 한다. 모든 역사는 영속되기 때문에 그렇다. 복잡다단(複雜多端)한 이야기를 정말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세계사라는 역사에 대해 궁금증을 가지는 것만도 재미라면 재미 아니겠는가 그런 생각을 해본다.
어렵고 귀찮은 역사 공부를 왜 할까? 과거를 알고, 현재도 알기 위해, 현재를 살아가는 교훈을 얻기 위해, 우리의 뿌리를 알기 위해? 그 역사 교훈이 현실에서 도움이 될까?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것은 착각일 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저자는 말한다. 역사 속의 위대한 위인들의 행동과 사고방식은 흉내도 내기 힘들뿐더러 귀감으로 삼기에도 벅차다. 과거의 인물과 사회적 패턴을 알게 되면 미래를 예측해 볼 수 있다고 하는 주장은 일리 있어 보이지만, 역사의 패턴과 법칙을 미래에 어떻게 적용할지는 전적으로 개인의 판단력에 따른 문제이지 역사를 알고 모르고와는 다른 문제다. 역사 속의 전쟁 패턴을 알고 있다고 해도 이번 전쟁에서 정확히 판단 내리기는 어렵다. 마찬가지로 과거의 정치사를 연구했다고 유능한 정치인이 된다는 보장도 없다. 그렇지만 과거가 판단의 기준이 되기는 할 것이다. 따라서 역사는 리더 양성을 위한 커리큘럼(curriculum-체계적으로 만든 교육 내용 및 학습 계획)을 하나로 묶어낸 ‘제왕학’이라고 부를 수는 있을 것이다.
역사를 읽는 데는 전제 조건이랄까 거의 똑같이 반복되고 되풀이되는 행동양식(패턴)이 있다. 그것은 이미 부를 획득한 풍요로운 세력은 부를 지키기 위해 현재 사회 시스템을 유지하려고 하고, 반대로 가난한 세력은 부의 획득에 실패했기에 현재 사회 시스템을 부정하고, 새롭게 부를 분배받을 기회를 노리게 된다. 이 둘을 보수파와 혁신파로 나누기도 하는데, 보수파는 우파, 혁신파는 좌파라고 부르기도 하며 요즘엔 진보라고 바꿔 부르기도 한다.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 당시 의회에서 의장석을 바라보고 오른편에 보수파인 부유층이 앉고, 왼쪽에 빈곤층 혁신파가 앉는 경우가 많았기에 우파와 좌파로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근·현대에 와서 우파는 자본주의·자유주의, 좌파는 공산주의·사회주의라는 속성을 띄게 되면서, 우파인 부유층은 자유경쟁을 통한 자본주의를 원하면서 사회적 강자로 군림하고, 좌파 빈곤층인 약자는 사회적 격차를 인정하지 않고, 높은 곳에 군림하는 강자를 끌어내려 평등한 세상을 만들겠다고 하므로 공산주의 사상과도 상통하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이 둘의 대립은 단순히 분리하기 어려운 요소들이 많으며 또 정의 자체도 다양화되는 추세다.
근대 이후에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이데올로기로서 고도의 학술이론을 끌어들여 사회적인 부를 분배하는 방법이 저마다 합리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고대나 중세에는 칼을 휘두르며 부의 분배를 놓고 다투었던 인류가 이제는 이데올로기로 싸우고 있는데, 이것은 마르크스의 말대로 역사는 ‘계급의 대립’이라는 축으로 움직여왔다는 것을 실감하기에 충분하다. 어쨌든 보수와 혁신은 역사를 이끄는 두 축이 되고 있다.
인류의 역사를 흔히 고대, 중세, 근세, 근대, 현대, 이렇게 다섯 시대로 구분하는데, 이것은 서양사에서 지배 계급 변동을 기준으로 나눈 것으로, 그리스·로마 시대 이전을 고대,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476년을 기점으로 이후를 중세로 보는데, 중세는 유럽에 기독교가 성행하면서 종교지도자인 교황이 강한 권력을 행사하던 시기이며, 교황은 종교뿐 아니라 속계(일반사회)에도 영향력을 미쳤고 국왕 또는 황제와 대립하였다. 중세는 혼돈의 시대라고 하여 1천 년이나 지속되어 ‘암흑의 시대’로 불리기도 한다. ‘교황, 국왕·황제, 제후’라는 세력 속에서 국왕이 절대권력을 차지한 뒤에는 ‘짐이 국가다’라고 한 루이 14세를 거쳐 17∼18세기를 근세로, 부르주아(생산 수단을 소유하고 노동자를 고용하여 기업을 경영하는 자본가 또는 제3계급을 형성한 시민 계급과 부자들)가 득세한 18∼19세기를 근대,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1918년 이후는 현대로 분류한다.
‘암흑의 시대’인 중세는 ‘칼의 시대’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힘의 시대였으며, 신흥 세력인 부르주아가 절대주의 왕정을 지원하면서, 시장을 통제하고, 법체계를 정비하고 상거래 규칙을 정하고, 화폐·금융 정책을 안정시키고 관료제 행정기능까지 갖춤으로써 부르주아는 자본가 계급으로 사회를 이끌었다. 국왕의 권력은 재정 부담자인 부르주아 세력에 의해 탄생 된 것이다. 자본주의 발전이 부르주아 계급의 성장을 부추기면서 그 결과 시민 계급이 확장되고, 이권에 불만을 품은 이들에 의하여 시민혁명이 촉발되어 시민 세력으로 왕권을 타도하기에 이르게 되며, 근대와 현대의 구분은 여러 관점이 있기는 하나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를 현대로 보는 것이 보편적이다.
