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에 대한 단상
계간 문학동네 1998년
겨울/제5권 제4호/통권17호/쟁점
고종석
1. 지난 10월 24일 저녁, 교육방송은 50년 문자 전쟁:한글 전용 대 한자 혼용이라는 제목으로 생방송 토론 프로그램을 내보냈다. 리모컨으로 이리저리 채널을 옮겨다니다 우연히 마주친 프로여서 처음부터 보지는 못했지만, 나는 지루해하는 둘째아들 녀석의 표정을 모른 체하고 토론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채널을 교육방송에 맞춰놓은 것은 당초 그 주제가 흥미로워서는 아니었다:토론자로 출연한 분들 가운데 아는 얼굴들이 비쳤던 것이다. 그러나 그 프로를 끝까지 지켜본 것은 토론이 어떻게 전개돼 어떻게 마무리될지가 이내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지난 50년간 그랬듯, 이날의 토론도 어느 한쪽의 승리로 마무리되지는 않았다. 양쪽의 의견은 줄곧 평행선을 그었고, 우리가 채택해야 할 서기 체계에 대한 두 견해는 그대로 교육 문제에까지 투영되었다. 즉 한글 전용을 주장하는 이들은 죄다 초등학교에서 한자를 가르쳐서는 안 된다는 견해를 내놓았고, 한자 혼용을 주장하는 이들은 예외 없이 초등학교에서부터 한자를 가르쳐야 한다고 말했다. 내겐 그것이 좀 신기했다. 나는 지금까지 한국어를 표기하는 데 한글만을 쓰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해왔고, 또 한국어를 사용하는 사람이라면 되도록 일찍부터 한자를 배워야 한다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나의 이런 생각은 어설픈 절충론이라고 핀잔받을 만하지만, 내게는 그것이 논리적 모순이 아니다. 그러니까 내게는 한글 전용과 한자 교육이 서로 길항하지 않는다. 그 문제말고도 그 프로는 내게 이런저런 생각을 떠올렸다. 이 글은 그때 떠오른 단상들을 두서없이 적은 것이다.
2. 첫째는 우리 사회의 토론 문화에 대한 것. 흔히 지적되고 있는 것이지만, 우리 국어 교육은 말하기와 글쓰기를 등한시해왔다. 대학 입학시험에 논술이라는 과목이 포함된 뒤로 글쓰기 교육이 어느 정도 이뤄지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 충분해 보이지는 않는다. 말하기 교육은 거의 없다고 해도 좋다. 그것은 서양에서의 언어 교육과 크게 다른 점이다. 글로써든 말로써든, 자기 생각을 논리적으로 표현할 수 있게 훈련시키는 것은 서양의 언어 교육에서 가장 커다란 몫을 차지한다. 당연히, 그렇게 자란 서양인들은 토론에 능하다. 유럽의 텔레비전은 우리의 경우보다 토론 프로그램을 내보내는 일이 훨씬 더 잦은데, 출연자들이 대개 다 청산유수의 달변이다. 때때로 얄밉게 보일 정도다. 거기에 견주어 한국인들은 공적인 자리에서 말이 무척 서툰 것 같다. 그것은 학교에서 말하기 교육을 거의 받지 못한 데 큰 이유가 있겠지만, 능변을 덕성으로 치지 않는 우리 문화 탓도 있는 듯하다. 말하는 것이 직업인 정치인들까지도 마찬가지다. 신문이나 잡지의 인터뷰에서 그럴듯하게 말을 하는 것 같았던 정치인들이 막상 텔레비전에 출연해 쏟아놓는 그 바보 같은 외마디소리들을 생각해보라. 24일의 토론에 출연했던 분들도, 그들이 대체로 국어 교육이나 언론에 관여하는 사람들이었음에도, 말하기에 그리 능숙하지는 못했다. 그들은 대체로 자기 생각을 명확하게 표현하지 못했고, 흔히 논점에서 벗어나기 일쑤였다. (이렇게 말하는 나 자신도 말하기에 무척 서투르다. 텔레비전 카메라가 앞에 있다면, 아마 혀가 굳어버릴 것이다.) 반면에 토론이 떠들썩하게 진행된 것은 내게 좋아 보였다. 때때로 예의에 벗어난 말투도 튀어나오곤 했는데, 내겐 그런 날것의 말들이 오히려 토론에 활력을 부여하는 것처럼 보였다. 사실, 점잔을 빼고 말을 돌려 하다 보면, 논점이 흐려지고 결국 좋은 게 좋은 것이 되기 십상이다.
3. 둘째는 한자의 매력에 대한 것.
* 상(商) 왕실의 점복(占卜) 기록인 갑골문(甲骨文)에서 시작해, 주대(周代)의 금문(金文), 춘추전국시대의 대전(大篆)과 고문(古文), 진(秦)의 소전(小篆)을 거쳐, 한대(漢代) 이후의 예서(隸書)․해서(楷書)․초서(草書)․행서(行書)에 이르는 그 필체의 변전. 한자는 글자쓰기(글쓰기가 아닌 글자쓰기!)를 하나의 독특한 예술 갈래로 만든 거의 유일한 문자 체계다. 한글 서예라는 것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고작 한자 서예의 그림자라고나 할 만하다. 인쇄체말고 따로 필기체를 개발한 대부분의 다른 문자 체계들도 글자쓰기를 깊이 있는 예술로 만들지는 못했다;
* 상형(象形)․지사(指事)․회의(會意)․형성(形聲)의 네 조자법(造字法)과 전주(轉注)․가차(假借)의 두 용자법(用字法) 등 이른바 육서(六書)를 통한 기호와 현실의 짝짓기. 한자 역시 다른 모든 문자 체계처럼 음성 언어의 그림자일 뿐이지만, 한자의 이 독특한 발달 과정은 한자 하나하나가 실물이라는 환각을 때때로 불러일으킨다. 한자는 모든 문자 체계 가운데서 그것이 표상하는 세계와 가장 밀착된 듯이 보이는 기호다. 비록 그것이 착각일지라도;
