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주연 말씀 요약
(23.8.14.월)
내가 자격이 없다는 것을 잘 안다. 내가 어떻게 여기 앉아서 이렇게 여름집회때 간증을 하는가. 정말 평신도교회 좋은 것 같다. 나는 충성봉사 한적 없고 목사님에게 이렇게 잘 하겟다 햇는데 한번도 그렇게 약속 지킨적 없다ㅣ.
딱 하나, 내가 십못내 예수라는 것을 알앗다는 것, 그 자격으로 여기 섯다.
어제 간증해야겟다, 예술이야 땀 뻘뻘 흘리며 노래할 때는 좋앗는데 어제 샤워하고 가만히 잇는데 뭔가 성경도 읽어야겟다 싶은데 성경도 모르지. 그런데 목사님이 성경 몰라도 된다 햇다. 이 한사람만 알면 되지 성경 몰라도 된다는 말에 힘을 얻엇다.
그런 가운데 한 구절 찾앗다.
고린도전서 2:2
내가 십자가 못박힌 것 외에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엿다. 할렐루야
예수가 십못내 라는 사실외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엿는데 이게 밭에 묻힌 보화다. 또 하나 찾앗다. 마9장44절
밭에 묻힌 보화 이야기, 모든 것을 팔아 밭을 삿다는 것, 이것이 천국이다.
목사님을 교회를 자랑하고 평생 찾던 예수도 사랑하려고 햇다. 또 교회에서 받은 많은 사랑, 나도 사랑하려고 햇다. 그런데 내게 목사님이나 예수를 만날 정확한 주소를 알수없엇다. 주소를 들고 찾아갓는데 거기 목사님이 안계셧다.
이렇게 하면 목사님이 알수잇거나 만날 수 잇지 않을까, 예수도 그렇게 만나려 햇지만 번번히 실패햇다. 정확한 주소가 이제 왓다. 십못내 예수. 이 주소로 찾아가면 거기 잇다. 아멘!
이 주소 들고 찾아가니 목사님 거기 계셧다. 더이상 막연히 생각할 필요없다. 정확한 주소가 왓다. 이것은 쉽다. 이 주소, 이 자리는 너무나 정확하고 예리하고 진실이언니 이야기한 것처럼 시침핀으로 찝어놓은 것처럼 정확한데 이 안에 신기할 정도로 자유가 잇다. 내 고백이다.
내 운명은 못내려오는 운명인데 저 ㅅ이 나다 그게 내 고백인데 너무나 내 자리인데 너무나 큰 해방이 잇다. 진정한 자유와 해방, 절대적 이 제한 안에 잇다는 것이 점점 알아진다.
진정한 자유, 절대적 제한 안에 잇다. 내 문제와 내 상태와 아무 상관없다. 늘 돌아보앗던 중요한 내 상태는 정말 안 중요하다. 그 자리가 내 자리, 정확한 주소를 말하는 데는 내 상태와 꼬라지와는 정말 상관없으니 참 자유다.
내가 밝을 때 교회 나오고 안 그러면 못 나오는 것, 그러면 진정한 자유 아니다. 내가 상한 감정잇든 없든 이 ㅅ이 나라고 하는게 진정한 자유다.
문제는 이 자유는 누구나 가지려고 하면 문제가 없을텐데, 그렇다면 힘잇는 ㅅ이 다 가져가고 내게는 안 왓을 것이다. 모든 아담이 싫어하니 이 자리가 내게 온 것이다. 모든 ㅅ이 싫어서 버리고 사실 나도 버리고 사탄도 버리고 마지막에 ㅎ도 버린 이 자리...
이것을 들고 좋다고 날뛰는 것 이상하긴 하다. 그 자리에서 예수를 만낫다. 대단한 예수, 나는 만날 수 없다. 엄청난 목사님 못 만난다. 그런데 이 자리에 잇는 예수는 목사님은 내가 만난다.
이것을 믿고 내려올 수 없엇다. 계단에서 내려와야하는데, 안개가 짙어서 내려올 수 없엇다. 그런데 이 보화를 이 땅을 사야겟다고 생각햇는지 그게 은혜다. 모두 버리고 간 ㅅ이 내겐 진실해 보엿는지. 왜 지난 10월의 세희 간증이 좋게 들렷는지, 왜 자길삼촌 말이 크게 들렷는지...
일단 보라 하니 내려가보자 하게 된 것이 은혜 위에 은혜다. 새로운 기적을 일으켯다. 보라 새것이 되엇도다. 할렐루야.
