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파이어
김원경
당신은 나를 닮은 당신을 연기할 수 있어
나를 닮은 당신은 사실 너무 많은 당신이지만
당신은 그 모두여서 안전하다고 믿고 있다만
쇠창살 안은 밖보다 더 안전한가
너무 선한 모습으로 피를 빨아먹는
너무 착한 당신
지금 난 회전 목마를 타고 있어서 행복한데
왜 어지러운 거지
자꾸만 발이 사라지고
발밑으로는 끈적끈적한 꿀이 흘러넘쳐
익사할 것 같아
우린 우리라는 우리에 갇혀 우리를 흉내내고 있어
도망치려면 청소기처럼 빨아 당기고
가만있어도 청소기처럼 구석에 세워둬서
따뜻한 모유가 흐르는 곳으로 갈 수가 없어
세상 곳곳에 존재하는 당신이 다른 종(種)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비밀은 다음을 시작할 준비물이 될 거야
시작노트
항상 거리조절 실패가 문제였다. 나무와 나무 사이의 간격, 섬과 섬과의 간격처럼 적당한 거리감이 관계를 유지시켜준다는 것을 무수히 많은 시가 가르쳐주었건만 그것이 내 것일 때는 보이지 않았다. 눈 감았다. 뜨거워서 눈이 멀고 보이지 않았다. 올라온 감정은 놓아버리고 싶다고 해서 놓아지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 하지만 형체 없는 구름처럼 잠시 일어났다 반드시 사라진다. 잠시면 된다. 행여 일기예보에 내일 비가 온다고 해서 오늘부터 미리 우산을 켤 필요는 없다. 이별 후에 아파하는 자여. 막차 떠났다고 주저앉을 필요 없다. 죽을 것 같은 어둠도 견디고 통과하면 동이 튼다. 첫차 온다. 다만 우리는 저 어둠을 건너는 게 두려워 웅크리고 있을 뿐이다. 깊은 어둠을 견디고 통과하면 한 줄 빛에도 감사할 것이다. 죽은 고목나무에서 버섯이 자라듯, 모든 죽음은 또 생을 품고 있다. 그러니, 사는 쪽으로 우리 같이 기울어지자.
김원경
2005년 중앙일보신인문학상,
『너의 아름다움이 온통 글이 될까봐』공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