* 후한대(後漢代) 『설문해자(說文解字)』(서기 100년)의 9천3백여 자에서 시작해, 청대(淸代) 『강희자전(康熙字典)』(1716년)의 4만 7천여 자를 거쳐, 중화인민공화국 『한어대자전(漢語大字典)』(1986~1990년)의 5만 6천여 자에 이르기까지, 왕조를 거치며 새로운 자전이 출간될 때마다 보태지는 글자 수. 한자는 모든 문자 체계 가운데 글자 수가 가장 많은 기호 체계이고, 그 진화와 생성의 과정이 가장 길었던 체계다. 그 진화생성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글자의 일부가 제적되고, 새로운 글자가 신분증을 얻는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 진화생성은 주로 형성을 통해서, 그러니까 뜻을 나타내는 부분과 소리를 나타내는 부분의 결합을 통해서 이루어져왔고 앞으로도 그러리라. 飼(유:우라늄), 孝(서:셀레늄)를 포함해 화학원소를 의미하는 1백여 개의 새로운 한자가 만들어진 것은 20세기 이후다. 그 모두가 형성자였다;
* 갑골문자가 사용되던 기원전 1300년께부터 3천수백 년 동안 본질적으로 동일한 체계를 유지해온 그 문자사(文字史)의 연면성(連綿性). 한자는 지금 사용되고 있는 문자 체계 가운데서 가장 기다란 역사를 지닌 체계다. 지금 세상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문자이자 서양 문화를 그 뿌리부터 담아온 로마자의 역사도 2천5백 년에 지나지 않는다. 문자의 발달 단계로 보면 한자보다 훨씬 더 나아간 체계인 한글의 역사는 5백수십 년에 지나지 않는다;
* 형태가 소리만이 아니라 의미와 대응하는, 그래서 일음절로 발음되는 하나의 글자가 그대로 하나의 형태소가 되는 표의성(表意性). 위에서 언급한 한자의 독특한 발달 과정과 함께, 바로 이 점이, 즉 표의성과 표음성의 결합이 한자 물신주의를 낳는다. 그것은 위험한 유혹이지만, 뿌리치기 힘든 유혹이기도 하다. 한자는 그 하나하나가 의미 단위다. 다시 말해 형태소다. 또 한자는 그 하나하나가 음절 단위다. 한자는 부분적으로 소리글자이기도 하다. 한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형성자는 소리글자로서의 한자라는 만화경 속의 아름답고 진기한 풍경들이다;
*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이런저런 속자(俗字)들, 국민당 정권의 간체자(簡體字)와 공산당 정권의 간화자(簡化字), 일본식 약자(略字) 등 수많은 이체자(異體字)의 존재. 이것은 로마 글자의 I와 J가 한 뿌리에서 나왔다거나, V와 U가 한 뿌리에서 나온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문자의 곡예다. 한자는 모든 문자 체계 가운데 가장 호사스러운 체계다;
* 중국 바깥에서 만들어진 한국제 한자와 일본제 한자(이른바 화제한자和製漢字)의 존재. 대한해협 양쪽의 두 나라에서 지금도 부분적으로 한자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과 함께, 바로 이 외국제 한자의 존재가 한자를 중국만의 것이 아니게 만든다. 여기에다가, 비록 전적으로 문자 체계의 영역에 속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본 에도 시대의 난학(蘭學) 이래, 특히 메이지 유신 이후 양학(洋學) 열풍 이래 일본어에서 한자를 형태소로 해 만들어진 무수한 신어(新語)의 존재를 덧붙여야 할지 모른다. 그 대부분이 한국어에 차용되고 상당수가 중국으로 역수출된 이 일본제 한자어의 존재는, 천수백 년 전부터 한국과 일본에 존재해온 무수한 전통 한자어들과 더불어, 본디 중국 글자인 한자를 일본의 글자로도 만들고, 한국의 글자로도 만든다.
이런 매력들 가운데 일부는 자주 한자의 약점으로 거론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기나긴 세월 동안 하나의 문자 체계가 겪은 화려한 모험의 흔적이다. 나는 한자가 겪은 그 모험의 흔적들을 생각하며, 인류가 생각해낸 다른 어떤 문자 체계도 겪지 못한 그 거대한 모험의 흔적들을 생각하며, 때때로 넋을 놓는다. 그래, 나는 일찍부터 한자에 반했다. 나는 한자를 사랑한다.
4. 한국어를 표기하는 데, 한글을 전용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한글과 한자를 혼용할 것인가? 우리가 사적인 글을 쓸 때, 한글만을 쓰든, 한자를 섞어 쓰든 그건 개인의 자유다. 우리는 한자만이 아니라, 그 기원에 따라 로마자나 카나를 섞어 쓸 수도 있다. 예컨대, 볼썽사납긴 하지만, 친구에게 보낸 사신(私信)에다가 우리는 어제 敎育放送局에서 내보낸 그 program은 썩 괜찮았어. 그 地質學者가 つなみ에 對해서 아주 쉽게 說明해주더군이라고 적을 수도 있다. 더 나아가 그것이 꼭 사신이 아니더라도, 한자를 쓸 것이냐 말 것이냐, 그리고 쓴다면 어느 정도까지 쓸 것이냐는 쓰는 사람이나 구체적으로 씌어진 문장의 스타일의 문제로 치부할 수도 있다. 사람의 취향에 따라서, 또는 어떤 문체적 의도에 따라서 한자를 사용할 수도 있다. 요컨대 우리는 어떤 사람이 한자를 사용한다고 해서 그걸 법령으로 금지할 수는 없다, 그 친구 되게 배운 티를 내는군!이라고 흉볼 수야 있겠지만.
