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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및 자료실 스크랩 1. 原書第一
청운 추천 0 조회 119 16.07.18 18:2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1. 原書第一


【해제】

강유위는 인류의 문자가 모두 상형에서 시작되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문자는 일단 창립되자마자 자체(字體)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다투어 간이화로 나아가 우수함을 선택하여 사용한다.  유독 중국에만 충서(蟲書)ㆍ주문(?文)ㆍ전서(篆書)ㆍ예서(?書)의 변화가 있는 것이 아니라 외국 또한 이와 같지 않음이 없으니, 고대 천축(天竺, 인도의 옛 이름)의 범어에서 서체의 변화는 더욱 복잡하고 어지럽다.  강유위는 또한 중국이 형태를 주로 한 것과 외국이 소리를 주로 한 두 종류의 문자를 비교하여 “소리를 합하여 글자를 만든 것은 음이 갖추지 않았고 견강부회함이 많아 중국 문자의 아름다움을 갖춘 것보다 못하다.”라고 하였다.  또한 이러한 문자를 쓰는 것은 단지 이루어진 형태만 취하여 알아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어서 종요(鍾繇)ㆍ위관(衛瓘)을 자랑하지 않고 왕헌지(王獻之)ㆍ양흔(羊欣)을 말하지 않더라도 서예를 홀시하는 것은 잘못된 관점이라 반박하였다. 



【원문】

文字何以生也. 生於人之智也. 虎豺之?, 龍鳳之奇, 不能造爲文字, 而人獨能創之, 何也. 以其身峙立(1), 首函?陽(2), 不爲血氣之濁所熏, 故智獨靈也. 凡物中倒植之身, 橫立之身, 則必大愚, 必無文字. 以血氣熏其首, 故聰明弱也. 凡地中之物, 峙立之身, 積之歲年, 必有文字. 不獨中國有之, 印度有之, 歐洲有之, 亞非利加洲之黑人, 澳大利亞洲之土人(3), 亦必有文字焉. 秘魯地裂, 其下有古城, 得前劫(4)之文字於屋壁. 其文字如古蟲篆(5), 不可識別. 故謂凡爲峙立之身, 曰人體者, 必有文字也. 以其智首出萬物, 自能制造, 不能自已也. 


【해석】

문자는 어떻게 태어났는가?  사람의 지혜에서 태어났다.  호랑이ㆍ승냥이의 강함, 용ㆍ봉황의 기이함으로 문자를 만들 수 없고, 사람이 유독 이를 창제할 수 있음은 무엇인가?   몸은 우뚝 솟아 세우고, 머리는 맑은 양기를 싸며, 피와 기운은 탁함에 스며들지 않도록 하는 까닭에 지혜가 유독 신령스럽다.  무릇 사물에서 거꾸로 꽂은 몸과 가로로 선 몸은 반드시 크게 어리석어 문자가 없다.  피와 기운으로 머리를 스며들게 하는 까닭에 총명함이 약하다.  무릇 땅의 사물에서 우뚝 솟아 세운 몸이 해를 쌓아 반드시 문자가 있었다.  유독 중국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니, 인도에도 있었고, 유럽에도 있었으며, 아프리카의 흑인과 호주의 원주민 또한 반드시 여기에 문자가 있었다.  페루의 땅이 갈라져 그 아래에 옛 성이 있어 이전 오랜 시간의 문자를 집 벽에서 얻었다.  그 문자는 마치 옛날 충서와 같아 식별할 수 없다.  그러므로 무릇 우뚝 솟아 세운 몸을 일컬어 사람의 형체라 하는 것은 반드시 문자가 있었다.  지혜로운 머리로 만물을 나타내고 스스로 제조할 수 있음은 스스로 그칠 수 없다.


【주석】

(1) 峙立(치립) : ‘상해본’에서는 ‘峙文’, ‘사고본’ㆍ‘목이본’에서는 ‘峙立’이라 하였는데, 후자를 따른다.

    ‘치립(峙立)’은 ‘흘립(屹立)’으로 우뚝 솟아 선다는 뜻이다.  

(2) 首函?陽(수함청양) : ‘함(函)’은 즉 ‘포(包)의 뜻이니, 『한서ㆍ예악지(漢書ㆍ禮樂志)』에서 “복을 싸고 덮어 항상 기약함과 같다[函蒙祉福常若期].”라고 하였다.  

    ‘청양(?陽)’은 『회남자ㆍ천문훈(淮南子ㆍ天文訓)』에서 “청양이란 것은 가볍고 잘아 이미 하늘이 되고, 중탁이란 것은 엉기고 막혀 이미 땅이 된다[?陽者薄靡已爲天, 重濁者凝滯已爲地].”라고 하였으며, 『주자어류(朱子語類)』권4에서 “식물은 아래로 향하니, 땅에 근본을 둔 것은 아래와 친한 까닭에 탁하다.  동물은 위로 향하니, 하늘에 근본을 둔 것은 위와 친한 까닭에 맑다[植物向下, 本乎地者親下, 故濁. 動物向上, 本乎天者親上, 故淸].”라고 하였다.  

(3) ‘상해본’ㆍ‘목이본’에서는 ‘土人’, ‘사고본’에서는 ‘士人’이라 하였는데, 전자를 따른다.

(4) 前劫(전겁) : 이는 ‘전차겁난(前次劫難)’으로 불교에서는 천지가 개벽한 다음 멸망하여 다시 개벽할 때까지를 일겁(一劫)이라 하니, 매우 길고 오랜 시간을 뜻한다.  

    따라서 ‘전겁(前劫)’은 이전의 오랜 세월 동안의 시간을 말한다.

(5) 蟲篆(충전) : 이는 이른바 ‘충서(蟲書)’로 전서의 변체이다.  춘추전국시기에 이러한 종류의 서체가 있었는데, 대부분 병기ㆍ종에 주물하거나 새겼다.  진나라 팔체에 ‘충서’가 있고, 왕망의 육서에 ‘조충서’가 있었는데, 기치 혹은 부신에 사용하였다.  이는 또한 인장의 문자로도 사용하였다.  『한서ㆍ예문지ㆍ소학가(漢書ㆍ藝文志ㆍ小學家)』에서 “충서는 벌레ㆍ새의 형태를 한 것을 일컬ㄹ으므로 번신을 썼다[蟲書謂爲蟲鳥之形, 所以書幡信也].”라고 하였다.



【원문】

文字之始, 莫不生於象形(1). 物有無形者, 不能窮也, 故以指事繼之. 理有憑虛(2), 無事可指者, 以會意盡之. 若諧聲假借, 其後起者也. 轉注則劉歆(3)創例, 古者無之. 


【해석】

문자의 시작은 상형에서 태어나지 않음이 없다.  사물에 형태가 없는 것이 다할 수 없는 까닭에 지사로 이를 이었다.  이치에 없는 것을 의탁함이 있고, 일을 가리킬 수 없는 것은 회의로 이를 다하였다.  해성(형성)ㆍ가차와 같은 것은 이후 나온 것이다.  전주는 유흠이 법식을 창조한 것으로 옛날에는 없었다. 


【주석】

1) 象形(상형) : 이는 아래 글의 지사(指事)ㆍ회의(會意)ㆍ해성(諧聲, 形聲)ㆍ가차(假借)ㆍ전주(轉注)와 함께 『주례(周禮)』에서 말한 ‘육서(六書)’이다.  허신(許愼)은 『설문해자ㆍ서(說文解字ㆍ?)』에서 “첫째, ‘지사’를 말한다. ‘지사’라는 것은 보아서 알 수 있고, 살펴서 뜻을 보는 것이니, ‘上ㆍ下’가 그러하다.  둘째, ‘상형’을 말한다. ‘상형’이란 것은 그려서 사물을 이루고, 형체를 따라 구불거리는 것이니, ‘日ㆍ月’이 그러하다.  셋째, ‘형성’을 말한다.  ‘형성’이란 것은 사물을 문자로 삼고, 비유를 취해 서로 이루는 것이니, ‘江ㆍ河’가 그러하다.  넷째, ‘회의’를 말한다.  ‘회의’라는 것은 유형을 견주어 옳음에 합해서 뜻이 향하는 바를 나타내는 것이니, ‘武ㆍ信’이 그러하다.  다섯째, ‘전주’를 말한다.  ‘전주’라는 것은 유형의 한 부수를 세워 같은 뜻을 서로 받아들이는 것이니, ‘孝ㆍ老’가 그러하다.  여섯째, ‘가차’를 말한다.  ‘가차’라는 것은 본래 그 글자가 없어 소리에 의하여 일을 의탁하는 것이니, ‘令ㆍ長’이 그러하다[一曰指事. 指事者, 視而可識, 察而見意, 上下是也. 二曰象形. 象形者, 畵成其物, 隨體詰?, 日月是也. 三曰形聲. 形聲者, 以事爲名, 取譬相成, 江河是也. 四曰會意. 會意者, 比類合誼, 以見指?, 武信是也. 五曰轉注. 轉注者, 建類一首, 同意相受, 考老是也. 六曰假借. 假借者, 本無其字, 依聲托事, 令長是也].”라고 하였다.  ‘육서’는 한자 조자의 기본 원칙이다.

(2) 憑虛(빙허) : 이치에 실제 가리킬 수 없어 의탁을 빌려 설명할 필요가 있는 것을 가리키니, 『문선ㆍ서경부(文選ㆍ西京賦)』에서 “빙허공자라는 자가 있었다[有憑虛公子者].”라고 하였는데, 실제로 그런 사람은 없고 의탁을 빌렸던 까닭에 ‘빙허’라 하였다.  ‘빙(憑)’은 의탁하는 것이고, ‘허(虛)’는 없다는 것이다.  

(3) 劉歆(유흠) : 유흠(劉歆, 기원전 약 50-23)은 서한말기 고문경학파의 창시자로 목록학자이고 수학자였다.  자는 자준(子?)이고 유향(劉向)의 아들이다.  부친의 업을 계승하고 여러 서적으로 교감하며 『칠략(七略)』을 편찬하여 목록학의 시조가 되었다.  그는 일찍이 『주례(周禮)』ㆍ『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ㆍ『모시(毛詩)』ㆍ『고문상서(古文尙書)』ㆍ『일례(逸禮)』 등의 고문으로 쓴 경을 발견하고, 아울러 민간에서 전수한 상황을 이해하여 이것들을 학궁(學宮)에 세울 것을 건의하였으나 금문경학가의 반대를 받았다.  왕망이 집권하였을 때 국사(國師)를 지냈으나 이후 왕망을 죽이려 하였는데, 일이 발각되어 자살하였다.



【원문】

倉沮(1)創造科斗(2)?篆, 文必不多, 皆出象形, 見於古?(3)者, 不勝?數(4). 今小篆之日月山川水火艸(5)木面首馬牛象鳥諸文, 必倉?之遺也. 


【해석】

창힐ㆍ저송이 과두문ㆍ충서를 창조하였으나 문자는 반드시 많지 않다.  모두 상형에서 태어나왔고, 고문ㆍ주문에 나타난 것은 손가락을 구부려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지금 소전의 해[日]ㆍ달[月]ㆍ산(山)ㆍ내[川]ㆍ물[水]ㆍ불[火]ㆍ풀[艸]ㆍ나무[木]ㆍ얼굴[面]ㆍ머리[首]ㆍ말[馬]ㆍ소[牛]ㆍ코끼리[象]ㆍ새[鳥]의 여러 문자는 반드시 창힐이 남긴 것이다.  


【주석】

(1) 倉沮(창저) : 이는 창힐(倉?)과 저송(沮誦)이다.  창힐은 또한 창힐(蒼詰)이라고도 하고, 옛날 황제의 사관으로 문자를 창제하였다고 전한다.  『설문해자ㆍ서』에서 “황제의 사관 창힐이 새와 짐승의 발자국 자취를 보고 이치를 분간하여 서로 구별되고 다름을 알아 처음으로 서계를 만들었다.[帝之史倉?, 見鳥獸蹄?之迹, 知分理之可相別異也, 初造書契].”라고 하였다.  

    저송은 옛날에 황제 때 사람으로 우사(右史)를 맡아 창힐과 함께 문자를 만들었다고 전한다.  후인은 때때로 ‘창저(倉沮)’ 혹은 ‘저창(沮倉)’이라 연결하여 일컫기도 한다.  미불(米?)은 『서사(書史)』에서 “장언원의 뜻은 많이 들은 것에 있으니, 위로는 저송ㆍ창힐을 나열하고 역사에 의하여 논을 펴내었다[張彦遠志在多聞, 上列沮蒼, 按史發論].”라고 하였다.  

(2) 科斗(과두) : 이는 과두문(科斗文, ??文)으로 서체의 일종이다.  칠서(漆書)로 서사하여 붓을 내리는 곳이 굵고 무거우며, 행필은 섬세하여 머리는 굵고 꼬리는 가늘어 형태가 마치 올챙이와 같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러한 명칭은 대략 한나라 말에서 시작하였다.  

(3) 古?(고주) : 이는 고문(古文)과 주문(?文)을 가리킨다.  ‘고문’에는 3가지 의미를 함유하고 있다.  첫째, 문자학적 각도에서 말하면 넓게 갑골문(甲骨文)ㆍ종정문(鐘鼎文)ㆍ석고문(石鼓文)ㆍ고도문(古?文)ㆍ고천문(古泉文)ㆍ소전(小篆) 등은 ‘고문’계통으로 ‘금문(今文)’과 상대적인 말이다.  둘째는 은ㆍ주 혹은 이보다 더욱 빠른 시기의 고대문자를 가리킨다.  셋째는 전적으로 주나라 말 육국에서 사용했던 문자를 가리킨다.  ‘주문’을 또한 ‘주서(?書)’ㆍ‘대전(大篆)’이라고도 일컬으며, 춘추전국시기에 진국(秦國)에서 유행했던 문자이다.  ‘주문’은 혹 ‘대전’과 다르기 때문에 ‘주전(?篆)’이라고도 일컫는다.  넓은 의미에서 ‘주문’은 대전ㆍ소전ㆍ고문 등을 포괄한다.  좁은 의미의 ‘주문’은 단지 『사주편(史?篇)』의 문자, 즉 주나라의 글로 진나라 이사(李斯)가 이를 근거로 하여 소전을 만들었기 때문에 ‘주문’을 대전이라 부른다. 

