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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체투지의 시학
반경환
이서빈 시인은 누구이며, 여러분은 이서빈 시인을 알고 있는가? 이서빈 시인은 경북 영주에서 태어났고,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했으며, 201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을 한 바가 있다. 그는‘진성 이씨 19대 손’([체인의 한때])이며, 어릴 때는 딱지치기를 좋아했지만,“딱지에 별이 많을수록 계급이 높은 동그란 별딱지는 수백 장씩 따서 5성 장군이라도 된 양 까만봉지에 담아들고 오면 할머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짓 한다며 혀를 찼다. 몰래 의자를 갖다놓고 천장을 칼로 죽 긋고 그속에다 딱지를 감춰놓고 자면, 밤새도록 별빛이 우수수 쏟아져 꿈을 밝히던 시절”이라는 시구에서처럼,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딱지 하나가 몇 억이 왔다갔다”([쓸모없는 것의 쓸모])하는 현실보다는 천상 시인이 될 운명의 팔자를 타고 났던 것이다. 경북 영주는 소백산과 선비의 고장으로 유명한 곳이기는 하지만 도시화의 혜택이 비껴간 곳이고, 따라서 이서빈 시인은 주경야독晝耕夜讀의 대표적인 사례로서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했으며, 그 결과, 매우 뒤늦은 나이로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을 하게 되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서빈 시인은 2014년 {애지} 가을호에 [고삐]와 [마침표 .]를 발표한 바가 있었고, {애지} 2015년 겨울호에 [옥양목의 유전자]와 [파도 다듬기]를 , 그리고 {애지} 2016년 봄호에 [흰뱀], [無], [물병자리], [거울神], [금, 같다]를 발표한 바가 있었다. 내가 이서빈 시인에게 원고를 청탁한 것은 그가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을 했고, 비록, 신출내기이기는 하지만, 매우 아름답고 뛰어난 시를 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삐], [마침표 .], [흰뱀], [無] 등은 제일급의 명시들이며,‘천재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느닷없이 출현한다’는 나의 말을 가장 잘 증명해주고 있는 시들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나는 이서빈 시인의 사상과 이념과 취향을 모르고, 또한 그를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천재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느닷없이 출현한다. 나와 이서빈 시인과의 만남은 하늘이 맺어준 천명天命이며, 나는 이제 이‘천명의 소임’에 따라서, 이서빈 시인의 시집인 {달의 이동 경로}를 살펴보고자 한다.
종소리엔 신들의 웃자란 말이 있다/ 천기 하강하고, 지기 상승하고/ 죄없는 세상을 만든다. ----[종소리에 달린 귀]부분
죽음이 가까워올수록 발버둥엔 탄력이 생긴다. ----[발버둥]부분
비스듬히 앉은 듯 모로 누운 암캐의 빈젖통들/ 붉은 파산이다. ----[파산] 부분
프로메테우스가 제우스를 속이고/ 불을 훔쳐낸 고통이 만장으로 팔락인다.
---[외짝 바라춤] 부분
天孫의 피묻은 울음이 대를 이어/ 오늘밤도 달빛으로 헹구며 신비속에 잠긴 신전은 言語道斷의 극치다. ---[神殿] 부분
발굽닿는 자리에 소금 부서지는 소리가 짜다. ----[소금사막길]부분
벙어리장갑 끈은 너무 짧았고, 이별의 끈은 너무 길었네. ----[카츄사 오빠] 부분
근심이 많은 잠은 뿌리가 얕다. ----{메밀, 꿈] 부분
삶이란 말에 죽음이 살고/ 죽음이란 말속에 삶이 죽는 것이다.----[부조화의 조화] 부분
가시 많다는 건 겁 많다는 것이 아닐까. ----[직립의 꿈] 부분
저 하루살이의 시작과 끝엔 반일을 살고가는/ 피울음 장엄한 해와 달이 있다.
----[하루살이, 반날살이] 부분
젖빨던 아기가 엄마 쳐다보듯/ 씨익, 웃는 난해한 상형 문자/ 시집을 베고 자다 문장을 통째 삼켜/ 손톱밑도 땀구멍도 혀도 입술도 모두/ 시가 되어 누워있는
----[뒷모습] 부분
옛시절 깜깜했던 막장 하나씩 폐에 집어넣고/ 사람들 떠난 자리 노다지 찾는 사람들. ----[사북역이 젖다] 부분
코 꿰고, 고삐 메고 굴레씌운 소를 보면 나는 순해진다. 이것은 굴종의 기호 연대다.
