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를 포함하여 6명 참석.
안티고네(Antigone). 이름만으로는 '어머니를 대신하여'라는 의미와 '혈통을 반대하여'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오빠의 시신을 처리하려는 마음은 어미가 자식을 품으려는 모습으로 해석되기도 하고, 처녀로 자결한 사실은 자식을 낳지 않겠다는 것과 결부시킬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안티고네>를 통해 개인:국가, 신:국가, 자연:문화, 남성:여성의 대립각에서 텍스트를 생각하였습니다.
테이레시아스의 등장에서 결국 크레온의 강력한 의지는 흔들리게 되고
끝내 하이몬을 찾아나서는 것이나,
안티고네에 대한 관용의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으로 보아
'국가의 정의'(크레온의 정의관)는 신의 정의 앞에 비할 데 없게 된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크레온의 주장은 통치자의 입장에서 충분히 납득된다는 의견도 만만찮았습니다.
역사를 보면 통치자의 입장은 으레 국가의 기강, 질서의 확립이란 면목으로 유연함보다는 강직함을 추구합니다.
때로 그것은 '원칙'이란 미명하게 강압적인 위력을 발휘하기도 합니다.
사회의 안녕, 국가의 존립이란 명목은 국가의 통치술에 대해 정당성을 부여하며, 때로 개인의 권리가 제한당하고 침해당하는 것도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시각에서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오히려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공권력이 힘을 갖지 못하고 이해당사자들에 의해 짓밟히는 사례들이 숱하게 들리고 있으며,
군인이나 경찰이 총기를 강탈당하는 사례도 흔합니다.
사회의 지도층 인사들의 불법한 일들이 적발되어 닮지 않아야 할 모범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지경에 된 데는 그간 국가의 힘이 독재자들의 치부를 위해 악용된 사례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좀더 차분하게 사회의 전체를 살필 여유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민주 사회에서는 나의 자유를 주장하는 만큼 다른 사람의 평등을 침해할 수 있음을 늘 경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의 조절을 위해 국가의 힘이 사용되도록 국가의 통치권을 바른 방향으로 놓이게 할 책임이 오늘을 사는 모든 시민에게 부여되어 있습니다.
또 개인적으로 우리들은 숱한 가치 갈등을 겪으며 살고있습니다.
우리가 겪는 대부분의 가치관적인 문제들은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나 사회 일부와 늘상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정답'이란 것을 쉽게 찾아내기 못하기 때문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오늘 토론한 <안티고네>를 보면서 가치관을 고집하는 것과 유연하게 대처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였습니다.
고집, 독선, 아집 이런 것이 어느 선에서 결정되는지 그 경계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대개는 숫자적으로 더 많으면 더 민주적인 착각을 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보다 진리에 가깝거나 진리이길 바라는 것이 현명할 것 같습니다.
가치관이란 한마디로 여러 가지 중에 우선순위를 무엇으로 두는가의 문제이지만,
그 핵심은 결정하려는 바가 '바람직한가?'라는 질문에 당당하게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근본적인 질문에 자신이 없다면 우리가 고수하려는 가치관은 언제든 수정해야 할 것입니다.
유연한 사고를 한다는 것은 나이가 들수록 어려워지는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지위가 높아질수록 한번 결정한 것에 대해 번복하거나 타협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높아지고 나이듦은 그런 면에서 불행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 분은 팔십 노인도 세살짜리 아기한테서 배우는 바가 있다는 말을 인용하시면서,
그만한 시야의 폭과 깊이를 가지는 인생에 대해 이야기 하셨는데 참 공감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크고 높게 생각하는 것을 좇다가 종종 낮아지고 깊어지는 것에 대해 잊어버리는 수가 있습니다.
저는 산에 올랐을 때 문득 한 그루 나무를 보면서
지하세계에 살고 있는 존재들 중심으로 생각하면
태양을 향해 뻗치고 있는 줄기나 잎이 오히려 뿌리같은 존재일 수 있겠다는 상상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나무는 위로도 자라지만 아래로도 자라고, 남쪽으로 가지를 많이 뻗치면 북쪽으로 뿌리를 많이 폅니다.
그러한 균형을 가져야만 자신의 생존에 문제가 적습니다.
인간 역시 이러한 균형감각을 길러야 하겠습니다.
<안티고네>에서는 국가의 정의와 가정의 정의, 사회의 정의와 개인의 정의의 충돌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늘 한쪽만 선택해야 하는 입장보다는 둘의 조화를 찾으려는 시도가 우리를 더욱 편하게 합니다.
어쩔 수 없이 결단할 때도 있겠지만, 평소 우리들의 생활은 둘의 조화를 찾아가는 지혜를 찾아야 하고
그것을 제도적으로 정착시키려는 노력들이 필요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