【고대】
고대라고 하면 그리스·로마와 중국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의 영향이 지금도 세계역사에 미치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 시대의 삶이 오늘날까지 영향을 주기 때문일 것이다. 처음부터 백인이 유럽을 지배한 것은 아니었다. 백인이라고 하면 당연히 서구인을 떠올리지만, 당초 백인은 중앙아시아에 살고 있었다. 기원전 2000년 무렵 이들이 남쪽으로 이동해 오리엔트(아라비아)에서 유럽으로, 일부는 인도로 내려갔다. 인류사에서 백인은 ‘인도·유럽계’로 지칭되는데, 이들의 뿌리는 동일하다. 인도· 유럽계 백인을 ‘아리아’인이라고 부르는데 ‘고귀한’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유럽에 사는 백인은 아프리카에서 곧바로 유럽으로 진출한 인류가 아니라 중앙아시아에서 오리엔트를 거쳐 유럽으로 갔다는 말이다. 후에 인도·유럽계 백인은 각자 독립해 소아시아의 아나트리아 반도에 정착해 일부는 ‘리디아’왕국을, 일부는 이란 쪽에서 가서 ‘메디아’왕국을 건설했다. 리디아 왕국은 가장 오래된 화폐를 만들기도 했는데, 금·은으로 합금된 이 화폐를 사용함으로써 원시 물물교환 방식에서 신용 거래가 가능해졌다. 또 메디아 왕국은 페르시아로 이어져 오리엔트 전체를 통일하고 1천 년을 지속하였으며, 7세기에 이르러 무함마드가 이슬람교를 만들면서 아랍 정권이 들어서고 아랍인이 패권을 잡았다.
아랍인 페르시아와 유럽인 그리스의 전투인 ‘마라톤 전투’와 지중해 패권을 두고 로마와 가르타고(한니발 장군)가 300년간 지속된 ‘포에니 전쟁’과 알렉산드대왕에 의한 세계정벌을 거치면서 로마가 지중해를 장악하기까지 역사는 물결처럼 도도히 흘렀다. 로마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황제들일 것이다. 절대권력을 가진 황제는 어떻게 탄생했을까? 율리우스 카이사르(영어 시저)는 개인 군대의 장군이었는데, 그는 부자들에게 스폰스가 될 것을 권유해 그들에게서 나온 투자금으로 군대를 키워 차례대로 외지 정복에 성공했다. 민중의 지도자로 부상했고, 스폰스였던 부자들과 원로원 세력까지 제압해 독재 권력을 거머쥐었다.
기원전 46년. 카이사르는 특권과 기득권을 차례로 빼앗아 자신의 휘하 지휘관들에게 배분했다. 이에 격분한 브루투스를 비롯한 원로원 세력들에 의해 그는 암살당했다. 와중에 카이사르의 양자 옥타비아누수가 반대파를 숙청하고, 민중의 분노와 불만을 잠재우는 한편, 원로원 세력으로부터도 협조를 얻어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얻었다. 미묘한 정치 상황 속에서 마치 유리공예를 다루듯이 정밀하게 정치체계를 만들어낸 옥타비아누스는 양부인 카이사르처럼 암살당할지 모른다는 우려를 갖고 있었다. 그는 다른 이들이 자신을 황제라고 부리지 못하게 하고, 대신에 ‘프린켑스(princeps-원수)라고 부르게 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로마제국 초대 황제였는데, 스스로 자제하는 모습에서 진시황과는 차이를 보이지만 결과는 같을지 모른다.
로마 후기에는 너무 비대해지자 4명의 황제가 다스리게 되기도 되는데, 이런 사분오열을 재통일한 황제가 콘스탄티누스다. 그는 서쪽을 포기하고 동쪽 지금의 이스탄불을 콘스탄티노플로 이름하고 동로마를 지배했다. 이 무렵 이미 커질 대로 커진 기독교는 황제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황제는 이에 기독교의 보호자를 자처했고, 313년 기독교를 공인했다. 당시에는 예수를 신으로 할지, 아니면 신의 음성을 들었다는 초능력을 지닌 사람을 신으로 할지, 의견이 분분했는데 제국의 입장에서 예수를 신으로 만드는 게 유리하다고 생각했다. 형상이 분명하지 않은 신을 대신할 모습으로 예수를 선택한 것이었다. 예수를 신으로 보는 세력을 정통파로 인정한 것이다. 카톨릭은 ‘정통’이라는 라틴어다.
라틴어를 쓰는 사람들을 라틴인이라고 하는데, 로마인과 그 후예들을 가르킨다.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인으로 이들은 로마제국 시대에 문자를 통일하였고, 알파벳을 사용하던 것을 라틴어로 정착시켰다. 로마의 남동쪽 지역인 ‘라티움’의 언어라는 뜻이다.
유럽에 비해 중국은 조금 더 쉽게 다가온다. 《전국지》, 《삼국지》등 고전의 역사와 연결되기 때문일 것이다. 하·상·주에 이어 기원전 4세기 상앙(商鞅)이 진나라 재상으로 등용되면서, 다른 나라들이 공자의 덕치주의를 떠받드는 것과 달리 법치주의를 채택했는데, 인간의 심성을 악으로 간주해 가만히 두면 악을 행한다는 전제하에 죄악을 행하는 자는 벌하고 공적이 있는 자는 상을 내리는 ‘신상필벌(信賞必罰)’원칙 하에 나라를 안정시켰다. 진나라는 국민들의 지지에 힘입어 마침내 기원전 221년 전국시대를 끝냈다. 법가주의자인 이사(李斯)가 재상이 되어 강력한 중앙집권정책을 시행해 보수, 기득권층을 억압함으로써 저항에 부딪치기도 했다. 진시황 사후에는 큰 혼란에 빠져 민중의 봉기가 일어났고, 내란 속에서 항우와 유방이 등장하였으며 기원전 202년 漢왕조가 탄생해 이후 400년간 이어졌다. 유방은 천하를 하나로 묶지는 못했는데, 제후들이 할거하고 사분오열된 상태로 천하통일은 겉모습뿐이었다. 기원전 154년에는 흉노의 공격을 받아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난이 일어나기도 했으나, 경제(景帝)가 영리하게 이를 진압했다. 이어 아들 무제(武帝)로 이어진 뒤에야 국력이 신장되었다. 이때가 바야흐로 종이가 발명되고, 사마천이 《사기》를 쓴 시기다.
고구려와 여러 번 전쟁을 치르기도 했으나, 결코 이기지 못한 수양제는 대운하를 건설하고 축하하는 자리에서 백성들의 노고를 치하하기는 커녕 뱃놀이를 즐기고 대단히 오만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승자의 기록일 것이다. 양제는 관료제를 정비하고 균전제(均田制)를 시행해 호족들이 소유한 토지를 몰수해 백성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는 파격적인 정책을 추진했다. 또 우리가 고려 때 시행한 ‘과거제’를 도입하여 인재를 등용하기도 했으나, 618년 양제가 궁궐을 비우고 강남을 시찰하던 중에 중신이었던 이연(李淵)과 그의 아들 이세민(李世民)이 배신하여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었고 양제는 암살당했다. 부당한 쿠데타로 인해 폭군으로 취급된 양제(煬帝)의 본명은 양광(楊廣)인데, 楊과 거리가 먼 ‘하늘을 거스른다’는 의미의 煬자를 썼다.