----[고삐] 부분
떡잎을 보면 그 나무의 미래를 알 수가 있고, 단 한 줄의 시구로 그 시인의 영광을 알아 볼 수가 있다. 이서빈 시인의 {달의 이동 경로}의 대부분의 시편들은 가장 정교하고 세련된 말, 즉, 잠언과 경구로 씌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종소리엔 신들의 웃자란 말이 있다/ 천기 하강하고, 지기 상승하고/ 죄없는 세상을 만든다”라는[종소리에 달린 귀],“죽음이 가까워올수록 발버둥엔 탄력이 생긴다”라는 [발버둥],“프로메테우스가 제우스를 속이고/ 불을 훔쳐낸 고통이 만장으로 팔락인다”라는 [외짝 바라춤],“天孫의 피묻은 울음이 대를 이어/ 오늘밤도 달빛으로 헹구며 신비 속에 잠긴 신전은 言語道斷의 극치다”라는 [神殿],“발굽 닿는 자리에 소금 부서지는 소리가 짜다”라는 [소금사막길], “벙어리장갑 끈은 너무 짧았고, 이별의 끈은 너무 길었네”라는 [카츄사 오빠] 등의 시가 그렇고, “근심이 많은 잠은 뿌리가 얕다”라는 {메밀, 꿈], “삶이란 말에 죽음이 살고/ 죽음이란 말속에 삶이 죽는 것이다”라는[부조화의 조화],“가시 많다는 건 겁 많다는 것이 아닐까”라는 [직립의 꿈],“저 하루살이의 시작과 끝엔 반일을 살고가는/ 피울음 장엄한 해와 달이 있다”라는[하루살이, 반날살이],“젖빨던 아기가 엄마 쳐다보듯/ 씨익, 웃는 난해한 상형 문자/ 시집을 베고 자다 문장을 통째 삼켜/ 손톱밑도 땀구멍도 혀도 입술도 모두/ 시가 되어 누워있는”이라는 [뒷모습],“옛시절 깜깜했던 막장 하나씩 폐에 집어넣고/ 사람들 떠난 자리 노다지 찾는 사람들”이라는 [사북역이 젖다],“코 꿰고, 고삐 메고 굴레 씌운 소를 보면 나는 순해진다. 이것은 굴종의 기호 연대다”라는 [고삐] 등이 그렇다. 모든 신전의 종소리들에는“천기 하강하고 지기 상승”하며 “죄없는 세상을”만드는 염원이 담겨 있고, 생존(죽음)의 위기에 몰린 자의 발버둥이 가장 장엄하고 처절할 수도 있다. 일곱 마리의 새끼들을 모두 떠나보낸 “암캐의 빈젖통들이”“붉은 파산”의 그것일 수도 있고, 신성모독자로서의 프로메테우스의 고통이 만장으로 펄럭일 수도 있다. 수많은 메밀꽃들처럼, 근심이 많은 잠은 뿌리가 얕을 수도 있고, 가시가 많은 갈치는 겁이 많을 수도 있다. 하루살이보다 더 짧은 반일을 살고 가는 해와 달이 장엄한 피울음을 토할 수도 있고, “삶이란 말에 죽음이 살고/ 죽음이란 말 속에 삶이 죽는”[부조화의 조화]도 있을 수가 있다. 잠언箴言이란 무엇이고, 경구警句란 무엇인가? 잠언이란‘침묵은 금이다’라는 말과도 같이 삶의 교훈을 던져주는 말을 뜻하고, 경구란‘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과도 같이 어떤 사상이나 진리를 가장 간결하고 가장 날카롭게 표현해낸 말을 뜻한다. 잠언과 경구에는 수천 년의 역사와 전통이 압축되어 있고, 우리 인간들의 역사와 문화 전체를 설명할 수 있는 지혜가 담겨 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모든 경전들이 잠언과 경구로 되어 있듯이, 시는 잠언이고 경구이지 않으면 안 된다. 이서빈 시인은 비록, 신출내기 무명시인에 불과하지만, 한국시문학사상, 이 잠언과 경구들을 가장 정교하고 세련되게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도처에 명명의 힘이고, 도처에 최고급의 지혜가 살아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우리 대한민국과 우리 한국어의 영광이 천지창조의 첫날처럼 밝아오며, 그 아름답고 찬란한 황금의 왕관을 준비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것이 기적이다. 아니, 이 모든 것은 기적이 아니라, “젖빨던 아기가 엄마 쳐다보듯/ 씨익, 웃는 난해한 상형 문자/ 시집을 베고 자다 문장을 통째 삼켜/ 손톱밑도 땀구멍도 혀도 입술도 모두/ 시가”([뒷모습]) 된 ‘온몸의 시학’의 소산인 것이다. 이서빈 시인은 그 길고 긴 ‘무명의 쳇바퀴’를, 마치, 필연의 힘으로 ‘천재의 쳇바퀴’로 돌리면서, 자기 자신의 붉디 붉은 피로 시를 써왔던 것이다. 언어는 시인의 붉디 붉은 피이며, 그의 생명과도 같다. 이 언어의 꽃이 잠언과 경구이며, 이 잠언과 경구들이 최고급의 지혜로서 모든 인류들을 구원할 수가 있는 것이다. 모든 꿈과 희망을 잃고 방황을 하고 있는 인간들을 구원해주는 것도 시인이고, 이글이글 생살이 타는 듯한 고통 속에서 다 죽어가고 있는 인간들을 구원해주는 것도 시인이다. 미래의 꿈과 희망을 가지고 그 어떠한 장애물과 시련을 극복하게 해주는 것도 시인이고, 비록, 잠시 잠깐 동안이기는 하지만, 하늘을 찌를 듯한 환희에의 기쁨을 맛보게 해주는 것도 시인이다. 잠언과 경구만이 우리 인간들을 구원해줄 수가 있고, 모든 훌륭한 시인들은 이 잠언과 경구를 창출해내기 위하여 그토록 어렵고 힘든 고통의 지옥훈련과정을 거쳐왔던 것이다.
이서빈 시인의 ‘온몸의 시학’은‘오체투지五體投地의 시학’이다.
첫 이마를 숙인 밤하늘에 생채기난 달 하나가 떠있다. 고원의 순례자들은 출발할 때 이마에 달 하나를 챙겨간다. 그 밝기로 험로를 오체투지로 간다.
이마가 땅에 닿을 때마다 신들은 따끔따끔거릴 것같다. 이마가 헐고, 조금씩 상처가 나 오래된 표시로 딱지가 앉는다. 거뭇한 이마에 굳은살로 뜬 붉은달.