(4) ?數(누수) : ‘루(?)’는 구부린다는 뜻이니, ‘누수(?數)’는 손가락을 구부려 수를 헤아린다는 뜻이다.  『순자ㆍ유효(荀子ㆍ儒效)』에서 “비록 성인의 앎이 있더라도 아직 손가락을 구부려 헤아릴 수 없다[雖有聖人之知, 未能?指也].”라고 하였다.  

(5) ‘상해본’에서는 ‘草’, ‘사고본’ㆍ‘목이본’에서는 ‘艸’라 하였는데, 후자를 따른다.



【원문】

匪惟中國然, 外國亦莫不然. 近年埃及國掘地, 得三千年古文字, 郭侍?嵩燾(1)使經其地, 購得數十?本, 文字酷類中國科斗?篆, 率(2)皆象形, 以此知文字之始於象形也. 


【해석】

오직 중국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외국 또한 그렇지 아니함이 없다.  최근 이집트에서 땅을 파서 3,000년 전의 고문자를 얻었는데, 시랑인 곽숭도가 사신으로 그 땅에 가서 수십 장의 탁본을 구입하여 얻었다.  문자는 중국 과두문ㆍ충서와 매우 유사하고, 대저 모두 상형문자이며, 이것으로 문자의 시작이 상형에서 시작되었음을 알았다.


【주석】

(1) 郭侍?嵩燾(곽시랑숭도) : 곽숭도(郭嵩燾, 1818-1891)는 청나라 말 외교관으로 자는 균선(筠仙)이고 호남성 상음(湘陰) 사람이며, 도광 연간(1821-1850)에 진사에 합격하였다.  외교교섭에서 이홍장(李鴻章)의 타협방침에 붙었다.  저서로는 『양지서옥문집(?知?屋文集)』ㆍ『사서기정(使西?程)』 등이 있다.  

(2) 率(솔) : 이는 대저(大抵)와 같다.



【원문】

以人之靈而能創爲文字, 則不獨一創已也. 其靈不能自已, 則必數變焉. 故由?篆而變?, 由?而變秦分(?小篆)(1), 由秦分而變漢分(2), 自漢分而變?書(3), 變行草(4), 皆人靈不能自已也.


【해석】

사람의 신령함으로 문자를 창제할 수 있은즉 유독 하나의 창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 신령함은 스스로 그칠 수 없은즉 반드시 여기에서 자주 변한다.  그러므로 충서로 말미암아 주문으로 변하였고, 주문으로 말미암아 진나라 분서(分書, 즉 小篆)로 변하였고, 진나라 분서로 말미암아 한나라 분서로 변하였고, 한나라 분서로부터 진서로 변하였고 행초서로 변하였으니, 모두 사람의 신령함이 스스로 그칠 수 없는 것이다. 


【주석】

(1) 秦分(진분) : 즉 소전으로 대전에 상대하여 일컫는 말이다.  또한 ‘진전(秦篆)’이라고도 일컬으며, 진나라의 통행문자로 승상 이사(李斯)가 주문(?文)을 덜고 고쳐 만들었다고 전한다.  진시황이 문자를 통일하는 정책을 행할 때 소전을 정자로 삼아 한자의 규범화에 큰 작용을 하였다.  소전의 형체는 고르고 둥글면서 정제하였으니, 세상에 존재하는 <낭야대각석(瑯?臺刻石)>ㆍ<태산각석(泰山刻石)>의 잔석이 대표작품이다.  

    여기에서 ‘( )’는 원문에서 작은 글씨의 주를 나타낸 것을 바꾼 것으로 이하 모두 이와 같다.

(2) 漢分(한분) : 이는 한나라 예서를 가리키니, 전서로부터 간이화하여 변천한 서체로 소전의 둥글게 꺾는 원전(圓轉) 필획을 모나게 꺾는 방절(方折)로 변화시켜 서사하기에 편하도록 하였다.  진나라에서 시작하여 한ㆍ위나라 때 성행하였다.  위항(衛恒)은 『사체서세(四體書勢)』에서 “진나라는 이미 전서를 사용하였고, 주청하는 일이 번거롭고 많아 전서 글자로 이루기가 어려워지니, 곧 지금 노예들의 좌서를 예서 글자라 한다[秦旣用篆, 奏事繁多, 篆字難成, 卽今?人佐書, 曰?字].”라고 하였다.  초기의 예서는 자형 구조에서 전서 형태의 자취가 비교적 많이 남아 있었다.  동한 예서 필획에서 파책이 나타난 것을 이전 사람은 팔분서(八分書, 즉 分書)라 하였다.

(3) ?書(진서) : 이는 즉 해서(楷書)로 정서(正書)라고도 일컫는다.  규범 초서의 서사 표준과 한나라 예서 파책을 생략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형체는 방정하고, 필획은 평평하고 곧으며, 법도로 삼을 수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한나라 말에서 시작하여 위진남북조 때 성행하였고, 지금까지 통행하고 있다.  

(4) 行草(행초) : 이는 행서와 초서이다.  행서는 초서와 해서 사이에 낀 서체로 해서가 빠르게 쓰기에 불편하고 초서가 분별하기 어려운 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만들어졌다.  해서 필법이 초서 필법보다 많은 것을 해행서라 하고, 초서 필법이 해서 필법보다 많은 것을 행초서라 한다.  한나라 말에서 시작하여 지금까지 유행하고 있다.  

    초서는 빠르게 서사하기 위하여 나타난 서체이다.  일반적으로 한나라 초에 시작하였다고 하는데, 당시 통행한 것은 초예(草?)로 즉 초서를 거칠고 빠르게 쓴 예서를 말한다.  이후 점차 발전하여 예술 가치를 갖춘 서예가 되었는데, 이를 장초서(章草書)라 한다.  이는 혹 동한 장제가 서예를 좋아하여 붙인 이름이라 하고, 혹은 장제 때 두도(杜度)가 초서를 잘 써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한나라 말에 이르러 장초서에서 예서 필획의 자취를 벗어나 위아래 글자 사이를 연결하고 통하게 하여 금초서(今草書)로 변천하였는데, 이는 즉 일반적으로 말하는 초서이다.  당나라에 이르러 금초서를 더욱 방종하게 하고, 필세는 솜처럼 연결하여 에워싸며, 자형은 변화가 많은 광초서(狂草書)를 이루었다.



【원문】

古文爲劉歆僞造, 雜採鐘鼎(1)爲之(余有新學僞經考(2)辨之已詳). 水經注(3)?(4)臨淄人有發齊胡公之銅棺(5), 其前和隱起(6)爲文, 惟三字古文, 餘同今書. 子思(7)?今天下書同文, 蓋今?書, ?蒼?篇(8)中字, 蓋齊魯間文字, 孔子用之, 後學行焉, 遂定於(9)一. 


【해석】

고문은 유흠이 위조한 것으로 잡되게 종정문에서 채취하여 만들었다(나의 『신학위경고』가 있으니, 분별함이 이미 상세하다).  『수경주』에서 “임치 사람이 제나라 호공의 청동 관을 발견하였는데, 앞과 볼록하게 높이 일으켜 문자를 만든 것에서 오직 3글자만 고문이고 나머지는 지금 글씨와 같다.”라고 하였다.  자사가 “지금 천하의 글씨는 같은 문자이다.”라고 하였으니, 대개 지금의 예서, 즉 『창힐편』에서의 글자는 대개 제와 노나라 사이의 문자로 공자가 이를 사용하였고, 후학들이 여기에서 행하며, 마침내 하나로 정하였다.  


【주석】

(1) 鐘鼎(종정) : ‘상해본’에서는 ‘鍾’, ‘사고본’ㆍ‘목이본’에서는 ‘鐘’이라 하였는데, 여기에서는 후자를 따른다.  이하 ‘鐘鼎’은 모두 이와 같다.

    이는 종정문(鐘鼎文)으로 즉 금문(金文)을 말한다.  은ㆍ주나라 청동기에 명문을 새긴 내용은 사전(祀典)ㆍ석명(錫命)ㆍ정벌(征伐)ㆍ약계(約契) 등을 기록하였다.  은나라 금문은 갑골문과 서로 가까우나 명문의 글자 수가 비교적 적다.  주나라 초는 여전히 은나라를 계승한 뒤에 점차 웅장하고 위대하며 정제하여 명문의 글자 수가 거의 100자에 달하여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  전국말기에 이르러 서체는 소전과 접근하고 있다.  고대에는 종정을 중요한 기물로 여겼으니, 종정은 곧 기타 청동기 기물을 개괄하였으므로 청동기의 명문을 통칭하여 ‘종정문’이라 일컬었다.  

    여기에서 “고문은 유흠이 위조한 것으로 잡되게 종정문에서 채취하여 만들었다.”라는 말에 대하여 황소기(黃紹箕)는 『광예주쌍즙평어(廣藝舟雙楫評語)』에서 “『설문해자』에서 고문은 대부분 견풍이 개정한 문자로 종정이기와 많이 합하지 않는다.  유흠이 종정에서 채취하여 고문을 만들었다고 일컬은 것은 증거가 없으니 내가 믿지 못한다[說文中古文大半甄豊改定之字, 與鼎彛多不合. 謂劉歆採鐘鼎造古文無徵, 吾不信也].”라고 하였다.  이를 보면, 강유위의 견해가 확실히 지나친 독단임을 알 수 있다.

(2) 新學僞經考(신학위경고) : 이는 강유위가 지은 것으로 14권이며 1891년에 초간본이 나왔다.  그는 요평(廖平)의 『금고학고(今古學考)』 관점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고문경학은 왕망이 정권을 탈취한 것을 도와 새로운 왕조를 건립한 것이니, 마땅히 ‘신학(新學)’이라 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또한 고문경전은 유흠의 위조에서 나왔기 때문에 ‘위경(僞經)’이라 한다고 하였다.  글 가운데 고서를 고찰하고 변별함에 비록 독창적 견해가 있으나 대부분 독단적이다.

(3) 『水經注(수경주)』 : 북위의 역도원(?道元)이 지은 것으로 황하ㆍ회수ㆍ양자강 등 1,252개의 중국 각지 하천의 계통ㆍ연혁?전설 등을 기술한 책이다.  원래 40권이고 송나라에서 이미 5권이 없어졌으나 후인들이 편을 나누고 고쳐 지금 본은 여전히 40권이다.  원서의 제목은 『수경(水經)』이었으나 여기에 ‘注’를 더하여 『水經注(수경주)』가 되었는데, 이는 『수경』을 벼리로 삼고 여기에 원서의 25배가 되는 보충을 더하여 거대한 저작을 이루었다.  인용한 서적은 430종에 달하고, 문장의 필치가 현란하여 문학적 가치가 높다.  후세 이를 연구한 저작이 많은데, 양수경(楊守敬)ㆍ웅회정(熊會貞)의 『수경주소(水經注疏)』ㆍ『수경주도(水經注圖)』의 공헌이 가장 크다.

(4) ?(칭) : 이는 칭(稱)자의 본자(本字)로 ‘사고본’을 제외하고 기타 본에서는 모두 ‘稱’이라 하였는데, 이하 모두 ‘사고본’을 따른다.

(5) 齊胡公之銅棺(제호공지동관) : 역도원(?道元)은 『수경주ㆍ곡수편(水經注ㆍ穀水篇)』에서 “고예의 글씨는 진나라에서 일어났으나 전서의 문자가 번거롭고 빠르게 힘쓸 수 없던 까닭에 노예의 생략한 것을 사용하여서 예서라 일컫는다.  혹 말하길 정막이 운양에서 더하고 줄인 것을 예서라 하는데, 전서를 빠르게 한 것이다.  손창이 일찍이 청주자사 부홍인을 뵙고 말하길 ‘임치 사람이 옛 무덤을 발견하여 청동 관을 얻었는데, 앞과 밖에 볼록하게 높이 일으켜 예서로 ?太公六世?胡公之棺이라 썼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오직 3글자는 옛것이고 나머지는 지금 글씨와 같으니, 이것으로 예서는 예로부터 나온 것이지 진나라에서 시작되지 않았음을 증명한다[古?之?, 起於秦代, 而篆字文繁, 無???, 故用?人之省, ?之??. 或云, ?程邈於雲陽增損者, 是言?者, 篆捷也. 孫暢之嘗見淸州刺史傅弘仁說, ?淄人?古?, 得?棺, 前和外?起??字, 言?太公六世?胡公之棺也. 惟三字是古, 餘同今書, 證之?自出古, 非始於秦].”라고 하였으나 장회관(張懷瓘) 등은 이에 대하여 의심하였다.  

(6) 隱起(은기) : 이는 볼록하게 높이 일어난 부분을 가리킨다.  갈홍(葛洪)은 『서경잡기(西京雜記)』에서 “조후(즉 趙飛燕)에게 보배스러운 거문고가 있어 봉황이라 불렀는데, 모두 금과 옥으로 볼록하게 높이 일으켜 용ㆍ봉황ㆍ교룡ㆍ난새와 옛날 어진 열녀의 형상을 만들었다[趙后有?琴, 曰鳳凰, 皆以金玉?起爲龍鳳?鸞, 古賢列女之象.]”라고 하였다.

(7) 子思(자사) :  전국시기 사상가로 이름은 급(伋)이고 공자의 손자이다.  그는 증자에서 수업하였다고 전한다.  맹자는 또한 그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다.  후세 그를 ‘술성(述聖)’이라 존중한다.  『한서ㆍ예문지(漢書ㆍ藝文志)』에 『자사(子思)』23편이 수록되었으나 일찍이 없어졌다.  현재 『예기(禮記)』에서 『중용(中庸)』ㆍ『표기(表記)』ㆍ『방기(坊記)』 등은 그의 저작이라 전한다.  그는 맹자의 학설과 함께 ‘사맹학파(思孟學派)’라 일컫는다.  