실상 한자를 혼용하고 싶은 유혹은 한글이라는 문자 체계에 내재해 있다. 한글은 음소문자이면서도 낱글자를 음절 단위로 네모지게 모아 쓰는 이른바 음절합자식(音節合字式) 철자법을 취하고 있다. 즉, 다른 음소문자들이 알파벳을 이어 바로 단어를 구성하는 데 견주어, 한글은 일단 낱자들을 네모꼴로 모아서 한 음절을 구성하고 그 이후에 이 음절들을 결합해 단어를 구성한다. 그래서 우리의 철자법은 맞춤법이기도 하다. 그 맞춤은 음소를 맞추어 음절을 만들고, 음절을 맞추어 단어를 만드는 과정이다. 이렇게 한글의 실제적 운용이 음절문자식이어서, 한글의 한 음절과 한자의 한 글자는 쉽게 대응한다. 한자 역시 한 글자가 한 음절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처음부터 한글을 풀어썼더라면, 그래서 음소 수준과 단어 수준 사이에 음절이 끼어들 여지가 적었다면, 한글 속에 한자가 섞일 여지도 적었을 것이다. 로마 문자로 씌어진 텍스트 안에 한자가 끼어들었을 경우의 그 부자연스러움을 상상해보라. 그러나 우리는 한글을 음절 단위로 모아 씀으로써, 한자가 끼어들 여지, 즉 국한 혼용의 여지를 만들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문자 창제자들 자신이 처음부터 이런 국한 혼용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한글의 문자 체계가 우연히 음절 단위의 모아 쓰기가 돼 한자가 개입하게 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한자의 개입을 허용하기 위해서 한자처럼 음절 단위의 네모 글자들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것은 한글의 불행이다. 똑같이 음절 단위의 네모 글자여서, 한글 사이에 한자가 끼어도 튄다는 느낌이 덜한 것이다. 한자는 분명히 한글과는 이질적인 글자인데도, 그 이질성이 커 보이지 않는 것이다. 한자 혼용에 대한 유혹은 이렇게 한글의 음절문자적 성격에 내재해 있고, 한자를 아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라도 이따금씩 그 유혹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내 개인적 생각으로는, 적어도 공적인 출판물에서는 한글을 전용하는 것이 옳을 듯싶다. 예컨대 위에서 인용한 문장이 어떤 희곡이나 소설 속의 대사라면 한글을 전용해서 어제 교육방송국에서 내보낸 프로그램은 썩 괜찮았어. 그 지질학자가 츠나미에 대해서 아주 쉽게 설명해주더군이라고 써야 하지 않을까 싶다. 실제로 우리가 한글 전용에 대해 열띤 토론을 하건 안 하건, 현실의 추세는 그쪽 방향으로 가고 있다. 전통적으로 한글 전용을 해온 소설은 물론이고, 이제 신문들도 대부분 한글 전용으로 가고 있다. 학술 서적들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문자 체계를 하나로 통일하고 싶다는 언중(言衆)의 무의식적 욕망이 낳은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근대 이후에 한글 전용을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이 조선조 말기의 번역 성서였고, 그 뒤를 소설이 이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말하자면, 한글 전용은 대중과 통화하고 싶은 욕망의 결과다. 한글 전용은 민주주의라는 가치와 긴밀히 연결돼 있다.) 중화민국 초창기에 중국 지식인들이 외치던 한자가 망하지 않으면 중국이 망할 것이라는 구호를 흉내내어 혼용론 진영의 일각에선 최근 한글이 망하지 않으면 한국이 망할 것이라는 도발적 구호를 만들기도 했지만, 한글의 흥망과 한국의 흥망이 어떻게 관련되는지 나는 모르겠다. 한글 전용 출판물들은 지금까지 점점 늘어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흥망성쇠는 자연과 역사의 이법이어서 언젠가 한국이 정말 망할지도 모르지만, 한글 때문에 망하지는 않을 것이다. 한국이 이만큼이나마 흥한 것은 사실 한글 덕도 있다. 20세기 초 이래의 한글 보급 운동은 한국인의 문맹률을 크게 낮췄다. 한글만을 사용해서 의미가 분명히 들어오지 않는 낱말은 괄호 안에 한자를 병기해주면 그만이다.
그러나 출판물에서의 한자 노출을 금지하는 것도 어리석은 짓이다. 한글 사용을 금지한 연산군 시대의 희비극이 우리 역사에 존재하기는 했지만, 도대체 어떤 문자의 사용을 법으로 금지하는 것도 우스꽝스러운 일이고, 한자를 쓰겠다는 욕망이 있는 한 법으로 금지한다고 해서 그 관행이 사라지지도 않을 것이다. 이미 큰 흐름이 한글 전용으로 가고 있으므로, 단지 그 흐름을 방해만 하지 않아도 족하다.
개인적인 견해를 하나 덧붙인다면, 적어도 각급 학교의 교과서에서는 한글 전용을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교과서는, 말하자면, 한국어의 표준적 텍스트를 모아놓은 것이다. 그런 표준적 텍스트들에는 한국어의 모범적 서기 체계가 반영되는 것이 옳다. 한국어의 모범적 서기 체계는, 말할 것도 없이,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담고 있는 한글 전용이다.
사실, 하나의 언어가 하나의 문자 체계로 표기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한 텍스트나 한 문장 안에서 이질적인 문자 체계를 병용하는 관습이 있는 나라는 한국과 일본 이외에 얼른 떠오르지 않는다. 예컨대 옛 유고슬라비아의 제1공용어인 세르보-크로아티아어는 키릴 문자로도 표기되고 로마 문자로도 표기되지만, 이 언어의 경우에도 한 텍스트 전체를 키릴 문자로 쓰거나 로마 문자로 쓸 뿐, 한 텍스트 안에서, 심지어 한 문장 안에서 두 개의 문자 체계를 혼용하는 것은 아니다.
한자 혼용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한자어는 한자로 표기돼야 그 뜻이 얼른 들어온다고 말한다. 이런 주장이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다. 낱말에 따라서, 맥락에 따라서, 한자어의 표의성이 크게 효과를 발휘하는 경우가 있기는 하다. 또 한자 혼용문에 익숙한 나이 든 세대의 경우, 한자어가 한글로 표기됐을 때보다는 한자로 표기됐을 때 더 뜻이 쉽게 파악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한자가 더 편한 세대는 이제 점점 사라지고 있다. 그리고 한글이라고 해서 표의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한글 맞춤법은 서유럽 언어학계에서 형태음소론이라는 것이 체계화되기 전에 마련됐지만, 놀랍게도 형태음소론의 이론이 그대로 반영돼 있다. 즉 한글 맞춤법에서 하나의 형태소는 늘상 동일한 형태를 갖게 돼 있다. 독립적으로 발화되면 똑같이 〔낟〕이라고 발음되는 낟, 낫, 났, 낮, 낯, 낱 따위 말들의 맞춤법을 구별하는 것이, 한글 맞춤법의 형태음소론적 성격을 또렷이 드러내는 예로 흔히 거론된다. 이런 낱말들의 맞춤법은 표음 기능만이 아니라 표의 기능까지 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글 맞춤법의 이런 형태음소론적 특성과는 무관하게, 표음문자도 그것이 사람들에게 익숙하게 될 때는 어느 정도 표의성을 띠게 된다는 사실이 지적돼야 한다. (실상 우리가 표음문자와 표의문자를 구별할 때, 그 문자 체계들의 주된 특성을 추상해서 그리 명명한 것일 뿐, 실제로 표음문자가 오로지 표음만을 하고, 표의문자가 오로지 표의만을 하는 것은 아니다. 표음문자에도 표의적 요소가 있고, 표의문자에도 표음적 요소가 있다.) 예컨대 내게는 해병대라는 글자들의 꼴이 海兵隊라는 글자들의 꼴보다 훨씬 더 직접적으로 〔해병대〕의 개념을 연상시킨다. 나는 〔해병대〕의 개념을 담은 해병대라는 글자꼴에는 아주 익숙해 있지만, 海兵隊에는 그리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 내게 해병대는 海兵隊보다 훨씬 더 표의적이다. 물론 내게도 해와 병과 대라는 글자들 하나하나가 海와 兵과 隊라는 글자들 하나하나보다 더 표의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 글자들이 모여 단어를 이룬 뒤의 해병대는 海兵隊보다 내게 더 표의적이다. 우리는, 적어도 나는, 낱말 단위의 글자 뭉치를 익히고 읽는 것이지 글자 하나하나를 익히고 읽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학교에 다니면서 한자를 배울 만큼은 배운 셈이지만, 적어도 한국어 문장에서는 한자 혼용문보다 한글 전용문에 더 익숙한 나의 경우에는, 한자로 표기됐을 때보다 한글로 표기됐을 때 더 뜻이 금방 들어오는 한자어들이 해병대말고도 수두룩하다. 대한민국이라는 말도 그렇다. 내게는 대한민국이 大韓民國보다 훨씬 더 표의적이다. 즉 대한민국이 大韓民國보다 더 직접적으로 그 뜻이 전달된다. 대한민국이라는 글자의 꼴이 大韓民國이라는 글자의 꼴보다 더 눈에 익숙한 탓이다. 나는 大韓民國이라는 글자꼴을 보면, 토오쿄오나 베이징의 한국 대사관 정문 앞에 내걸려 있을 법한 현판이 연상된다. 즉 大韓民國이 내 첫눈에는 일본어나 중국어처럼 생각된다. 물론 이것은 착시다. 그러나 나는 이런 착시가 내 개인적인 경험이 아니라, 한글 전용문에 익숙한 세대들에게 공통되는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한글 전용문이 일반화되면서, 어느 틈에 한글도 표의성을 띠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이제 적어도 사십대 이하의 한국인에게는 한글 역시 부분적으로는 표의문자가 되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 세대에게 한자 혼용문은 단지 쓰기만 불편한 것이 아니라, 읽기도 불편하다.
