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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 분향단의 향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소합향과 나감향과 풍자향의 향품을 가져다가 그 향품을 유향에 섞되 각기 같은 분량으로 하고 그것으로 향을 만들되 향 만드는 법대로 만들고 그것에 소금을 쳐서 성결하게 하고 그 향 얼마를 곱게 찧어 내가 너와 만날 회막 안 증거궤 앞에 두라 이 향은 너희에게 지극히 거룩하니라 네가 여호와를 위하여 만들 향은 거룩한 것이니 너희를 위하여는 그 방법대로 만들지 말라 냄새를 맡으려고 이같은 것을 만드는 모든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출30:34~38).”
가. 관유는 우리에게 오시는 하나님을 상징함
관유에 이어서 향이 나왔다. 관유는 향을 기름에 섞어서 바르기 위한 것이다. 제사장 옷에도 바르고 성소 안의 모든 기물에도 바르는데, 그 목적은 거룩하게 성별하기 위해서이다. 이것은 인격의 네 가지 면인데 이 네 가지 면을 종합하면 죽으심과 부활이다.
몰약과 육계, 창포와 계피는 그리스도의 성질이며, 이는 우리에게 오시는 하나님을 상징한다. 우리에게는 기름이 발라져야 한다. 여기서 기름부음이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기름 붓는다는 것과 기름 바른다는 것은 같은 의미이다. 결국 우리는 그리스도로 기름 부어져야 한다.
요한일서에 보면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요일2:27)”라고 하였다.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라는 말은 그리스도로 발려졌다는 의미이다. 그리스도로 발려졌다는 의미는 추상적이거나 막연한 말이 아니다. 그의 죽으심과 부활로 발려져 있다는 뜻이다. 갈라디아서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3:27).”고 하였다. 이 말도 역시 그리스도로 발려졌다는 뜻이다.
왜 기름에 섞었는가? 기름은 성령을 상징한다. 향품을 기름에 섞어야 향이 날아가지 않고 붙어 있을 수 있다. 향품의 가루만 발라 놓으면 다 날아가 버린다. 기름에 섞어 놓으면 그것이 묻어 있어서 향이 날아가지 않는다. 이것이 기름 부음인데 여기서 그리스도라는 말이 나왔다.
히브리어로는 메시야, 희랍어로는 그리스도라고 한다. 예수를 그리스도라 하는 말은 ‘기름부음 받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예수는 무슨 기름 부음을 받았는가? 죽으심과 부활로 기름 부음 받았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시기 위한 방법이다. 그는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서 우리와 하나 되신다.
죽으심과 부활은 단지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거나 우리를 구속해주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하나 되기 위한 것이다. 그의 죽으심 안에서 우리는 죽었고 그의 사심 안에서 우리는 살았다. 이것은 단순한 혜택이 아니라 한 운명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죽으심이 아니면 우리는 그와 연합할 자리가 없다. 그가 물 위를 걸으신 자리에서 우리가 그와 연합되겠는가? 죽은 나사로를 살린 자리에서 연합이 되겠는가?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 그 자리에서 연합이 되겠는가? 그것은 영원히 불가능하다. 우리는 그의 죽으심에서만 그와 연합될 수 있다. 그의 죽으심은 우리 모든 사람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죽으심 안에서는 그와 우리가 차별이 없다. 그 이전에는 그분과 우리 사이에 많은 차별이 있었다. 그분은 성령으로 잉태되어 나셨고,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셨으며, 놀라운 능력으로 사람을 살리셨고,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셨다. 그 자리에서 그분을 알면 우리는 그분을 추앙할 수밖에 없다. 그분을 경배하고 예배할 수밖에 없다. 이런 것으로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룰 수 없다.
우리는 그분과 연합되어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분과 우리가 하나 되려면 그분의 죽으심 안에서 하나가 되지,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그분과 하나 될 수 없다. 세상에는 높은 사람 낮은 사람, 가진 사람 못 가진 사람의 차별이 있다. 이 모든 사람이 어디서 연합되는가? 죽음에서 연합된다.
죽음 안에서는 높은 자도 없고 낮은 자도 없으며, 가진 자도 없고 못 가진 자도 없으며, 선한 사람도 없고 악한 사람도 없다. 거기서는 모두 다 하나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우리와 연합하기 위한 것이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롬6:3).”고 하였다.
그의 죽으심은 우리와 연합하기 위하여 오시는 하나님을 상징한다. 관유는 우리에게 발려지기 위해 오신 그리스도이다. 죽으심을 통해서 우리에게 발려지고, 다시 사심을 통해서 우리에게 발려진다. 죽으심이 있어야 다시 사심이 있지, 죽으심이 없으면 다시 사심이 없다. 죽으심과 사심은 그분의 인격 안에 우리 모두를 포함할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기름을 바르기 위한 것이다.
구약시대에는 왕과 제사장만 기름부음을 받았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적인 기름부음이 아니고 제도적인 기름부음이었다. 그런데 신약에 오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의 죽으심과 합하고 그의 부활하심과 합한 모든 사람은 기름부음 받은 자가 된다. 그래서 “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벧전2:9)” 라고 했다.
제도 안에서 우리는 왕도 될 수 없고 제사장도 될 수 없다. 왕이 되려면 다윗의 자손이라야 하고 제사장이 되려면 아론의 후손이라야 한다. 그 외에는 아무도 왕이나 제사장이 될 수 없다. 그런데 예수 안에서는 기름부음 받은 사람이 제사장이다.
예수로 기름부음 받은 사람, 죽음과 부활로 옷 입혀진 사람, 이 사람이 바로 기름부음 받은 사람이다.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요일2:27)” 관유는 우리에게 오시는 하나님이다.
나. 향은 하나님의 행정을 움직임
그런데 향은 반대로 우리가 그에게로 가는 것을 말한다. 향료를 불에 태워서 나는 향기를 하나님께 드리는데 하나님께 드리는 이 향은 하나님의 행정을 움직이기 위한 것이다. 관유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오시는 하나님을 상징하고, 향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로 가는 것을 상징한다. 이 향이 없으면, 이 향이 올라가지 않으면 하나님의 보좌가 움직일 수 없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왕권이 이 땅 위에 행사될 수 없다는 뜻이다.
국민이 대통령을 지지하지 않으면 대통령이 권세를 행사할 수 없다. 이번에 대통령이 행정 수도를 옮기겠다고 했는데, 이에 대해 헌법재판소에서 국민투표로 결정해야 할 사항이라고 했다. 국민 투표에 자신이 있으면 하겠지만 자신이 없으면 물러서야 한다. 국민이 지지 해야 대통령의 말이 효력이 있지, 국민이 지지하지 않으면 효력을 발생할 수 없다.
하나님도 마찬가지다. 그 백성에게서 올라오는 향이 없으면, 하나님의 행정을 움직일 수가 없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므로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만약 전능하신 하나님이 무엇이든지 하신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사탄을 멸하시고 자기 좋아하는 사람들만 모아서 나라를 세우시면 된다.