(8) 蒼?篇(창힐편) : 옛날 자서(字書)로 진나라 승상 이사(李斯)가 지었다.  사주(史?)의 대전을 취하여 생략하고 고친 이른바 소전이나 옛날 글자가 많다.  한나라 때 이 책에 능통한 자가 적어 선제가 제나라 사람으로 『창힐편』을 읽을 수 있는 자를 찾았더니 장창(張敞)이 나왔다.  『한서ㆍ예문지(漢書ㆍ藝文志)』의 기록에 의하면, 한나라 때 조고(趙高)의 『원력편(爰歷篇)』, 호무경(胡毋敬, 一作 胡母敬)의 『박학편(博學篇)』, 이사의 『창힐편』을 합하여 60자를 끊어 1장으로 삼고 무릇 55장을 아울러 『창힐편』이라 하였는데, 또한 『삼창(三蒼)』이라고 하였다.  지금 모두 전하지 않는다.  청나라의 손성연(孫星衍)ㆍ임대춘(任大椿)과 근대의 왕국유(王國維) 등이 편집한 본이 있는데, 왕국유 본이 비교적 상세하게 갖추었다.

(9) ‘상해본’에서는 ‘子’, ‘사고본’에서는 ‘於’라 하였는데, 후자를 따른다.



【원문】

若鐘鼎所採, 自是春秋戰國時各國書體, 故詭形奇製, 與倉?篇不同也. 許?(1)說文?謂諸侯力政(2), 不統於王, 言語異聲, 文字異形. 今法德俄文字皆異, 可以推古矣. 但以之亂經, 則非孔子文字, 不能不辨. 若論筆墨, 則鐘鼎雖?, 自不能廢耳.


【해석】

종정문에서 채취한 바와 같은 것은 춘추전국시기 각국의 서체로부터 나온 까닭에 바르지 않은 형태와 기이한 형제이므로 『창힐편』과 같지 않다.  허신은 『설문해자?서』에서 “제후들이 무력으로 정벌하여 왕에게 통치를 받지 않았고, 언어는 다른 소리이며, 문자는 다른 형태이다”라고 하였다.  지금 프랑스?독일?러시아의 문자가 모두 달라 옛날을 추측할 수 있다.  다만 이것으로 경(經)을 어지럽힌즉 공자의 문자가 아니니 변별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필묵을 논한다면, 종정문은 비록 거짓이더라도 스스로 폐할 수 없다.


【주석】

(1) 許?(허신) : 허신(許愼, 약 58-147)은 동한시기 경학가이고 문자학자였다.  자는 숙중(叔重)이고 여남소릉(汝南召陵, 지금의 河南省 ?城) 사람이며, 가규(賈逵)를 스승으로 모셨다.  벼슬은 태위남각제주(太尉南閣祭酒) 등을 지냈고, 경전에 박통하였다.  저서로는 『설문해자』14권과 서목 15권이 있는데, 고문ㆍ경학의 훈고학 집대성자로 후대 문자 연구와 자서 편집에 가장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2) 力政(역정) : 이는 ‘역정(力征)’과 같으니, 무력으로 정벌함을 일컫는다.  『회남자ㆍ요략(淮南子ㆍ要略)』에서 “제환공 때 천자가 쇠미하여 제후를 청하여 무력으로 정벌하였다[齊桓公之時, 天子卑弱, 請侯力征].”라고 하였다.  이를 또한 ‘역정(力正)’이라고도 일컫는다.



【원문】

王?(1)?百二十六種書體(2), 於行草之外, 備極殊詭(3). 按佛本行經(4)云, 尊者?黎(5), ?我何書(自下太子廣爲說書), 或復梵天(6)所說之書(今婆羅門書王有四十音是(7)), ?盧?叱書(隋言驢脣), 富沙迦羅仙人說書(隋言華果), 阿迦羅書(隋言節分), ?迦羅書(隋言吉祥), 邪寐尼書(隋言大秦國書), 鴦瞿梨書(隋言指言), 耶那尼迦書(隋言馱書), 娑伽羅書(隋言?牛), 波羅婆尼書(隋言樹葉), 波流沙書(隋言惡言), 父與書毗多?書(隋言起尸), 陀毗?國書(隋云南天竺), 脂羅低書(隋言形人), 度其差那婆多書(隋言右旋), 優波伽書(隋言嚴熾), 僧?書(隋言等計), 阿婆勿陀書(隋言覆), 阿?盧摩書(隋言順), 毗耶寐奢羅書(隋言雜), 陀羅多書(烏?邊山), 西瞿耶尼書(須彌西), 阿沙書(硫勒), 支那國書(?此國也), 摩那書(科斗), 末?叉羅書(中字), 毗多悉底書(尺), 富數波書(華), 提婆書(天), 那羅書(龍), 夜叉書乾?婆書(天音聲), 阿修羅書(不?酒), 迦羅婁書(金翅鳥), 緊那羅書(非人), 摩?羅伽書(天地), 彌伽遮(8)迦書(諸獸音), 迦迦婁多書(鳥音), 浮摩提婆書(地居天), 安多梨叉提婆書(虛空天), 鬱多羅拘盧書(須彌北), 逋婁婆毗提訶書(須彌東), 烏差婆書(?), ?差婆書(擲), 娑伽羅書(海), 跋?羅書(金剛), 梨伽波羅低犁伽書(往復), 毗棄多書(食殘), 阿?浮多書(未曾有), 奢娑多羅跋多書(如伏轉), 伽那那跋多書(等轉), 優差波跋多書(?轉), 尼差波跋多書(擲轉), 波陀梨?書(上句), 毗拘多羅波陀那地書(從二增上凶), 耶婆陀輸多羅書(增上句已上), 末?婆?尼書(中流), 梨沙邪婆多波?比多書(諸山苦行), 陀羅尼卑叉梨書(觀地), 伽伽那卑麗叉尼書(觀虛空), 薩蒲沙地尼山陀書(一切藥草因), 沙羅僧伽何尼書(總覽), 薩婆韋多書(一切種音).(9) 


【해석】

왕음은 126종류 서체를 차례 하였는데, 행초서 이외에 갖춤이 매우 다르고 기이하였다.  『불본행경』에서 말한 것에 의하면, “존자사리는 나에게 어떤 문자를 가르치시렵니까?(아래부터는 태자 광이 문자를 말한 것이다.)  혹 브라흐마의 문자(지금 바라문의 문자는 왕에게  40음이 있다)ㆍ구로슬질서(수나라 말로 여순)?부사가라선인설서(수나라 말로 화과)?아가라서(수나라 말로 절분)?몽가라서(수나라 말로 길상)?사매니서(수나라 말로 대진국서)?앙구리서(수나라 말로 지언)?야나니가서(수나라 말로 태서)?사가라서(수나라 말로 자우)?바라바니서(수나라 말로 수엽)?바류사서(수나라 말로 악언)?부여서비다도서(수나라 말로 기시)?타비도국서(수나라에서 남천축이라 한다)?지라저서(수나라 말로 형인)?도기차나바다서(수나라 말로 우선)?우바가서(수나라 말로 엄치)?승구서(수나라 말로 등계)?아바물타서(수나라 말로 복)?아누로마서(수나라 말로 순)?비야매사라서(수나라 말로 잡)?타라다서(오장변산)?서구야니서(수미서)?아사서(유륵)?지나국서(곧 이 나라이다)?마나서(과두)?말도차라서(중자)?비다실저서(척)?부수바서(화)?디바서(천)?야라서(용)?야차서건달바서(천음성)?아수라서(불음주)?가라루서(금시조)?긴나라서(비인)?마후라가서(천지)?미가차가서(제수음)?가가루다서(조음)?부마디바서(지거천)?안다리차디바서(허공천)?울다라구로서(수미북)?포루바비디가서(수미동)?오차바서(거)?니차바서(척)?사가라서(바다)?발사라서(금강)?이가바라저리가서(왕복)?비기다서(식잔)?아누부다서(미증유)?사사다라발다서(여복전)?가나나발다서(등전)?우차바발다서(거전)?니차바발다서(척전)?바타리구서(상구)?비구다라바타나지서(종이증상흉)?야바타수다라서(증상구이상)?말도바신니서(중류)?이사사바다바치비다서(제산고행)?타라니비차리서(관지)?가가나비여차니서(관허공)?살포사지니산타서(일체약초인)?사라승가하니서(총람)?살바위다서(일체종음)입니까?”라고 하였다.  


【주석】

(1) 王?(왕음) : 북조의 서예가로 위평북장군(魏平北將軍) 왕예(王乂)의 아들로 초서를 잘 썼다.  저서로는 『고금문자지목(古今文字志目)』이 있는데, 원문은 일찍이 없어졌다.  당나라 장언원(張彦遠)은 『법서요록(法書要錄)』에서 “이 책은 보이지 않고 오직 조목만 보인다[未見此書, 唯見其目].”라고 하였다.  

(2) 百二十六種書體(백이십육종서체) : 왕음(王?)의 『고금문자지목(古今文字志目)』은 모두 3권인데, 상권은 고대 서체 36종류의 명칭만 기재하였고, 중권은 진ㆍ한나라와 삼국의 오나라 서예가 59명을 기록하였으며, 하권은 위ㆍ진나라 서예가 58명을 기록하였다.  따라서 여기에서 126종류 서체라 한 것은 옳지 않다.

(3) 殊詭(수궤) : ‘수(殊)’는 같지 않은 것이고, ‘궤(詭)’는 괴이한 것이니, 반고(班固)는 「서도부(西都賦)」에서 “같지 않은 형태와 괴이한 형제는 매번 각각 달리 보인다[殊形詭制, 每各異觀].”라고 하였다.

(4) 佛本行經(불본행경) : 불경 이름으로 일명 『불본행찬전(佛本行贊傳)』ㆍ『불소행찬(佛所行贊)』이라고도 일컫는다.  인도사람인 마명(馬鳴)이 짓고, 북량(北凉)의 담무참(曇無讖)이 번역하였다.  전체 7권 28품으로 시찬(詩贊) 형식으로 부처의 생평과 가르침을 서술하였다.  

(5) 尊者?黎(존자사리) : ‘존자(尊者)’는 범어 ‘아리야(阿梨耶, ?rya)’의 음역으로 수행이 뛰어나고 덕이 높은 수행자를 일컬으며, 혹 성자(聖者)라고도 일컫는다.  

    ‘사리(?黎ㆍ?利ㆍ?梨)’는 제자의 품행을 바로잡는 일을 하거나 일반 승려들에게 덕행을 가르치는 승려를 높여 부르는 말로 범어 아사리(?c?rya, 阿?梨ㆍ阿?黎)를 생략한 명칭이다.  이를 또한 ‘궤범(軌範)’ 또는 ‘정행(正行)’으로 의역하기도 한다.

(6) 梵天(범천) : 색계의 초선천(初禪天)에 속하는 가장 위의 하늘을 다스리는 왕으로 제석천(帝釋天)과 함께 부처를 좌우에서 모시는 불법 수호의 신이며, 산스크리트어의 브라흐마(Br?hma)의 음역이다.

(7) 今婆羅門書王有四十音是(금바라문서왕유사십음시) : 이 구절은 옳지 않다.  『패문재서화보ㆍ당석도세기범서(佩文齋書畵譜ㆍ唐釋道世記梵書)』권2에서 『법원주림(法苑珠林)』본을 인용하여 “[今婆羅門書正有十四音是].”라고 하였으며, 『수서ㆍ경적지(隋書ㆍ經籍志)』에서는 “[後漢得西域胡書, 以十四字貫一切音, 文省義廣, 謂之婆羅門書].”라고 하였으니, 마땅히 14자가 옳다.  강유위가 아래 문장에서 인용한 『수서(隋書)』 또한 이와 같다.  

    ‘바라문(婆羅門)’은 고대 인도를 가리키며, 바라문 대중의 나라이라는 뜻이다.  중국은 동한시기 이후 이것으로 인도를 일컬었다.  

(8) ‘상해본’에서는 ‘詭’, ‘사고본’ㆍ‘목이본’에서는 ‘遮’라 하였는데, 후자를 따른다.

(9) 이상 ‘?盧?叱書隋言’에서 ‘薩婆韋多書’에 이르기까지는 범어 명칭의 순서이다.  여기에서 열거한 각종 글씨 명칭 아래 괄호의 문자는 이에 해당하는 글씨의 명칭을 중문으로 의역한 것으로 수나라 때 번역하였기 때문에 ‘수언(隋言)’ 혹은 ‘수운(隋云)’이라 하였다.  이는 즉 ‘육십사서(六十四書)’로 인도에서 유행하는 모든 외전(外典)이다.  순서는 각자의 설이 다른데, 『불본행경(佛本行經)』권11과 『방광대장엄경(方廣大莊嚴經)』권4 등에 보인다.  



【원문】

三藏記(1)云, 先覺說有六十四種書, 鹿輪轉眼, 神鬼八部(2), 惟梵(3)及?樓(4)爲勝文. 酉陽雜俎(5)所攷(6), 有驢肩書, 蓮葉書, 節分書, 大秦書, 馱乘書, ?牛書, 樹葉書, 起尸書, 右旋書, 覆書, 天書, 龍書, 鳥音書, 凡六十四種. 然則天竺(7)古始, 書體更繁, 非獨中土有??繆?之殊. 芝英倒?(8)之異, 其製作紛?, 亦所謂人心之靈, 不能自已也.


【해석】

『삼장기』에 이르기를 “선각자의 말에 64종 문자가 있다고 하는데, 녹륜전안ㆍ신귀팔부가 있으나 오직 범문 및 구루가 뛰어난 문자이다.  『유양잡조』에서 상고한 바 여견서?연엽서?절분서?대진서?태승서?자우서ㆍ수엽서?기시서?우선서?복서?천서?용서?조음서 등 무릇 64종이 있다.  그러니 천축은 예로부터 시작하여 서체가 더욱 많았으니, 유독 중국에 충서ㆍ주문ㆍ무전ㆍ전전의 같지 않음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지영서ㆍ도해서의 다름은 그 제작이 분분한 것 또한 이른바 사람의 신령함이 스스로 그칠 수 없는 것이다.