【중세】
중세는 고대 농촌형 경제가 도시형·상업형으로 발전한 시기다. 종교가 가장 결렬하고 두드려진 시기이기도 하다. 유럽은 서로마 제국 계승자로 신성로마 제국(독일·오스트리아)이 생기고, 동로마 제국(비잔틴 제국)후계자로는 로마노프 왕조(러시아)가 생겼다. 신성로마 제국을 이어받은 합스부르크(독일)가문, 호엔촐레른(오스트리아)가문, 로마노프(러시아)가문, 이렇게 세 가문만이 황제의 가문으로 전통을 잇는다. 프랑스 태양왕 루이 14세나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은 아무리 이름을 떨쳤어도 황제가 아닌 ‘왕’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들은 로마를 이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9세기 발트해 연안에서 노브고로드 왕국이 건국되는데, 이는 러시아의 모태가 된다. 노르만인 루스 족이 나라를 세웠는데, 러시아의 어원이 이 ‘루스’에서 비롯된 것이다. 도버 해협에서는 현지인과 노르만인의 복잡한 싸움을 거쳐 1066년 노르만 왕국이 세워졌으며, 이것이 영국의 모태가 되었다. 노르만 왕국은 도버 해협을 끼고 영국과 프랑스에 걸쳐 있었던 나라다. 영국이 프랑스 북방을 소유하고 혼인을 관계를 잇다가 백년전쟁으로 이어졌는데, 영국이 프랑스에 왕위와 영토를 요구한 때문이었다.
중세 영국에서는 산업혁명이 일어나게 되는데 원동력이 무엇이었을까? 영국은 프랑스와 달리 토지가 척박해 농업에 적합하지 않아 양을 키우는 목축업이 성행했다. 영국산 양모는 당시 첨단 기술 왕국이었던 폴랑드르(벨기에)에 수출하여 제품화되었다. 두 나라는 강한 연대감이 존재했다. 영국은 프랑스의 영향력을 배제하고 양모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이익을 챙길 수 있었다. 백년전쟁이 발발하자 폴랑드르 양모업자들이 대거 영국으로 건너와 직접 양모를 생산하고 제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전쟁이 시작된 1339년 이전 영국은 원료수출국일 뿐 후진국이었지만, 1350년 이후에 폴랑드르 기술자가 영국으로 건너오면서 모직 제품이 영국에서 생산 제조되어 수출되기 시작했다. 1453년 전쟁이 끝나자, 모직물 수출이 급증하여 영국은 선진 무역국으로 변모했다. 이 과정에 네덜란드가 중개무역업으로 큰 부를 쌓았으나, 독일과 이탈리아는 19세기에 이르기까지 국가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분열 상태였다.
지금의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유대교·기독교를 기반으로 이슬람교가 생겼는데, 이슬람은 어떻게 중동을 지배하는 종교가 되었을까? 그곳은 왜 지금도 자꾸 싸우는 것일까? 세계종교 중 가장 신도 수가 많은 종교는 1위 기독교(33%), 2위 이슬람교(22.4%), 3위 힌두교(13.8%), 4위 불교(6.7%)이다. 이란·이라크 지역에 존재한 사산 왕조 페르시아가 6세기 비잔틴 제국(동로마)과 격렬한 전쟁으로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교역 루트가 끊기자, 아라비아반도 서해 홍해 연안 지역인 히자즈(헤자즈)를 경유해 인도에 이르는 루트가 개발되었다. 히자즈 중심 도시인 메카는 중계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여 번영했다. 경제발전에도 빈부격차는 심화해 주민들의 불만이 팽배했는데, 이때 무함마드가 유일신 알라에 귀의하라고 설교하며 이슬람을 창시했다. 그는 명문 쿠라이시족의 거부였으므로 많은 재물을 풀었고, 알라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고 했다. 610년 포교를 시작한 그는 622년 이슬람을 경계하던 지배층과 부유한 상인들의 탄압으로 메카에서 메디나로 피난했다. 이것을 헤지라(성스러운 이동)라고 하는데, 이 해가 이슬람교 원년이다. 메디나에서 세력을 규합한 무함마드 일파는 630년 메카를 점령하고 지배층을 몰아냈다. 이 성공한 쿠데타로 아라비아반도 전역을 통일하기에 이르렀다.
무함마드 시대는 기독교도를 ‘경전의 백성’이라고 하여, 적대시하지 않았으나, 사산 왕조를 정복한 이후에는 기독교를 정복하는 것이 일종의 지하드, 즉 ‘성스러운 전쟁’으로 받아들이면서 이슬람의 군사적 팽창은 멈출 수 없었고, 기독교를 말살하는 것이 목표가 되었다. 최고의 군단을 거느린 이슬람의 ‘무아위야’장군은 마음먹으면 천하를 빼앗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독실한 무아위야였지만, 그런 유혹을 버릴 수는 없었다. 이슬람이 팽창한 가운데 4대 칼리프(후계자, 대리인)인 알리가 암살당했다. 무아위야는 661년 왕조를 세우고도 칼리프는 배제했다. 그는 673년 비잔틴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했지만, 워낙 수비가 단단해 공성에 실패했다.
유럽 정벌을 위해서는 비잔틴 제국 점령이 필요했지만, 실패함에 따라 698년 비잔틴 영토인 카르타고를 점령해 교두보를 확보하였고, 711년에는 스페인을 점령해 서유럽과 대치했다. 서유럽은 사분오열되어 단합이 어려웠으나, 732년 프랑크족 카를 마르텔이 투르-프와티 전투에서 우마이야 군대를 격파했다. 그는 마르텔의 손자로 서유럽을 통일한 ‘카롤루스’ 대제였다. 카를루스는 이슬람의 위협이 극에 달했던 시기에 서유럽을 단결시켰다. 750년 우마이야 왕조는 붕괴하고, 아바스 왕조가 건국되었다. 아바스는 이란의 전신이다.