그런데 왜 그렇게 못하시는가? 자기 백성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가 되려면 백성이 있어야 한다. 백성이 없으면 왕이 될 수 없다. 향은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기 위한 것이다. 그분으로 하여금 권리를 행사하실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 향은 기도를 의미한다.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된다는 말은 나의 소원이 상달된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권리를 행사하실 수 있도록 내가 태워지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태워져야 그분이 움직이실 수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께로 가는 것을 의미한다.
제단에서 죽임을 당한 제물이 피를 흘리면 그 피를 가지고 지성소로 들어간다. 이것은 일종의 기도를 의미한다. 내가 죽어서 그 피가 들어간 것이다. 그리고 내 몸은 불살라져서 향기로 하나님께 흠향된다. 그 향기가 흠향되어질 때 제단의 불을 담아서 향단의 불을 피우게 되어 있다.
향단의 불은 기도만 열심히 하거나 정성스럽게만 하면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제단에서 가져온 불이라야 그것을 태울 수 있다. 반드시 제단의 불로 태워야 한다. 제단의 불은 무엇인가? 내가 탄 불이다. 내가 제물이 된 불로 향을 태워야 한다. 제단의 불이 아닌 다른 불로 향을 사르면 안 된다.
민수기 16장에는 제단의 불이 아닌 다른 불로 드리다가 250명이 한꺼번에 죽는 사건이 나온다. 다른 불로 향을 드렸기 때문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제단의 불이 아닌 다른 불로 열심히 기도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것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모른다. 세상이 좋아져서 죽지 않는 것이지, 구약 시대였으면 다 죽었을 것이다. 구약 시대의 하나님 같으면 요즘 기도하는 사람들은 기도하다가 다 죽고 말 것이다. 다른 불로 열을 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의 놋 향로를 녹여서 놋 제단을 만들고 이스라엘 자손 대대로 기념하라고 했다. 다른 불을 드리는 자는 이렇게 심판을 받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놋 제단을 만들었다. 그러므로 이것은 중요한 문제이다.
1) 제단의 목표는 분향을 위한 것
제단의 목표는 분향을 위한 것이다. 제물은 왜 제단에서 태워져야 했는가? 죽기 위해 태워진다. 제물이 불에 타서 없어지고 향기가 나면 하나님이 흠향하신다. 제단에서 흠향된 향기는 하나님의 만족을 위한 것이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만족하셨다고 한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의 만족이 될 뿐이지 하나님의 움직이심까지는 되지 못한다. 십자가의 죽음 안에서 나 자신이 발견되어 내가 하나님 앞에 죽은 자로 알아지면 하나님은 ‘그래, 네 죄가 없어졌다.’ 하시며 만족하신다.
우리의 죄는 무엇인가? 우리가 산 줄로 여기는 것이 죄이다. 우리가 죽은 줄로 여기면 하나님의 마음이 다 녹아진다. 어떤 사람에 대해 노발대발 소리를 지르다가도 그 사람이 내 앞에 와서 ‘내가 정말 잘못했습니다.’ 라고 하면 분이 풀릴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분을 풀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죽음밖에 없다. 우리의 죽음이 하나님의 분을 풀리게 하고, 하나님을 만족케 한다.
그러나 만족케 하는 것만으로는 하나님의 행정이 유발될 수 없다. 그래서 향이 필요하다. 우리의 죽음뿐만 아니라 죽음 안에서 하나님께 드려지는 향이 있어야 한다. 그때 비로소 하나님의 행정이 움직이게 된다.
제단에서 나오는 것도 향이고, 향단에서 나오는 것도 향이다. 제단의 향은 제물이 태워짐으로 나오는 향이고, 향단의 향은 향이 불태워져서 나오는 향이다. 향단의 향은 정제된 향이다. 향은 그냥 향이 되는 것이 아니라 정제되어야 한다. 향기로운 꽃이나 식물을 따서 정제하고 정제하여 고도로 정제해야 향수가 된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께 내 자신이 기도가 되려면 내가 정제되어야 한다. 거친 상태에서는 제단에서 태워져서 일차적으로 정제되어야 하고 이차적으로 향이 된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문제는 내 인생이 정제되어야 하는 문제이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생각이 한국 사람에게 유독 강하다. 교회에서 기도할 때 지성으로 기도하면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성경에도 그런 예가 있다. 어떤 과부가 와서 조르면 불의한 법관이라도 어쩔 수 없이 그 말을 들어준다고 했다. 교회에서 이것을 계속 강조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애걸복걸하고 하나님께 정성을 드리면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러나 정성만 드리면 된다는 생각은 이방인의 생각이고, 아주 위험한 생각이다. 앞산 공원에 가보면 바위 밑에 촛불을 켜 놓아서 바위가 시커멓게 그을려 있다. 남들은 공원에서 그런 일을 한다고 찌푸리지만 그 사람들은 정성을 드리기 위해서 그렇게 하고 있다. 자기의 정성을 신이 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방인의 생각이다.
엘리야와 바알의 선지자들의 전쟁(왕상10:1~40참)에서 바알의 선지자들은 큰 소리로 부르고 그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 몸을 상하게 하면서 바알을 불렀다고 한다. 이것이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이방인의 사상이다. 그런데 엘리야는 무릎 사이에 머리를 두고 있었다. 그런데 불이 내려왔다고 한다. 이것은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사상이 아니다. 우리는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한국 사람에게 특별히 그런 경향이 많은 것은 어린아이가 떼를 쓰면 부모가 들어주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그런 생각이 박혀 있다. 하나님께도 조르면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서양 사람들은 떼를 써도 들어주지 않는다. 우유 먹을 시간이 아닌데도 울면 그냥 두라고 한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게 울면 그냥 두라고 한다. 그래서 서양 사람들은 떼쓰는 기도는 하지 않는 것 같다.
2) 분향단의 기도는 하나님의 행정을 움직임
향단의 향은 그런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행정을 움직이기 위한 기도다. 그러므로 향단의 기도는 나를 위한 기도가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을 위한 기도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6:9~10).” 이 기도는 순전히 하나님과 그 나라를 위한 기도이지 나를 위한 기도가 아니다. 온전히 그분을 위한 것이고 그 나라를 위한 것이다. 그 기도가 향단의 기도다.