【주석】

(1) 三藏記(삼장기) : 이는 『출삼장기집(出三藏記集)』으로 불교서의 명칭이다.  남조의 제ㆍ양나라 때 승려 우(祐)가 편집한 것으로 모두 15권이다.  동한시기에서 양나라에 이르는 경(經)ㆍ율(律) 등의 목록과 서기(序記) 및 승려의 전기 등을 번역한 책이다.  승려 우 이전의 경 목록은 대부분 산실되었기 때문에 지금 이 목록을 최초로 여긴다.

(2) 鹿輪轉眼, 神鬼八部(녹륜전안, 신귀팔부) : ‘녹륜전안(鹿輪轉眼)’은 석가모니가 성불한 이후 녹야원(鹿野園)에서 교진여(?陳如, 一作 陳如?) 등에게 고(苦)ㆍ집(集)ㆍ멸(滅)ㆍ도(道)의 4가지 요체를 설파할 때 사슴으로 법륜을 굴렸다.

    ‘신귀팔부(神鬼八部)’는 사천왕이 귀신 무리를 거느린다는 뜻이다.

(3) 梵(범) : 이는 ‘범문(梵文)’으로 인도 고대의 문자를 가리킨다.  바라문자가 변천하여 나온 것으로 7세기에 자모가 형성되었는데, 원래 음은 13개이고 보충하는 음이 33개로 지금도 유행하고 있다.

(4) ?樓(구루) : 즉 ‘구로문(?盧文)’으로 또한 ‘구류(?留)’ㆍ‘구로슬저(?盧蝨底)’라고도 일컫는데, 인도의 고대문자이다.  『출삼장기집(出三藏記集)』에서 “우러러 선각자가 말한 바를 살펴 64종이 있는데, 녹륜전안은 필치로 구분을 만들고 신귀팔부는 글자체가 다른 형식이나 오직 범문 및 구루가 뛰어난 문자였던 까닭에 천축의 여러 나라들이 ‘천서’라 일컫는다[仰尋先覺所說, 有六十四種, 鹿輪轉眼筆制區分, 神鬼八部字體殊式, 惟梵及?樓爲勝文, 故天竺諸國謂之天書].”라고 하였다.  

(5) 酉陽雜俎(유양잡조) : 당나라 단성식(段成式, ?-863)이 지은 필기(筆記)로 20권과 속집 10권이다.  장화(張華)의 『박물지(博物志)』 체례를 참고하여 지괴(志怪)ㆍ전기(傳奇)ㆍ잡록(雜錄)ㆍ쇄문(?聞)ㆍ명물(名物)ㆍ고론(考論) 등을 한 편에 모은 책이다.

(6) ‘사고본’에서는 ‘攷’, 기타 본에서는 모두 ‘考’라 하였으나, 여기에서는 전자를 따르고 이후 ‘攷’자가 나오는 것은 모두 이와 같다.

(7) 天竺(천축) : 고대 인도의 별칭이니, 『후한서ㆍ서역전(後漢書ㆍ西域傳)』에서 “천축국은 일명 신독이라 하는데, 월씨의 동남쪽 수천리에 있다[天竺國一名身毒, 在月氏之東南數千里].”라고 하였으며,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서는 “대저 천축을 지칭하는 것을 상세히 보면, 다른 의론이 분분하다.  옛날 책에 신독 혹은 현두라 하였으나 지금 바른 음으로 보면 마땅히 인도라 하여야 한다[詳夫天竺指稱, 異議糾紛, 舊書身毒, 或曰賢豆, 今從正音, 宜云印度].”라고 하였다.  

(8) 芝英倒?(지영도해) : 지영(芝英)은 지영서(芝英書)이고, 도해(倒?)는 도해서(倒?書)로 각각 서로 다른 두 종류 전서체의 이름이다.  

    ‘지영서(芝英書)’는 춘추전국시기에 이미 나타나 이를 부신(符信)의 문자로 사용하였는데, 동한시기에 이르러 진준(陳遵)이 궁전에서 영지버섯을 보고 고대의 ‘지영서’를 본받아 새롭고 기발한 생각을 가하여 지영전(芝英篆)을 정리하였기 때문에 서단에서 이름이 났다고 한다.  지영(芝英)은 지초(芝草)로 옛사람은 이를 신초(神草)ㆍ서초(瑞草)로 여겼다.  

    ‘도해서(倒?書)’는 전서의 일종으로 ‘해엽전(?葉篆)’ㆍ‘언해서(偃?書)’라고도 일컫는다.  이러한 명칭이 붙여진 것은 필획의 형체가 가늘고 길며 뾰족한 염교의 잎사귀를 모방하였기 때문이다.  



【원문】

隋志(1)?婆羅門書, 以十四字貫一切音, 文省義廣, 蓋天竺以聲爲字. 槃涅經(2)有二十五字母, 華嚴經(3)有四十字母. 今通志七音略(4)所傳天竺三十六字母, 所變化各書, 猶可見也. 


【해석】

『수지』에서 “바라문의 문자는 14자로 모든 음을 꿰뚫고, 문자는 생략하고 뜻은 넓으며, 대개 천축은 소리를 글자로 삼았다.”라고 하였다.  『열반경』은 25개의 자모가 있고, 『화엄경』은 40개의 자모가 있다.  지금 『통지ㆍ칠음략』에 전해지는 천축의 36개 자모에서 변한 각 문자를 오히려 볼 수 있다.  


【주석】

(1) 隋志(수지) : 이는 즉 『수서(隋書)』에서의 ‘십지(十志)’로 의례지(儀禮志)ㆍ음악지(音樂志)ㆍ율력지(律曆志)ㆍ천문지(天文志)ㆍ오행지(五行志)ㆍ백관지(百官志)ㆍ지리지(地理志)ㆍ식화지(食貨志)ㆍ형법지(刑法志)ㆍ경적지(經籍志) 등 30권이다.  어지령(於志寧)ㆍ이순풍(李淳風) 등이 현경원년(656)에 완성하였다.  ‘십지’는 원래 양ㆍ진ㆍ주ㆍ제ㆍ수나라 등 오대사를 위하여 지은 것이어서 『오대사지(五代史志)』라고 하는데, 이후 각각 단독으로 유행하였기 때문에 마침내 『隋志(수지)』라 일컬었고, 함께 『수서』에 들어갔다.

(2) 槃涅經(반열경) : 이는 불경의 이름으로 소승(小乘)ㆍ대승(大乘) 2부가 있다.  소승의 『반열경』은 서진의 백법조(帛法祖), 대승의 『반열경』은 북량의 담무참(曇無讖)이 각각 번역하였다.  

(3) 華嚴經(화엄경) : 이는 불경의 이름으로 전체 명칭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다.  동진의 불타발타라(佛馱跋陀羅)가 번역한 60권과 당나라 실차난타(?叉?陀)가 번역한 80권 두 종류가 있다.

(4) 通志七音略(통지칠음략) : 『통지(通志)』는 남송의 정초(鄭樵, 1103-1162)가 1161년에 편찬한 것으로 모두 200권이다.  이 책은 『사기』의 체재를 모방하여 본가(本家)ㆍ세가(世家)ㆍ연보(年譜)ㆍ열전(列傳)ㆍ이십략(二十略)으로 나뉘어 있다.  ‘이십략’은 이 책의 정수로 예(禮)ㆍ직관(職官)ㆍ선거(選擧)ㆍ형법(刑法)ㆍ식화(食貨)의 5략(略) 이외에 씨족(氏族)ㆍ육서(六書)ㆍ칠음(七音)ㆍ천문(天文)ㆍ지리(地理)ㆍ도읍(都邑)ㆍ시(諡)ㆍ기복(器服)ㆍ악(樂)ㆍ예문(藝文)ㆍ교수(校?)ㆍ도보(圖譜)ㆍ금석(金石)ㆍ재상(災祥)ㆍ곤충초목(昆蟲草木)의 15략(略)인데, 모두 정초의 독창적 견해가 담겨져 있다.  이 중에서 칠음(七音)은 궁(宮)ㆍ상(商)ㆍ각(角)ㆍ치(徵)ㆍ우(羽)ㆍ변상(變商)ㆍ변치(變徵)를 가리킨다.  이는 음운학서로 『운경(韻鏡)』과 근원이 같고 현존하는 최초 등운서(等韻書)의 하나로 중국 고대음을 연구하는 데에 중요한 자료이다.  



【원문】

唐古?(1)之書, 出於天竺. 元世祖中統元年(2), 命國師八思巴製蒙古新字(3)千餘, 母四十一, 皆相關紐(4), 則採唐古?與天竺爲之, 亦迦慮(5)之變相也. 


【해석】

당고특의 문자는 천축에서 나왔다.  원 세조 중통원년(1260)에 국사 파스파에게 명하여 몽골의 새로운 문자 1000여 자를 제정하였으니, 자모가 41개로 모두 서로 관계되는 뉴인즉 당고특과 천축이 사용한 것을 채집한 것이고, 또한 가로의 변한 형상이다.  


【주석】

(1) 唐古?(당고특) : 이는 또한 ‘당고특(唐古特)’이라고도 일컫는 탕구트(Tangut)족이니, 티베트계의 일족으로 7세기 초부터 티베트와 청해(靑海) 지방의 강국(羌國) 토욕혼(吐谷渾) 사이에 있는 지역에 거주하였다.  청나라 초의 문헌에서 서장(西藏) 및 장족(藏族)을 일컬었고, 원나라 때는 몽고 사람을 당항인(黨項人)이라 일컬었으며 그들이 건국한 서하(西夏)를 당올(唐兀)이라 하였다.  이후 점차 청해ㆍ서장 지역 언어계통의 전체를 일컬었다.  지금 몽고어는 여전히 청해 지역 및 장족을 당고특이라 일컫는다.  

(2) 元世祖中統元年(원세조중통원년) : 원 세조는 즉 쿠빌라이(忽必烈, 1260-1294)이고, 중통원년은 1260년이다.

(3) 八思巴製蒙古新字(파스파제몽고신자) : 파스파(八思巴, 1235-1280)는 또한 파극사파(?克思巴)ㆍ발사파(?思八)ㆍ 파사마(八思馬)라고도 일컬으며, 원래 이름은 라고라사감장(?古?思?藏, bLo-gros-rgyalmtshan=hPhags-pa)으로 원나라 때 서장(西藏)의 라마교 살가파(薩迦派)의 제오조(第五祖)이다.  백부 살반(薩班)과 함께 서량(西?, 지금의 甘肅省 武威)에서 몽고에 귀순하여 중통원년(1260)에 국사(國師)에 봉해졌다.  그는 몽골문자의 자모를 근거로 삼아 파스파문자를 창제하여 지원 6년(1269)에 반포하였다.  문자는 네모꼴이고 왼쪽부터 세로로 적었다.  그러나 이 글자는 빨리 쓰는 데 적합하지 않아 쓰기에 불편하였기 때문에 잘 보급이 되지 않았고, 당시 일반적으로 사용하였던 위구르 문자를 차용한 몽골문자의 세력에 밀려 원나라가 망한 이후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오늘날 비문이나 고문서 등 공식적 기록에 남아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4) 紐(뉴) : 이는 즉 ‘성뉴(聲紐)’로 음운학 술어로 또한 ‘음뉴(音紐)’라고도 일컬으며 성모의 별칭이다.  발음부호를 조합하여 만든 문자로 반절법(反切法)에서 반절의 자음(子音)에 해당하는 것이다. 

(5) 迦盧(가로) : 이는 즉 ‘가라(迦羅)’라는 범어로 사람의 몸과 털을 쪼개어 백으로 나눈다는 뜻이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몽고의 새로운 문자가 당고특(唐古?)과 천축의 자모에서 변천하여 나왔음을 비유한 말이다.



【원문】

我朝達文成公(1), 又採唐古?蒙古之字, 變化而成國書(2). 至乾隆時, 於是製成?篆, 亦以聲而演形, ?託音爲字者. 然印度之先, 亦必以象形爲字, 未必能遽合聲爲字, 其合聲爲字, 必其後起也. 


【해석】

청나라의 달해는 또한 당고특과 몽고의 글자를 채집하고 변화시켜 나라의 문자를 만들었다.  건륭 때(1739-1795) 이르러 청나라 전서를 제정하여 만들고, 또한 소리로 형태를 부연하였으며, 아울러 음을 기탁하여 문자를 만들었다.  그러나 인도는 먼저 또한 반드시 상형을 문자로 삼았고, 아직 갑자기 소리를 합하여 문자를 만들지 못하였지만, 소리를 합하여 문자를 만든 것은 반드시 그 이후 일어났을 것이다.  


【주석】

(1) 達文成公(달문성공) : 이는 달해(達海, 1595-1632)로 청나라 만주 정람기(正?旗) 사람이며, 만주문자와 한문에 통하였다.  청 태조 때 직동문관(直同文館)을 맡아 명ㆍ몽고ㆍ조선에 보내는 문서는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  그는 또한 청나라 문자를 자세히 살펴 교정하였으며,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2) 國書(국서) : 나라에서 정한 문자로 여기에서는 만주문자를 가리킨다.



【원문】

遼太祖神冊五年(1), 增損?書之半, 製契丹文字(2). 金太祖(3)命完?希尹(4)依倣楷書, 因契丹字合本國語爲國書. 西夏李元昊(5)命野利仁榮(6)演書, 成十二卷, 體類八分(7). 此則本原於形, 非自然而變者. 本無精義自立, 故國亡而書隨之也.


【해석】

요 태조 신책 5년(920)에 예서의 반을 더하거나 덜어내어 거란문자를 창제하였다.  금 태조는 완안희윤에게 명하여 해서를 의지하고 모방하라 하였기 때문에 거란문자가 본국의 말과 합하여 나라 문자가 되었다. 서하의 이원호는 야리인영에게 명하여 문자를 부연하도록 하여 12권을 이루었으니, 서체는 팔분서와 유사하다. 이는 곧 형태에서 근원하였으니, 자연스럽게 변한 것이 아니다.  본래 정미한 뜻이 없고 스스로 세운 까닭에 나라가 망하자 문자도 따라서 없어졌다.  