다음, 세대를 떠나서, 한자의 표의성이 어떤 경우에나―즉 낱말이나 맥락을 막론하고―한글보다 더 뛰어난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늘 단어를 구성하는 한자 하나하나의 의미를 통해서 그 단어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학교라는 낱말을 통째로 배우는 것이지, 학이 學이고, 교가 校라는 것을 안 뒤에야, 그러니까 學校를 통해서, 학교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은 아니다. 말을 바꾸어, 우리는 학교의 의미를 그 자체로 배우는 것이지, (1)학교를 두 구성 부분으로 나눈 뒤에 (2)학은 배우다의 의미를 지닌 형태소이고 교는 집이라는 의미를 지닌 형태소라는 걸 알고 나서 (3)그 다음에 다시 그걸 조립해 학교의 의미를 알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이 점을 지적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낱말을 배울 때, 그리고 그것을 사용할 때, 항상 그 어원을 염두에 두고 배우거나 사용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 말이다. 이 점을 표나게 강조하기 위해서, 개화기 이후에 일본어의 영향을 받아 그 뜻이 변하게 된 전통적 한자어의 예를 살피는 것은 적절한 일인 듯하다.
예컨대 방송(放送)이라는 말은 전통적으로 죄인을 풀어준다는 뜻이었지만, 일본어 호오소오(放送)의 영향을 받아 이제는 보도나 연예를 라디오나 텔레비전의 전파에 실어 내보내는 것을 뜻하게 되었다. 발명(發明)은 전통적으로 죄가 없음을 말하여 밝힘 즉 변명의 뜻이었지만, 일본어 하츠메이(發明)의 영향으로 이제는 주로 새로운 기술이나 물건 따위를 만들어냄의 뜻으로 쓰이고 있다. 그러니까 당초 중국에서 수입됐거나 한국에서 만들어진 한자말들이, 19세기 말~20세기 초 이후 똑같은 형태의 일본 한자어와 접촉하면서 일본어의 간섭을 받아, 원래의 의미를 잃고 일본 사람들이 부여한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이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한자어들 가운데도 이런 유형의 어휘들은 기다란 목록을 만들 수 있을 만큼 많다. 그 가운데 몇 개만 더 예를 들어보자.
중심(中心)이라는 말은 본디 마음속을 뜻했지만 이젠 일본어 추우신(中心)의 영향으로 한가운데, 한복판의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발표(發表)라는 말은 본디 뾰루지 같은 것이 피부 바깥으로 자라는 것을 뜻했지만, 지금은 일본어 핫표오(發表)의 영향을 받아 사람들에게 널리 드러내 알림의 뜻이 되었다. 발행(發行)이라는 말은 본디 길을 떠난다는 뜻이었지만, 이젠 일본어 핫코오(發行)의 영향을 받아 책이나 신문 따위를 인쇄해 펴냄 (관공서․학교․회사 등이) 증명서 따위를 만들어 그것을 요구하는 사람에게 내어줌 (정부가) 화폐를 만들어 사회에 내놓음 따위의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본디 막 결혼한 사람이라는 뜻이었던 신인(新人)은 이제 어떤 분야에 새로 나서서 활동을 시작한 사람이라는 뜻이 되었다. 생산(生産)은 본디 아이를 낳는 것 즉 출산의 의미였지만 이젠 일본어 세이산(生産)의 쓰임새에 영향받아 인간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만듦의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물론 생산이라는 말이 지금도 출산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이차적․주변적 의미가 되었고, 그런 의미의 생산에는 낡은 말투라는 뉘앙스가 있다. 실내(室內)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본디 남의 아내를 점잖게 이르는 말이었던 이 말은 이젠 그런 용법을 거의 잃어가고 있다. 대신에 일본어 시츠나이(室內)의 영향으로 방 안, 집 안을 의미하고 있다. 산업(産業)이라는 말은 본디 소유하고 있는 것이나 직업을 의미했지만, 지금은 일본어 산교오(産業)의 영향으로 근대적 의미를 얻게 돼 생산을 목적으로 하는 사업을 가리키게 되었다. 사회(社會)라는 말은 본디 일종의 전통적 제의를 위한 모임을 뜻했지만, 이젠 일본어 샤카이(社會)의 영향으로 공동 생활을 하는 인간의 집단을 의미하게 되었다. 자연(自然)이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스스로 그렇다는 뜻이었지만, 이젠 여러 가지 철학적․과학적 개념을 담게 되었다.