제자들에게 이 기도를 가르쳐 주셨지만 제자들은 이 기도를 하지 않았다. 그 때 제자들의 입장은 하나님을 위하는 입장이 아니라, 자기들의 인생을 위해서 하나님이 필요했던 사람들이었다.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눅11:2)” 라고 하였으나 막상 기도를 가르쳐 주니 그 기도를 전혀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마26:38).” 하며 잠시 동안만 기도하자고 사정을 했지만 그들은 자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를 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오늘날 모든 종교가 기도를 갖고 있다. 불교도 그렇고 기독교도 그렇다. 그런데 그 기도의 목적과 내용은 전부 자기를 위한 것이다. 향단에서 드리는 기도가 아니라 울타리 밖에서 하는 기도이다. 성막은 울타리에 싸여져 있다. 울타리 밖에서 하는 기도가 이방인의 기도다. 이방인은 울타리 밖에 있다. 거기서 자기의 소원을 간구하는 것이다.
성소 안에 들어와서 하는 기도는 자기의 소원을 위한 기도가 아니다. 하나님의 소원을 위한 기도이다. 즉 하나님의 힘을 도와주고 그분의 행정과 권위가 행사되게 하기 위해서 드리는 기도이다. 이것은 자기 헌신이다. 이 기도가 하나님의 행정을 움직인다.
요한계시록 8장 5절에는 “천사가 향로를 가지고 단 위의 불을 담아다가 땅에 쏟으매 뇌성과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나더라.”고 하였다. 향로를 가지고 제단의 불을 담아다가 땅에 쏟으매 뇌성과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나더라 하였는데 이는 하나님의 심판이 시행되었다는 뜻이다. 또 8장 6절에는 “일곱 나팔 가진 일곱 천사가 나팔 불기를 예비하더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보좌, 하나님의 행정이 움직이셨다는 것이다.
왜 세상을 심판하지 못하는가? 이 기도가 없어서이다. 이 기도가 없으면 하나님 혼자서는 심판을 하실 수가 없다. 백성이 왕에게 힘을 주어야 왕이 권력을 행사할 수 있지 백성이 힘을 주지 않으면 왕은 아무 권력이 없다. 월남이 망한 후에 전 월남 대통령이었던 티우는 미국의 모 대학에 초청되어 강연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대학 학생들이 거부를 해서 강연을 하지 못했다. 패전한 나라의 대통령은 강연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백성이 없는 왕은 왕이 아니다. 미국 대통령이 권세가 있는 것은 미국의 국력 때문이다. 대통령 개인의 힘이 아니라 그 나라의 국력이 어떤 행정을 가능하게 한다. 이것은 결코 그 사람 개인의 권세가 아니다. 하나님 나라도 마찬가지이다. 백성의 어떠함이 하나님의 행정을 움직이는 것이다.
3) 성육신은 분향을 위한 것
성육신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 분향을 위한 것이다. 요한복음의 순서를 보면 1장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그리스도가 나온다. 2장에는 갈릴리 가나의 잔치집이 나오고 신랑을 기쁘게 하는 분이 나오는데 그분이 잔치집의 신랑이다. 3장에는 거듭남에 대해 나오는데 이것은 생명이 되신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6장에는 벳세다 광야에서 생명의 떡이 나오고, 8장에는 등대가 되신 분이 나온다. 나면서부터 소경이었던 자의 눈을 뜨게 하시면서 “나는 세상의 빛이니(요8:12)” 하신 사건이 나온다. 그리고 14장 15장 16장은 그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예언이 나오고, 마지막 17장에 가면 기도가 나온다. 17장의 기도는 이방인들이 울타리 바깥에서 하는 기도가 아니고 분향단의 기도다.
이 기도는 제자들과 세상을 위해서 하신 기도이고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신 기도이다. 예수는 왜 성육신 하셨는가? 왜 세상에 오셨는가? 그분은 분향단의 기도를 위해 오신 것이다. 그는 왜 십자가에 죽으셨던가? 역시 분향단의 기도를 위해서 죽으셨다.
우리 인생의 최종 목적지는 어디인가? 바로 분향단의 기도다. 나는 왜 태어났는가? 나는 왜 예수를 믿게 되었는가? 나는 왜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는가? 이 모든 것의 결국은 분향단의 향이 되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돕기 위해 태어난 것이다.
다. 세 가지 향품
향단에서 드리는 향은 소합향과 나감향과 풍자향이다.
1) 소합향
소합향(Nataph)이라는 말은 ‘물방울’에서 유래된 말이다. 나무의 진이 뚝뚝 떨어질 때 보면 물방울처럼 떨어진다. 그래서 물방울처럼 떨어지는, 흐르는 수지라는 뜻이다. 이것은 순수하게 정제된 몰약 종류 중의 하나이다.
이것은 십자가에서 흘러내린 그분의 진액을 상징한다. 죽음을 통해서 흘러나오는 진액이므로 그리스도의 죽음을 상징한다. 몰약이 죽음을 상징하듯이 소합향도 역시 죽음을 상징한다. 향은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것이다. 죽음 없이는 하나님께로 갈 수 없다. 죽음을 피해서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께 가려는 것은 모두 사술이고 잔꾀이다.
하나님은 그런 사술을 용납하지 않으신다. 그런데도 종교 안에는 죽음 없이 하나님께로 가려는 방법들이 너무나 많다. 어떤 교리를 믿거나, 특정 제도 안에 있거나, 선한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께로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아주 얄팍한 생각이고 이방인의 생각이며 사술에 해당한다. 죽음이 없이는 절대로 하나님께로 갈 수 없다.
요한복음 16장 16절에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라고 하셨다. 이 말은 자기가 곧 죽을 거라는 뜻이다.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 하나님께로 간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하나님께로 가는 것이다. 하나님께로 간다는 말은 올라간다는 말이다. 분향단으로 가는 것은 곧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다. 이것은 하나님과 하나 되는 것을 말한다.
인간의 눈으로 볼 때는 죽음이고, 없어지는 것인데 그것은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즉 하나님 안으로 감추어지는 것이다. ‘나는 죽고 그리스도만’이라는 말은 나는 없어지고 그리스도 안으로 감추어졌다는 뜻이다. 그래서 내가 살아도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2:20).” 하였다. 나는 감추어졌으므로 그리스도만 산 것이다.
나는 옷을 입고 있다. 내 몸은 옷 속에 감추어져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나는 죽고 그리스도만’이라는 말은 내가 그분 안에서 없어져 버리고 그분만 남았다는 뜻이다. 그분만 남았으므로 내가 살아도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다.
우리는 이 말을 공간적으로 생각하기가 쉽다. 내 안에 주님이 계신다는 말은 공간적인 개념이 아니라 인격적인 개념이다. 내가 하나님 안으로 들어간다는 말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이라는 공간에 ‘나’라는 육체가 들어간다는 뜻이 아니라, 인격적인 연합, 하나 됨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과 하나 된다는 뜻이다.
예수님이 하나님께로 올라간다고 하신 것은 하나님 안으로 감추어진다는 뜻이다. 그가 하나님께로 올라가신 후에 우리는 그를 볼 수 없게 되었다. 세상에 계실 때는 보았지만 세상을 떠나 하나님께로 가신 후에는 우리는 예수를 볼 수 없다. 그것은 그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으로 감추어졌기 때문이다.