티벳 여행길에서 오체투지를 하며 가는 순례자를 만났다. 몇 달 며칠을 이마에 달띄우며 간다. 달은 언제나 찬란한 가난을 닮았다. 한동안 배고프고 또 한동안 배부르다 다시 배고픈 달. 장엄한 사육제다. 태어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거듭나기를 한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바닥을 함께 기는 그림자 푸른밤. 살 다 내리고 채우기를 몇 번 함께 기는 그림자의 눈이 푸른밤, 지순한 보름달에 세상이 환하다. 지나가던 차를 멈추고 순례하는 사람들에게 푸르스름한 지폐 몇 장을 보시한다. 고개 하나를 넘을 때마다 붉은 피가 나고, 딱지가 앉고, 또 넘으면 붉은 피가 나고, 딱지가 앉고 마지막 사원앞에 가서야 남루한 달 하나가 뜬다.
거뭇한 이마를 밝힐 평생의 달 하나 얻는다.
----[달의 이동 경로] 전문
이서빈 시인은 티벳불교신자들의 순례길을‘달의 이동 경로’라고 명명을 하고, 그 ‘오체투지의 시학’을‘장엄한 사육제다’라고 말한다. 이때의 사육제謝肉祭는 사순재四旬齋, 즉, 금욕과 단식을 앞둔 날들의 축제가 아니라, 고통으로 밥을 먹고 고통으로 춤을 추는 것을 말하고,“태어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거듭나기를”말한다. “고개 하나를 넘을 때마다 붉은 피가 나고, 딱지가 앉고, 또 넘으면 붉은 피가 나고, 딱지가 앉고 마지막 사원앞에 가서야 남루한 달 하나가 뜬다/ 거뭇한 이마를 밝힐 평생의 달 하나 얻는다”라는 시구가 바로 그것을 증명해준다.‘오체투지의 시학’은 붉디 붉은 피로 쓰는 시학이며,‘태어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거듭나기’의 시학이다. 하나의 신전이 세워지기 위해서는 수많은 신전들이 파괴되어야 하듯이, 영원불멸의 성자(시인)가 되기 위해서는 수없이 되풀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지 않으면 안 된다. 달은 어둠을 밝히는 달이며, 모든 인간들을 지상낙원으로 인도해주는 달이다. 달은 하늘에 떠 있는 달이 아니며, 그 모든 욕망을 다 비운 고원의 순례자들이 피워올리고 있는 달이다.“天孫의 피묻은 울음이 대를 이어/ 오늘밤도 달빛으로 헹구며 신비 속에 잠긴 신전은 言語道斷의 극치다”([神殿])라는 시구와“저 하루살이의 시작과 끝엔 반일을 살고 가는/ 피울음 장엄한 해와 달이 있다”([하루살이, 반날살이])라는 시구들에서처럼, 달은 순례자들의 고행으로 그 힘을 얻고, 그들의 고행을 통해서 전인류의 지혜의 등불로서 그 빛을 발하게 된다.
시인은 어제의 사람도 아니고, 오늘의 사람도 아니며, 미래의 사람도 아니다. 왜냐하면 시인은 날이면 날마다 끊임없이 새롭게 태어나는 새로운 사람으로서의 오늘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날마다 죽고 날마다 새롭게 태어나는 사람이다. 편견이나 고정관념도 시인을 죽이고, 머무름이나 휴식도 시인을 죽인다. 시인은 흐르는 물이며, 솟아오르는 안개이며, 머나먼 하늘을 향해서 끊임없이 날아가는 영원한 철새이다.
이서빈 시인은 도대체 누구이며, 여러분은 도대체 이서빈 시인을 알고 있는가? 그는 도대체, 왜 시를 썼고, 그는 도대체, 누구에게서 시를 배웠단 말인가? 도처에 명명의 힘이고, 도처에 최고급의 지혜가 살아 움직이는 그의 시들을 읽으면서, 나는 놀라움과 충격에 빠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대한민국 불세출의 대형비평가였던 김현을 정면으로 공격하고 그의 유일한 젖줄이었던‘문지’로부터 파문을 당했던 반경환----, 유종호, 김우창, 김윤식, 백낙청, 정과리, 고은, 신경림, 이문열, 신경숙, 박노해, 김용택, 정현종, 황동규, 황지우, 이성복 등을 모조리 비판하고 한국사회로부터 영원히 생매장을 당해야만 했던 반경환----. 왜, 나는 이 신출내기 시인이며 단 한 번도 얼굴을 본 적이 없는 이서빈의 출현에 놀라움과 충격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것인가?“십자가나‘卍’자./ 성호를 긋는 것 모두 신이 쳐놓은 울타리이듯/ 이쪽서 보면 인연이고, 저쪽서 보면 악연이다// 담장이 없는 밤은/ 밤새도록 귀가 열려 잠이 불안하다”라는 [투명담장], 제 입맛에 맞으면 ‘은어’라고 했다가 제 입맛에 맞지 않으면‘도룩묵’이 된다는 [묵, 혹은 도루묵],“코 꿰고, 고삐 메고 굴레 씌운 소를 보면 나는 순해진다. 이것은 굴종의 기호 연대다”라는 [고삐] 등의 ‘오체투지의 시학’은 다시 말해서‘나무아미타불의 기적’이며, 한국문학사의 새로운 기원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서빈 시인의 수천 년을 찍어누른 듯한 잠언과 경구 앞에서는 그저 어안이 벙벙하고 저절로 감탄사가 만발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러한 놀라움과 충격은 그 즉시 두려움이나 공포보다는 경의의 대상이 되고, 저절로 두 무릎을 꿇고 이 세상에서 제일 공손한 자세로 경의를 표하고 싶어지게 만든다. 모든 앎은 그것이 경제학이든, 법률이든, 철학이든, 역사이든, 문학이든, 시이든, 미술이든지 간에 잠언과 경구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꿈꾸는 것은 한 줄의 시가 아니라 한 줄의 경구인 것이다.
