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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1장
승리의 입성, 예루살렘에서 찬양 받고 가르치심
(찬송 4장)
2023-12-22, 금
맥락과 의미
마태복음 21-28장은 예수님의 고난-부활주간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패배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 선지자, 제사장으로서 승리하여 그 직분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을 만들어 내는 방법입니다. 신구약의 모든 백성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거룩하게, 영광스럽게 만드는 때입니다.
21장에는 예수님이 주일에, 나귀를 타고 승리의 입성을 하십니다. 21-23장은 성전에서 가르치십니다. 24장부터 성전 바깥으로 나가십니다.
예수님의 고난 주간은 유대인의 유월절 기간이었습니다. 유월절은 구약교회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야를 기다리며 시편 118편을 불렀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회도 그러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월절 어린양으로 바로 유월절에 이 시편으로 찬양하고, 이 시편의 찬양 내용을 이루십니다
제자들이 이 시편을 찬양하며, “그 오시는 분”이라고 찬양했습니다(9절). 메시아라 인정하며 찬양했습니다. 예수님은 메시아이신 자신이 건축자의 버린 돌로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이지만 부활하여 교회를 세우는 모퉁이 돌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42절, 시편 118:22,23). 예수님은 시편 118편의 찬양을 성취하시는 메시아이십니다.
1. 나귀를 타고 겸손한 왕으로 입성하여 성전에 가심: 주일(1-17절)
2. 잎만 무성한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심: 월요일( 18-22절)
3. 성전에서 가르칠 권세가 있는 예수님, 반대자는 멸망: 화요일(23-46절)
1. 예루살렘 성에 나귀를 타고 겸손한 왕으로 통치 (1-17절)
1) 겸손하여 나귀 타고 입성 (1-11절)
예루살렘에 가까이 왔을 때 두 제자를 보내시며 “가라”고 하셨습니다 (1,2절). 이 표현은 예수님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 쓰는 관용적인 표현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명령한 일을 이루기 위해 파송을 받아 가는 사람입니다.
“나귀와 그 새끼를 풀어오라. 주인이 물으면 “그들(나귀와 새끼)을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라.”(3절) 그리스도는 다른 사람이 소유하고 있는 그 나귀들의 주인이요 주님이십니다. 그 말대로 나귀의 주인이 나귀를 제공했습니다. 이것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초라한 옷 입은 분으로 오셨지만 온 세상의 소유주요 주님인 것을 성령님이 증거합니다.
예수님의 이 계획은 스가랴9:9절의 예언을 이루시기 위해서입니다.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오나니)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를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5절).” 이어 스가랴9:10은 말합니다: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평화를 전할 것이요.”
예수님은 말을 타고 전쟁하는 왕이 아닙니다. 온 세상에 전쟁을 끝내고 평화를 이루는 왕으로 오십니다. 그리스도는 약소국 이스라엘에 식민지 해방을 이루는 정치 군사 지도자가 아닙니다.
그분의 겸손,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 죄 용서를 통해 새로운 용서와 화해를 이루는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지금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왕으로 다스리십니다. 교회를 통해 온 세상에 평화를 세우시고 있습니다.
5절에 “겸손”은 11:28-29에 “온유”라는 말로 나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그 옆에는 새끼도 함께 걸어 갑니다. 예수님께서 그 분과 함께 걸어가고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멍에를 메고 가시는 것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가시며 쉼을 주십니다. 온유하고 겸손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의 지고 가십니다. 우리가 천국을 향한 길에 함께 가시는 왕이십니다. 함께 찬양합시다.
제자들과 군중들은 옷을 길 바닥에, 나귀 위에 깔며 찬양합니다. 이것은 구약시대 민중들이 새로운 왕을 옹립할 때 하던 행동입니다(왕하 9:13, 북 이스라엘의 에후 왕).
그리고 제자와 군중들은 찬송합니다. “호산나, 다윗의 왕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9절). 시편 118:26절을 암송하며 찬양한 것입니다. 유월절마다 부르는 시편이기에 대중들에게 아주 익숙한 시편이었습니다.
원래 시편 118편은 왕이 전쟁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승리하고 돌아올 때 그 승리를 주신 하나님께 찬양하던 시편입니다. 백성들은 제사장의 인도로 성 밖까지 나가서 환영합니다. 찬양하며 성 안으로, 성전 안으로 들어옵니다. 구약 성도들은 다윗 왕조가 망한 후에도 메시야를 기다리며 유월절마다 이 찬송을 했습니다.
“오시는 이”(바로 그 오시는 분, 5절, 9절)는 세례 요한이 증거한 “그 오시는 이”(3:11, 11:2)를 말합니다. 예수는 즉 메시아=그리스도라고 제자들과 군중들은 인정하고 찬양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이스라엘 국가를 회복할 정치적 메시아로 알고 찬양했습니다. 그분이 십자가의 죽음으로 영적인 나라를 세우고 온 세계에 이 나라를 확장할 것임을 몰랐습니다.