성육신은 내려오는 것이다. 인생과 하나 되어 내려오신 것이다. 이것은 인생 안에 감추어진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사람 속에 감추어졌으니까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사람만 보인다. 이것이 성육신이다. 조각목이 금속에 감추어졌다. 조각목 판자는 금으로 쌓여 있으니까 겉에는 금만 보인다. 조각목은 감추어지고 금만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조각목 법궤, 조각목 향단이라고 하지 않고 금 법궤, 금 향단이라고 한다. 자기가 살고 있지만 조각목으로 살지 않고 금으로 살고 있다. 그의 삶은 조각목의 삶이 아니라 금으로서의 삶이다. 이것이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2:20).”는 말이다.
금의 성질은 무르기 때문에 휘어지거나 넘어진다. 그런데 그 속에 조각목이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서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막에 있는 마흔 여덟 개의 판자는 모두 조각목이 서 있는 것이다. 내가 서 있어도 내가 서 있는 것이 아니고, 금이 서 있는 것이다. 내가 살아도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다.
부활이라는 말은 그 영으로 다시 왔다는 의미이다. 성육신으로 내려오시고 죽으시고 승천하셨다가 다시 강림하신다. 오시고 가시고 오시고 가신다. 이렇게 오시고 가시는 이치 안에 그분의 묘한 조화가 있고 그분과 우리의 관계가 있다. 나를 그분 안에 포함시켜서 오시고 가시고를 계속 하다 보면, 나는 그 안에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도 갔다가 세상에도 다시 내려왔다가 한다.
법궤 안에 감추어진 조각목은 법궤가 이동할 때 같이 이동한다. 법궤가 서면 조각목도 서고, 법궤가 앉으면 조각목도 앉는다. 법궤와 조각목은 하나이다. 우리가 그분 안에 감추어지는 것은 이렇게 비밀한 일이다. 이 감추어진 비밀이 그리스도인의 비밀이다. 나는 그분 안에 감추어져서 그분으로 사는 것이다. 이것이 소합향의 의미이다.
2) 나감향
두 번째는 나감향이다. 이것은 홍해의 습지에 사는 작은 동물의 가죽이라고 한다. 홍해는 타락한 세상을 의미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를 건넜다. 이것은 타락한 세상을 건너왔다는 의미이다. 늪은 한번 빠지면 나오지 못하기 때문에 사망을 의미한다. 타락을 상징하는 홍해의 늪에서 자라난 작은 동물이다.
이 작은 동물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바로 삼십 삼년 동안 세상에서 사신 예수를 상징한다. 예수님이 오신 당시의 상황은 사망의 늪이었다. 사방에서 우겨 쌈을 당해서 어느 누구도 옹호할 사람이 없었던 상황이었다. 마지막 십자가에 가셨을 때 아무도 그와 함께 할 사람이 없었다. 그는 세상과 종교로부터 완전하게 버림받았다. 대제사장과 빌라도에게 버림받았고, 마지막에는 하나님에게까지 버림받았다.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라고 하셨을 때는 하나님도 그를 버리셨다. 그분은 삼십 삼년 동안 세상에서 살았으나 실은 십자가의 삶을 사셨다. 즉 살다가 죽으신 것이 아니라 그분은 항상 죽음을 살아내고 계셨던 것이다. 이분은 어린양으로, 송아지로 표현되기도 하고, 비둘기로, 고운가루로 표현되기도 한다. 여기서는 이름 없는 작은 동물로 표현된다.
나감향은 이 작은 동물의 가죽으로 만들어진다. 모든 인류를 위한 대속제물이 되려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과 겉모습이 같아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하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다. 우리를 대신하기 위해서는 겉모습이 우리와 같아야 한다. 그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이다. 우리와 겉모습이 같은 분이 우리의 대속물이 되신 것이다. 나감향은 우리를 대속하기 위해 제물이 되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나감향의 향기는 태워야만 나는 향기다. 태우지 않으면 향이 나지 않는다. 보통의 향품들은 태우지 않아도 냄새가 나는데 이것은 태우지 않으면 냄새가 나지 않는다. 예수님이 그런 분이다. 그가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전에는 그 향기의 효력이 발생하지 않았고 아무도 그 향기를 맡지 못했다. 그런데 그가 십자가에서 불탈 때 비로소 그 향기를 맡게 되었다. 이것이 우리의 구속이 되었다.
초는 타야 빛이 난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인생이 하나님을 위해 불타기 전에는 향기가 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이 나감향은 불이 타야 향기가 난다. 인생도 이 나감향처럼 하나님을 위해서 불이 타야 향기가 나지, 타지 않으면 향기가 나지 않는다. 자기만을 위해 살면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인생은 하나님을 위해서 불살라질 때만 향기가 난다.
돈은 올바른 곳에 잘 사용할 때 빛이 난다. 아무리 많은 돈이라도 쓰지 않으면 빛이 나지 않는다. 창고에 넣어두면 돈은 아무런 능력도 발휘하지 못한다. 창고에서 나와서 쓰여야 능력이 생긴다. 돈이 잘 사용되면 죽을 위기에 처한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큰 복음을 전하는데 쓰이기도 한다. 엄청난 능력이 된다. 돈이지만 어떤 경우에는 돈 이상의 능력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아무리 많은 돈이라도 재어놓고 있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돈은 올바른데 잘 써야 빛이 난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인생을 불태우는 사람은 많다. 여기저기에 불태우느라 분주한 삶을 살아간다. 그런데 어디에 불태우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을 움직일 수도 있고 마귀를 움직일 수도 있다. 사탄도 사실은 사람이 불태우지 않으면 아무 능력도 발휘하지 못한다.
귀신 이야기를 더러 하는데, 귀신이 무섭다는 사람도 있고 직접 보았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귀신도 사람이 도와주어야 귀신노릇을 하지 그렇지 않으면 귀신 노릇을 못한다. 점쟁이가 대를 잡고 떠는데, 사람이 귀신을 도와주기 때문에 떠는 것이다. 내가 귀신을 전혀 도와주지 않으면 아무리 대를 잡아도 떨지 않는다. 아무에게나 가서 귀신이 마음대로 해 버리면 우리는 하루도 편안하게 살지 못할 것이다.
심지가 굳은 사람에게는 귀신이 올 수 없다. 예전에 시골에 가면 도깨비 만났다는 사람들이 있다. 대부분 보면 술에 취해서, 구석진 곳에서 도깨비를 만나서 씨름을 하고 죽을 뻔 했다고 한다. 사탄도 사람이 도와주어야 자기 능력을 발휘하지, 사람이 도와주지 않으면 아무 능력도 발휘할 수 없다.
하나님도 마찬가지다. 그 백성이 없으면 그분의 능력을 나타낼 수가 없다. 이름 없는 작은 동물의 가죽이지만 그것이 불태워지면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는 향이 된다. 우리가 이름 없는 작은 동물의 가죽일지라도 하나님을 위해서 불태워지면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게 된다.