【주석】

(1) 遼太祖神冊五年(요태조신책오년) : 요 태조는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 907-927)이고, 신책 5년은 920년이다.  

(2) 契丹文字(거란문자) : 이는 요나라 때 거란 사람이 창제한 문자이다.  요 태조는 신책 5년(920)에 야율노불고(耶律魯不古) 등에게 명하여 한자를 참조하여 제정하라 하였다.  이후 태조의 동생 야율질랄(耶律迭剌)이 회골문(回?文)에서 계시를 받아 별도로 새로운 문자를 창제하였는데, 이를 거란소자(契丹小字)라 일컫고 옛날 문자를 거란대자(契丹大字)라 일컫는다.  금나라 초에 이를 답습하였다.  금 장종 명창 2년(1191)에 명령을 내려 이를 사용하는 것을 금하자 단지 서요(西遼)의 상층계급에서만 유행하였다.  서요가 망하자 이것도 점차 없어졌다.  

(3) 金太祖(금태조) : 이는 완안아골타(完顔阿骨打, 1115-1122)이다.

(4) 完?希尹(완안희윤, ?-1140) : 금나라 여진족 완안부(完顔部) 사람으로 본명은 곡신(穀神)이다.  태조로부터 군대를 일으켜 천보 3년(1119)에 조부의 명을 받고 한자의 해서와 거란문자를 본받아 여진문자를 만들었다.  이후 희종이 별도로 새로운 문자를 창제하였으니, 이를 소자(小字)라 하고, 완안희윤이 창제한 것은 대자(大字)라 일컫는다.

(5) 李元昊(이원호) : 이원호(李元昊, 1003-1048)는 또한 조원호(趙元昊)라고도 일컬으며 서하(西夏)의 군주(1032-1048)이다.  하늘에서 예법을 받고 연조원년(1038)에 황제라 하고 국호를 대하(大夏)라 하였다.  관제ㆍ군제ㆍ법제를 제정하고 서하문자를 창조하였다.

(6) 野利仁榮(야리인영, ?-1042) : 서하의 대신으로 서하문자의 주요 창시자이다.  서하의 이원호는 야리인영 등에게 서하문자(西夏文字, 一作 小番文字)를 창조하라 명하여 6,000여 자를 만들었는데, 즉 고대 당항강(黨項羌) 언어의 문자를 기록한 것이다.  형체와 방식은 한자를 보방하고 필획이 복잡하다.  한 글자에 하나의 음이고, 회의ㆍ형성ㆍ전주 등의 조자법을 구성하였다.  대부분 법률ㆍ송사ㆍ비각ㆍ관인ㆍ금패ㆍ전패와 한문 전적과 한문ㆍ장문(藏文)의 번역에 사용하였다.  원나라 중엽까지 감숙(甘肅)ㆍ영하(寧夏) 일대에서 여전히 사용하였다.  

(7) 八分(팔분) : 한나라 예서의 별칭으로 팔분서라 한다.  위ㆍ진나라 해서도 예서라 일컫기 때문에 당시 통행하였던 파책이 있는 예서를 팔분서라 하여 혼란을 방지하였다.  팔분서에 관한 다른 해석들이 많다.  혹 “글씨가 모난 팔분은 법도가 있다고 말한다[字方八分, 言有楷模].”(張懷瓘, 『書斷』引王?說)라고 하여 팔분은 글씨를 쓰는 법도이나 점차 변천하여 서체의 명칭이 되었다는 것이다.  혹 한나라 예서의 파절(波折)이 좌우로 향하여 갈라지니 “점차 八자처럼 분산하여 또한 명칭이 팔분서가 되었다[漸若八字分散, 又名之爲八分].”(『書斷』)라고 하였다.  이후 이에 동조하는 설이 많았다.  일설에 “이사가 소전을 만들고, 정막이 예서를 만들었으며, 왕차중이 팔분서를 만들었다.  채문희는 이르기를 ‘정막의 글씨에서 팔분을 베어내고 이분을 취하며, 이사의 글씨에서 이분을 베어내고 팔분을 취하였던 까닭에 팔분서라 일컫는다.’[李斯作小篆, 程邈作??, 王次仲作八分. 蔡文姬曰, 割程邈字八分, 取二分, 割李斯字二分, 取八分, 故謂之八分].”(見, ??, 『樊?山房文集』卷二 『方君任?八分辨序』)라고 하였다.



【원문】

歐洲通行之字, 亦合聲爲之. 英國字母二十六, 法國二十五, 俄德又各殊, 然其始亦非能合聲爲字也. 其至古者, 有阿拉伯文字, 變爲猶太文字焉. 有?利亞文字巴比倫文字埃及文字希利尼(1)文字, 變爲拉丁文字焉, 又變爲今法英通行之文字焉.(2) 此亦如中國?篆分?行草之展轉相變也. 且彼又有篆分正斜大小草之異, 亦其變之不能自已也.


【해석】

유럽에서 통행하는 문자 또한 소리를 합하여 만들었다.  영국 자모는 26개 이고, 프랑스는 25개 이며, 러시아와 독일도 각각 다르다.  그러나 그 시작은 또한 소리를 합하여 문자를 만들 수 있던 것은 아니다.  가장 오래된 것은 아랍문자가 있는데, 변하여 여기에서 유태문자가 되었다. 시리아문자?바빌론문자?이집트문자?희랍문자가 있었으나 변하여 여기에서 라틴문자가 되었고, 거듭 변하여 여기에서 지금 프랑스와 영국에서 통행하는 문자가 되었다.  이 또한 마치 중국의 주문?전서?팔분서?예서?행서?초서가 전전하면서 서로 변한 것과 같다.  뿐만 아니라 저것 또한 전서?팔분서, 바르고 기운 대초?소초의 다름이 있으니, 이 또한 그 변화를 스스로 그칠 수 없었던 것이다.  


【주석】

(1) 希利尼(희리니) : 이는 즉 희랍(希臘)을 번역한 음이다.

(2) 이 단락의 논술은 정확하지 않다.  세계의 각종 병음문자의 자모는 외형으로 보면 다양하나 연구를 통하여 발견한 것은 이것들 대부분이 아라비아반도 북방 유대인 계통의 셈족(Semites)에서 근원하였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후 기타 민족들이 서로 전하여 기원전 1,000년 전후 셈족의 자모는 세 갈레로 나누어졌다.  이 중에서 현재 대부분 사용하는 사람이 없는 고문자인 가나안(Canaan)과 희랍 자모는 서쪽으로 전파되었고, 스와힐리어(Alama) 자모는 동쪽으로 전해졌다.  이후 희랍 자모는 많은 후예가 있었는데,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라틴 자모와 슬라브족 자모이다.  라틴 자모는 또한 로마자라고도 일컫는데, 기원전 7세기 라틴족이 희랍 자모의 기초에서 창조한 것이다.  현재 유럽ㆍ아메리카ㆍ호주ㆍ아프리카의 대부분 민족과 동유럽 및 아시아의 일부 국가에서 라틴 자모를 사용하고 있다.  슬라브족 자모는 9세기경 희랍정교의 선교사가 희랍 자모에 의거하여 창조한 것이다.  원래는 동유럽에서 희랍정교를 신봉하는 각 슬라브족들이 사용하였으나 이후 종교의 한계를 타파하여 현재 소련의 대다수 민족의 문자 자모가 되었다.  러시아문자가 바로 이러한 자모이다.  스와힐리어 자모는 대략 기원전 8세기에 형성되었는데, 이것의 후예와 갈래가 많다.  이 중에서 중요한 것은 아랍 자모로 현재 이집트ㆍ시리아ㆍ예멘ㆍ이란ㆍ아프가니스탄 등 많은 국가에서 여전히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강유위가 여기에서 논술한 병음문자의 변천과정은 정확하지 않다.(見, 高名凱ㆍ石安石, 『語言學槪論』)



【원문】

夫變之道有二, 不獨出於人心之不容已也, 亦由人情之競趨簡易焉. 繁難者人所共畏也, 簡易者人所共喜也. 去其所畏, 導其所喜, 握其權便(1), 人之趨之, 若決川(2)於堰水之坡, 沛然下行, 莫不從之矣. 


【해석】

무릇 변의 이치는 두 가지가 있으니, 유독 사람 마음이 자기를 용납하지 않음에서 나온 것과 또한 사람 정이 여기에서 다투어 간단하고 쉬운 것을 좇는 것에서 말미암지 않았다.  번거롭고 어려운 것은 사람들이 함께 두려워하는 바이고, 간단하고 쉬운 것은 사람들이 함께 기뻐하는 바이다.  두려워하는 바를 없애고, 기뻐하는 바를 인도하며, 권도의 편안함을 잡아 사람이 이를 좇으면 마치 내가 물을 막은 제방에서 터져 세차게 내려가는 것과 같아 좇지 아니할 수 없다.  


【주석】

(1) 權便(권편) : ‘권(權)’은 불교의 명사로 ‘방편(方便)’의 다른 명칭이다.  이는 또한 권도(權道)를 가리키기도 한다.  이는 시기와 형편에 적합한 법을 가리키는데, 항상 변하지 않는 법인 ‘실(實)’과 상대적으로 사용한다.  『마하지관(摩河止觀)』에서 “‘권’은 권모를 일컬으니 잠시 사용하였다 다시 그만 두는 것이고, ‘실’은 실록과 더불어 요지를 탐구하고 다하는 것이다[權謂權謀, 暫用還廢, 實與實錄, 究竟旨歸].”라고 하였다.

    ‘편(便)’은 ‘방편’ㆍ‘편리’라는 뜻으로 사용한다.

(2) 決川(결천) : 물길을 개통하여 방수하는 것을 가리키니, 『상서ㆍ익직(尙書ㆍ益稷)』에서 “내가 아홉 내를 터서 사해로 이르게 하였다[予決九川, 距四海].”라고 하였다.



【원문】

?席易爲牀榻, 豆登(1)易爲盤碗, 琴瑟易以箏琶, 皆古今之變, 於人便利. ?草之變, 而行之獨久者, 便易故也. 


【해석】

안석과 자리가 바뀌어 평상과 걸상이 되고, 두와 등이 바뀌어 소반과 주발이 되었으며, 거문고와 큰 거문고는 쟁과 비파로 바뀌었으니, 모두 고금의 ‘변’은 사람의 편리함에서 나왔다.  예초의 변함이 행한 지가 유독 오래된 것은 편하고 쉽기 때문이다.


【주석】

(1) 豆登(두등) : ‘두(豆)’는 고대의 식기로 발이 높은 반(盤)과 같고, 혹 뚜껑이 있기도 하다.  이는 식물을 담는 데에 사용하였다.  신석기 말기에 나타나기 시작하여 상ㆍ주나라 때 성행하였으며, 대부분 도기로 되었다.  상ㆍ주나라에는 나무로 만들어 칠을 바른 것이 있었고, 서주말기에 이미 청동기로 만든 것이 있었다.  ‘두’는 본래 기장을 담는 것이었으나 이후 점차 변하여 고기 젓갈이나 국을 담았다.  고대에 나무로 만든 것은 두(豆), 대나무로 만든 것은 변(?), 기와로 만든 것은 등(?)이라 하였으니, 『시경ㆍ대아ㆍ생민(詩經ㆍ大雅ㆍ生民)』에서 “두와 등에 즐비하도다[于豆于登].”라고 하였다.  



【원문】

鐘表(1)興則壺漏(2)廢, 以鐘表便人, 能懸於身, 知時者未有捨鐘表之輕小, 而佩壺漏之累重也. 輪舟(3)行則帆船廢, 以輪舟能速致, 跨海者未有捨輪舟之疾速, 而樂帆船之遲鈍也. 故謂變者天也.


【해석】

손목시계가 성행한즉 물시계를 폐기한 것은 손목시계로 사람을 편하게 하고 몸에 매달 수 있으니, 때를 아는 사람은 아직 손목시계의 가볍고 작음을 버리고 물시계의 무거움을 차는 일이 없다.  화륜선이 다닌즉 범선을 폐기한 것은 화륜선으로 빨리 이르게 할 수 있으니, 바다를 건너가는 자가 아직 화륜선의 빠름을 버리고 범선의 더디고 둔한 것을 좋아함이 없다.  그러므로 ‘변’이란 것은 자연이라 일컫는다.


【주석】

(1) 鐘表(종표) : 손목시계를 가리킨다.

(2) 壺漏(호루) : 이를 또한 ‘누호(漏壺)’ㆍ‘각루(刻漏)’라고도 하며, 물시계를 일컫는다.  이는 고대에 시간을 헤아리는 기물로 『주례ㆍ하관(主禮ㆍ夏官)』에 이미 기록이 있다.  일반적으로 모래 혹은 물을 넣어 점차 얼마나 떨어지는가를 보고 시간을 헤아렸다.  명나라 이후 손목시계가 있은 뒤에 점차 폐기하여 사용하지 않았다.

(3) 輪舟(윤주) : 이는 화륜선(火輪船)을 가리키니, 물레바퀴 모양의 추진기를 단 기선으로 스크루를 사용하기 전에 있었다.



【원문】

梁釋僧祐(1)曰, 造書者三人, 長曰梵書, 右行, 次?樓, 左行, 少倉?, 下行. 其說雖謬, 爲文字之製, 欲資人之用耳, 無中行左右行之分也. 


【해석】

양나라 승려 우가 이르기를 “문자를 만든 자가 세 사람이 있는데, 뛰어난 것은 범어문자로 오른쪽으로 썼고, 다음은 구루문자로 왼쪽으로 썼으며, 적은 것은 창힐로 아래로 썼다”라고 하였다.  그 말은 비록 그릇된 것이나 문자의 창제는 사람이 사용을 도와주고자 할 뿐 가운데로 가고, 좌우로 가는 구분이 없다. 


【주석】

(1) 梁釋僧祐(양석승우) : 양나라 승려 우(祐, 445-518)는 남조 제ㆍ양나라 때 불교학자이다.  본래 성은 유(?)이고 관적은 팽성하비(彭城下?, 지금의 江蘇省 ?縣)이나 부친 때부터 건업(建業, 지금의 江蘇省 南京)에 살았다.  14세에 출가하여 율종대사인 법영(法穎)을 모시고 불학을 정미하게 연구하였다.  저서로는 『석가보(釋迦譜)』?『출삼장기집(出三藏記集)』?『홍명집(弘明集)』 등이 있다.