아바스 왕조는 군사 국가가 아니었다. 팽창주의 한계를 반성하고, 경제성장에 정권의 구심력을 유지하려고 애쓰며 군사력을 줄였다. 그러나 아바스 왕조는 시아파를 탄압했다. 시아파는 4대 정통 칼리프 알리를 신봉하던 소수파이고 알리는 무함마드의 딸 파티마의 사위로 그의 자손들은 정통 칼리프를 인정하라고 요구했다. 이바스는 다수파인 수니파가 지배했는데, 아마이야 왕조부터 시아파를 탄압했지만, 이바스 왕조는 중앙집권적 독재가 심해지면서 시아파에 대한 탄압이 거세지자 시아파는 아라비아반도를 떠나 이집트로 피신했고, 10세기 이집트에서 파티마 왕조를 세우고 아바스 왕조에 대항했다.
11세기에는 투르크인의 셀주크 왕조가 아바스 왕조의 실권을 빼앗았다. 하지만, 12세기 셀주크 왕조도 내부 분열로 붕괴되고, 13세기에는 피폐한 이슬람권과 멀리 떨어진 동방의 몽골인이 쳐들어왔는데 칭기즈칸의 손자 홀라구는 중동 지역에 ‘일한국’을 세우고 이슬람을 지배하기도 했다. 이슬람 지도자를 칼리프와 술탄이라고 부르는데, 칼리프는 무함마드의 후계자라는 뜻이고, 술탄은 1055년 셀주크 왕조가 시아파 왕조를 무너뜨렸을 때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로부터 받은 칭호로 ‘황제’라는 뜻이다. 칼리프는 이슬람의 성스러운 권위를 지닌 지도자, 술탄은 속세의 실질적인 지도자의 역할을 분담한 것이다.
907년 당나라가 분열로 망하자 혼란의 시대가 찾아와 5대 10국 시대를 맞았으나 이를 수습한 조광윤은 송나라를 세워 포청천으로 유명한 개봉을 수도로 삼고 번영을 이루었다. 이때는 당나라 때의 50배에 이르는 동전을 주조했으며 세계 최초로 지폐인 교자(交子)를 발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몽골계인 여진족이 金나라를 세우고, 화북을 지배하자 남쪽으로 내려가 임안(항주)를 수도로 삼고 버티다가, 1142년 금과 화평을 맺고 겨우 명목을 유지하다 13세기 몽골의 쿠빌라이에게 멸망 당했다. 몽골은 동서교역로를 독점하면서 번영을 이루었는데, 그들은 실크로드를 따라 수 ㎞마다 위병소 겸 숙박업소를 두는 병참제를 시행해 상인들을 보호했다.
14세기 유라시아의 한국(汗國)의 티무르는 트루크인과 몽골인의 혼혈로 칭기즈칸의 후예를 자처하면서 실크로드의 요충지 사마르칸트에 수도를 두고 실크로드를 지배했다. 하지만 16세기 대항해 시대가 도래하면서 육로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이에 티무르는 실크로드 경영을 접고 우즈벡을 넘어 인도로 남하했는데, 티무르의 후예인 바부르는 1526년 인도로 진출해 무굴제국을 세웠다. ‘무굴’이란 이름도 몽골어에서 비롯된 것이다. 인도를 지배한 5대 황제 ‘샤 자한’은 유명한 타지마할을 건축했는데, 햐얀 대리석 궁전 형식의 묘지는 자신보다 먼저 죽은 왕비를 위한 것으로 1632년부터 20년에 걸쳐 완성되었다.
원나라 말기에는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다. 주원장이 원을 몰아내고 1368년 명나라를 세우고 수도를 금릉(난진)에 두고 스스로 홍무제로 칭했다. 원나라는 과도한 상업주의를 내세워 거품경제였지만, 홍무제는 농업경제를 기반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주원장은 유방과 달리 빈농 출신으로 글자도 몰랐으며, 형제가 굶어 죽기도 했다. 그러나 어른이 된 뒤에는 글자를 배웠으며 어릴 때 고생이 많았던 만큼 부하들을 믿지 않았다. 공신이며 측근이었던 호유용과 부하 2만 명, 참모인 이선장과 부하 5만 명을 죽이고 아예 중서성을 폐지 시키기도 했다.
주원장이 죽고 1398년 손주인 건문제가 즉위했으나, 주원장의 아들들과 대립했다. 넷째 아들 연왕 주체가 쿠데타를 일으켜, 1402년 3대 황제에 즉위하면서 자신을 영락제로, 수도를 금릉에서 베이징으로 옮겼다. 금릉은 남경(난징)으로 바뀌었다. 영락제는 해상무역을 권장해 이슬람 환관인 정화에게 남해 원정을 떠나도록 함으로써 유럽보다 100년이나 앞서 아프리카에 도달했다. 영락제가 죽은 후에는 몽골이 세력을 키워 남쪽으로, 남쪽에서는 왜구들이 명나라를 괴롭혔다. 이것을 ‘北虜南倭’라고 한다. 일본은 무로마치 시대에서 전국시대를 거쳐, 도요토이 히데요시가 천하통일을 이루고 조선을 공격하자 명나라는 조선에 원군을 보냈으나 비용이 늘면서 재정파탄을 겪기도 하다가 끝내 환관들의 당파싸움으로 쇠퇴하고 말아 청나라에 실권을 넘겼다.
중국 역사에서 대만은 삼국시대와 수나라 역사서에 ‘유구국’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대만을 말하는 것이다. 지금은 琉球(유큐)를 오키나와로 지칭한다고 보기도 하지만, 유큐국은 대만을 포함한 것이고, 실제로 오키나와와 대만은 경제적으로 하나로 볼 만큼 가깝다. 원나라가 고려를 정복했을 때 대만도 복속되었으며 일본 도쿠가와 막부가 1608년, 1616년 대만에 군사를 파견했지만, 정복하는 데는 실패했다. 그후 1624년 네덜란드가 점령했다가 1644년 만주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가 들어서자 명의 신하였던 이들이 ‘반청복명’으로 저항했으며, 명나라 신하였던 정성공이 대만을 지배하고 있던 네덜란드를 몰아냈다. 대만에는 그의 유적이 많다. 한족이 지배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정성공이 죽은 후 20년 동안 청에 항전했지만, 강희제에 의해 멸망당했다. 현재 중국은 그때를 근거로 정성공의 통치가 센가쿠 열도에까지 뻗쳤다고 주장하고 있고, 19세기 후반 영국과 프랑스가 대만을 지배하기도 했지만, 1894년 청일전쟁에 패한 다음 해에 맺은 시모노세키 조약에 의하여 일본이 점령하기도 했다.