3) 풍자향
풍자향이라는 말의 어근은 ‘가장 좋은 부분’이라는 뜻이고, 그 말의 어미는 ‘눈물을 흘린다’는 뜻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가장 좋은 부분이 무엇인가? 번제물의 가장 좋은 부분인 간이나 콩팥이나 기름을 하나님께 드린다. 발목 같은 부분은 하나님께 드릴 수 없다. 눈물을 흘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세상을 위해서, 죄인인 우리를 위해서 흘리신 눈물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풍자향의 냄새는 지독히 강하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을 의미한다. 우리 앞에 오는 고난과 죽음은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다. 만일 유쾌한 일이라면 뛰어난 자들이 먼저 가져갈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돌아올 몫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향은 워낙 불쾌하기 때문에 세상이 다 버리고 갔다. 그래서 우리에게까지 온 것이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올라가신다는 것을 알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세상은 그것을 예수님에게 주었겠는가? 주지 않았을 것이다. 대제사장이 먼저 가지려 했을 것이고, 빌라도가 차지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볼 때 너무나 불쾌하기 때문에 버렸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차지가 된 것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은 차지할 사람이 따로 있다. 만일 이것이 참 유쾌한 것이라면 서로 차지하려고 경쟁이 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돌아올 몫이 없다. 다 불쾌하다고 버렸기 때문에 우리는 값없이 받게 되었다. 고난과 죽으심은 결코 유쾌한 것이 아니다.
풍자향은 다른 향을 강화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즉 소합향과 나감향이 탈 때 그 향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소합향은 죽음을 상징하고, 나감향은 대속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풍자향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대속을 강화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풍자향은 향기를 유지시키는 역할을 한다. 향기는 날아가는 성질이 있어서 향수뚜껑을 조금만 열어 놓아도 다 날아간다. 잘 막아 놓아도 오래 되면 다 날아가 버린다. 좋은 향일수록 가벼워서 더 빨리 증발한다. 그런데 풍자향은 향이 빨리 날아가지 않도록 유지시켜준다. 또 한 가지는 해충을 퇴치하는 방충제 역할을 한다. 특별히 파충류를 제거시키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유쾌한 것이 아니지만 긍정적인 것은 더욱 긍정적으로, 부정적인 것은 더욱 부정적으로 되게 해서 퇴치해 버린다. 악한 냄새가 더러운 냄새에 합해지면 그 더러운 냄새를 더욱 짙게 만들고, 향기롭고 좋은 냄새에 합해지면 그것을 더욱 향기롭게 만든다.
십자가의 죽으심은 인생의 긍정적인 면을 최고로 살려줌과 동시에, 부정적인 면을 바로 퇴치시키는 것이다. 대적을 물리치고 인생을 찾아주신 그리스도, 그 분이 내 인생 속에 들어오셔서 개입하심으로 나를 사로잡고 있던 사단을 퇴치하신 것이다. 풍자향은 해충을 퇴치하는 역할을 한다.
내 인생 밑바닥에서 보일 듯 말듯 하던 것, 다 없어져 버린 그것을 끄집어내어 살려주셨다. 하나님이 지으신 것, 흙으로 지으시고 생기를 불어 넣으신 것, 옛날이야기 같고 우리와 전혀 상관이 없는 이야기였던, 내 속에 있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는 그것을 꺼내어 살려주셨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기이하게도 그것을 살려내셨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1:26).” 하신 것, 그분이 하나님의 형상이고 그분이 하나님의 모양이라면, 나도 그분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어졌구나, 나도 인생이구나 하는 그것을 살려내셨다.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는 이것을 알 수 없었다. 단지 인생은 죄인이라는 것밖에 알지 못했다. 예수를 믿어도 죄인이고 믿지 않아도 죄인이다. 예수를 믿으면 용서받은 죄인이다. 용서를 받은 죄인도 매일 용서를 받아야 한다. 죄가 없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죽을 때까지 계속 용서를 받고 살아야 한다. 이것이 전통적으로 믿어 오던 사람들의 신앙이다.
‘우리는 죄인이다. 우리는 원죄를 타고 났기 때문에 나면서부터 죄인이다. 비록 내가 구원을 받았다 해도 나는 죄인이다. 구원받은 죄인이다’ 라고 생각한다. 천당에 가기 전까지 이 죄는 없어지지 않는다. 아무리 해도 죄가 남아 있고, 또 죄가 남아 있고, 죄의 뿌리가 계속 남아 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롬7:19).” 했고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롬7:21).” 했다.
한편으로는 내가 하나님의 법을 섬기고 사랑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고 있다. 그런 자기 자신이 발견될 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 하는 탄식이 저절로 나오게 된다. 여기에 근거해서 예수를 아는 사람들은 구원을 받았지만 구원받은 죄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항상 죄인의 입장에 있어야 하고, 엎드려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죄인으로 있게 하려고 오신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서 대적을 물리치고 송사하는 뱀을 물리치려고 오신 분이다. ‘너는 지금도 죄를 짓고 있지 않느냐? 너 밑바탕에는 죄가 깔려 있지 않느냐?’ 하며 계속 송사하는 사탄을 물리치고, ‘너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고 그의 모양으로 지어졌다. 하나님이 너에게 전권을 주려고 너를 지었다.’ 이것을 일깨워 주는 향이 풍자향이다.
그분 안에서 잃어버렸던 것을 찾고 보니, 그것이 처음에는 너무 작은 것이라 여겼는데, 살아내면 살아낼수록 점점 더 커지고 더 완전해짐을 알 수 있다. 이것이 긍정적인 것을 강화하고 부정적인 것을 퇴치하는 역할을 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의 죽으심이다. 그것은 불쾌하지만, 우리가 다 꺼려하지만 우리를 살려주는 십자가이다.
요즘 십자가를 마치 사랑스러운 것처럼 생각하고 목에다 걸고 다니는데 사실은 십자가는 저주의 상징이다.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신21:23).” 하였다. 십자가는 저주의 상징이다. 옛날 같으면 아무도 목에 걸고 다닐 사람이 없다. 요즘에는 기독교 문화의 영향 때문에 십자가를 좋은 것으로 알고 목에 걸고 다닌다. 하지만 막상 십자가를 지라고 하면 모두가 도망 칠 것이다.
풍자향 속에서 우리는 불쾌하지만 우리를 살려내신 그리스도를 보게 되고, 우리의 인권을 찾아 주신 그리스도를 볼 수 있다. 우리는 항상 천사에 매여서 ‘언제 천사처럼 될까?’ 하다 보니 천사의 종이 되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천사를 부릴 사람으로 회복되었다.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히1:14)” 하는 이 자리로 우리를 회복시켜 준 것이다.