‘너 자신을 알라.’‘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신은 죽었다.’‘세계는 범죄의 표상이다.’‘나는 신성모독을 범한다, 고로 존대한다.’‘죄는 미워하되 인간은 미워하지 않는다.’‘신 앞에서는 만인이 평등하다.’‘투쟁은 만물의 아버지이다.’‘최종심급은 경제이다.’‘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전쟁과 가난은 자연의 인구법칙이다.’‘모든 욕망은 성적 욕망이다.’
모든 앎의 투쟁은 이처럼 최고급의 지혜를 얻기 위한 투쟁이며, 최고급의 지혜, 즉, 사상과 이론을 정립한 인간만이 영원불멸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천재란 하늘이 빚어낸 사람이며, 그는 태어난 것이 아니라 느닷없이 출현하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천재의 탄생을 볼 수가 없으며, 오직 그의 출현과정만을 볼 수가 있기 때문이다. 천재는 ‘고통의 지옥훈련과정’을 거쳐왔던 것이지만, 우리는 그 과정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느닷없는 출현에 그저 깜짝 놀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이제 이서빈 시인의 ‘오체투지의 시학’속의‘언어의 현상학’적 측면을 살펴보고자 한다.‘마침표의 현상학’과‘수다의 현상학’과‘쉬의 현상학’과 ‘無의 현상학’이 바로 그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마침표 하나 찍어놓고 보면 가장 좁은 문같기도 하고, 감옥을 막고 있는 철문같기도 하다. 마침표가 없는 책은 없다. 어떤 빛나는 철학이나 슬픔, 기쁨에도 마침표는 있다.
외눈박이 눈은 그 사람을 막고 있는 점이다. 내 어렸을 때 던졌던 조약돌 같아 읽고 있던 책에서 퐁당퐁당 소리가 물방울처럼 튀어오른다.
이야기 하나에는 수많은 점이 있다. 점 하나 잘못 찍어 님이, 남이 되기도 하고, 궁이 공으로 굴러 떨어지기도 하고 마침표가 미침표가 되기도 한다.
작은 점 하나에서 아주 큰동그라미를 그리기도 하고, 글자가 걸어 나오고 초록 선율과 붉은 신비가 콩나물 자라듯 자라기도 한다.
모든 것을 마무리 짓는 점 하나, 절 안 모셔놓은 부처도 점안을 해야 비로소 눈뜬 부처가 된다. 부처의 눈알은 지구 공같기도 하다. 바둑을 두면 집 한 채를 지을 수 있고, 마지막 돌 하나로 길을 막을 수도 있다.
말이나 문장 뒤에 찍지 않고 슬쩍 넘어가기도 하는 점. 긴장감에 꿀꺽 삼킨 침 한 방울같은 것 누구에게 어떤 말을 한 뒤 살짝 열어놓기도 하지만, 며칠 뒤엔 사라지는 점. 한적하게 비어있는 곳엔 작은 점 하나 찍혀 있다.
실수·노여움·슬픔은 모두 마침표를 안 찍은 것들. 우주를 반복하는 저 꽃잎도 언젠가 한 번은 찬란한 마침표를 꾹 찍을 것이다.
---[마침표 · ]전문
시인은 언어의 사제이며, 이 세상에서 가장 정교하고 세련된 언어를 사용할 줄 아는 예술가이다. 시인의 말에 의해서 하늘과 땅이 탄생했고, 시인의 말에 의해서 모든 동식물들이 탄생했다. 시인의 말에 의해서 어린 아이들이 탄생했고, 시인의 말에 의해서 사랑의 대상이 탄생했다. 시인의 말에 의해서 미움이 탄생했고, 시인의 말에 의해서 싸움이 탄생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고, 이 말씀으로 이 세계를 창출해냈던 것이다. 모든 시인들은 최초의 시인이자 최후의 시인인 호머의 또다른 분신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서빈 시인의 [마침표 ·]를 읽다가 보면 그는 언어의 현상학자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게 된다. 왜냐하면 현상론자는 사물의 겉모습만을 보지만, 현상학자는 두 눈에 보이지 않는 사물의 본질을 볼 수가 있기 때문이다. 언어의 유형은 다종다양하고, 그 쓰임새는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다. 진실한 말, 거짓의 말, 사랑의 말, 증오의 말, 익살광대극의 말, 사악하고 잔인한 말, 간사하고 음탕한 말, 싸늘하고 날카로운 말, 마음껏 야유하고 조롱하는 말 등이 있고, 그 부호와 기호마저도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는 것이다.