【원문】

人圓讀不便於手, 倒讀不便於目, 則以中行爲宜, 橫行亦可爲用. 人目本橫, 則橫行收攝爲多, 目睛實圓, 則以中行直下爲順. 以此論之, 中行爲優也. 


【해석】 

사람이 원만하게 읽고 손에 불편하지 않으며, 거꾸로 읽어도 눈에 불편하지 않으면, 가운데로 가는 것이 마땅하고, 옆으로 가도 또한 사용할 수 있다.  사람 눈은 본래 옆으로 되어 있은즉 가로로 가면 거두어 당김이 많고, 눈동자는 실제 둥근즉 가운데로 가서 곧게 내리는 것을 순함으로 삼는다.  이것으로 논하면, 가운데로 가는 것이 우수하다.  



【원문】

安息(1)書革旁行以爲書記, 安息?今波斯(2)也. 回回(3)字右行, 泰西(4)之字左行, 而(5)中國之書中行(6), 此亦先聖格物之精也. 然每字寫形, 必先左後右. 數學書亦有橫列者, 則便於右手之故. 蓋中國亦兼左行而有之, 但右行實於右手大不順, 爲最愚下耳.


【해석】

파르티아 문자는 가죽에다 옆으로 가면서 일을 기록하였는데, 파르티아는 즉 지금의 페르시아이다.  회족문자는 오른쪽으로 갔고, 유럽과 미국의 문자는 왼쪽으로 갔으나 중국의 문자는 가운데로 같으니, 이 또한 선현들이 사물의 이치를 추구한 정수이다.  그러나 각 글자는 형태를 쓸 때 반드시 왼쪽을 먼저 하고 오른쪽을 뒤로 하였다.  수학서도 가로로 배열한 것이 있은즉 오른손에 편한 까닭이다.  대개 중국문자 또한 왼쪽으로 가는 것을 겸하고 있으나 오른쪽으로 가는 것은 실제 오른손에 크게 자연스럽지 못하니, 가장 어리석고 아래가 될 뿐이다.


【주석】

(1) 安息(안식) : 이는 파르티아(Parthia, ?提亞)를 음역한 것으로 아시아 서부의 고대 국가였다.  로마와 중국의 무역과 교통의 요충지로 국세가 강성하였으나 2세기 말에 점차 쇠퇴하다가 226년에 사산왕조 페르시아(Sassanian Persia, 薩桑波斯)에게 정권을 넘겨주었다.  

(2) 波斯(파사) : 알 대시(Ardashir, ?-약 240년, 阿爾達希) 1세가 파르티아 왕국으로 추대되어 통치한 이후 창립한 나라 페르시아로 지금의 이란이다.  

(3) 回回(회회) : 이는 이슬람교를 믿는 회족을 가리킨다.  옛날 회골(回?, 고대의 위구르족)은 졸리문(?利文, 통칭 粟特文) 자모를 채용하여 문자를 창제하였는데, 처음에는 오른쪽으로부터 왼쪽으로 향하여 가로로 썼으나 이후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세로로 썼다.  해서는 경전에 사용하였고, 초서는 일반 문서에 사용하였다.  당나라부터 명나라에 이르기까지 주로 지금의 투루판(吐魯番)분지와 중아시아 초하(楚河) 유역에서 유행하였다.  

(4) 泰西(태서) : 이는 ‘극서(極西)’와 같은 말로 옛날 중국에서 서양 국가를 일컬은 것인데, 일반적으로 유럽과 미국 각국을 가리킨다.

(5) ‘상해본’에서는 ‘西’, ‘사고본’에서는 ‘而’라 하였는데, 후자를 따른다.

(6) 中國之書中行(중국지서중행) : 황소기(黃紹箕)는 『광예주쌍즙평어(廣藝舟雙楫評語)』에서 “종정문 및 석각은 종종 아래에 있으면서 오른쪽으로 갔으니 마치 만주문자의 법이 있는 것 같다[鐘鼎文及石刻往往有在下而右行, 如國書之式者].”라고 하였다.  



【원문】

中國自有文字以來, 皆以形爲主, ?假借行草, 亦形也, 惟諧聲略有聲耳, 故中國所重在形. 外國文字皆以聲爲主, ?分篆?行草亦聲也, 惟字母略有形耳. 中國之字, 無義不備, 故極繁而條理不可及. 外國之字, 無聲不備, 故極簡而意義亦可得. 蓋中國用目, 外國貴耳. 


【해석】

중국이 문자가 있은 이래로부터 모두 형태를 주로 삼았으니, 즉 가차의 행초서 또한 형태이고 오직 해성(형성)만 대략 소리가 있을 따름인 까닭에 중국이 중시하는 바는 형태에 있다.  외국문자는 모두 소리를 주로 삼았으니, 즉 전서?예서?행서?초서로 나누었어도 또한 소리이고, 오직 자모만 대략 형태가 있을 뿐이다.  중국의 문자는 뜻을 갖추지 않음이 없는 까닭에 매우 번거로우나 조리는 따라갈 수 없다.  외국의 문자는 소리를 갖추지 않음이 없는 까닭에 지극히 간략하나 의미 또한 얻을 수 있다.  대개 중국은 눈을 사용하고, 외국은 귀를 귀히 여긴다.



【원문】

然聲則地球(1)皆同, 義則風俗各異, 致遠之道, 以聲爲便. 然合音爲字, 其音不備, 牽?爲多, 不如中國文字之美備矣(2).

 

【해석】

그러나 소리는 전 세계가 모두 같고, 뜻은 풍속이 각각 달라 먼 곳에 이르는 이치는 소리를 편리함으로 삼는다.  그러나 소리를 합하여 문자를 만드는데, 그 소리가 갖추어지지 않아 억지가 많으니, 중국문자의 아름다움을 갖춘 것만 같지 못하다.

 

【주석】

(1) 地球(지구) : 이는 지구에 있는 전 세계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하였다.

(2) 이 구절에 대하여 황소기(黃紹箕)는 『광예주쌍즙평어(廣藝舟雙楫評語)』에서 “외국은 소리를 위주로 삼고 형태가 이를 좇으며, 중국은 형태를 위주로 삼고 소리가 이를 좇는다.  오직 형태를 주로 하는 까닭에 문자는 날로 번거롭고 소리는 날로 적다.  그러나 자모가 한번 변하면, 즉 묘연하여 무슨 말인지 알지 못한다.  만약 중국이 금일 2,000여 년 전의 종정문을 읽는다면 오히려 십에 예닐곱을 얻을 것이니, 이는 오히려 고문ㆍ전서ㆍ예서ㆍ진서가 변천하고 흐름이 갈마들며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집트 고문이 유실되고 끊어짐에 이르렀으나 서양인 또한 오히려 대강을 추측하여 볼 수 있으니. 형태를 주로 하지 않으면 무엇으로 말미암아 이를 얻겠는가?  그러므로 멀리 가는 것은 소리를 편함으로 삼고, 오래 드리우는 것은 형태를 편함으로 삼는다.  실제에 있어서 해성(형성)은 하나의 예로 자모가 배합하여 형체가 다르나 사용함은 같다.  또한 고서 두 글자는 소리를 합한 문자이니 낱낱이 들어 말할 수 없으나 오래 쌓이는 것은 형태에 치우치지 않을 수 없을 따름이다[外國以聲爲主, 而形從之, 中國以形爲主, 而聲從之. 惟其主形也, 故文日繁而聲日少. 然字母一變, 卽渺不知爲何語. 若中國今日上讀二千餘年前之鐘鼎文, 尙可得十之六七, 此猶可曰古篆?眞遷流迭?也. 至埃及古文, 其流失絶矣, 然西人亦尙能推見梗槪, 非主形何由得此. 故行遠以聲爲便, 垂久以形爲便. 其實諧聲一例, 與字母配合, 體異而用同. 且古書兩字合音字, 不可枚擧, 但積久而不能不偏形耳].”라고 분석하였다.




【원문】

天竺開國最先, 創音爲書亦最先, 故戎蠻(1)諸國悉因(2)之. 西域記(3)?跋祿迦國(4)字源三十餘, ?霜那國(5)健?羅國(6)有波爾尼仙(7)作爲字書, 備有千頌, 頌三十言, 究極古今, 總括文書. 八紘外史(8)及今四譯館(9))所載, ?泥(10)文萊(11)蘇祿(12)暹羅呂宋(13)國書, 皆合聲爲字, 體皆右行, ?本原於梵書. 日本國書字母四十有七, 用中國草書爲偏旁, 而以音貫之, 亦梵之餘裔也.


【해석】

천축은 나라를 제일 먼저 열었고, 소리를 창제하여 문자를 만든 것 또한 가장 먼저인 까닭에 여러 나라들은 이를 의거하였다.  『서역기』에 이르기를 “발록가국 문자 근원은 30여개이고, 갈상나국ㆍ건태라국에는 파이니선이 만든 자서가 있는데, 『천송』ㆍ『송』 30말씀이 있는데, 고금을 연구하여 다하였으며 문언을 총괄하였다.”라고 하였다.  『팔굉외사』 및 지금의 ‘사역관’에 기재된 바에 의하면, 발리?브루나이?술루?태국?루손 나라의 문자는 모두 소리를 합하여 문자를 만들었고, 형체는 모두 오른쪽으로 가며, 아울러 범어문자에서 근원하였다.  일본의 문자는 자모가 47개이고, 중국 초서를 사용하여 편방을 만들었고, 소리로 꿰었으며, 또한 범어의 남은 후예이다.


【주석】

(1) 戎蠻(융만) : ‘융(戎)’은 고대 소수민족을 넓게 일컫는 것 중의 하나이다.  소수민족은 서로 다른 지역에 분포되어 있기 때문에 서쪽에 있는 것을 흔히 ‘서융(西戎)’, 남쪽에 있는 것을 ‘남만(南蠻)’이라 일컬었다.  

    따라서 ‘융만(戎蠻)’은 널리 서쪽과 남쪽에 있는 각 소수민족의 국가와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다.

(2) 因(인) : 의거하다 혹은 따른다는 뜻으로 『상군서ㆍ경법(商君書ㆍ更法)』에서 “각각 당시 법을 세웠는데, 일을 의거하여 예를 제정하였다[各當時而立法, 因事而制禮].”라고 하였다.

(3) 『西域記(서역기)』 : 이는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로 12권이다.  당나라 승려 현장(玄?)이 짓고 변기(辯機)가 편집하여 정관 20년(646)에 완성하였다.  이는 현장법사가 천축의 110나라를 주유하면서 28나라의 산천ㆍ성읍ㆍ물품ㆍ풍속을 기록한 것으로 대부분 『당서(唐書)』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것들이다.  이는 또한 인도ㆍ파키스탄ㆍ네팔 및 중앙아시아의 고대 역사와 지리를 연구하는 데에 중요한 문헌이기도 하다.  

(4) 跋祿迦國(발록가국) :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의 기록에 의하면, “동서로 600여 리, 남북으로 300여 리이다.  토양은 마땅하고 기후는 차례가 있으며, 인성ㆍ풍속ㆍ문자의 법칙은 굴지국과 같으나 언어는 조금 다르다.  승려는 1,000여 명이고, 소승교의 설일체유부를 닦는다[東西六百餘里, 南北三百餘里. 土宜氣序, 人性風俗, 文字法則, 同屈支國, 語言少異. 僧徒千餘人, 習小乘敎說一切有部].”라고 하였다.  이는 즉 아극소(阿克蘇)로 한나라 때에는 고묵국(姑墨國), 당나라 때에는 고묵주(姑墨州)라 하였다.  지금의 아극소하(阿克蘇河)를 『수경주(水經注)』에서 고묵천(姑墨川)이라 하였다.  지금은 옛날 회성(回城)에 온숙현(溫宿縣)을 설치하였고, 신성(新城)에서 아극소현(阿克蘇縣)을 설치하였는데, 옛날 나라는 회성에 있었다.  

(5) ?霜那國(갈상나국) :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의 기록에 의하면, “갈상나국은 둘레가 1,500리이다.  토양이 마땅하고 풍속은 삽말건국과 같다[?霜那國, 周千四五百里. 土宜風俗, 同颯?建國].”라고 하였다.  지금 소련 중아시아 사마르칸트에서 남쪽으로 약 140km 떨어진 사혁리하발자(沙赫里夏勃玆) 지방에 있다. 

(6) 健馱羅國(건타라국) : 건타라(健馱邏, Gandh?ra)는 또한 건타라(?陀羅)ㆍ간타라(干陀羅)ㆍ건타라(建陀羅)ㆍ계빈(??)ㆍ향풍(香風)이라 음역하기도 하며, 지금 파키스탄의 페샤와르(Peshawar, 白沙瓦) 및 그 인접의 아프가니스탄(Afghanistan) 동부 일대이다.  현장(玄?)은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서 “동서로 1,000여 리, 남북으로 800여 리이다[東西千餘里, 南北八百餘里].”라고 하였다. 

(7) 波爾尼仙(파이니선) : 파이니(波爾尼)는 범어문전을 지은 옛날 신선 이름으로 『대당서역기(大唐西域?』에서 “사람 수명이 백세일 때 파이니선이 있어 나면서 넓게 사물을 알았고, 때가 경박하고 천함을 걱정하며 근거가 없고 거짓됨을 깎고 번거롭고 뒤섞인 것을 산정하려고 하였다.  유람하고 바야흐로 돌아오는 길에 자재천을 만나 마침내 기술하는 뜻을 말하니, 자재천이 이르기를 ‘대업이도다, 내가 마땅히 너를 돕겠다.’라고 하였다.  파이니선은 가르침을 받고 물러나 이에 정미하게 연구하고 생각을 이르러 많은 말을 채집하고 주워 모아 자서를 만들었다.  『천송』ㆍ『송』 32말씀이 있는데, 고금을 연구하여 다하였으며 문언을 총괄하였다[人壽百歲之時, 有波爾尼仙, 生知博物, 愍時?薄, 欲削浮僞, 刪定繁猥. 遊方回道, 遇自在天, 遂伸述作之志. 自在天曰, 盛矣哉, 我當祐汝. 仙人受敎而退, 於是硏精覃思, 採?群言, 作爲字書, 備有千頌, 頌三十二言矣, 究極古今, 總括文言].”라고 하였다.  