우리는 천사를 경배하거나 천사를 수종들 자가 아니다. 천사가 우리를 경배하고 수종들어야 한다. 히브리서에 보면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히12:1)”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히12:22)” 라고 되어 있다.
그들은 우리처럼 선수가 될 수 없기 때문에 우리의 경주를 보고 즐거워하는 것이다. 우리가 월드컵 경기를 보면서 박수를 치고 응원을 하는데, 선수가 될 수 있다면 박수치고 응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직접 뛰어 들어가서 골을 넣지 않겠는가? 선수가 못 되니까 관중석에 앉아서, TV 앞에 앉아서 응원만 하는 것이다. 천사와 우리의 관계가 그렇다.
사탄은 어찌하든지 우리를 자기 밑에 두려고 계속 송사하고 있다. ‘너는 죽지 않느냐? 죽으면 그만 아니냐?’ 라고 송사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송사를 피하려고 천당에 가려한다. 그 말을 듣지 않으려고 영혼불멸이나 천당을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생은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더욱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존재다. 우리는 하나님 아들의 영광을 가진 자다. 이 자리를 밝히 살려내 주신 분이 바로 그리스도이다.
라. 향을 만드는 법
1) 유향(수지)에 섞어 만듦
이 세 가지 향을 유향에 섞는다. 유향은 나무에서 나오는 일종의 수지인데 사막의 산간 지대, 아라비아 사막 같은 곳에서 생산된다. 색은 우윳빛 같은 노란색이고 맛은 톡 쏘는 맛이다. 이 유향은 레위기 6장 15절에 “소제물 위의 유향을 다 가져다가 기념물로 제단 위에서 불살라 여호와 앞에 향기로운 냄새가 되게 하고” 라고 되어 있다.
곡식을 태우는 소제를 드릴 때 함께 불에 태우는 것이다. 그리고 레위기 24장 7절에 “너는 또 정결한 유향을 그 각 줄 위에 두어 기념물로 여호와께 화제를 삼을 것이며” 했다. 진설병의 상 위에 이 유향을 떡과 함께 놓아두는데, 이것은 떡을 더욱 정결하게 보이게 한다.
유향은 부활을 상징하는 향이다. 예수님이 태어나셨을 때 황금과 몰약과 유향을 가져왔는데 황금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몰약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유향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상징한다. 관유는 감람유에 섞는데 향은 유향에 섞는다. 관유를 감람유에 섞는 것은 감람유가 그 영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오신 분을 상징하기 때문에 그 영이신 감람유에 섞는다.
향은 부활을 상징한다. 향이 하나님께로 올라가기 때문이다. 이것은 부활 안에서 하는 기도를 의미한다. 죽고 다시 삶 안에서 기도해야 분향단의 기도가 될 수 있다. 바깥뜰에서 하는 기도는 이방인의 기도다. 십자가를 지나지 않은 기도는 자기에게는 유용할지 몰라도 하나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다.
‘아들이 잘 되게 해주십시오, 사업이 잘 되게 해주십시오.’ 이런 것은 모두 자기 인생의 필요를 위한 것이다. 정신적인 것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자기 필요를 위해서 드리는 기도는 분향단의 기도가 아니라 이방인의 기도다. 그래서 향은 유향에 섞어야 한다. 유향에 섞어야 더욱 정결해지기 때문이다.
2) 동일한 비율로 섞어서 만듦
세 가지 향을 똑같은 비율로 섞어서 만든다. 이것은 죽음과 부활이 동일한 속성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가 볼 때는 죽음과 부활이 다른 것 같다. 부활의 영광은 좋지만 죽음의 고난은 불쾌한 것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찌하든지 십자가를 피해서 부활의 영광만 얻으려고 한다.
그러나 죽음과 부활은 실제상으로는 같은 자리이다. 즉 죽은 자리가 곧 산 자리이다. 두 개가 아니다. 한 자리이다. 제단의 향과 분향단의 향은 둘 다 향이다. 처음 시작은 다르지만 마지막 결과, 목표는 둘 다 향이다. 같은 것이다. 죽음과 부활이 하나이다. 제단에서는 죽음이고 향단에서는 부활이다. 제단에서 향단으로 가는 것이므로, 죽음과 부활은 한 직선 상에 있다.
3) 중수가 없음
이 세 가지 향은 중수가 없다. 즉 무게가 없다. 관유를 이야기할 때는 중수가 있었다. 몰약 500세겔과 육계 250세겔과 창포 250세겔, 그리고 계피가 500세겔이었다. 그런데 세 가지 향에는 중수가 없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관유는 수량이 정해져 있다. 그리스도는 정해져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실 때는 정해진 분이시다. 이것은 정해진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이것은 우리의 운명을 상징한다. 우리의 운명은 정해져 있다. 커질 수도 없고 작아질 수도 없다. 더 무거워질 수도 없고 더 가벼워질 수도 없다. 그 정해진 운명으로 우리에게 오셨다. 이렇게 정해진 것이므로 수량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올라가는 향은 중수가 정해져 있지 않다. 우리로부터 올라가는 것은 우리의 운명이 올라가는 것인데, 이것은 각 사람의 살아냄에 따라 다르다. 각 사람이 받은 것은 동일하지만 그것을 살아낼 때는 다르다. 달란트의 비유에서 말씀하셨듯이 한 달란트를 나눠주었는데 세 사람의 결과는 모두 달랐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똑 같은 운명을 받았다. 모든 인류는 한사람도 예외 없이 똑 같은 운명을 받았다. 같은 자리에서 창조되었으며, 같은 자리에서 구원받았다. 그런데 살아내는 것은 각자 다르다. 교회 안에서 우리의 운명을 살아내는 것을 보면 각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분명히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은 동일한데 살아내는 것은 사람마다 다르다. 그래서 중수를 제한할 수 없는 것이다.
은혜는 동일하지만 우리 각자가 표현하는 것, 살아내는 것은 저마다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살아내기에 따라서, 엄청나게 많이 살아낼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악하고 게으른 종아(마25:26)”라는 말을 들을 수도 있다. 여러분은 가능하다면 달란트를 땅 속에 묻어 두었던 종처럼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는 말을 듣지 않아야 한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마25:23).”라는 말처럼 그런 종이 되어야 할 것이다.
4) 소금으로 조절함
레위기 2장 11절에는 “여호와께 드리는 모든 소제물에는 누룩을 넣지 말지니 너희가 누룩이나 꿀을 여호와께 화제로 드려 사르지 못할지니라” 했다. 누룩과 꿀은 발효시킨 것으로 부패와 죄를 상징한다. 여호와께 드리는 소제물에 변질된 것을 넣으면 안 된다.
그리고 레위기 2장 13절에는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라고 했다. 소제에는 반드시 소금을 치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언약의 소금이기 때문이다.
