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의 독서일지 (2024.06.04~06.25)*
-11일차 : 6월 20일 목요일
유월 저녁 산책길의 살구
-손종호의 시집 《뿌리에 관한 비망록》을 읽으며
-정락인의 《미치도록 잡고싶다》를 읽고
-애니 그레이의 《먹보 여왕》을 읽으며
1
저녁을 일찌감치 먹고 아파트를 나서서 아내와 늘 가는 산책길로 들어서면 마주치는 사람이 있는데 옛날식 이발소를 운영하는 아저씨다. 가게를 비울 수 없어 이발소 주변의 도로를 왔다갔다 왕복하는 걸음걸이가 운동의 전부다. 이발소를 지나면 4차선 큰 길이 나오며 육교가 보이는데, 육교를 건너지 않고 좌측으로 길을 조금만 걸어가면 살구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매년 이 맘 때면 살구나무에는 노란 살구가 주렁주렁 열려있고 길가에는 아무도 관심이 갖지 않은 채 이 곳 저 곳 어지럽게 떨어지고 행인들의 발걸음에 밝힌 채 지나는 길가를 더럽히고 있었다. 재미삼아 한두 개 집어서 먹어보면 달콤한 게 침이 고일 정도였다.
올해에도 살구나무에 살구는 변함없이 열렸지만 길은 텅 비어 있다. 며칠 전만 해도 많지는 않지만 군데군데 떨어진 살구를 보았는데, 이제 떨어진 살구는 아무 곳에도 볼 수 없다. 어제는 살구나무 위로 시선을 돌려 살펴보았지만 노란 살구는 눈에 띄지 조차 않는다. 어떻게 된 일일까.
아내와 걸어서 지나는 저녁 산책길에서 올해는 벌써 살구를 볼 수가 없다. 내년 이맘때는 예년처럼 풍성하게 열려 한동안 보는 재미를 주던 노란 살구를 볼 수 있을까.
2
무위삼제(無爲三題)
-손종호
1.
아침 나절 눈 큰 여치 한 마리
더 큰 눈의 개구리에게 잡아먹힌 풀밭 위에
가치독사 한 마리 한낮을 즐기고 있다.
햇빛은 그 곁에서
힘겹게 풀잎을 타고 오르는
진드기 한 마리의 등을 토닥이며 있고
2.
흐르는 강은 뒤돌아보는 법이 없다.
앞일도 내다보지 않는다.
들녘을 만나면 들녘을 적시는 강물
풀숲을 만나면 풀숲을 지나는 강물
다리를 만나면 다리 아래의 강물.
흐름 자체가 그의 삶이지만
사실은 흐르지 않고 있다
그는 그저 있을 뿐.
3.
빈 것을 채우는 것이 빈 것이며
채운 것을 비우는 것이 채운 것이라면
바람은 어디에나 있으나
어디에도 없다
*손종호 시집, 《뿌리에 관한 비망록》에서
<斷想> 자연의 먹이사슬 속에는 삶과 죽음이 평화롭게 공존해 어떤 긴장도 느껴지지 않는다. 말 그대로 자연스럽다. 대지를 적시며 도도히 흐르는 강은 흐르면서도 멈춘 듯 보인다. 어디를 지나가도 주변과 조화를 이루는 탓에 그 경계가 느껴지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바람은 있어서 운동을 보게 하지만 그 실체는 없다. 우리가 보는 세상의 모든 것이 이런 것이 아닐지. 있으나 없는 것 같은 무위. 집착을 버려도 좋은.
3
*《미치도록 잡고싶다》
-정락인 지음/이다북스 2019년판
인간다운 삶의 완성을 향해
대한민국 사회에서 일어난 미제 살인사건을 추적해서 모아놓은 책이다. 기자 출신의 작가는 이렇게라도 모아서 한 권의 책으로 발간한 이면에는 행여 사건의 해결을 통한 범인 검거와 아울러 죽은 영혼은 말할 것도 없고 남은 가족들의 상처를 치유해주고픈 동정심과 이와 같은 비인간적인 죽음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 모두가 사람으로 태어난 의미와 기쁨을 누리며 인간다운 삶의 완성을 이루어가자는 염원일 것이다.