이런 한자어들을 이루는 개개 한자어의 의미를 합성한 것이 이 단어들의 옛날 의미에 더 가까운지, 아니면 새로운 의미에 더 가까운지는 확실치 않다. 확실한 것은, 이러한 의미 변화 자체가, 우리가 한자어의 의미를 파악할 때 한자의 뜻을 합성해서 파악하는 것은 아니라는 증거가 된다는 사실이다. 한자어의 의미가 오로지 그 한자어를 이루고 있는 한자들의 의미를 합한 것이라면, 의미 변화가 이렇게 흔히 생기는 것은 부자연스럽다. 즉, 우리는 단어를 배우는 것이지 글자를 배우는 것이 아니다. (물론 여기서도 이런 관점을 지나치게 몰고 가서는 안 된다. 대부분의 경우, 분명히 한자어의 의미와 그 한자어를 이루는 한자의 의미 사이에는 깊은 관계가 있다. 내가 여기서 비판하는 것은 한자어의 의미를 사회적 맥락에서 절단해 오로지 그 구성 한자의 의미의 함수로 보는 소박한 견해일 뿐이다.)
교육방송의 프로그램에 나온 토론자 한 분은 집 가(家) 자와 허물 죄(罪) 자의 예를 들며, 한자의 우수성을 찬미했다. 家자는 아래쪽에 돼지(豕)를 키우며 살았던 옛 중국인들의 가옥 구조를 나타내고 있고, 罪라는 게 별것 아니라 사방에서(四) 아니라고(非) 하는 것이 죄라는 것이다. 그렇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가 한자를 써야 할 이유가 되는가? 한자 몇 글자의 유래를 아는 것이 때로 옛 중국인들의 생활 풍습이나 상상력을 짐작하는 데 도움이 될 수는 있다. 그것은 충분히 흥미롭고, 때때로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아낼 만하다. 그러나 그런 흥미와 호기심을 대부분의 한자가 유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또 만 보를 양보해서 대부분의 한자가 우리의 호기심과 흥미를 유발할 만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문자로서의 한자의 강점이 되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그것이 우리가 한자를 써야 할 이유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막상 한자를 써야 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한자는 중국을 대상으로 한 인류학의 열쇠로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하나의 문자 체계로 기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좋게 이해하자면 그 말을 한 토론자가 일종의 유머 감각으로 그 말을 꺼낸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그 유머는, 요즘 아이들의 문자로, 썰렁했다.
5. 그러면 우리는 한자를 배우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아야 하나? 나는 당연히 배우고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하고, 어차피 배우고 가르쳐야 하는 것이니 되도록 일찍부터 배우고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낮추어 잡아도 우리말 어휘의 반 이상은 한자어이고, 그 한자어들의 꽤 많은 수는 한자에 대한 지식 없이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우리가 한글을 전용한 문장을 쉬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은 한자에 대한 지식이 어슴푸레하게나마 밑바탕에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한자 교육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동의하지 않는 견해이기는 하다. 내 얘기는 한글로 표기된 한자어들이 모두 다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꽤 많은 수의 한자어들이 그렇다는 것이다.
게다가 한글 맞춤법 자체가 한자에 대한 지식을 전제하고 있다. 동님문이라고 읽는 독립문을 우리가 독립문이라고 표기하는 것은, 그것이 한자 獨立門에 대응하기 때문이다. 이 주장에 대해서, 그것은 한자와 무관하게 형태소를 고정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반박할 수도 있다. 말하자면, 한국어에서 독은 홀로라는 의미를 지닌 형태소이고, 립은 서다는 의미를 지닌 형태소이므로, 그리고 동님문의 첫 형태소와 둘째 형태소는 그 독과 립이므로, 동님문이라고 써서는 안 되고 독립문이라고 써야 한다고 말이다. 물론 그것은 옳은 말이다. 즉 한글 맞춤법의 원리를 설명하는 데 꼭 한자가 매개가 돼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글 맞춤법을 처음 배우는 아이들이나 외국인에게, 한자의 매개 없이 그걸 설명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물론 독학 독재 독점 독창 독자적 독보적 독방 독단 독신 독선 독주 독백 고독 단독 등 형태소 독을 포함하는 낱말들을 배워가면서 독의 의미를 자연스럽게 알게 될 수도 있을 것이고, 기립 수립 자립 설립 조립 대립 시립 도립 등 형태소 립을 포함하는 낱말들을 배워가면서 립의 의미를 자연스럽게 알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위에서 얘기했듯 아예 처음부터 독은 홀로라는 뜻이고, 립은 서다의 뜻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자의 매개 없이 말이다. 그러나 한자의 매개 없이 그것을 설명하자면, 방금 말한 그 독은 독약이나 해독의 독과는 다르고, 또 독촉이나 감독의 독과도 다르고, 또 독서나 애독의 독과도 다르고, 또 독지가나 위독의 독과도 다르다. 그걸 잘 구별해야 한다. 다음, 우리가 말한 립은 소립자의 립과는 다르다. 소립자의 립은 낟알이라는 뜻이다. 또 도롱이와 삿갓을 뜻하는 사립이라는 말이 있는데, 거기서 립은 삿갓이라는 뜻이어서, 우리가 지금 말하는 립이 아니다. 독도 여러 가지이고, 립도 여러 가지이니, 그걸 잘 구별해야 한다라며 길고 복잡하게 설명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말하자면 한국어에는―한국어만이 아니라 일본어도 마찬가지이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중국어도 마찬가지인데―음이 같은 형태소들(이 경우엔 한자들)이 너무 많은 것이다. 이때, 한자를 개입시키면 설명이 훨씬 깔끔하고 간단해질 것은 분명하다.
음이 같은 한자 얘기를 함으로써, 이제 우리는 자연스레 우리말 한자어들의 동형(同形) 문제로 접어들 수 있게 되었다. 실상 한국어 사용자들에게 한자 지식이 필요한 가장 커다란 이유는 한자어에 동형어들―동음이의어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이 동형어 문제는 한자 혼용론자들이 자신들 주장의 논거로 으레 내세우는 단골 아이템이다. 그때마다 한글 전용론자들은 동음이의어는 어느 언어에도 있는 것이고, 단어는 독립적으로 쓰이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맥락 속에서 사용되는 것이므로 그 맥락을 따져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고 반박해왔다. 나는 원칙적으로 전용론자들의 견해에 동의한다. 분명히 동음이의어는 어느 언어에도 있고, 단어는 문맥 속에서 구체적 뜻을 획득하는 것이므로 그것이 한자를 혼용해야 할 이유는 될 수 없다. 문맥으로도 뜻이 모호한 경우에는 괄호 안에 한자를 병기해주면 그만이다.
