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의 자기 검열
배옥주
그림자가 계속 뒤를 따라온다
내가 일생을 똑바로 걸어가서
배고픈 무덤에 잘 들어가는지
검안하라고 빛이 보낸 검시관
- 함기석, 「걷는 사람」(『애지』 2023년 겨울)
자기 검열은 현실 원칙을 지키기 위해 자아를 통제하는 심리학적 태도다. 함기석의 「걷는 사람」은 4행 1연의 묵직한 시다. 짧은 문장과 여백 속에 촌철살인의 함축된 사유가 녹아 있다. “일생을 똑바로 걸어”가고 있는지, “배고픈 무덤에 잘 들어”갈 수 있을지 불현듯 뒤를 돌아보게 만든다. 위 시에서 ‘그림자’는 사회적 상황이나 대면 관계에 있어서 타인으로부터 호의적이거나 긍정적으로 여겨지기 위해 자아를 조절·통제·감시하는 검시관의 역할을 맡고 있다. 근심이나 불행, 자취나 흔적으로 비유되는 관용적인 의미에서 한 걸음 나아가 자신의 생을 지켜보는 검시관의 임무를 이행한다. “빛이 보”낸 그림자는 끊임없이 자신을 지켜보는 또 하나의 자아다.
도덕성이나 금기는 사회화 단계에서 깨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억압기제로 자기 검열에 의해 이루어진다. 자기 검열 또한 사회적 불이익과 비난을 피하기 위해 자신을 보호하려는 방어기제다. 불온성이 확대되는 현대사회에서 우리는 자아 분열이나 자기 부정을 일삼는다. 심지어 자신이 잃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맹목적인 욕망을 욕망하며 살아간다. ‘증자’는 명예를 소중히 여겨 미래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라고 가르친다. 넓은 도량과 굳센 의지로 도덕을 책임지는 행동을 수행한다면 부끄럽지 않은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것이다(논어 태백편 7장). 또한 시인 ‘윤동주’는 자신이 찾아 나선 길을 헤매다가 어리석음을 반복하지 않으려고 한 점 부끄럼 없이 살고자 했다(「서시」). 유혹에 흔들리는 자신을 미워하지만 이내 가여워하고, 다시 미워져 돌아가다가도 그리워지는 삶을(「자화상」) 되풀이한다. 잃어버린 길을 찾아 헤매다 돌아오는 일상을 반복하던 시인은 우물 속에 잠긴 추억 같은 자신이 “죽는 날까지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간절히 바란 것이다. 우리는 부끄럽지 않은 자아에 도달하기 위해 얼마만큼 겸허하게 살아가고 있는 걸까?
걷기는 가장 친근하고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일상의 한 부분으로, 음악 감상이나 사색 등의 멀티태스킹이 가능한 유산소 대표 운동이다. 건강과 직결된 ‘걷기’와 더불어 ‘걷는 사람’에 대한 관심도 이어지고 있다. 이는 제주 올레길을 필두로 조성된 무수한 둘레길과 표제, 출판사명, 빈번히 선택되는 예술가의 작품 주제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붓다’는 출가 후 50년 동안 ‘걷기’의 구법 행로로 길에서 깨달음을 얻었고, 배우 ‘하정우’는 『걷는 사람』을 통해 죽을 만큼 힘든 시점을 넘어 계속 걸으면 결국 다시 본래의 삶으로 돌아온다는 ‘걷기’의 인생철학을 피력했다. 영국 팝아트 작가 ‘줄리안 오피’의 <걷는 사람들>은 또 어떤가. ‘오피’는 달리고 앉고 걷는 일상의 모습에서도 특히 사람들의 걷기에 집중한다. LCD 화면을 꽉 채운 군상들은 눈·코·입·발목도 없이 굵은 윤곽 속에 그림자를 감춘 채 걷고 있다. 끝없이 ‘걷는 사람들’의 삶을 통해 작가는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은 걸까. 일생을 걸어가는 모습을 통해 삶의 태도를 가늠한다면, “계속 뒤를 따라”오는 그림자는 자신이 올바른 길을 가는지 묵묵히 지켜보는 존재라 할 것이다.
함기석의 시 「걷는 사람」에서 ‘그림자’는 빛이 화자의 생에 보내는 채찍질이다. 검시관이 된 그림자는 일생을 똑바로 걷고 있는지, 배고픈 무덤의 청정구역에 잘 들어가는지 두눈 부릅뜬 채 화자를 검안하고 있다. 배고픈 무덤은 욕심으로 얼룩진 정신의 군더더기를 덜어내고 자신이 걸어가는 삶을 성찰하는 자세로 살아야 들 수 있는 곳이다. 하심下心(타고르, 『기탄잘리』)의 구도로 얻는 인생의 깨달음은 비우는 데 있다. 한 통의 물이 비워지는 순간 한 통의 물이 채워지는 갠지스강에는 ‘비움’에서 시작되는 구도의 진리가 흐르고 있다. 이처럼 ‘배고픈 무덤’은 시거이도舍車而徒의 깨달음에 오른 자만이 들 수 있는 안식처라고 할 것이다. 삶의 길을 잃고 어둠이 되었을 때 비뚤어진 걸음을 바로 잡으려고 애쓰다 보면, 자신을 낮추고 타인을 밝히는 빛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내 사라지고 말 그 순간까지 사위四圍를 밝히는 뭇별처럼.
‘인간’은 ‘걷는 존재’ 또는 ‘걸으면서 방황하는 존재’라는 티베트어를 소리 내어 읽어본다. 문득, 그림자를 받들고 산책을 나가야 할 것 같은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