이서빈 시인을 언어의 현상학자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우선 좁혀서 말한다면
‘마침표의 현상학자’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우선“마침표 하나 찍어놓고 보면 가장 좁은 문같기도 하고, 감옥을 막고 있는 철문같기도 하다”라고 말하고, 그는 또한 “마침표가 없는 책은 없다. 어떤 빛나는 철학이나 슬픔, 기쁨에도 마침표는 있다”라고 말한다. 마침표는 좁은 문이며, 좁은 문은 탄생과 관련이 있다. 왜냐하면 모든 생명체는 수억 개의 정자들 중의 하나에서 탄생했고, 그 좁은 문을 통과했기 때문이다. 마침표는 감옥이며, 감옥은 그의 죽음과 관련이 있다. 감옥은 존재의 활동영역----좁은 의미에서----이며, 그는 그 감옥 속의 삶을 살다가 죽어가게 된다. 마침표는 모든 것의 시작이며, 모든 것의 죽음이다. 마침표 없는 책도 없고, 마침표 없는 철학도 없다. 마침표 없는 슬픔도 없고, 마침표 없는 기쁨도 없다. 제일급의 대가는 모든 것을 자기 자신의 목소리로 말하고, 그 모든 일들의 맺고 끝맺는 법을 가장 잘 알고 있다. 모든 제일급의 대가들은 마침표의 대가이거니와 이 마침표에 의해서 그들의 아름답고 행복했던 삶이 그 예술성과 영원성을 획득하게 된다. 호머, 단테, 셰익스피어, 괴테, 보들레르, 랭보, 베토벤, 모차르트,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칸트, 쇼펜하우어, 니체, 마르크스 등이 바로 그것을 증명해주고 있는 것이다.
“외눈박이 눈은 그 사람을 막고 있는 점”이고,“내 어렸을 때 던졌던 조약돌”과도 같다. 외눈박이 눈은 조약돌이 되고, 외눈박이가 쓴 책은 시냇물이 되어서 내가 던진 조약돌에 의해서 퐁당퐁당 소리가 나게 된다.“이야기 하나에도 수많은 점이”있고,“점 하나 잘못 찍어 님이, 남이 되기도”한다.“궁이 공으로 굴러 떨어지기도 하고”“마침표가 미침표가 되기도 한다.”“작은 점 하나에서 아주 큰동그라미를 그리기도 하고,”작은 점 하나에서“글자가 걸어 나오고 초록 선율과 붉은 신비가 콩나물 자라듯 자라나기도 한다.”“모든 것을 마무리 짓는 점 하나, 절 안 모셔놓은 부처도 점안을 해야 비로소 눈뜬 부처가” 되고, 그 “부처의 눈알은 지구 공같기도 하다.”“바둑을 두면 집 한 채를 지을 수도 있고, 마지막 돌 하나로 길을 막을 수도 있다.”“말이나 문장 뒤에 찍지 않고 슬쩍 넘어가기도 하는 점. 긴장감에 꿀꺽 삼킨 침 한 방울같은 것, 누구에게 어떤 말을 한 뒤 살짝 열어놓기도 하지만, 며칠 뒤엔 사라지는 점. 한적하게 비어있는 곳엔 작은 점 하나 찍혀있다.// 실수·노여움·슬픔은 모두 마침표를 안 찍은 것들. 우주를 반복하는 저 꽃잎도 언젠가 한 번은 찬란한 마침표를 꾹 찍을 것이다.”
참으로 아름답고 현란한 말솜씨이며, 하나님도 감동할 만큼의‘마침표의 현상학’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점-님-남-궁-공-마침표’는‘마침표의 말놀이’에 의한 자유연상의 기법이며, 그 수사법은 환유적이다. 환유는 인접성의 법칙이며, “점 하나 잘못 찍어 님이, 남이 되기도 하고, 궁이 공으로 굴러 떨어지기도 하고 마침표가 미침표가 되기도 한다”라는 시구에서처럼, 그 자유연상이‘마침표의 말놀이’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점-눈알-바둑알-집’은‘마침표의 말놀이’에 의한 상징주의자의 기법이며, 그 수사법은 은유적이다. 은유는 유사성의 법칙이며, 점에서 눈알로, 눈알에서 바둑알로, 바둑알에서 집으로의 이미지는 그 유사성에 의한‘마침표의 말놀이’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말이나 문장 뒤에 찍지 않고 슬쩍 넘어가기도 하는 점”은 은근슬쩍을 좋아하는 야비한 인간의 마침표를 뜻하고,“긴장감에 꿀꺽 삼킨 침 한 방울같은 것”은 큰일을 앞둔 자의 마침표를 뜻한다.“누구에게 어떤 말을 한 뒤 살짝 열어놓기도 하지만, 며칠 뒤엔 사라지는 점”은 그 어느 누구에겐가 극적인 혜택을 주는 자의 마침표를 뜻하고, “한적하게 비어있는 곳엔 작은 점 하나 찍혀 있다”는 것은 그 어느 누구도 주목하지 않은 일들의 마침표를 뜻한다.“실수·노여움·슬픔은 모두 마침표를 안 찍은 것들”이라는 것은 그 실수, 노여움, 슬픔의 무한한 연속성을 뜻하고,“우주를 반복하는 저 꽃잎도 언젠가 한 번은 찬란한 마침표를 꾹 찍을 것이다”라는 시구는, 우주의 역사도, 그 우주 속의 별들의 역사도 그 종말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의 말이기도 한 것이다.
이서빈 시인의 이러한‘마침표의 현상학’은‘수다의 현상학’으로 이어지고, 이‘수다의 현상학’은‘쉬의 현상학’으로 이어진다. 이‘쉬의 현상학’은‘무 無의 현상학’으로 이어지고, 이‘무의 현상학’은 궁극적으로는 언어의현상학으로 이어진다.
옛 친구 셋이 수다 한 상 차렸다.
이야기를 사과껍질처럼 돌려 깎는다.
흘러내리는 추억들 구불구불 쟁반에 쌓이고
접시에 담긴 말들
아삭아삭 사과맛이 난다.
새콤달콤 이야기 당도가 올라간다.
쓴말 쓰레기통에 버려지고
입에 붙는 말만 포크로 찍어 서로에게 권한다.