그러나 내가 한자 교육을 불필요하게 생각하는 한글 전용론자들에게까지 공감하는 것은 아니다. 괄호 안에 한자를 병기하거나, 그 병기된 한자를 이해하는 데에도 한자 지식은 필요하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말 동음이의어에 대한 한글 전용론자들의 주장이 흔히 거친 재단으로 현실을 왜곡하고 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 정직하지 못하다. 우리말의 동음이의어들은, 일본어를 제외한다면, 널리 알려진 어떤 언어보다도 많고, 그 동음이의어의 압도적 다수는 한자어다. 그렇게 된 사정은 한자에 대응하는 음의 가짓수가 한정돼 있고, 두 음절로 이뤄진 한자어들이 제일 많은 데에 있다. 스물 가까운 이질적 의미를 지닌 사기라는 말은 혼용론자들이 흔히 내세우는 예로서 별난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말 한자어가 한두 개의 동형어를 지닌 것은 예외적 현상이 아니라 아주 흔한 현상이다. 국어 사전의 어떤 페이지를 펼쳐도 동형어들은 금방 눈에 띈다. 이런 것을 어느 언어에도 있는 현상이라고 속 편하게 말할 수는 없다.
사기를 비롯한 무수한 한자어 동형어에 대해서 일부 전용론자들은 영어의 get이나 have 같은 동사에도 수십 가지의 의미가 있다고 내세운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적절치 않은 비교다. 사기의 경우와 get의 경우는 본질적으로 다른 언어 현상이기 때문이다. 사기가 지니고 있는 것은 동형성(同形性=동음이의 homonymy)이지만 get이나 have가 지닌 것은 다의성(多義性 polysemy)이다. 동형성(동음이의)이란 이질적인 의미가 우연히 한 형태 속에 스며든 경우에 사용하는 말이다. 그러니까 동형어(동음이의어)는, 겉보기에 형태는 하나지만, 실은 여러 개의 서로 다른 기호들이다. 반면에 다의성은 비록 어떤 단어가 여러 의미를 가졌다고 하더라도 그 의미들이 최초의 한 의미에서 가지를 쳐나간 경우에 사용되는 말이다. 당연히, 이 경우엔 그 여러 의미들이 어원적 동일성을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다의어는 본질적으로 한 개의 기호다. 그런데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한자어들은 동형어들이고, 일부 한글 전용론자들이 거론하는 영어의 get이나 have 같은 동사는 다의어다. 실제로는 엄격한 의미의 다의어에도 못 미칠 정도로 get이나 have가 지니는 여러 의미들 사이에는 밀접한 연관이 있다.
이런 동형어들의 개념을 구분하기 위해서도, 한자 교육은 필요하다. 그리고 어차피 한자 교육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일찍 시작할수록 좋다. 기억력이 스펀지 같을 때 배우는 것이 부담이 덜하기 때문이다.
물론 한자는 배우기 어렵다. 한글에 견준다면 정말 배우기 힘들다. 글자의 수효도 많고, 한 글자 한 글자의 형태와 소리와 의미를 함께 익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자의 대부분은 형성문자이므로, 즉 의미를 나타내는 부분과 소리를 나타내는 부분을 결합해서 만든 글자이므로, 한자들 사이의 소리 연관, 의미 연관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예컨대 한자 이천 자를 배우는 것이 한글 스물넉 자를 배우는 것보다 백 배 가까이 힘든 것은 결코 아니다. 갑골문에서는 20퍼센트 정도였던 형성자는, 한대(漢代)의 허신(許愼)이 편찬한 최초의 자전인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 이미 80퍼센트까지 늘었고, 현재는 한자의 90퍼센트 이상이 형성자라고 한다. (『설문해자(說文解字)』의 字가 바로 이 형성문자다. 『설문해자』는, 글자 그대로, 文을 설명하고 字를 풀이한 책이다. 허신에 따르면 文이란 대개 사물의 종류에 따라 그 꼴을 본뜬 글자이고, 字란 그후에 꼴과 소리가 서로 더해져 이뤄진 글자다. 요컨대 文이 상형자라면, 字는 형성자인 것이다.)
또 우리가 배워야 할 한자가 수만 자인 것은 아니다. 한 통계에 따르면 중국어에서도 출판물의 90퍼센트를 차지하는 것은 9백5십 자이고, 99퍼센트는 2천4백 자로 채워진다. 중국에서는 1988년에 국가교육위원회와 국가언어문자공작위원회(國家言語文字工作委員會)가 공동으로 현대한어상용자표(現代漢語常用字表)를 공포해 상용자 3천5백 자를 정했는데, 이 3천5백 자의 사용 빈도율이 99.48퍼센트나 된다고 한다.(최영애, 『한자학 강의』, 통나무, 1995, 21쪽;최영애, 『중국어란 무엇인가』, 통나무, 1998, 161쪽) 중국에서도 제대로 교육을 받은 사람이 아는 한자 수가 대략 3천에서 4천 자라고 하니, 우리가 그 만큼을 알 필요도 없을 것이다. 2천 자 남짓만 안다고 하더라도 한국어에 대한 감각을 유지하는 데는 충분할 것이다. 실제로 우리말에서 생산성이 아주 높은 한자들은 불과 몇백 자 정도일 것이다. 얼른 대(大), 불(不), 무(無), 성(性), 화(化), 자(自) 같은 한자 형태소들이 떠오른다.