(8) 八紘外史(팔굉외사) : 이는 육차운(陸次雲)이 지은 것으로 『팔굉역사(八紘譯史)』4권과 『팔굉황사(八紘荒史)』1권이며 『용위비서(龍威秘書)』에 수록되어 있다.  이는 『대황경(大荒經)』을 이어 제작한 것으로 내용은 서역의 수도사들이 먼 지방으로 포교를 하러 갔다가 친히 겪은 일을 적은 것인데, 모두 『직방(職方)』의 기록에 없는 것들이다.  여기에는 많은 국가들의 지리ㆍ위치ㆍ풍속ㆍ습관 이외에 황당무계한 것들 예를 들면, 여인국(女人國)ㆍ구국(狗國)ㆍ소인국(小人國) 등이 많다.  이에 대하여 육차운은 “우주의 큼에 있지 아니함이 없으니, 존재하는 것은 고증을 기다린다[宇宙之大無所不有, 存之以俟考證].”라고 하였다.  ‘팔굉(八紘)’에 대하여 『회남자ㆍ지형(淮南子ㆍ地形)』에서 “구주의 밖에 팔빈이 있고, 팔빈의 밖에 팔굉이 있으며, 팔굉의 밖에 팔극이 있다[九州之外, 而有八殯. 八殯之外, 而有八紘. 八紘之外, 乃有八極].”라고 하였으니 매우 먼 지역을 가리킨다.  

(9) 四譯館(사역관) : 명ㆍ청나라에서 설치한 변경 민족과 이웃 나라의 언어와 문자를 번역하는 전문 기구이다.  명나라 영락 5년(1407)에 사이관(四夷館)을 설치하여 국자감 학생을 선발하여 번역 일을 배우도록 하였고, 한림원에 예속하였다.  청나라 초에 ‘사역관’이라 명칭을 고치고, 건륭 13년(1748)에 회동관(會同館)에 편입시켜  다시 명칭을 ‘회동사역관(會同四譯館)’이라 하였다.  

(10) ?泥(발니) : ‘상해본’ㆍ‘목이본’에서는 ‘悖’, ‘사고본’에서는 ‘?’라 하였는데, 후자를 따른다.

    이를 또한 ‘패니(悖尼)’라고도 하는데, 『팔굉역사(八紘譯史)』에서 “발리(Bali)는 암바의 속국으로 서남쪽 대해에 있다.  땅이 뜨겁고 바람과 비가 많다.  문자는 필찰이 없고 칼로 조개나 많은 잎사귀에 새겼다.  부처를 섬김이 매우 근엄하며 홍무 연간(1368-1398)에 조공을 들였다[?泥, 闇婆屬國, 在西南大海中. 地炎熱, 多風雨. 書無筆札. 以刀刻貝多葉. 事佛甚嚴, 洪武時入貢].”라고 하였다.  

(11) 文萊(문래) : 이는 옛날에 ‘보르네오(Borneo, 婆羅乃)’로 음역하였다.  브루나이(Brunei, 文萊)는 동남아시아 칼리만탄(Kalimantan, 加里曼丹島) 북부에 있고 남해에 임해 있다.

(12) 蘇祿(소록) : 고대 국가의 이름으로 옛날 땅은 지금 필리핀(Philippines, 菲律賓)의 술루(Sulu, 蘇祿)섬으로 진주 생산지로 유명하다.  『도이지략(島夷志略)』ㆍ『명사ㆍ외국열전(明史ㆍ外國列傳)』에 모두 기록이 있다.

(13) 暹羅呂宋(섬라여송) : ‘섬라(暹羅)’는 즉 지금의 태국이고, ‘여송(呂宋)’은 지금 필리핀의 루손(Luzon, 呂宋)섬이다.  



【원문】

聲學(1)盛於印度, 故佛典(2)曰, 我家??體, ?淨在音聞. 又以聲聞爲一乘(3), 其操聲爲?, 能治奇鬼異獸, 蓋聲音之精也. 唐古?蒙古及泰西合聲爲字之學, 莫不本於印度焉(泰西治?, 皆出天竺, 予別有論, 此變之大者也).


【해석】

성학은 인도에서 성행한 까닭에 불전에서 이르기를 “나의 가문 참 가르침의 요체인 청정은 소리를 듣는 데에 있다.”라고 하였다.  또한 소리를 듣는 것을 일승으로 삼으니, 소리를 잡고 주문을 하여 기이한 귀신과 짐승을 다스릴 수 있으니, 대개 소리의 정화이다.  당고특ㆍ몽골 및 유럽과 미국에서 소리를 합하여 문자를 만드는 학문은 인도에서 근본하지 않음이 없다.(유럽과 미국에서 가르침을 다스리는 것은 모두 천축에서 나왔으니, 내가 별도로 논함이 있는데, 이는 ‘변’의 큰 것이다.)


【주석】

(1) 聲學(성학) : 이를 또한 음향학이라고도 일컫는다.  성음(聲音)은 인류 최초 연구의 물리현상의 하나이고, 성학(聲學)은 경전물리학에서 역사가 가장 오래되었으며, 현재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유일한 학과이다.  성학은 물리학에서 갈라진 학과의 하나로 매개체에서 기계파의 탄생ㆍ전파ㆍ접수ㆍ효과를 연구하는 학과이다.

(2) 佛典(불전) : 이는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릉엄경[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으로 권8에서 “이는 바야흐로 참 가르침인 진교의 요체이고, 청정은 소리를 듣는 데에 있으니, 집념을 버리고 한 가지 대상에만 정신을 집중하는 경지의 삼마지를 취하려면 실제로 듣는 가운데에 들어가야 한다[此方??體, ?淨在音聞, 欲取三摩地, 實以聞中入].”라고 하였다.  

(3) 以聲聞爲一乘(이성문위일승) : 이는 즉 불교의 ‘성문승(聲聞乘)’이다.  사라바가(s/ra^vaka, Sheluopojia, 舍羅婆迦)는 부처의 소승법(小乘法)에서의 제자로 부처의 소리 가르침을 듣고 사체의 이치를 깨달아 보고 생각하는 의혹을 끊어 열반안(涅槃岸)에 들어갔다.  이후 부처의 법문으로 사체(四諦, 즉 苦諦ㆍ集諦ㆍ滅諦ㆍ道諦)의 이치를 깨닫고, 아라한의 깨달음 경지를 구하는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성문승’이라 일컫는다.  불교는 또한 이러한 수행이 길에서 사람을 태우고 열반안으로 운행하는 수레를 ‘승(乘)’이라 일컫는다.  불교에서는 사람이 선천적으로 3종류가 있다고 일컫는다.  즉 ‘근기(根器)’(사람의 성정이 나무와 같은 까닭에 根이라 하였고, 根은 나무를 지탱할 수 있는 까닭에 器라 하였다.)는 성문승의 ‘소근기(小根器)’ 이외에 또한 연각승(緣覺乘)인 ‘중근기(中根器)’가 있어 ‘벽지불과(?支佛果)’를 구하고, 보살승(菩薩乘)인 ‘대근기(大根器)’는 ‘불과(佛果)’를 구한다.  



【원문】

綜而論之, 書學與治法, 勢變略同. 周以前爲一體勢(1), 漢爲一體勢, 魏晉至今爲一體勢, 皆千數百年一變. 後之必有變也, 可以前事驗之也. 今用?楷(2), 吾言?楷.


종합하여 논하면, 서학과 법을 다스리는 형세의 ‘변’은 대략 같다.  주나라 이전이 한 체세이고, 한나라가 한 체세이며, 위ㆍ진나라에서 지금에 이르기까지가 한 체세이니, 모두 천 수백 년에 한 번 변하였다.  이후 반드시 변함이 있는 것을 이전 일로 증험할 수 있다.  지금 해서를 사용하니, 나는 해서라 말한다.


(1) 體勢(체세) : 글자의 결체와 포백의 변화로 인하여 생겨나는 필세를 가리킨다.  형체를 얽어놓는 과정이나 실제로는 ‘세’를 생성하는 과정이니, 즉 형태를 만들고 형세를 이루는 것이다.

(2) ?楷(진해) : 이는 진서(?書)와 해서(楷書)를 합친 말로 여기에서는 지금의 해서를 뜻한다.



【원문】

或曰, 書自結繩(1)以前, 民用雖篆草百變, 立義皆同. 由斯以談, 但取成形, 令人可識, 何事誇鍾衛(2), 講王羊(3), 經營點?之微, ?悅筆札之麗, 令祁祁(4)學子(5)玩時日於臨寫之中, 敗心志於碑帖之內乎. 


【해석】

혹 이르기를 “문자는 결승이전부터 백성이 사용하여 비록 전서ㆍ초서가 백번 변하였으나 뜻을 세움은 모두 같다.”라고 한다.  이로 말미암아 말하면, 단지 취하여 형태를 이루어 사람에게 알 수 있도록 하였을 뿐이다.  무슨 일로 종요ㆍ위관을 자랑하고, 왕헌지ㆍ양흔을 말하며, 점과 획의 미묘함을 경영하고, 필찰의 아름다움을 밝히고 기뻐하며, 많은 학자들로 하여금 시일을 임서하고 서사하는 가운데에서 놀게 하고, 마음과 뜻을 비와 첩의 안에서 썩게 하는 것인가? 


【주석】

(1) 結繩(결승) : 끈을 매듭지어 일을 기록하는 것으로 문자가 탄생하기 전에 기억을 도와주는 방법의 일종이다.  큰 일은 큰 매듭, 작은 일은 작은 매듭을 만들었다고 전한다.  『주역ㆍ계사하(周易ㆍ繫辭下)』에서 “상고시대에 결승으로 다스렸고, 후세 성인이 이를 서계로 바꾸었다[上古結繩而治, 後世聖人易之以書契].”라고 하였다.  

(2) 鍾衛(종위) : 이는 종요(鍾繇, 151-230)와 위기(衛?, 155-230) 혹은 위관(衛瓘, 220-291)을 가리키나 여기에서는 위관의 공적이 더 뛰어나기 때문에 잠시 위관이라 하겠다.  

    종요는 자가 원상(元常)이고 삼국시대 위나라 서예가로 영천장사(潁川長社, 지금의 河南省 長葛의 서쪽) 사람이다.  조비(曹丕)가 한나라를 대신한 이후 정위(廷尉)를 맡았고, 명제가 즉위하자 태부(太傅)에 올랐기 때문에 ‘종태부(鍾太傅)’라 불렸다.  글씨를 잘 썼고 조희(曹喜)ㆍ채옹(蔡邕)ㆍ유덕승(劉德昇)을 스승으로 삼아 널리 여러 장점을 취하였고, 겸하여 각 체를 잘 썼는데 특히 예서ㆍ해서에 뛰어났다.  장언원(張彦遠)은 『법서요록(法書要錄)』에서 “종요의 재주와 생각은 통하고 민첩하다.  해서가 세상에 뛰어나 강하고 부드러움을 겸하였고, 점과 획 사이에 기이한 정취가 많이 있다.  그윽하고 심원함이 끝이 없으며, 고아함은 남음이 있어 진ㆍ한나라 이래 한 사람 뿐이라 일컬을 수 있다[鍾繇才思通敏, ???世, ?柔?焉, 點?之?, 多有異趣. 可?幽深無?, 古雅有餘, 秦?以?, 一人而已].”라고 하였다.  

    위관은 서진시기 하동안읍(河東安邑, 지금의 山西省 夏縣의 북쪽) 사람으로 자는 백옥(白玉)이고 위나라 말에 정위(廷尉)를 지냈다.  진 무제 때 사공(司空)을 지냈고, 혜제 때 조정을 보필하다가 가후(賈后)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초서를 잘 썼다.  장지(張芝)에서 나와 부친 위기(衛?)의 법을 참작하여 당시 삭정(索靖)과 더불어 ‘일대이묘(一臺二妙)’라 불렸다.  방종하고 유창함은 삭정보다 나았으나 법도는 그만 같지 못하다는 평이 있다.  서예사에서 영향이 많았으나 작품은 드물게 전한다.  아들 위항(衛恒, ?-291) 또한 서예로 유명하다.  

(3) 王羊(왕양) : 이는 왕헌지(王獻之, 344-386)와 그의 조카 양흔(羊欣, 370-442)을 가리키는 말이다. 

    왕헌지는 동진시기의 서예가로 자는 자경(子敬)이고 왕희지의 일곱째 아들이다.  벼슬은 중서령(中書令)에 이르러 ‘왕대령(王大令)’이라 불렸다.  여러 체를 잘 썼는데, 특히 행초서가 뛰어났다.  장지ㆍ왕희지의 기초에서 진일보하여 당시 고졸한 서품을 개변하여 파체(破體, 新體)로 유명하였다.  기세가 호매하고 자태가 빼어나 왕희지와 함께 ‘이왕(二王)’이라 병칭한다.  작품으로는 <압두환첩(鴨頭丸帖)>과 <낙신부십삼행(洛神賦十三行)>이 있다.  

    양흔은 남조의 서예가로 자는 경원(敬元)이고, 태산남성(泰山南城, 지금의 山東省 費縣의 서남쪽) 사람이다.  벼슬은 중산대부(中散大夫)ㆍ의흥태수(宜興太守)를 지냈고, 왕헌지에게 직접 서예를 배웠다.  양나라 심약(沈約)은 “특히 예서(즉, 해서)에 뛰어나 왕헌지 이후 독보라 하겠다[尤善於?書, 子敬之後, 可以獨步].”라고 하였다.  당시 세속에서는 “왕헌지 작품을 사면 양흔을 얻으니, 바라는 바를 잃지 않는다[買王得羊, 不失所望].”라는 말이 떠돌았다.  또한 그를 폄하하는 사람은 양흔이 왕헌지를 배워 끝내 그의 법도를 넘지 못하였다고도 한다.