그리스도는 그들의 부족을 아시면서 그들의 찬양을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그 분의 부활 승천 후에, 그들이 예수님을 “주님으로서 그리스도”인 것을 인정할 날을 기다리셨습니다.
메시야가 예루살렘 성안으로 오셨을 때, 성 전체가 소동했습니다. 예루살렘 시민들은 “예수는 갈릴리 나사렛 출신의 선지자”라고만 알았습니다(10절). 동방 박사들이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분”을 경배하러 왔을 때, 예루살렘 성이 소동한 것과 비슷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도, 마지막 주간에도 많은 사람에게 혼란을 주는 일입니다.
이 땅의 안락과 안정을 유지하려는 자들에게 메시아의 오심은 복음이 아니라 소동과 혼란의 효과를 냅니다. 우리는 겸손히 그리스도의 왕권에 굴복하며 그 분을 환영합시다.
2) 성전을 깨끗케 하고, 병자를 치유, 어린이의 찬양을 변호 (12-16절)
왕이신 그리스도는 성전의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을 뒤엎었습니다.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다”(이사야 56:7). 예수님은 하나님의 집 성전을 원래 기능으로 되돌리는 분입니다. 모든 민족이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영적 성전, 교회로 몰려오는 새 시대를 열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전 안에서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성전을 참된 치유의 장소로 회복하십니다. 참 성전인 교회는 죄인들을 영적으로 치유하는 공동체입니다. 그 치유 안에 정서적인 치유가 들어 있습니다.
제사장들은 예수님의 기적 치유를 보았습니다. 어린이들이 찬양하는 것을 보고 화를 내었습니다. 예수님은 시편 8:2절을 인용하며 대답하셨습니다. “어린 아이와 젖먹이의 입에서 나온 찬송을 온전케 하셨나이다.”(16절). 이 말씀을 “읽어본 적이 없느냐” 고 대답했습니다. 구약 예언자들의 예언이 이루어지는 이 시점을 분별하지 못하는 소경 된 종교 지도자들을 꾸짖으십니다.
그리스도께서 물질적 욕망으로 더럽혀진 성전을 회복하여 보통 사람들에게 돌려줍니다. 이방인, 병자들, 어린아이들을 치료하고 환영하는 곳으로 회복하십니다.
이 땅의 성전인 교회도 세상적 이익을 누리는 곳이 아닙니다. 우리 교회도 외국에서 온 나그네, 병자, 어린이들이 다 한 식구로 영적 생명을 공급받는 곳이 되도록 기도합시다.
2. 무화과 잎만 있는 나무를 심판하여 마르게 함 (18-22절)
그리스도께서 잎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는 나무를 꾸짖으셨습니다. 나무가 말라 죽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 기적은 당시의 타락한 종교와 제자들의 권세에 대해 보여줍니다. 종교 행위는 무성하지만 참 경건과 사랑의 열매가 없는 지도자들은 무화과 나무가 마르듯이 징벌 받을 것입니다.
동시에 제자들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보다 더 큰 기적을 이룬다는 점을 가르치십니다. “믿음”은 아무 것이나 믿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안의 자신감이 아닙니다. 믿음에는 항상 그 믿음의 대상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는 “이보다 더 큰 것도 하리니”라고 약속하셨습니다(요한복음 14:12). 사도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구할 때 아버지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해 더 큰 일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제자들을 세우신 이유는 앞으로 성령님을 통해 교회를 통해 온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확인시키고 예수님의 제자들을 통해 더 큰 일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말씀에서 약속하신 것을 주시도록 구해야 합니다. 성령님을 구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도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그분의 뜻하시는 일을 말씀과 기도 가운데 깨닫고 간구할 때, 하나님께서 그 일을 이루십니다.
3. 성전에서 가르칠 권세가 있는 예수님, 반대자는 멸망 (23-46절)
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 바리새인 그들은 “예수님이 성전에서 가르칠 권세가 있는가” 말하며 도전합니다(23절). 그들은 성전에서 형식적 제사를 드리며 이익을 얻고 있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16절에 “분하여”, 즉 시기심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께 도전합니다. 제자들도 시기심 때문에 서로 다툰 적이 있습니다(20:24). 우리 모두도 시기심 때문에 예수님을 도전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합시다. 예수님은 세 가지 말씀으로 그들을 책망하고 깨우치십니다.
1) 요한의 세례와 예수님의 권위 (23-27절)
예수님은 대답합니다. “요한의 권세가 어디서 주어졌는지 대답해 보라. 그러면 나도 너희 질문에 대답하겠다.”
요한은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증거했습니다. 백성들이 요한을 참 선지자로 받들기 때문에 제사장들은 요한의 권위를 부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의 권위를 인정하면 그리스도의 권위도 인정해야 하기에 그들은 “모르겠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도 그들의 질문에 답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생각이 없이 하나님께 요구하기만 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2) 두 아들의 비유: 소위 죄인들이 위선적 종교지도자보다 먼저 천국 백성이 됨 (28-32절)
예수님은 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에게 비유로 가르치십니다. 어떤 아버지가 두 아들에게 일하라는 명령을 합니다. 큰 아들은 하겠다고 해 놓고 나중에 하지 않습니다. 작은 아들은 하지 않겠다 말하고 회개하고 순종합니다.