십자가 못박혀 내려올 수 없는 이것이 보화다. 그 자체가 보화지 그것으로 무엇을 만들 수 없다. 십못내 예수로 이렇게 해보자. 이것은 보화 아니다. 그 자체가 보화일 뿐이다. 그 외에는 모르겟다.
그 사람이 나구나. 내 운명이구나 그것 외에는 아무 것도 모르겟다. 잠시후에 무엇이 일어날 지 모른다. 어떻게 하겟다는 무슨 약속도 못하겟다. 내일 안올지 모른다. 잠시 일도 어떻게 모르는 인생, 지금 못박으면 내려오지 못하는 그 ㅅ이 나고 그 ㅅ이 선포되는데 왜 이렇게 좋은가. 그게 구속의 복음이고 모든 대속을 끝낸, 나는 안되는데 이모삼촌은 되고 목사님은 되는데 나는 언제 되나. 까마득한 예수 그게 아니고,,
하트를 그리며 아무리 다가가도 안되는 그 예수를 단번에 만나고 만 것이다. 나도 그 ㅅ이라는 선포, 목사님이라는 고백. 이것만 알아야하고 이것만 나로 알아야한다. 이것만 구속의 복음이고 모든 것의 모든 것인 것이다.
거기서 내 정체성 찾지 않으면 ㅅ들을 만나는게 그렇게 안 행복하다. 그 정체성 없으면 ㅅ들 만날수록 피곤하다. 많은 나무들 가지고 오는 사람들, 공부하고 얻은 것 그게 자기가 아닌데 그것을 들고 와서 나인줄 알고 살다가 인생이 허무햇다.
잇다가 사라질 것이 내가 아니다. 절대 변하지 않는 곳에 집을 지어야한다. 흔들리지 않는 반석, 내가 이제 명함을 안 들고 가서 명함 만드는 수고 끝나서 감사하다. 그것만 말한다. 양생회 형제자매들 만나서 너 어떻게 지내니 한마디도 묻지 않고 못내려오는 예수가 나다 그것만 말하는데 너무나 하나다.
이 복음 말하는 선포하는 그 형제자매들 고백속에 그냥 잡으면 하나다. 너가 나구나. 그 ㅅ의 간증이 나다. 분명히 선포할수록 더욱 나다. 그러니 더욱 귀하다. 내가 사랑할 수 잇다면 구속의 복음 안에서다.
나는 교회에 대한 어떤 그림도 갖지 않앗다고 목사님 말씀하셧는데 너무나 진실하셧다. 교회가 그냥 흘러가는 대로, 주의 손에 이끌렷다는 목사님, 내가 어떻게 이런 분을 만낫는지. 그림을 정교하게 그려야하지, 교회 미래가 어떻게 될지 걱정해야하는데 교회의 어떤 그림도 갖지 않아서 그냥 흘러가면 된다는 말씀과 함께 좋은 말로 할 때 이 미래의 스트림에 올라타라고 하셧다. 너무나 아멘이다.
어떻게 내가 목사님의 마음을 알수잇는지. 이 운명 안에 함께 잇는게 전부다. 너무 감사하다. 이 말을 하려고 나도 태어낫다. 우리가 그렇게 태어낫다.
왜 앵무새처럼 똑같은 말을 하느냐? 그런데 이 세계를 보게 되면 총천연색이다. 자기대로 경작하는 것이다. 누구에게 물을 필요가 없다. 자기 인생대로 경작되고 그 안에서 소출이 나온다. 정말 신기하다.
그렇게 바라봐주는 이 눈빛도 감사하고.. 내가 무엇을 가져서 무엇을 공부해서 이자리에서 말할 수 잇겟는가. 아무 것도 모르는 인생, 만물의 찌끼같은 우리를 불러서 이렇게 아름다운 고백과 선포하게 하시고 이 세계를 노래하는 것, ㅎ이 하신 일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인생이 너무 괴로울 때 ㅎ이 계신가, 안계신가 믿음이 1도 없엇다. ㅎ이 아무래도 없는 것같앗다. 그런데 이제 교회를 보면 한명한명 형제자매들 보면 ㅎ이 분명히 계시고 불꽃같은 눈으로 ㅎ이 지켜보고 잇는게 보니까 믿어진다. 계속 말하고 싶은데...
오 정말 ㅅ으로 태어나 이 말을 알아듣고 말한다는 것, 딱맞다. 내 자신이 누구라고 따로 말할 필요없다. 장래 일 모른다. 이 말자락을 붙잡고, 이 한 말을 붙잡고 지금을 사는게 전부지 이후는 나도 모른다. 그 고백 외에는 모르는데 왜 이리 당당하고 행복한지.
진정한 자유, 절대적 위치 안에서 맛보는 자유와 해방, 대박이다. 주님을 찬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