관유는 기름에 개었다. 기름은 복합적 관유를 만드는데 사용하는 것이다. 향은 유향에 섞어서 다시 소금에 절인다고 했다. 이것은 언약의 소금으로 절이는 것을 의미한다. 소금은 부패를 방지하고 맛을 유지시킨다. 안동 간 고등어가 맛있는 이유는 소금 때문이다. 옛날에는 동해에서 고등어를 잡아 소금에 절여 안동까지 짊어지고 왔다. 바닷가에서 바로 먹으려면 소금에 절이지 않아도 되는데, 안동까지 가지고 와야 하니 소금에 절여야 한다. 소금에 절여서 이삼일 쯤 지나면 고등어가 간이 적당히 베게 된다. 그래서 안동 간 고등어가 유명하다. 소금은 맛을 유지하고 조절하는 역할을 한다.
또 소금은 향을 오래 타게 하는 역할을 한다. 쑥 중에서 강화 쑥이 제일이라는 말이 있다. 강화 쑥은 해풍을 맞아서 염분이 많다. 염분이 없는 푸석푸석한 쑥에 비해 염분이 많은 강화쑥은 푸석푸석하지 않고 보들보들하다. 그래서 서서히 탄다. 쑥뜸을 할 때 강화쑥으로 뜨면 열을 적절히 계속 유지해준다. 그래서 강화쑥이 유명하다.
향은 소금에 따라 조절되어야 한다. 이것은 언약에 따라서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 마음대로 무작정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이 하라는 기도를 해야 하며,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기도해야 한다.
유향에 섞는 것은 부활과 함께 섞는 것이고 소금에 절이는 것은 언약으로 절이는 것이다. 어떤 기도도 하나님의 언약으로 절이지 않으면 과잉되거나 모자라거나 부패되어 제 멋대로 되고 만다. 소금에 절이면 제 멋대로 되지 않고 맛이 일정하게 유지된다.
요즘 사람들은 생선을 사면 무조건 냉장고에 넣는다. 하지만 생선은 소금에 절여야 맛이 있다. 냉장고에 두면 맛이 없어지고 냉동실에 넣어 두면 더 맛이 없어진다. 생선은 소금에 절여서 상온에 두어야 맛이 있다. 나는 바닷가 어촌에 살아서 생선절임에 대해서 잘 아는데, 생선은 소금에 절여 두어야 변질되지 않는다.
냉장고는 온도가 일정하게 유지되지 않기 때문에 생선이 얼었다가 녹았다가 한다. 그러면 부패되고 만다. 썩지는 않는데 맛이 없어져 버린다. 소금에 절여서 독 안에 넣어두는 게 가장 좋다. 우리의 기도는 생선을 소금에 절이듯이 항상 언약으로 조절되어야 한다. 그분의 언약이 없는 기도를 해서는 안 된다. 언약 안에서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이 이삭을 축복하실 때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을 기억하사 축복하셨다고 되어 있다. 무작정 축복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다. 언약을 통해서 축복하시는 분이다. 떼를 쓴다고 기도를 들어주시는 분이 아니다. 당신의 언약 안에서 축복하신다. 인생은 하나님의 언약 가운데 있다. 특별히 하나님의 백성은 그의 언약 안에 있다.
마. 향은 하나님을 위한 것
1) 하나님 앞 증거궤 앞에 둠
향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위한 것이다. 그래서 “회막 안 증거궤 앞에 두라(출30:36)” 하셨다. 증거궤 앞은 하나님 앞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을 증거하는 증거궤이다. 이것은 하나님께만 드리는 것이며, 하나님을 위해서만 향을 피워야 한다는 뜻이다. 이 향은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위한 것이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향을 준비하는 것이 가장 아름답다. 신약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마리아가 옥합을 준비한 것이다. 당시의 풍속으로 여자가 준비하는 옥합은 일생동안 단 한 남자에게만 쓰기 위해서 준비하는 것이다. 옥합은 한번 깨뜨리면 두 번 다시 쓸 수 없다. 한 남자에게만 쓰면 그만이다.
마리아는 그 옥합을 준비하고 예수님 앞에서 깨뜨렸다. 왜냐하면 자기는 남편도 없고 시집갈 일도 없고 예수님은 곧 돌아가실 것이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거기에 쏟은 것이다. 마리아의 옥합, 이것은 하나님을 위해서 준비한 향이었다.
그 옥합이 깨뜨려졌을 때 “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마26:8~9)”하였다. 그런데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마26:10~11)”고 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마리아의 옥합이 하나님을 위한 허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위하는 것은 허비에 해당된다. 계산에 의한 것이 아니다. 계산으로 하면 그것을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써야 한다. 그 비싼 것을 발에 쏟아 부었으니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런데 예수님은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막14:6).”고 하셨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봉사하는 것은 계산으로 따지면 허비이고 낭비이다. 세상이 볼 때는 아무 쓸 데 없는 짓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하는가? 그 안에 우리의 헌신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위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복음은 바로 거기서 전파된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에게 예수 전하라고 세금을 내주겠는가? 절대로 그럴 일은 없다.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도움을 주는 사람은 많아도, 우리가 복음 전하라고 돈을 주지는 않는다. 이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지금도 그렇다. 예를 들어 결식아동을 돕자고 하거나, 무료 급식소를 차려 놓으면 우리 돈이 없어도 돈이 넘쳐난다. 사방에서 돕겠다는 사람들이 수없이 나타난다. 서울에 가면 최일도 목사라는 분이 있다. 그분이 밥을 퍼준다고 해서 ‘밥퍼 목사’인데, 그 분이 시작해 놓으니까 전국에서 후원자가 몰려들었다. 끝없이 몰려든다. 봉사할 일이 있다고 하면 사방에서 몰려든다.
종합병원에는 자원봉사자가 얼마나 많은지, 너무 많아서 귀찮을 정도라고 한다. 너무 많아서 오히려 환자들에게 피해가 될 정도라고 한다. 그런데 그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위해서 돈을 내라고 하면 내겠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무엇에 허비해야 될 것인지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들이 볼 때 우리가 하는 일은 허비다. 무료급식 같은 일은 모두 유용한 일이다. 도와주는 일이고, 선한 일이고, 좋은 일이다. 최일도 목사님이 무료 병원을 짓기 위해서 ‘만원 후원자’를 모집하기 시작했다. 만원의 후원금은 어지간하면 다 낼 수 있다. 만원의 후원금을 내서 무료병원이 우리나라에 설립이 된다면 얼마나 희망적인가! 수천만 명이 몰려들어서 엄청난 돈이 모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 계획이 꿈이 아니라 현실로 다가왔다고 한다. 이처럼 세상이 인정할 수 있는 좋은 일을 하자고 하면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든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위해서 무엇을 하자고 하면 아무도 올 사람이 없다. 우리 밖에 없다. 십자가에서 죽은 사람을 위해서 하자 하면 아무도 할 사람이 없다. 빌라도를 위해서 하자 하면 할 사람이 많지만,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을 위해서 모금을 하자 하면 할 사람이 많지만, 십자가에서 죽은 사람을 위해서는 모금을 하자 하면 아무도 할 사람이 없다. 우리 밖에 없다.