【근세】
근세 들어서 대표적인 사건은 미지였던 아메리카 발견에 이은 그들의 독립 선언이었다. 우리나라도 개항 압력에 못 이겨 문호를 열지만, 쇄국정치를 선언하면서 결국은 일본에게 침탈당했다. 유럽은 13세기 몽골의 침략으로 한차례 수난을 겪은 뒤 회복의 기미를 보이고, 중앙아시아에서 온 오스만 1세는 아나톨리아 반도에 오스만 제국을 건설하고는 쇠퇴의 길로 접어든 비잔틴 제국을 무너뜨린 뒤 발칸반도에까지 진출한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해 이스탄불로 이름을 바꾸고 그곳을 수도로 삼았다. 1529년 오스만 제국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신성로마 제국의 본거지인 빈을 포위하기도 했으나, 1571년 레반토 해전에서 스페인에게 져 지중해에 대한 권리를 빼앗기면서 몰락의 길로 접어든다. 오스만 제국은 이슬람국가였지만, 기독교 자제들을 교육시키고 군인과 관료로 등용했는데, 이것은 화합을 위해 필요한 조치였다.
청나라는 1644년 만주 여진족이 세운 나라로서 1912년 어린 푸이 황제까지 250년간 지속되었다. 이는 원나라가 1271년부터 1368년까지 97년간 지속된 것에 비하면 오래도록 한족 아닌 이족이 중국을 통치한 사례다. 청나라는 약탈대상이 없어져 궁핍에 허덕이던 몽골인들을 흡수해 복속시키고 그들을 팔기군(八旗軍)이란 이름으로 활용해 내분이 잦았던 명나라의 수도 베이징을 정복했다. 명나라는 인두세로라는 것으로 인해 아이를 출산하고도 출생신고도 하지 않는 사례가 많았는데, 1713년 강희제가 인두세를 폐지함에 따라 누구나 출생신고를 하게 되어 등록 6천 명만 이었던 인구가 3억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대항해 시대는 1492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고부터 시작되었는데, 콜럼버스는 죽을 때까지 자신이 발견한 곳이 인도라 착각했다고 한다. 후에 ‘아메리고 베스푸치’에 의해 인도가 아닌 새로운 땅이라는 것이 밝혀져 그의 이름 따 ‘아메리카’라 명명했다. 대서양을 건너서 인도에 도착하겠다는 콜럼버스의 계획은 실패했지만, 콜럼버스를 지원했던 스페인의 입장에서는 신대륙 발견은 뜻하지 않은 보상을 안겼다. 스페인의 제독 ‘코르테스’와 ‘피사로’가 ‘아스테카’와 ‘잉카’를 정복하고 엄청난 양의 금과 은을 손에 넣었는데, 이로써 스페인은 유럽 최강의 ‘해가 지지 않는 나라’가 되었다. 이러한 명성은 나중에 영국에게 내어주지만, 스페인은 1580년에는 포르투갈까지 병합했다.
유럽의 근세는 종교개혁의 시대였다. 로마 교황 레오 10세는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 출신었는데, 그는 ‘로렌초 데 메디치’차남으로, 유럽에서 손꼽히는 부자였다. 돈의 힘으로 교황에 선출된 것이다. 그는 바티칸의 산피에트로 대성당 개축공사를 하면서 자금을 충당하기 위해 현재 환율로 10∼500만원에 면죄부를 팔았다. 바보 같은 짓으로 보이지만, 당시 로마 가톨릭은 절대적이라서 ‘면죄부를 사면 죄가 사라지고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말을 맹신했고 의심도 하지 않았다. 이런 종교적 무서움이 지금도 없지 않다는 것은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그와 같은 맹신에 이의를 제기한 이는 독일의 ‘마르틴 루터’였다. 1517년 루터는 로마 교회에 95개 항목에 이르는 질문서를 만들어 보내고 이를 인쇄해 대량으로 유럽 각지에 뿌렸다. 이에 신성 로마 황제도 루터의 행위는 반역이라고 간주하고 루터를 소환해 비판했다. 황제가 나섬에 따라 제후들이 일어나 맞비판하기도 했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스페인을 제압하고 권위가 높아지자 가톨릭을 버리고 영국국교회로 바꾸었다. 절대 왕정은 절정에 달했고 영국은 세계 최강으로 도약했다. 영국보다 100년이나 뒤처졌지만, 프랑스도 루이 14세 이르러 절대 왕정으로 커졌다. 그러나 절대는 반드시 붕괴하게 한다는 것을 역사는 말해 준다.
영국에서 모직물 산업이 발달하여 상공업에 종사하는 세력들이 대부분 프로테스탄트(신교, 칼뱅파)를 신봉했는데, 이들을 퓨리턴(puritan, 청교도)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엘리자베스 여왕이 그들의 열렬한 신앙을 비꼬아 ‘순진한(pure) 사람들’이라고 한데서 비롯됐다. 신흥 세력을 이끈 크롬웰은 1642년 청교도 혁명을 일으켜 왕당파를 제거하고 국왕 찰스 1세를 체포했다. 그러나 국왕의 처형을 두고 의견이 엇갈렸는데, 혁명의 지도자 크롬웰은 다수파인 좌파의 주장에 따라 1649년 국왕을 처형했다. 교회는 신분 서열을 인정하는 감독제, 루터처럼 완전 평등주의를 회중제, 칼뱅의 장로제는 그 중간에 위치하는데, 이것을 정치 체제로는 왕정·귀족정치·회중제는 공화정, 장로제는 의회정치라고 말할 수 있다.
크롬웰이 이끈 하층 계급 청교도는 회중제에 입각해 공화정을 표명하며 국왕 처형을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중산계급은 장로제로 국왕권력을 통제하면서 국가를 운영하는 입헌군주주의를 주장하고는 공화정치세력을 적대시했다. 이런 청교도 내부의 분열은 신앙의 해석과 함께 정치체계의 방식을 따지는 문제였기에 피할 수 없는 대립을 낳았다. 크롬월은 정권을 잡기 이전에는 하층민 편이었으나, 정권을 잡은 뒤에는 하층민을 탄압했던 것이다. 지조 없이 보일지 몰라도 그는 현실주의자였다.