큰 아들은 당시 종교 지도자들을 말합니다. 작은 아들은 그들이 항상 비난하던 세리와 창녀 등을 말합니다. 죄인으로 비난받던 세리와 창녀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뉘우치고 회개하여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갑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는 종교지도자들을 책망하십니다.
세리와 창녀 같은 죄인들인 우리를 그리스도의 보혈 공로로 죄 용서하시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게 하셨으니 감사합시다.
3) 주인의 종들과 아들까지 죽인 포도원 일꾼들에 임한 심판 (33-46절)
예수님은 또 다른 비유로 그들에게 대답하셨습니다. 한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일꾼들을 고용하고 다른 나라로 갔습니다. 포도원은 구약 백성이고 주인은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서기관과 제사장 등에게 천국을 가르치도록 위임해 주셨습니다. 수확할 때가 되어 주인은 수확물을 거두기 위해 종들을 보냈으나 포도원 일꾼들은 종들을 죽이고 마지막으로 보낸 아들도 죽였습니다. 아들의 상속권을 빼앗기 위해서입니다.
“이 악한 포도원 일꾼을 주인이 어떻게 처리하겠느냐?” 물으셨습니다. 그들은 “포도원 일꾼을 죽이고, 포도원은 다른 사람에게 맡길 것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의 입으로 자기들이 심판당할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시편 118:22,23절을 인용하여 대답하십니다(42절).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건축자들의 버린 돌”처럼 하나님의 백성에게 배반당해 죽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부활하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다시 세울 “머리돌”이 되실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43절). 그리스도의 권위에 저항하는 그들에게 머리 위로 돌이 떨어지는 것 같은 심판이 있을 것임을 경고했습니다(44절, 이사야 8:14).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자기를 가리킨 줄 알고 잡아서 처벌하려 했지만, 백성들이 예수님을 선지자로 알았기 때문에 그때 당장은 무서워서 시행하지는 않았습니다.
믿고 복종할 일
이스라엘 백성은 메시야를 예언한 그 말씀으로 찬양하며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정작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종교지도자들은 메시야를 거부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기대했듯 말을 타고 정치적 독립을 이루는 권력자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메시아는 십자가에서 희생당하시는 제사장으로서 왕으로서 오셨습니다. 죽음과 마귀를 이기고 하나님의 교회를 새롭게 하셨습니다. 겸손히 그 분을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갑니다. 그러나 그 분을 거부하는 자는 영원한 심판을 받습니다.
시편 118편을 부르며 제자들이 그리스도를 찬양한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를 찬양하며 순종합시다. 그리스도와 그 분의 성경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경제적으로 해를 주어도, 대제사장들처럼 그리스도와 경쟁하며 그 분의 권위에 도전하지 맙시다. 회개하고 순종함이 인생의 행복입니다.
1. 오늘 말씀하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2. 오늘 말씀에서 주신 교훈은 무엇입니까? 3. 오늘 말씀에서 순종할 내용은 무엇입니까? |
조금 더 생각하기
<참고> 예수님의 수난 주간과 시편 118편
그 때 하나님의 백성들이 유월절에 부르던 시편 118편은 예수님의 마지막 주간에 중요한 부분이 됩니다.
우선 성전에서 가르치신 것이 21-23장입니다. 21-23장은 시편 118편에서 “그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시편 118:25)에 대한 것으로 시작하고 끝납니다. 21장에 제자들이 예수님은 메시아로 오시는 분(21:9)이라고 찬양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앞으로 “그 오시는 분”으로 재림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23:39).
21:42도 시편 118편의 인용입니다. “건축자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멀리 돌이 되었나니”(시편118:22,23).
<참고> 5절, 겸손하여 나귀 타고 오시는 왕 (스가랴 9:9)
예수님의 마지막 주간은 왕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겸손함을 보여줍니다. 그 왕께서 나귀 타고 오신다는 스가랴9:9의 말씀을 성취하셨습니다. 전쟁을 없애고 평화를 이루신다는 예언을 성취하셨습니다(스가랴 9:10)
예수님이 태어나시는 것을 예언한 미가서 5장도 비슷합니다(마태복음 2:6). 예수 그리스도는 베들레헴에 왕으로 오시는데, 칼과 창을 쟁기로 바꾸는 평화의 왕임을 예언했습니다(미가 5:1-3, 이사야 2:2-4).
<참고> 뉘우침(30,32절): 하나님의 뉘우침과 우리의 회개
둘째 아들이 뉘우쳤습니다(메타멜레오 30,32절). 시편 104:45는 하나님은 죄악된 백성을 심판하시지만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 크신 인자하심을 따라 뜻을 돌이키사(메타멜레오 )”라고 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심판을 뉘우치며 돌이키시는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뉘우침은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위해 하신 일입니다. 아버지의 넓은 사랑을 기억하고 우리의 잘못을 깨닫고 뉘우치며 돌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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