수다가 몸집을 불리자
제 입맛과 다르다고 투덜대는 여자들
깔끔한 성격과 결혼한 친구는 결벽증에
낭만과 결혼한 친구는 과소비에
일편단심과 결혼한 친구는
그 질긴 고집에 못 살겠단다.
여자들, 식탁에 둘러앉아
접시에 펼쳐놓은 말 자꾸 맛보는 여자들
과식으로 배가 부르다.
어느새 바닥에 깔고앉은 하루도 지루해지고
먹다 남은 과일 누렇게 변했다.
배고픈 집들,
아내 엄마 며느리를 찾기 시작한다.
----[식탁에 둘러앉아] 전문
조국을 떠나 외국생활을 하다가 보면 그 무엇보다도 제일 그리운 것이 모국어라고 한다. 비록, 몸은 머나먼 타향살이를 하고 있을지라도 모국어로 사유하고 모국어로 꿈을 꾸며, 모국어로 밥을 먹으면서 살아가게 된다. 모국어는 어머니의 언어이며, 우리 인간들은 모국어가 없으면 잠시도 살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밥을 먹지 않으면 배가 고프듯이, 하고 싶은 말을 참고 견디면 말이 고파진다. 말이 고플 때에는 혼잣말을 하거나 편지를 쓰거나 전화를 걸게 된다. 말을 하고 싶다는 것은 말이 고프다는 것이 되고, 누군가를 만나서 반드시 말의 허기를 채우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랑의 말도 있고, 다정다감한 정담의 말도 있다. 이 세상의 도덕과 법률과 인류의 미래를 이야기하는 고담준론도 있을 수가 있고, 상호간의 사상과 이념과 취향에 따른 열띤 논쟁의 말도 있을 수가 있다.‘수다’는 쓸데없이 말수가 많다는 것을 뜻하지만, 다른 말로 말하자면 아주 가까운 사람들끼리 둘러 앉아서 이야기꽃을 피우는 것을 말한다. 수다의 대상은 흉허물이 없는 사이이며, 서로간에 그 모든 마음을 탁 터놓고 말할 수 있는 사이이다. 옛 친구 셋이 수다 한 상을 차렸고, 사과껍질처럼 이야기를 돌려깎는다. 아삭아삭 사과맛이 나고, 새콤달콤 이야기의 당도가 올라간다. 입맛에 맞는 말만 포크로 찍어 서로에게 권하고, 쓴말은 따로 골라서 쓰레기통에다가 버린다. 수다가 몸짓을 불리면, 서로가 제 입맛과 다르다고 그 여자들은 투덜댄다. 깔끔한 성격과 결혼한 친구는 그 남편의 결벽증 때문에 못살겠다고 하고, 낭만과 결혼한 친구는 그 남편의 과소비 때문에 못살겠다고 하며, 일편단심과 결혼한 친구는 그 남편의 황소 고집 때문에 못 살겠다고 한다. 이서빈 시인의 [식탁 위에 둘러앉아]는 말들의 성찬을 보여주고 있는 시이며,‘수다의 현상학’이 이야기꽃으로 피어난 시라고 할 수가 있다. 말이 고프면 수다를 떨게 되고, 수다를 떨게 되면 “배고픈 집들”에서“아내와 엄마와 며느리를 찾기 시작”할 때까지 이야기꽃을 피우게 된다.‘수다의 현상학’에서는 경제는 부차적인 문제에 지나지 않으며, 요컨대 최종심급은 말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말은 욕망이며, 식욕이고, 우리 인간들의 존재의 근거이다. 말은 권력이고, 돈이며, 이 세계는 말들의 위계질서로 조직되어 있다.
할미가 손주바지를 내리고 쉬~ 하자, 쉬라는 말줄기 따라 따듯한 김 모락모락 나는 쉬가 포물선을 그린다.
먹다 남은 생선토막에 쉬 한 타래 슬어놓고는 휘 날아가 하얗게 쉬어버린, 쉰내나는 할미머리카락 위에 앉는 파리아가씨 한 마리.
손주는 검지손가락 입술 위에 세로다지로 세우며 쉬쉬~한다. 할미도 덩달아서 검지손가락 입술에다 갔다 대며 쉬쉬~ 한다. 꼬마는 까치발을 세우며 살금살금 다가가서 팍, 순간 파리아가씨는 쉬~ 날아가고, 손주는 쉬 파릴 못 잡아 쉬할미를 빤히 쳐다보며 곰스럽게 꽁꽁거리며 못내못내 아쉬워한다.
쉬할 수 없는 일은 쉬이 쉬어빠져 쉰내가 난다.
쉬할미가 쉬를 보러가면 쉬할미를 따라가 쉬~오줌을 뉘는 쉬손주. 오늘따라 쉬파리는 덤벼들지 않는다.
쉬라는 말조차 쉬쉬하면, 쉬는 쉬이 해결될 일도 진짜진짜 어려워진다. 쉽게도 어려워진다.
오늘도 쉬라는 말이 하루종일 쉬지않고 쉽게도 따라붙을 것같은
고런고런 하루다.
여름조차 다 갉아먹는 중동 호흡기 증후군인가 뭔가 고놈 메르스 창궐들 쉬 물러감 딱 좋겠다.