(4) 祁祁(기기) : 많은 모양을 말하니, 『시경ㆍ대아ㆍ한혁(詩經ㆍ大雅ㆍ韓奕)』에서 “여러 누이동생들 따라오는데, 구름처럼 아름답고 많기도 해라[諸?從之, 祁祁如雲].”라고 하였다.  

(5) ‘상해본’에서는 ‘于’, ‘사고본’에서는 ‘子’라 하였는데, 후자를 따른다.



【원문】

應之曰, 衣以?(1)體也, 則?褐(2)足蔽, 何事采章(3)之觀. 食以果腹(4)也, 則?藜足?(5), 何取珍羞(6)之美. 垣牆以蔽風雨, 何以有雕粉之?璨(7). 舟車以越山海, 何以有幾組之陸離(8). 詩以言志, 何事律(9)則欲諧. 文以載道, 胡爲辭則欲巧. 蓋凡立一義, 必有精粗(10), 凡營一室, 必有深淺, 此天理之自然, 匪人爲之好事. 


【해석】

이에 응하여 이르기를 “옷으로 몸을 가린즉 해진 털옷도 싸기에 족하니, 무슨 일로 채색 과 문채를 보겠는가?  먹어서 배부른즉 미숫가루와 명아주도 포식하기 족하니, 어찌 진수성찬의 맛남을 취하는가?  담으로 비바람을 가리니, 어찌 조각하고 분을 칠하여 옥빛이 찬란하게 하는가?  배와 수레로 산과 바다를 건너가니, 어찌 그림을 조각하고 장식한 채색이 복잡하고 들쑥날쑥 여러 모양이 있으랴?  시로 뜻을 말하니, 무슨 일로 운율은 조화하려는가?  글로 도를 실으니, 어찌 말은 공교롭게 하려는가?  대개 하나의 뜻을 세우면 반드시 정미함과 거침이 있고, 하나의 집을 경영하는데 반드시 깊고 얕음이 있으니, 이는 천리의 자연이지 사람이 일을 좋아서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주석】

(1) ?(엄) : 이를 옛날에는 ‘엄(掩)’으로 썼는데, 여기에서는 가린다는 뜻으로 사용하였으니, 『회남자ㆍ사논훈(淮南子ㆍ?論訓)』에서 “백성은 몸을 가려 추위를 막을 수 있다[民得以?形御寒].”라고 하였다.

(2) ?褐(수갈) : 이를 또한 ‘단갈(短褐)’이라고도 하는데, 거칠고 누추한 옷으로 고대에는 대부분 빈곤한 사람들이 입었다.  『한서ㆍ공우전(漢書ㆍ貢禹傳)』에서 “신 우는 나이가 늙고 빈궁하여 집에서 만전도 차지 않는다고 헐뜯는다.  처자는 겨와 콩도 넉넉하지 않고, 해진 털옷도 완전하지 않다[臣禹年老貧窮, 家?不?萬?. 妻子?豆不?, ?褐不完].”라고 하였는데, 안사고(顔師古) 주에서는 “‘수’라는 것은 더벅머리 아이가 입은 베가 긴 저고리이다.  ‘갈’은 모포로 만든 옷이다[?者, 謂?竪所著布長?也. 褐, 毛布之衣也].”라고 하였다.  

(3) 采章(채장) : ‘채(采)’는 ‘채(彩)’와 통하니 채색이니, 『상서ㆍ익직(尙書ㆍ益稷)』에서 “다섯 가지 채색과 문채로 오색을 베푼다[以五采彰施于五色].”라고 하였다.

    ‘장(章)’은 문채이니, 『상서ㆍ고요모(尙書ㆍ皐陶謨)』에서 “다섯 가지 복장과 다섯 문채로다[五服五章哉].”라고 하였는데, 공전(孔傳)에서는 “높고 낮은 채색과 문채가 각각 다르다[尊卑采章各異].”라고 하였다.  

(4) 果腹(과복) : 배부르게 먹는 것을 말하니, 이 말은 『장자ㆍ소요유(莊子ㆍ逍遙遊)』에서 나왔으며, 유종원(柳宗元)은 「증왕손문(贈王孫文)」에서 “채워 배부르기에 모자람이여, 교만하고 거만하게 기뻐하네[充?果腹兮, 驕傲歡欣].”라고 하였다.  

(5) ?藜足?(구려족어) : ‘구(?)’는 볶은 쌀과 보리 가루이니, 『상서ㆍ비서(尙書ㆍ費誓)』에서 “이에 볶은 식량을 쌓았다[峙乃?粮].”라고 하였는데, 정현(鄭玄)의 주에서는 “곡식을 찧고 볶는다는 것은 쌀과 보리를 볶아 익히고 또한 이를 찧어 가루로 만드는 것을 일컫는다[搗熬穀也, 謂熬米麥使熟, 又搗之以爲粉也].”라고 하였다.

    ‘려(藜)’는 식물 이름인 명아주로 또한 ‘회관(灰?)’ㆍ‘회채(灰菜)’라고도 하는데, 일년생 풀이다.  연한 잎사귀는 먹을 수 있고, 줄기가 오래된 것은 지팡이로 사용할 수 있다.

    ‘어(?)’는 포식하는 것으로 『후한서ㆍ유분자전(後漢書ㆍ劉盆子傳)』에서 “십여만 사람이 모두 물리도록 실컷 먹었다[十餘萬人, 皆得飽?].”라고 하였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일반적으로 거친 밥과 반찬은 포식할 수 있음을 일컫는 말이다.

(6) 珍羞(진수) : 이를 또한 ‘진수(珍?)’라고도 하는데, 귀중하고 진귀한 식품을 일컫는다.  이백(李白)은 「행로난(行路難)」이란 시에서 “금술통의 맑은 술은 한 말에 만전이고, 옥쟁반의 진수성찬은 값이 만전이네[金樽淸酒斗十千, 玉盤珍羞直萬錢].”라고 하였다.  

(7) 雕粉之?璨(조분지최찬) : ‘조(雕)’는 조각이니, ‘조화(雕花)’ㆍ‘조판(雕版)’과 같다.  또한 채색 그림으로 장식한 것을 가리키기도 하니, 『상서ㆍ오자지가(上書ㆍ五子之歌)』에서 “험준한 글씨를 담에 장식하였다[峻字雕牆].”라고 하였다.

    ‘분(粉)’은 분을 칠하고 장식하는 것을 일컫는다.

    ‘최찬(?璨)’은 또한 ‘최찬(?粲)’이라고도 하니 광휘가 찬란하다는 뜻으로 손작(孫綽)은 「유천태산부(遊天台山賦)」에서 “옥나무 옥빛 찬란하게 구슬을 드리웠네[琪??璨而垂珠].”라고 하였다.

(8) 幾組之陸離(기조지육리) : ‘기(幾)’는 기물에 그림을 조각하고 칠로 장식한 것이니, 『예기ㆍ소의(禮記ㆍ少儀)』에서 “국가가 쓰러지고 깨진즉 수레에 조각하고 칠 장식 못하네[國家靡?, 則車不雕幾].”라고 하였다.

    ‘조(組)’는 실로 짜서 만든 넓은 띠로 고대에는 인장을 지닐 때 옥을 매는 끈으로 사용하였다.  『한서ㆍ경제기(漢書ㆍ景帝紀)』에서 “비단으로 수놓은 붉은 끈 여자의 붉은 것을 해친다[錦?纂組, 害女紅者也].”라고 하였는데, 안사고(顔師古)의 주에서는 “‘조’라는 것은 지금 인끈이 어지러워진 끈 이것이다[組者, 今綬紛?是也].”라고 하였다.  

    따라서 ‘기조(幾組)’는 넓게 기물에 각종 그림을 조각하고 장식한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육리(陸離)’는 채색이 복잡하고 들쑥날쑥 여러 모양이란 뜻이니, 좌사(左思)는 「촉도부(蜀都賦)」에서 “털 달린 무리 뭍을 떠나고, 깃 달린 족속 어지럽게 머무르네[毛群陸離, 羽族紛泊].”라고 하였다.  

    따라서 ‘?褐足蔽’에서 ‘幾組之陸離’까지의 구절은 모두 단지 취하여 형태를 이루어 사람에게 알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서예의 관점을 강구할 수 없다고 반박하는 내용이다.  

(9) 律(율) : 이는 시의 운율을 가리킨다.

(10) ‘상해본’에서는 ‘組’, ‘사고본’에서는 ‘粗’라 하였는데, 후자를 따른다.



【원문】

楊子雲(1)曰斷木爲?, 梡革爲鞠, 皆有法焉, 而況書乎. 昔唐太宗屈帝王之尊, 親定晉史, 御撰之文, 僅羲之傳論(2), 此亦藝林之美談也. 況玆書譜(3), 講自前修(4), 吾?不爲時用, 其他非所宜言. 飽食終日, 無所用心, 因搜書論, 略爲引伸. ?蒙子臨池(5), 或爲識途之助, 若告達識(6), 則吾豈敢. 


【해석】

양웅이 이르기를 “나무를 잘라 바둑판을 만들고, 가죽을 도마질하여 공을 만드는 데에 모두 법이 있다.”라고 하였으니, 하물며 서예이랴?  옛날 당 태종은 제왕의 존엄함을 굽히고 친히『진사』를 정하여 찬문을 쓴 것은 겨우 『왕희지전론』뿐이나 이 또한 예술계의 미담이다.  하물며 이 『서보』는 이전 시대의 뛰어난 서예가들로부터 강구하였으나 나는 이미 때에 쓰임이 되지 못하였으니, 기타는 마땅히 말할 바가 아니다.  종일 배불리 먹고 마음 쓰이는 바도 없어서 서론을 찾아 대략 인신하였다.  모르는 사람이 서예를 배우려면 혹 길을 아는 데에 도움이 되나 만약 통하여 아는 사람인즉 내 어찌 감히 말하랴?


 【주석】

(1) 楊子雲(양자운) : 양웅(楊雄, 一作 揚雄, 기원전 53-18)은 자가 자운(子雲)이고, 서한시기 문학가ㆍ철학가ㆍ언어학자였으며, 촉군성도(蜀郡成都, 지금의 四川省 成都) 사람이다.  젊은 나이에 「장양부(長楊賦)」ㆍ「감천부(甘泉賦)」를 지었고, 철학 저서로는 『법언(法言)』ㆍ『태현(太玄)』이 있으며, 언어문자학 저서로는 『방언(方言)』ㆍ『훈찬편(訓纂編)』 등이 있다.  청나라 엄가균(嚴可均)이 『양자운집(楊子雲集)』을 다시 편집하였다. 

(2) 羲之傳論(희지전론) : 왕희지(王羲之, 321-379, 一作 303-361)는 동진시기 서예가로 자는 일소(逸少)이고 낭야임기(瑯?臨沂, 지금의 山東省) 사람이다.  회계산음(會稽山陰, 지금의 浙江省 紹興)에 살았고, 벼슬은 우장군(右將軍)ㆍ회계내사(會稽內史)를 지냈기 때문에 ‘왕우군(王右軍)’이라 불렸다.  어려서 위부인(衛夫人)에게 글씨를 배운 뒤에 널리 여러 장점을 취하여 정미하게 체세를 연구하였다.  초서는 장지(張芝)를 스승으로 삼았고, 해서는 종요(鍾繇)를 득력하였다.  고법을 더하고 덜어 한ㆍ위나라의 질박한 서풍을 일변하여 연미하고 유창하며 편한 금체(金體)를 창조하여 서성(書聖)이란 칭호가 있다.  작품으로는 <악의론(樂毅論)>ㆍ<난정서(蘭亭序)>ㆍ<십칠첩(十七帖)>ㆍ<쾌설시청첩(快雪時晴帖)>ㆍ<봉귤첩(奉橘帖)>ㆍ<초월첩(初月帖)>ㆍ<황정경(黃庭經)> 등이 있다.  『진서(晉書)』에 전(傳)이 있고, 당 태종 이세민(李世民)은 친히 『왕희지전론(王羲之傳論)』을 지어 그의 서예를 매우 추대하고 숭상하였다.  

(3) 書譜(서보) : ‘상해본’에서는 ‘諧’, ‘사고본’ㆍ‘목이본’에서는 ‘譜’라 하였는데, 후자를 따른다.  

    <서보(書譜)>는 손과정(孫過庭)이 짓고 쓴 것으로 자칭 6편을 지어서 상하 두 권으로 나누었다고 하였다.  지금 세상에 전하는 묵적은 단지 1편의  서문일 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전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서보(書譜)는 『광예주쌍즙』을 가리킨다.

(4) 前修(전수) : 이는 이전 시대의 현인이나 명인을 가리키는 것으로 『초사ㆍ이소(楚辭ㆍ離騷)』에서 “내가 본받는 것은 이전 시대의 현인이지, 세속에서 따르는 바가 아니네[?吾法夫前修兮, 非世俗之所服].”라고 하였다.  

(5) ?蒙子臨池(몽자임지) : ‘몽(?蒙)은 ‘몽(蒙)’과 같으니 아직 장가가지 않은 남자 아이를 가리키며, 어려서 아는 것이 없음을 일컫는 말이다.  

    ‘임지(臨池)’는 동한시기 장지(張芝)가 서예를 근면하게 배워 “연못에 임하여 글씨를 배울 때 연못물을 모두 검게 물들였다[臨池學書, 池水盡墨].”(見, 衛恒, 『四體書勢』)라고 한 데에서 나왔다.  그러므로 후인들은 서예를 배우는 것을 ‘임지’라 하였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왕희지 또한 묵지(墨池)라는 옛날 유적지가 임천(臨川, 지금의 江蘇省에 속함)의 동쪽에 있다.  

(6) 達識(달식) : 이는 통달하여 안다는 뜻이니, 『옥편(玉篇)』에서 “‘달’은 통하는 것이다[達, 通也].”라고 하였으며, 『인물지(人物志)』에서는 “[밝게 기미를 볼 수 있는 것을 통하여 아는 선비라 일컫는다明能見機, 謂之達識之士].”라고 하였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서예에 통달한 학자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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