영국은 찰스2세를 거쳐, 1688년 제임스 2세가 국왕에 오르지만, 그는 강경보수적 가톨릭과 절대왕정으로의 복귀를 꿈꾸다 추방당했다. 이로써 ‘국왕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유명한 말이 생겼고, 입헌 군주주의가 확립되었다. 모든 통치권을 장악한 영국 의회는 자유주의 개혁을 차례로 이루면서 새로운 시대를 열었던 것이다. 1642년 청교도 혁명으로 절대 왕정은 붕괴됐고, 크롬웰의 중산계급 보호 정책으로 중산계급이 정치력을 높혔으며 상류계급 또한 협력함으로써 1688년 명예혁명을 거쳐, 입헌군주주의에 기초한 의회정치를 확립한 것이 바로 영국이었다.
청교도들이 아메리카로 이주하는 등 영국이 해외로 진출하면서 북미와 인도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대립이 극심해졌다. 1643년 루이 14세가 즉위하면서 프랑스도 적극적으로 해외 진출을 노렸기 때문이다. 영국은 프랑스와 대립하면서 한때 해상무역을 놓고 전쟁을 벌이기도 한 네덜란드와 손잡을 수밖에 없었다. 1688년 제임스 2세가 추방당하자 영국은 네덜란드 총독 윌리엄과 그의 처 메리를 영국 국왕으로 받아들이고 네덜란드와의 일체화를 꾀했다. 네덜란드의 지원을 받은 영국은 프랑스와 100년 전쟁을 벌이게 되고 최종적으로 승리함으로써 18세기 후반 세계에 군림하는 대영제국이 된 것이다.
지금의 러시아는 어마어마한 영토를 보유했지만, 18세기까지 러시아는 스웨덴에도 못 미치는 소국이었다. 표트르 1세에 이은 예카테리나 여제 때에 남부인 흑해 방면으로 시선을 돌려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크림반도를 빼앗고 흑해의 제해권을 장악한 뒤에 발트해와 흑해를 잇는 물류동맹을 형성하여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발전하였고, 1773년에 일어난 푸가초프의 반란을 진압해 중앙아시아 북부까지 러시아의 지배권 아래 두게 되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신성로마 제국을 세습하여 전승기를 맞았으나, 17세기 프랑스와 대립하면서 독일에 대한 지배권을 상실하고는 오스트리아로 후퇴했다. 이후부터 합스부르크는 ‘신성로마 제국’으로 불리지 않고, ‘오스트리아 제국’으로 불렸다. 오스트리아의 호엔촐레른 가문이 이때 프로이센으로 동장했는데, 프로이센은 독일 동북부를 중심으로 발전해 발트해로 진출하고, 프랑스 루이 14세가 프로테스탄트 탄압하여 대거 프로이센으로 이주하는 것을 받아들였다. 인구가 급증하여 1701년 프로이센 왕국이 되었고, 베를린을 중심으로 상공업이 발전하였다. 이렇듯 독일에 프로이센, 남부에는 함스부르크·오스트리아가 양립하면서 전쟁으로 비화되었으며,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와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트레지아 여제는 독일 패권을 두고 1740년과 1756년 두 차례 전쟁을 치른다. 전쟁은 영국과 프랑스를 끌어들여 복잡해졌지만, 최종적으로 프로이센이 승리했다. 그러나 양국은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시대 혼란을 거친 뒤 1866년에도 다시 전쟁을 벌였다.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전쟁 와중에 끼여 있던 프랑스와 달리 영국은 북아메리카와 인도로 진출했고, 특히 북아메리카에서 프랑스 세력을 몰아내고 지배권을 거머쥐었다. 스페인은 1588년 아르마다 해전에서 영국에게 패한 뒤 급속히 쇠퇴하여 침체 된 상황이었으며, 영국의 자본주의는 끝을 모르고 발전해 세계 경제권과 군사력까지 모두 영국에 있는 듯 보였다. 이 당시 영국이 보유한 선박이 120만 톤이었던데 비해 프랑스는 73만톤, 독일은 15.5만톤에 불과했던 것만봐도 영국의 국력을 짐작하고 남는다.
【근대】
근세와 근대를 구분하는 기준운 명료하지 않은 것 같다. 다만 왕·귀족 중심의 사회에서 ‘부르주아 시민 계급이 중심인 사회’로 이동해 봉건적 농업 경제가 근대적 공업경제로 이행되는 시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공업화가 진행되면서 출현한 경영자와 자본가들이 바로 ‘부르주아’라고 불리게 된 사람들이다. 1660년부터 30년 동안에 건축된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은 루이 14세 때 정원을 포함해 총면적이 800헥타르, 궁전 내부 길을 모두 합치면 20㎞나 된다고 하는데, 700개 이상의 거실과 방이 구비되어 있다. 이런 방대한 사업을 진행하다 보니 재정이 바닥나 서민들의 생활은 말이 아니게 되고 혼란이 초래되었다. 혼란을 잠재우고 인플레를 수습한 이가 바로 ‘나폴레옹’이다. 군인 출신이었던 그는 쿠데타로 총재정부를 무너뜨리고, 1804년 나폴레옹 법전이라고 불리는 민법전을 새로 만들어, 자유주의 원칙과 부르주아의 재산을 보장했다.
프랑스 혁명을 거쳐 나폴레옹 시대에 이르기까지 프랑스는 유럽정치의 핵심이었다. 19세기 전반 프랑스 인구는 3천5백만, 영국은 9백만, 독일은 800만으로 프랑스의 영향력은 다른 나라들보다 큰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는 우파·좌파 정권이 왔다 갔다 했지만, 나폴레옹 이후의 중심은 부르주아 자유주의였다. 나폴레옹이 죽고 조카인 나폴레옹 3세는 제2 재정으로 안정된 부르주아 정권을 확립시키고, 그들이 중심이 되면서 안정을 기반으로 1855년 파리 만국박람회를 개최하여 파리는 오늘날의 모습으로 정비되어 번영을 누렸다. 나폴레옹 3세는 부르주아 세력과 더불어 균형 잡힌 정치를 추진했지만, 1870년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하며 붕괴되었다. 같은 해 제3 공화정이 출범하고 티에르가 수반으로 취임하여 1940년 나치 침공 때까지 계속되었다. 1946년에 제4 공화정이 들어섰고, 1958년에는 드골 대통령 취임으로 제5공화정으로 이어져 오늘에 이른다.