----[쉬와, 쉬와, 쉬] 전문
이서빈 시인의 [쉬와, 쉬와, 쉬]는‘쉬의 현상학’으로서의 이서빈 시인의 시적 재능과 그 성찰의 소산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할미가 손주바지를 내리고 하는‘쉬’는 손주의 오줌을 뜻하고,“먹다 남은 생선토막에 쉬 한 타래 슬어놓고”의 ‘쉬’는 파리의 그것을 뜻한다. 손주가 검지손가락을 입술 위에 세우며 하는 쉬쉬는‘조용히 하라’는 것을 뜻하고,“꼬마는 까치발을 세우며 살금살금 다가가서 팍하는 순간 파리아가씨는 쉬~ 날아가고”는 그 노력에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쉽게 날아갔다는 것을 뜻한다.“쉬할 수 없는 일은 쉬이 쉬어빠져 쉰내가 난다”는 말은 쉽게 할 수 없는 일은 쉽게 쉬어빠져 쉰내(상한 냄새)가 난다는 것을 뜻하고, 따라서 “쉬라는 말조차도 쉬쉬하면, 쉬는 쉬이 해결될 일도 진짜진짜 어려워”지게 된다. 오줌의 쉬, 파리의 쉬, 쉬쉬(조용히 하라)의 쉬, 쉬운 일의 쉬, 쉰내난다의 쉬 등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는‘쉬의 현상학’은 그 모든 일들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즉,‘메르스의 창궐들’마저도 쉽게 물러갔으면 좋겠다는 시인의 간절한 서원을 담고 있는 것이다.
없을‘無’자 하나를 벽에 걸어놓고 보면
훤한 빈곳들은 더 잘 보인다.
많고 넘치는 것들 컴퓨터 바탕화면 휴지통에
문서를 버리고 확인해보면
없을‘無’자 하나가 비좁게 들어 앉아있다.
비우라고 있는 현혹, 정말 없다면 無자도 없을 것인데
자신은 턱 버티고 나머지만 없다 한다.
가끔 虛자로 보이기도 한다.
다리가 네 개나 달려있는‘無’자는 다리 뻗을 곳 봐가며 방향을 정한다.
이때 쥐털소리 찍찍거리다,
다리 하나를 더 달아 허둥대기도 한다.
모든 것을 일시에 사라지게 하는 망각
포근한 눈을 덮고 겨울잠을 자는 봄에 입김을 불어넣어
황무지에 무지가 돋고 검은 등걸에
삐죽삐죽 눈을 돋아나게 하는‘無’
분명 있으면서 없는‘無’….
이름없음을 無名이라 한다면
그것은 또 얼마나 광활한 범위인가.
‘無’자 이전에‘有’자가 살았다는 기록은 본 적 없다.
있다면 있고 없다면 없는 구름같은‘無’
밤새도록‘無’자를 생각하다‘無’자에게 침식당한 밤
새벽까지만 해도 없던 아침이 환히 떠오른다.
‘無’는 돌아보면 무수히 많다.
아무것도 없다는 말,
그처럼 큰말도 없지 싶다.
----[無] 전문
이서빈 시인의 [無]는‘무의 현상학’으로서의 무의 존재와 무의 생산성과 무의 유용성을 역사 철학적으로 증명하고 있는 매우 아름답고 뛰어난 시라고 할 수가 있다. 무는 ‘없을 무’이며, 그 모든 것을 무화시킬 수 있는 무이다.“없을‘無’자 하나를 벽에 걸어놓고 보면/ 훤한 빈곳들이 더 잘”보이듯이,“자신은 턱 버티고 나머지만 없다고 한다.”무는“다리가 네 개나 달려”있고, 늘, 언제나“다리 뻗을 곳을 봐가며 방향을 정한다.”무는“쥐털소리를 찍찍거리”게도 하고, “겨울잠을 자는 봄에 입김을 불어넣”기도 한다.“황무지에 무지가 돋고 검은 등걸에/ 삐죽삐죽 눈을 돋아나게 하는 無,”“분명 있으면서 없는 無,”“있다면 있고 없다면 없는 구름같은 無----.”무는 그 어디에도 있고, 무는 그 어디에도 없다. 무는 천변만화하는 요술쟁이이며, 이‘무의 생산성’을 통해서 모든‘유有’를 가능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무는 훤한 빈곳을 더 잘 보이게도 하고,“포근한 눈을 덮고 겨울잠을 자는 봄에 입김을 불어넣어”만물이 태어나게도 한다. 무는 “황무지에 무지가 돋고” 모든 쥐털소리를 찍찍거리게도 만든다.“‘無’자 이전에‘有’자가 살았다는 기록은 본 적도 없고”따라서 이 무의 여신은 천지창조의 여신과도 같다.
‘無’는 돌아보면 무수히 많다.
아무 것도 없다는 말,
그처럼 큰말도 없지 싶다.
이서빈 시인은‘무의 현상학’을 통해서 이처럼 무에게 그 생명력을 부여하고, 그 유용성을 통해서 무의 생산성을 창출해내게 되었다. 모든 것은 무에 의해서 태어나고, 모든 것은 무에 의해서 죽어간다. 무는 천지창조의 텃밭이며, 이‘무의 현상학의 대가’는 그 이름도 거룩한 이서빈, 즉,‘언어의 현상학의 대가’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천재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느닷없이 출현한다.