작가는 미제 살인사건집인 《미치도록 잡고싶다》 발간 외에도 사회의 음지에서 고통 받는 약자들의 권리를 옹호하여 신문, 잡지 매체를 동원해 그들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던 사례들도 첨부해 놓았는데 놀라울 따름이다. 저마다 제 살기에 급급해서 남의 급박한 일들에 대해서 ‘나 몰라라’라며 방기하기 일쑤인데, 작가는 자신의 전업을 걸고, 자신의 사명에 충실한 기자정신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이미 그가 몸담은 세계에서는 파다하게 칭찬이 자자한 인물로 정평이 나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사회에 기여하는 기자의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의 기조에 사회를 향한 따뜻한 휴머니즘이 자리 잡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 사회란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사회이며, 삶이 긍정적인 기운으로 퍼져나가 기쁨과 보람이 되고 일상의 모든 과정이 삶을 완성하는 길로서 작용되도록 소명을 다해 그것을 일구어나가고 있다.
미해결된 사건 하나하나를 돌아보면 기자와 같이 범죄를 저지른 범인에 대해 그 잔인함과 비열함에 피가 끓기도 하고, 가족의 입장에서 청천벽력과 같은 상처를 받게 된다. 그러는 한편으론 우리 사회의 사람간의 관계를 이루는 다방면에서 오는 미성숙과 다 함께 행복한 사회를 만드는 데 필요한 관심과 동정과 관용이 많은 부분 부족하지 않은 지 성찰하게 만든다.
사람들이 어울려 살아가는 사회에서 근간적으로 적용되어져야 할 ‘정의로움’에 대해서도 이번 독서를 통해 되새기게 된다.
4
빅토리아 여왕과 그 시절 대영제국의 민낯
-애니 그레이의 《먹보 여왕》을 읽으며
작가 ‘애니 그레이’는 영국의 역사학자이자 요리사이다. 이 책은 빅토리아 여왕시대에 왕궁에서 즐겨먹은 음식들과 그 음식과 관련한 다양한 부대 자료들을 모아 수필형식으로 전개한 음식 역사이다.
그렇다고 해서 음식을 만드는 방법과 그 레시피들만 지루하게 엮어 독자들의 귀중한 시간을 마구잡이로 빼앗을 것 같지는 않다. 목차만 봐도 알 수 있듯 어린 시절/ 정찬 방식/ 주방/ 요리사/ 별궁 등등의 각 장의 소제목에서 잘 드러나듯 각 장이 지은이가 붙인 듯 한 빅토리아 여왕의 별명인 ‘먹보 여왕’과 같이 독특한 내용으로 꾸며져 음식의 풍미처럼 별스런 흥미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어린 시절>과 <정찬 방식>을 지나 <주방>에 이르고 보니 빅토리아 여왕 본인뿐만 아니라 그 시절의 대영제국이라는 과거 영국의 민낯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영국의 대표적 왕궁인 버킹엄 왕궁의 규모와 열악한 시설, 왕궁 안에서의 삶과 궁을 움직이는 복잡한 조직, 왕궁의 개보수 과정, 왕궁이 자리한 도시 런던의 삶의 일상과 행태, 여왕의 가족과 귀족, 정치가들의 움직임 등이 작가의 원래 의도와 달리(?) 타국인의 동경어린 시선을 달구며 서서히 그 면모를 드러내며 호기심을 충족시키고 있는 것이다.
빅토리아 여왕은 인간미가 넘치는 여성이었다. 왕궁의 하루 음식 소비량은 엄청났던 모양이다. 요리와 관련한 전문 인력만 오륙십 명 가량 되었다고 한다. 그런 어느 날 왕궁근처 민가에서 출퇴근하는 어느 나이 든 남자 하인이 왕궁의 음식 창고에서 상당량을 그냥 들고 나가다 관리에게 들킨 모양이다. 궁내부 차관이 그 남자 하인의 사직을 강력히 권고했지만 빅토리아 여왕은 그녀만의 섬세한 감성으로 그 남자의 나이와 거느린 가족, 부양을 염려하며 자리를 보전시켰다고 한다.
대영제국 당시 영국의 왕궁 내 요리와 관련한 조직은 별스런 세계였다. 조리부, 제과부, 제빵부, 페이스트리부 등의 조직이 있었고 요리사 대부분은 프랑스 남자였으며, 여성 요리사는 있긴 했지만 남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수가 적고 급료도 비할 바가 못 될 정도로 적었다고 한다. 당시 요리는 프랑스가 대세였던 모양으로 음식을 제공하는 방식에 ‘아 라 프랑세즈’라는 프랑스 방식이 있을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