6. 끝으로 일본어 고유명사 표기에 대하여 한마디. 일본어에서 田中이라고 표기되는 사람 이름에 대하여 타나카보다는 전중을 고집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다, 비록 예전보다는 많이 줄었지만. 이 사람들은 일본어에서 大阪, 東京이라고 표기되는 땅 이름에 대해서 오오사카 토오쿄오라고 읽는 것에 분개하고, 대판 동경이라고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타나카 대신 전중을 택하고, 오오사카 토오쿄오 대신에 대판 동경을 택해야 하는가? 대답은 아니오이다. 타나카는 타나카일 뿐 전중이 아니고, 오오사카는 오오사카일 뿐 대판이 아니며, 토오쿄오는 토오쿄오일 뿐 동경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의 논점은 외래어 표기법이 아니다. 그러니까 일본의 수도 とうきょう를 도쿄로 표기하느냐, 도꾜로 표기하느냐, 토오쿄오로 표기하느냐, 토오꾜오로 표기하느냐, 도오꾜오로 표기하느냐의 문제는 아니다. 말을 바꾸어 たなか가 타나카냐, 타나까냐, 다나카냐, 다나까냐의 문제, 또는 おおさか가 오오사카냐, 오사카냐, 오오사까냐, 오사까냐의 문제는 아니다. 물론 그 문제도 중요하기는 하다. 그러나 내가 지금 여기서 거론하고 있는 것은, 일본의 수도 東京을 위에 나열했던 것처럼 일본 한자음으로 읽어야 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동경이라고 한국 한자음으로 읽어야 하느냐의 문제이다.) 오오사카를 대판이라고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예컨대 일본에서는 대구(大邱)를 자기들 한자음을 따라 타이큐우라고 읽고, 제주도(濟州道)를 사이슈우토오라고 읽는다는 점을 지적하며, 우리도 언어 정책의 주체성을 세워야 한다고 말한다.(예컨대 좀 오래 된 글이기는 하지만, 이숭녕의 「도오꾜오 호칭론」, 1968)
이런 주체성론자들은 한글 전용론 진영에서도 발견되고, 한자 혼용론 진영에서도 발견된다. 우선, 한글 전용론자가 대판을 주장하는 것은 처음부터 어불성설이다. 대판은 한자를 매개로 해서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 한자 혼용론자의 대판 주장은 그들이 늘상 한자를 염두에 두고 있으므로 자신들의 평소 논지와 어그러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이들의 대판 주장 역시 올바른 것은 아니다. 그들이 잊고 있는 것은 한국어에는 이제 사라져버린 한자의 훈독 관행이 일본어에는 여전히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일본어 고유명사 가운데는 음독 못지않게 훈독이 흔하다. 예컨대 타나카 오오사카는 훈독이고, 토오쿄오는 음독이다. 모두 알다시피 훈독이란 한자를 일본어 훈으로 읽는 방식이 아니라 일본의 고유어를 한자로 표기하는 방식이다. 그들은 田中을 타나카라고 읽는 것이 아니라, 밭 가운데라는 뜻의 타나카를 田中이라고 표기하는 것이다. 우리가 일본 이름 타나카를 전중이라고 부른다는 것은, 밭 가운데라는 의미의 타나카를, 일단 중국어로 번역한 다음에, 해당되는 한자의 한국음을 읽는다는 것이다. 그 번역과 변형의 과정 끝에 탄생한 전중이라는 이름은 이 세상 누구의 이름도 아니다.
이런 상상을 해보자. 미국인들이 일본인들처럼 한자를 수입해서 훈독의 관행을 만들었다고 하자. 그랬다면 그들은 그 유명한 Watergate 빌딩을 水門이라고 표기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水門이라고 쓰고, 자기들 말로 워터게이트라고 읽는 것이다. (이것이 한국어에선 오래 전에 사라져버렸고 일본어에는 끈질기게 남아 있는 한자 훈독의 본질이다.) 그럴 때 우리는 영어의 빌딩 이름 Watergate를 수문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오스트레일리아에는 똑같이 Newcastle이라는 도시가 있다. 이 나라 사람들이 일본 사람들처럼 한자를 수입해서 훈독 관행을 확립했다면, 이 도시를 新城이라고 표기했을 것이다. 이 경우에도, 쓰기는 新城이라고 쓰고, 읽기는 뉴캐슬이라고 읽는 것이다. 이럴 때 우리는 이 도시를 신성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타나카를 전중이라고 부르고, 오오사카를 대판이라고 부르자는 주장은 Watergate를 수문이라고 부르고, Newcastle을 신성이라고 부르자는 주장과 전혀 다르지 않다. 그 유명한 빌딩의 이름이 Watergate로 표기되든 水門으로 표기되든 우리는 그걸 워터게이트라고 부르는 게 당연하다.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오스트레일리아에 있는 공업도시가 Newcastle이라고 표기되든 新城이라고 표기되든 우리는 그걸 뉴캐슬이라고 부르는 게 당연하다. Watergate와 수문, Newcastle과 신성 사이에는 간접적인 의미 연관이 있을 뿐, 아무런 소리 연관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당연히 오오사카를 오오사카라고 부르고, 타나카를 타나카라고 불러야 한다. 타나카를 전중이라고 불러야 한다면, 철학자 화이트헤드를 우리는 백두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그러면 일본의 고유명사 가운데 한자를 음독하는 경우엔 그 이름을 한국어로 어떻게 부를 것인가? 즉 한국어와의 소리 연관이 있을 때 말이다. 예컨대 토오쿄오는 동경과 소리의 뿌리가 같은 것이니, 동경이라고 부를 수도 있지 않을까? 원리적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같은 나라의 고유명사에 대해 음독과 훈독을 일일이 구별해서 음독의 경우는 한국음으로 읽고, 훈독의 경우는 일본음으로 읽는 것은 너무 번거로운 일이다. 그래서 나로서는, 외국 이름 읽기의 일관성을 유지한다는 취지에서 모든 고유명사를 일본 이름으로 불러주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물론 원리보다 중요한 것은 관행이다. 동경이라는 이름은 이미 우리에게 익숙하고, 그러니 그렇게 부르는 관행을 금지할 수는 없다. 또 우리가 일본이라는 말을 니혼이나 닛폰이라는 말로 대치하는 날은 가까운 장래에는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중국어 고유명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중국어의 한자음은, 일본어의 음독 한자음처럼, 한국 한자음과 뿌리가 같다. 그러니 한국 한자음으로 읽는 것이 일단 자연스러워 보인다. 실상 우리는 오래도록 그런 관행을 지켜왔다. 孔子를 콩쯔가 아니라 공자로 불렀고, 秦始皇을 친스후앙이 아니라 진시황으로 불렀다. 이것은 현대인에게도 대체로 적용돼, 우리는 毛澤東을 마오쩌똥이라기보다는 모택동으로 즐겨 불렀고, 周恩來를 저우언라이라기보다는 주은래로 즐겨 불렀다. 이것은 일본의 현대 정치가들을 대체로 일본 발음으로 불러준 것과도 대조된다. 일본 이름을 일본식으로 부른 데 견주어, 중국 이름을 한국식으로 부른 데에는, 앞서 얘기한 일본의 훈독 관행도 이유로 작용한 듯하고(일본어의 한자 훈독 발음은 한국 한자음과는 전혀 다르니), 또 우리가 중국어보다는 일본어에 더 익숙해 있었다는 사정도 작용한 듯하다.
지금 시행되고 있는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일본의 인명은 과거와 현대의 구분 없이 일본음으로 표기하지만, 중국의 인명은 과거인과 현대인을 구분해서 과거인은 우리 한자음으로 표기하고 현대인은 원칙적으로 중국 발음으로 표기하도록 돼 있다. 그러니까 진시황의 승상 李斯는 리쓰가 아니라 이사인 데 반해, 지금의 국가주석 江澤民은 강택민이 아니라 장쩌민인 것이다. 외국의 고유명사를 원음에 가깝게 읽는 현재의 추세와 우리 음으로 읽었던 전통적 관습 사이의 타협이기는 하지만, 나는 이것이 대체로 합당한 규정이라고 생각한다. 중국 인명의 표기에서 과거인과 현대인을 구분하는 것이 억지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실은 이것은 유럽어들 사이에서도 묵시적으로 확립된 관행이다.