현상학자는 눈에 보이는 것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구별하고, 어떤 말의 의미와 그 말이 배제하고 있는 의미를 구별한다. 오직 나만을 알 수 있다는‘유아론唯我論’에서 나의 마음과 행동양식을 통하여 타인의 행동양식을 보고 그의 마음을 읽어낼 수 있다는‘유비론類比論’을 정립해내고, 이 유비론의 약점을 통하여 또다시‘유아론의 정당성’을 연출해내게 된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현상뿐이지만,그러나 다양한 현상들을 탐구함으로써 그 사물의 본질을 알 수 있다는 현상학자는 점과 선, 선과 평면, 평면과 입체, 입체와 입체, 입체와 우주, 우주와 무한의 세계를 이해하고 있는 학자 중의 학자라고 할 수가 있다. 이서빈 시인은 언어의 현상학자로서‘마침표의 현상학’과‘수다의 현상학,’ 그리고‘쉬의 현상학’과‘無의 현상학’을 연출해냈고, 그리하여‘마침표’와‘수다’와 ‘쉬’와 ‘무’ 등의 존재와 그 생산성과 유용성을 그 어느 누구보다도 가장 아름답고 탁월한 시들로서 증명해낸 바가 있다. 사상과 이론은 논리적이고, 이 딱딱하고 난해한 논리는 시의 예술성을 질식시킬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나 이서빈 시인의 시들은 그 수준 높은 완성도를 자랑하며, 무오류성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침표 .], [식탁에 둘러앉아],[쉬와, 쉬와, 쉬], [無], [달의 이동 경로] 등의 시들이 바로 그것을 증명해준다.
만일, 그렇다면,“열린 문은 반드시 닫힌다,”“죽음이 가까워올수록 발버둥엔 탄력이 생긴다,”“불을 훔쳐낸 고통이 만장으로 팔락인다,”“발굽닿는 자리에 소금 부서지는 소리가 짜다,”“벙어리장갑 끈은 너무 짧았고, 이별의 끈은 너무 길었네,”“근심 많은 잠은 뿌리가 얕다,”“삶이란 말에 죽음이 살고/ 죽음이란 말속에 삶이 죽는 것이다,”“가시 많다는 건 겁 많다는 것이 아닐까,”“저 하루살이의 시작과 끝엔 반일을 살고가는/ 피울음 장엄한 해와 달이 있다”라는 잠언과 경구를 자유자재롭게 쓸 수 있는 최고급의 인식의 힘은 그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나는 우리 한국인들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우리 한국인들이여, 참으로 고전다운 고전을 읽으라. 고전 속에서 최고급의 지혜를 배우고, 이 고전의 힘으로 새로운 지혜를 창출해내라!”첫째도 공부이고, 둘째도 공부이고, 셋째도 공부이다. 모든 시인들의 사명은 이 불멸의 고전들을 읽고 그‘명명의 힘’을 기르는 것이며, 이 ‘명명의 힘’으로 새로운 세계를 창출해내는 것이다. 이서빈 시인의‘언어의 현상학’이나 ‘오체투지의 시학’이 저절로, 우연히 정립된 것이 아니고, 그것은 그의 붉디 붉은 피로 정립된 것이다.
시인은 모든 가치의 창조자이자 세계의 창조자이고, 언어의 기원을 소유한 종족의 창시자이다. 인간은 불완전하고 유한한 존재이지만, 신은 전지전능하고 무한한 존재이다. 하지만, 그러나 태초에 말씀으로 이 세계를 창조했듯이, 그 유한성의 한계를 뚫고 이 세계를 창조한 것은 우리 시인들이었다고 나는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신이 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창조한 것이다.“삶이란 말에 죽음이 살고/ 죽음이란 말속에 삶이 죽는 것이다([부조화의 조화]).”이 세상의 근본이치는 ‘부조화의 조화’이며, ‘어울리 않는 것의 어울림’이다. 우리 인간들의 자유와 개성은 부조화의 산물이기는 하지만, 이 부조화의 부조화를 통해서 반드시 조화를 이루어나가게 되어 있는 것이다. 부조화 속에서 만물이 생겨나고, 부조화 속에서 만물이 조화를 이루게 된다. 이서빈 시인의 말대로, 부조화는 만물의 아버지이며, 그 모든 것이다. 종합적인 시선이란 부분을 전체와 관련시켜 이해하고, 전체는 부분과 관련시켜 이해하는 시선을 말한다. 종합적인 시선의 소유자는 분명한 목표가 있고, 이 분명한 목표가 있기 때문에 그 어떠한 어려움과 장애물들을 만나게 될지라도 결코 우회하거나 좌절할 줄을 모른다.‘오체투지의 시학’은 그 무엇보다도 뜨거운 열정의 소산이며, 시인은 단어 하나, 토씨 하나에도 자기 자신의 목숨을 걸었던 것이다. 이서빈 시인의 시는 붉디 붉은 피로 씌어진 것이고, 이 티없이 맑고 순수한 피가 모든 인류의 더럽고 때묻은 피를 씻어주게 될 것이다.
이서빈 시인의 {달의 이동 경로}는 한국문단의 경사이며, 우리 대한민국과 우리 한국어의 영광을 위해서 그 지혜의 등불을 영원히 밝히게 될 것이다.
배우고 생각하지 않으면 오묘한 진리를 이해할 수 없고, 생각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로운 사상에 빠지게 된다(공자). 나는 배우면서 늙어간다는 어느 현자의 말씀도 있지만, 우리는 배우면서 더욱더 젊어져 가지 않으면 안 된다.
앎처럼 즐겁고, 앎처럼 기쁘며, 앎처럼 최고급의 행복을 연출해낸 것도 없다. 아는 것은 힘이고, 아는 것만큼 보인다. 이 앎의 힘은 천지를 창조할 수 있는 힘이며, 그 모든 것들의 생사를 움켜쥘 수 있는 힘이다. 앎은 전제군주이며, 앎 앞에서의 만인평등은 없다. 모든 싸움은 이 앎을 소유하기 최고급의 인식의 제전일 뿐인 것이다.
지혜(앎)는 모든 만물들의 양식이다. 지혜로서 살고 지혜로서 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