향은 오직 하나님만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께만 드리기 위해서 준비된 것이다. 마리아는 향을 다른 곳에 쓸 데가 없는 여자였다. 그래서 예수님이 죽게 되니까 죽고 나면 못 쓰니까 예수 앞에 옥합을 깨뜨렸던 것이다. 다른 곳에 쓸 데가 많은 사람은 하나님께 향을 드릴 수 없다. 거기 밖에 드릴 곳이 없는 사람만이 하나님께 향을 드린다.
2) 사람이 맡기 위한 것이 아님
이 향은 사람이 맡기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사람을 기쁘게 할 것인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인가? 고린도후서 5장 9절에는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고 하였고 에베소서 5장 10절에는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고 하였다.
이 향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기쁨과 만족만을 위해 필요하다. 우리의 향기는 오직 하나님만 맡아야 한다. 나에게서 나는 향기가 오직 하나님만 좋아하시는 향기라야 된다. 이 향은 사람이 맡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맡기 위한 것이다.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그분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것이다.
향은 거룩하다. “이 향은 너희에게 지극히 거룩하니라(출30:36).” “네가 여호와를 위하여 만들 향은 거룩한 것이니(출30:37)” 라고 했다. 여호와를 위하여 너희에게 거룩하다는 뜻이다.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 우리에게 거룩한 것이다. 거룩한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을 위하는 것이 거룩한 것이고, 더욱 더 하나님만을 위하는 것이 지극히 거룩한 것이다. 그래서 이 향은 지극히 거룩하다고 하셨다.
우리의 어떤 것이 오직 하나님만을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지극히 거룩한 것이다. 그것이 물질이든 영적인 것이든 마찬가지다. 오직 그분만을 위한 것이라면 물질이든, 무엇이든 지극히 거룩한 것이다.
3) 우리를 위하여 이 방법대로 만들지 못함
우리를 위하여 이 방법대로 만들지 못한다. “너희를 위하여는 그 방법대로 만들지 말라 냄새를 맡으려고 이같은 것을 만드는 모든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출30:37~38)”고 하셨다. 자기가 스스로 그 향을 맡으려고 하면 백성 중에서 끊어진다, 백성 중에서 관계가 끊어진다는 것이다. 옛날 말로는 죽는다는 뜻이다. 백성 중에서 끊어진다는 말은 죽여도 살인에 해당되지 않는다. 즉 파문된다는 뜻이다.
우리 교회에 이 말을 적용한다면 자기가 그 향을 맡으려고 하면 교회에서 교제가 끊어진다, 교통이 끊어지게 된다. 교회 안에서 스스로 그 향을 자기 것으로 맡으려 하는 사람에게는 아무도 가지 않는다. 아무도 그 사람과 교통이 안 된다. 자기 혼자 잘났다고 할 뿐이지 아무도 가지 않아서 교통이 되지 않는다. 교통이 안 되는 것이 영적으로 말하면 죽음이다. 이것이 그 백성 중에서 끊어지는 것이다.
이 향은 전적으로 그분만을 위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적으로 그분만을 위하는 사람에게서 향기가 나오고, 그 향기를 맡으려고 또 그 사람 곁으로 가고 그 사람과 교통하게 된다. 그래서 그 사람은 백성 중에서 자기의 영역이 넓어지게 된다. 그러나 자기가 그 향을 맡으려고 하면 다 떨어져 버리고 아무도 안 간다. 그러면 그 사람은 죽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교통이 끊어지는 것이 죽은 것이다.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은 모두 향으로 집결된다. 이 모든 것은 바로 하나님의 목적을 위한 것이다. 우리의 인생 전체가 마지막에는 정제된 향이 될 것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 자신을 위한 것이고, 하나님의 목적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은 하나님의 행정을 움직이는 것이다.
하나님의 행정을 움직여야 비로소 우리의 세계가 생긴다. 하나님이 움직이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가 없다. 하나님 나라가 없으면 그 백성은 나라 없는 백성이 된다. 백성이 없는 임금도 비참하지만 나라가 없는 백성도 역시 비참하다. 하나님은 그 백성이 필요하고 우리는 그 나라가 필요하다.
우리가 오로지 그분에게 향을 드릴 때 그분이 건재하게 되고, 그분의 행정이 건재하게 되며, 그래서 그 나라가 건재하게 된다. 그 나라가 건재해야 또 우리가 그 안에서 살 수 있게 된다. 나라가 있어야 내가 살고, 내가 있어야 또 나라가 있는 원리와 같다.
우리는 일제 36년을 경험하였다. 당시 우리는 나라가 없는 민족이었다. 나라가 없으면 서러움을 당한다. 오직 그분을 위하는 것이 나라를 위한 길이고, 나라가 있어야 내가 사는 길이다. 국민교육헌장에 ‘나라의 발전이 곧 나의 발전’이라고 하였는데 나라의 장래가 곧 나의 장래이다. 그 말이 맞는 말이다. 우리나라가 있어야 우리가 살 수 있다.
교회가 있다는 것은 우리의 살 길이 있는 것이다. 혹자는 혼자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것은 무인고도에 혼자 앉아서 통신하고 있는 것과 같다. 저 높은 산에서 독야청청하고 있는 소나무와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경륜의 목적과는 먼 거리에 있는 상황이다.
아무리 기도를 해서 매일같이 하나님을 만난다고 해도 교회 안에, 교통 안에 있지 않으면 그것은 혼자 사는 것이며, 나라를 갖지 못한 생활이다. 나라 없는 백성의 설움과 같다.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 곧 나라를 위하는 것이며, 나라를 위하는 것이 곧 나를 위하는 것이다. 관유와 향을 보면서, 우리에게 입혀지는 관유와 하나님께 드려지는 향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기도]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홍해의 늪지에서 이름 없이 살고 있는 작은 동물 같은 존재에 불과하지만 주님을 위해서 우리가 불태워질 수 있는 그런 임무가 주어지고, 위치가 주어지고 소명이 주어지고, 직분이 주어졌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비록 보잘 것 없고 우리 자신도 버린바 되었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하신 은혜를 인해서 우리의 잃어버렸던 생명을 찾게 해 주시고, 우리도 버렸던 생명을 다시 찾아서 영광스럽게 하나님 앞으로 다시 가져갈 수 있는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주님이 살려주신 생명을, 주님이 이끌어내 주신 권세를 세상 앞에 당당하게 행사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게 해 주시기를 원하고,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는 기도가 되도록 우리를 정제시켜 주시기를 원합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아서 우리가 정제되고 더 정제되어서 아름다운 향으로, 하나님을 움직이는 향으로 우리 자신이 산화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