동아시아 세 나라의 독특한 한자음들과 딱 떨어지게 비교될 수는 없겠지만, 유럽어에도 동일한 기원의 세례명들이 언어에 따라 서로 조금씩 다른 형태를 지니고 있다. 예컨대 영어의 찰즈(Charles)는 프랑스어로 가면 샤를(Charles)이 되고, 독일로 가면 카를(Karl)이 되고, 스페인으로 가면 카를로스(Carlos)가 되고, 이탈리아어로 가면 카를로(Carlo)가 된다. 비교적 우리에게 잘 알려진 외국어인 영어와 프랑스어를 비교하자면, 영어의 피터(Peter), 스티븐(Stephen), 존(John), 조운(Joan), 헨리(Henry), 메어리(Mary)는 프랑스어의 피에르(Pierre), 에티엔(Etienne), 장(Jean), 잔(Jeanne), 앙리(Henri), 마리(Marie)에 해당한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잘 알려진 인물의 경우에는 그들의 이름을 나라마다 자기식의 이름으로 읽는다. 예컨대 프랑스의 잔 다르크(Jeanne dArc)는 영어에선 조운 어브 아크(Joan of Arc)가 된다. 그러나 현대의 인물이거나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람의 경우에는 형태의 변화 없이 그냥 외국식으로 불러준다. 예컨대 영국의 유명한 여성 경제학자 조운 로빈슨(Joan Robinson)은 프랑스에서도 Joan Robinson이다. 영국의 필부 존 스미스(John Smith)는 프랑스어로도 존 스미스이고, 프랑스의 필부 피에르 뒤퐁(Pierre Dupont)은 영어로도 피에르 뒤퐁이다.
이런 예는 얼마든지 들 수 있다. 독일 제2제국의 빌헬름(Wilhelm) 1세나 2세는 영어에선 윌리엄(William) 1, 2세가 되고 프랑스어에선 기욤(Guillaume) 1, 2세가 되지만, 현대를 살고 있는 별 볼일 없는 독일인 빌헬름은 영어 신문에서도 프랑스어 신문에서도 그저 독일식으로 빌헬름일 뿐이다. 르네상스 미술을 대표하는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프랑스어에서 각각 미켈랑주, 레오나르 드 뱅시라는 새 이름을 얻었지만, 지금 이탈리아에 그들과 똑같은 이름을 지닌 화가가 나타나 유명해진다면, 프랑스 신문들은 당연히 그를 이탈리아식 이름으로 불러줄 것이다. 『데카메론』의 작가 보카치오는 프랑스에서 보카스가 되지만, 별 볼일 없는 이탈리아 사람 보카치오는 프랑스어로도 보카치오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프랑스어로 아리스토트이지만, 지금 아테네에 사는 필부 아리스토텔레스는 프랑스어로도 여전히 아리스토텔레스다. 프랑스인들이 아리스토텔레스를 아리스토트로 부르고,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쥘 세자르라고 부르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마르크 오렐이라고 부르고, 피타고라스를 피타고르라고 부르고, 미켈란젤로를 미켈랑주라고 부르고, 보카치오를 보카스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들이 과거의 중국 이름들을 우리식 한자음으로 읽는 것에 비견할 만하다.
그래서 나는 중국어 고유명사 표기에 대한 지금의 규정이 받아들일 만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공자나 맹자처럼 예전부터 잘 알려졌고 우리가 공자 맹자로 불러온 사람들을 갑자기 콩쯔나 멍쯔로 바꿀 수야 없겠지만, 그들의 이름 없는 후손인 孔씨, 孟씨 들은 이제 그들이 자신들을 부르는 이름을 존중해서 우리도 콩씨 멍씨로 부르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다.
7. 마무리하자. 한자는, 그 이름에서 드러나듯, 중국인의 글자다. 로마자가 옛 로마인들의 글자이듯 말이다. 그러나 로마자가 로마인만의 것은 아니듯, 한자도 중국인만의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중국인의 것이라는 이유로, 우리가 그것을 배척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우리 조상들은 한자를 이용해서 우리말을 표기해왔다. 향찰로 기록된 옛 노래들이나 이두로 기록된 무수한 공문서들은 한자가, 불충분한 대로, 한국어의 표기 수단으로서 제 나름의 역할을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한자는 중국어라는 언어와 꽉 밀착된 글자 체계다. 일음절일 형태소의 고립어라는 중국어의 특성이 한자에 그대로 녹아들어 있다. 그것은 다음절 교착어인 한국어를 표기하는 데는 아주 불편한 문자 체계다. 꼭 그 이유에서만은 아니었겠지만, 아무튼 지금부터 5세기 반쯤 전에 한글이 나왔다. 그리고 그 한글은 한국어를 표기하는 데 알맞은 글자다. 그러니, 우리가 표기 수단으로서 한자를 포기하고 한글을 택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한글이 한자와 싸워온 과정은 그대로 민주주의가 봉건주의와 싸워온 과정이다. 우리는 한글이 우리 글이어서 써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사용이 민주주의라는 가치에 부합하기 때문에 써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한자를 배우지 않을 수는 없다. 지난 이천 년 동안 한자를 매개로 해서 무수한 중국어 단어, 일본어 단어들이 한국어에 차용됐고, 그렇게 차용된 한자어들은 당연히 한자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어에 수입된 한자는 중국어나 일본어에서와는 다른 독자적인 한국음을 지니고 있고, 그래서, 중국어나 일본어에서 차용된 한자어들은 중국어도 일본어도 아닌 한국어다. 예컨대 천지(天地)라는 말은 중국어도 아니고 일본어도 아니고, 오로지 한국어일 뿐이다. 중국인이나 일본인에게 천지라고 말해봐야 그들이 그걸 天地의 뜻으로 알아들을 리가 없다. 이런 한자어들이 우리말 어휘의 태반이다. 이렇게 한국어 깊숙이 파고든 한자어의 이해에는 꽤 많은 경우에 한자에 대한 지식이 필수적이다. 이것을 부정하는 것은 부정직한 짓일 것이다. 설령 대부분의 경우 한자어의 이해에 한자 지식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한자 지식이 한자어의 이해를 돕는 것은 사실이다. 초등학교에서부터 한자를 가르쳐야 하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우리 어휘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한자어의 이해에 도움이 된다면, 2천 자 내외의 학습이 부당한 뇌 혹사는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