독일은 영국이나 프랑스와 달리 통일되지 않고, 프로이센·바이에른·작센·하노버 등 제후들이 각지에서 군웅할거하고 있었는데, 그중 프로이센이 프리드리히 2세 시대에 약진해 가장 강력한 힘을 갖추었다. 그들은 동북부 척박한 땅을 가졌지만, 대규모 농장을 경영하면서 18세기 후반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 감자를 조직적으로 재배하고 상공업 경영에도 박차를 가하고, 도자기와 무기 탄약 생산과 철광 등이 번창하기 시작했다. 19세기에는 영국이 개발한 증기기관과 제철법을 받아들여 기계화 공장의 규모화를 추진했고, 1834년에는 독일 영토 내에 존재하는 국가들간관세동맹이 체결되면서 물류장벽이 허물어지고 경제적 통일을 이루었다. 1848년에는 각각 다른 영토의 지식인들이 프랑크푸르트에서 국민회의를 개최했는데 이 회의 주제는 독일 통일의 주체를 프로이센으로 하느냐, 오스트리아로 하느냐였는데, 프로이센 지지 파가 이겨 프로이센의 재상이던 비스마르크는 군재개편, 군사력 강화만이 살길이라고 주장했다.
1868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프로이센이 이기고, 반대파였던 바이에른까지 쳐부수자 바이에른을 지지하던 프랑스가 반반하면서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발생했다. 프로이센이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를 물리치고 1871년 독일 제국을 선포했다. 비스마르크의 통일 방법은 ‘철과 피’를 불리지만, 비스마르크는 독일 내부에서의 싸움보다, 외부의 적을 침으로써 내부 결속을 다졌다. 이런 천재적인 재상이 있었다는 것은 프로이센과 독일의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이탈리아도 독일처럼 중세 이후 사분오열 상태로 사르데냐, 토스카나, 나폴리 같은 영토 세력과 베네치아, 밀라노, 피렌체 같은 독립도시 세력이 할거하고 있었는데, 그중 사르데냐 왕국은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중간에 낀 작은 나라였지만, 상황을 타개한 재상 카보우르는 농업을 경영하다 금융업, 철도건설업에 투자해 성공하고는 국회의원이 되면서 두각을 나타내어 수상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었다. 1859년 사르데냐 왕국은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오스트리아를 물리쳤고, 의용군을 이끌던 가리발디가 시칠리아 섬과 나폴리 왕국을 점령한 뒤 사르데냐에게 바쳤는데 이로써 1861년 이탈리아 왕국이 건설되었다. 왕국이 세워진 뒤에도 오스트리아는 베네치아를, 프랑스는 로마 교황령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기회를 엿보던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벌여 베네치아를 차지했다. 이에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터지면서 궁지에 몰린 프랑스가 점령한 로마 교황령을 프로이센에게 빼앗겼다. 이런 프로이센 덕에 이탈리아는 로마를 제외한 여러 부족을 통일할 수 있었다.
미국은 영국에서 이주한 청교도들이 건설한 나라인데, 1776년 독립을 선포함으로써 미합중국이 탄생했다고 알고 있지만, 사실은 복잡한 내력이 없을 수 없다. 당시 미국에 거주하던 유럽인은 약 300만 명, 이들은 아직 집약된 행정기능과 중추적인 도시가 없었기에 독립을 위해 각지에서 게릴라전을 전개했고, 영국군은 공세의 타켓을 어디로 정할지 몰랐다. 1781년 요크타운 전투에서 미국 측이 승리하면서, 1783년 파리조약으로 영국은 미국의 독립을 승인할 수밖에 없었다. 1787년 헌법이 제정되고 조지 워싱턴이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미국은 담배, 면화 등을 유럽에 수출했고, 서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를 몰고 와 혹사시켜 경제를 발전시켰다.
남북전쟁은 자유무역에 대한 의견 차와 노예제를 둘러싼 대립에서 시작되었지만, 정치 시스템에서도 대립했다. 북부는 연방정부에 의한 국가 주도 형태의 중앙집권, 근대공업화를 주장한 데 비해, 남부는 연방정부가 지방에 개입하는 것을 바람직하지 않다며 지주에 의한 지방분권, 봉건적 보수정치를 주장했다. 링컨이 대통령이 당선된 다음해인 1861부터 5년간 지속된 전쟁으로 300만 명 중에서 60만 명이 죽었다. 북부의 공업자본이 승리했지만, 부르주아 혁명치고는 희생이 너무 컸다. 전쟁 후인 1869년 대륙횡단 철도가 개통되는 등 자본주의 공업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전쟁의 후유증을 앓으면서도 정치·경제 사회구조가 새롭게 재편되었고 이무렵부터 미국은 새로운 시장개척을 위해 해외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맥킨리와 루즈벨트 대통령은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을 일으켜 대항해 시대 이후 스페인이 장악하고 있던 카리브해, 라틴아메리카, 핀리핀, 괌 등을 차례로 빼앗아 세계의 패권을 장악했다.
러시아는 다른 유럽 국가들이 산업화로 발전하는 동안에도 부르주아 자유주의 개혁은 일어나지 않았다. 1870년 지식인들이 ‘인민을 위해!’라는 기치를 내걸고 학대받는 농노들의 정치 투쟁을 호소했지만, 실패했다. 1880년이 되어서야 공업화가 시작되었는데, 이후 비약적 성장을 이루면서 빈부격차, 인구 밀집 등 불균형을 초래해 노동자의 불만이 폭발하기도 했다. 러시아는 19세기 중반 중앙아시아, 만주, 극동에까지 영토를 확장하면서 인구가 1억 명으로 늘어났다. 국력을 키운 러시아는 1877년 트루크(오스만)와의 전쟁을 일으켰다. 영국이 나서기 전에 산스테파노 조약을 체결했고, 이로써 불가리아, 루마니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같은 슬라브 국가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했다. 이들은 모두 러시아와 같은 혈통으로 러시아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된 것이다. 이에 흑해와 지중해 봉쇄를 우려한 영국이 가만있지 않았고 전쟁위험이 가중되자 독일이 나서 중재하면서 불가리아 영토는 축소되었다. 독일 자금을 지원받은 러시아는 시베리아 철도를 건설하고 태평양으로의 진출을 기도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영국이 러시아·프랑스 진영에 가담해 독일을 포위하면서 시작되었다. 영국·프랑스·러시아 진영과 독일·오스트리아 진영이 격돌해 1914년 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영국과 프랑스는 경제 대국이 된 미국으로부터 거액의 전쟁 비용을 빌렸다. 미국도 이들이 우세하다고 판단해 개인·법인·국가에 이르기까지 자진해 영국 국채를 사주었다. 그러면서 미국은 중립을 내세웠으나, 미국의 국채 투자가 너무 많아졌고, 1917년 러시아혁명이 터져 러시아 국내 상황이 혼란에 빠지자, 독일에게 유리한 상황이 되었고 미국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영국과 프랑스가 패배하면 빌려준 돈을 돌려받지 못하게 되고, 타격받을 것을 우려했다. 윌슨 대통령은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구실로 참전을 결정했고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전쟁에서 패배했다.
【현대】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는 튼튼하고 안전한지, 아니면 연약하고 불안한지, 우리는 지금의 상황을 되돌아 보아야 한다. 20세기 초에 세계인구는 15억 명,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인 1950년 25억 명, 20세기 말에 60억 명, 그리고 지금 2023년에는 이미 80억 명을 넘었다. 우리는 지금의 시대를 ‘민중의 시대’로 정의하기도 하지만, 민중은 어디에 있는지 잘 모를 때가 많다. 각자도생(各自圖生)만이 살길이라고 외치고 있는 것 같다. ‘유발 하라리’교수는 인간만이 허구를 믿고, 허구가 인류를 발전시킨 원동력이라고 하지만, 지금 세계는 허풍과 거품이 너무 세거나 많은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지난 2008년 리먼 쇼크 당시 주식투자로 큰 손해를 본 사람들이 많다. 지수가 40%나 떨어졌고, 미국의 실업률은 10%에 달했고, 세계 경제는 대혼란에 빠졌다. 지나간 1929년의 세계대공항 쇼크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막대한 피해를 입은 투자가들이 연일 고층빌딩에서 뛰어내렸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거품이 터졌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은 히틀러가 주도한 나치스 전쟁이다. 나치당은 ‘국가사회주의 노동자당’이라고 불렀지만 사회주의 정당이 아니다. 국민 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들의 지지를 얻으려고 겉모습만 꾸민 간판이다. 1871년 독일제국이 탄생하면서 독일은 정부 주도의 산업화가 추진되었다. 독점자본은 반드시 자국민의 우월성을 기치로 내건다. 민족주의가 필요하고 당연히 독점자본과 유착하게 된다. 독일 기업은 유대인들의 자본에 많은 돈을 빌려 거액의 채무를 지고 있었는데, 나치가 유대인을 박해하고 말살함에 따라 채무가 저절로 사라졌다.
1929년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은 세계대공항에 대응하지 못해 혼란에 빠져 있었으나, 1932년 히틀러의 나치당이 제1당이 되면서 그가 수상이 되어 군수산업에 예산을 투입해 실업자 구제 등 효과적으로 정책을 수행한 덕에 빠른 경제회복을 이룬 히틀러는 국민의 압도적 지지로 1934년 총통에 취임했고, 좌파정권이던 러시아-프랑스가 독일을 견제하자, 영국은 독일과 군사협정을 맺고는 독일의 군사력 확대를 용인했다. 독일의 외교적 지위가 높아지면서 이탈리아, 일본과 반공산주의 동맹을 맺고서 소련을 포위하고자 했다. 1938년 독일은 오랜 숙원이던 오스트리아를 병합했다. 히틀러는 소련 방면으로 진출할 결의를 굳히고, 체코슬라바키아에게 독일계 민족이 많은 서부지역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이에 영국과 프랑스는 동방으로 진출하면 서쪽으로는 오지 않는 조건으로 이를 승인했다. 영국수상 챔버린은 독일과 소련이 싸우면 두 나라 모두 무너질 것이라고 예상하기도 했으나, 독일은 1939년 소련과 불가침 조약을 맺으면서 폴란드만 조각나고 말았다. 챔버린을 비판한 강경파 처칠은 9월 1일 독일의 폴란드 침공을 막아야 한다는 자국의 여론에 따라 독일에 선전포고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것이다. 처질은 챔버린과 교대해 수상이 되었고, 독일의 동맹국인 일본은 진주만 공습을 거쳐 태평양 지역에서 미국과 치열한 전쟁을 벌였다.
영국의 선전포고는 히틀러에게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였고, 히틀러 자신은 영국, 프랑스와 전쟁할 의지가 없었지만, 일방적으로 전쟁을 강요당한 입장이 되었다. 폴란드 점유를 완수한 히틀러는 주력군을 프랑스로 돌려, 1940년 파리를 함락시켰다. 또 런던을 공습해 전투가 본격화되고, 동시에 소련을 침공하여 양방향 작전을 전개했다. 이는 패착이 되었으며 한계를 느끼자 독일의 열세가 나타났다. 일본도 열세에 몰렸다.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처음에는 전쟁에 개입하지 않았지만, 자국의 영향력을 강화하고 세계의 주도권을 위해 영국과 손을 잡고 독일·일본에 공동대응했다. 1943년 테헤란 회의, 1945년 얄타회담에서 스탈린과 더불어 독일·일본에 대한 공동대응, 분할통치를 결정했다. 이는 본디 미국과 영국이 주도권을 쥐어야 할 텐데 스탈린을 끌어들인 것으로 처질은 루스벨트의 의도에 휘말린 꼴이 되고 말았다.
루스벨트가 병사하고 뒤를 이은 부통령 트루먼은 루스벨트와 달리 공산주의를 적대시했고, 공산주의가 전 세계를 위협한다고 생각했다. 트루먼의 생각대로 세계는 냉전의 위기로 접어들기도 한 것은 나중의 일이다. 포츠담회담에서 트루먼은 스탈린을 비판했고, 소련과의 협조노선을 철회했다. 소련의 일본 개입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독일에 대해서도 소련을 배제하고 싶었지만, 이미 소련은 독일의 점령을 진행되고 있었다. 한반도도 마찬가지였다. 무조건 항복을 전제한 일본에 대한 미국의 태도에 스탈린은 미국에 대항하기 위해 일본점령 의도로 군을 홋카이도에 진격시키려 했다. 오키나와를 점령한 미국은 신속히 일본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 원자폭탄이라는 비상수단을 썼다. 결과 일본은 무조건 항복했다. 만약 조금만 시기가 늦었더라면 일본도 독일·한반도처럼 국토분열의 결과를 나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