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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기스칸 보드카 / 고정욱
강의동 밖으로 나온 나의 몸을 초여름의 후덥지근한 공기가 누에고치에 실 감듯 에워쌌다. 오산 비행장에서 떴을 전투기 편대의 폭음을 들으며 차에 오르니 갇혀 있던 열기가 숨을 막았다. 시동을 켜고 창문을 있는 대로 다 열어 차안의 뜨거운 공기를 갈면서 앉았던 휠체어 바퀴를 분해해 차안에 넣었다. 차가 교문을 빠져나올 즈음 정오를 알리는 라디오의 시보와 동시에 핸드폰 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토골도르라는 몽골 분이 부탁해서 전화 거는데요.”
낯선 목소리의 아가씨였다.
“네. 무슨 일인가요? 지금 그 사람과 같이 계신 건가요?”
“네. 여기 강남 성모병원인데요. 마장동까지 가시려는데 방법을 모르겠다고요. 혹시 이곳에 와서 픽업해 주실 수 있나 물어봐 달라는데요.”
“마장동이 숙소랍니까?”
“네. 올 때는 택시로 왔는데 요금이 너무 비싸서 갈 수가 없답니다.”
어차피 구의동의 내 집필실로 가려면 강남 언저리를 거쳐야만 하니 그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지금 전화하시는 곳은 어딘가요?”
“성모병원 구내 구름다리 아래 공중전화예요.”
“알았습니다. 제가 지금 수원에 있는데 데리러 갈 테니 거기 꼼짝 말고 기다리라고 전해주세요.”
그녀는 전화를 끊었다. 나는 차를 고속도로쪽으로 움직였다. 과천-의왕 고속도로는 내가 월요일 오전, 이곳 수원에 있는 작은 대학에 강의를 하러 올 때 늘 애용하는 길이었다.
토골도르와 내가 처음 만난 것은 2년 전 상하이에서였다. 세계장애인연맹(DPI) 아시아 총회 겸 세미나에 한국 장애인 연맹의 이사인 나는 회장의 대리인으로 참석하게 되었다.
모든 회의는 영어로 진행되었다. 간신히 의사소통이나 하는 나의 영어는 그야말로 아시아 각국의 장애인들이 나름대로 구사하는 다양한 영어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무장해제 되고 말았다. 영어는 몇몇 나라에서 자기들 식으로 발전해 본토에 없는 단어나 표현이 너무나 다양함을 직접 확인한 셈이다.
몽골 대표인 토골도르는 비행기 시간 때문에 회의 개최하는 날 오지 못하고 그 다음날 나타났다. 양손에 작은 단장을 하나씩 짚고 걷는 그는 휴게실에서 쉬는 나에게 다가왔다.
“당신 한국에서 온 사람이오?”
그는 정확한 분명한 영어 발음으로 내게 말을 걸었다.
“그렇소. 당신은?”
“나 몽골에서 온 토골도르요.”
‘르’에서 ‘흐’로 변하면서 혀를 안으로 말아야 하는 그의 이름 끝자 ‘르’는 권설음(捲舌音)이었다.
일반적으로 몽골인들은 우람한 체구에 둥글넓적한 얼굴을 갖고 있다. 몸통이 두껍고 이마가 훤하면서 여자들은 하체가 길고 몸통이 풍만해 대개 육감적이었다. 하지만 그는 약간은 갸름한 얼굴에 작은 키로 흔히 우리가 막연히 갖고 있는 몽골 사람의 이미지가 전혀 아니었다. 정말 한국 사람과 닮아 몽골은 우리의 형제 나라라는 말을 실감나게 했다.
그는 악수와 함께 명함을 내밀었다. 상체를 많이 쓰는 장애인들이 늘 그러하듯 그의 손은 우악스러웠다. 인사를 나눈 뒤 우리는 함께 차를 마셨다.
“몽골과는 한국과 일본, 중국의 네 나라가 따로 모여서 회의를 하도록 일정이 잡혀 있다.”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특별히 한국 대표를 먼저 만나고 싶었다.”
세계 장애인 연맹(DPI)은 전세계에 지부를 갖고 있는 단체였다. 한국과 일본, 중국, 그리고 몽골 네 나라는 동북아시아의 지부를 형성하는 국가들이어서 관련된 사업을 나름대로 전개하도록 되어 있었다.
“우리 나라는 장애인 문제에 관해서는 되어 있는 게 하나도 없다. 이제 걸음마를 시작했다.”
“그런가? 작년에 나는 몽골에 한번 갔다 왔다. 몽골에 관련된 작품을 쓰려고….”
내 말에 그는 깜짝 놀랐다.
“인상이 어땠나?”
“온통 과거 징기스칸의 영광으로 뒤덮여 있었던 게 인상깊었다.”
나의 몽골 방문은 징기스칸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몽골의 분위기를 맛보기 위해서였다. 예상했던 대로 몽골은 과거의 영화를 잊지 못해서인지 호텔 이름부터 상품, 거리, 기념품 등등이 모두 징기스칸 일색이었다. 그는 내 입에서 징기스칸이 언급되자 마치 멀리 헤어졌던 친척이라도 만난 것처럼 화색이 만면했다.
“당신이 몽골에 와봤을 줄은 몰랐다. 정말 반갑다.”
“여기는 어떻게 왔나? 여비도 만만치 않을텐데….”
몽골은 일인당 GNP가 500불이 채 안 되는 나라였다. 그런 나라에서 장애인 대표가 중국의 상해까지 온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자이카(JICA: 일본국제협력기금)의 도움으로 왔다.”
막강한 자금력으로 일본은 세계 장애인계에서도 그 입김이 센 나라였다. 회의에 참석한 나라 가운데 자이카의 지원을 받지 않은 나라가 거의 없었다. 피지나 파푸아뉴기니 같은 작은 섬나라뿐만 아니라 캄보디아나 방글라데시 같은 극빈국 대표들이 올 수 있었던 것도 그 덕이었다. 그렇기에 회의 내내 일본의 뜻에 반하여 회의를 진행하거나 안건을 올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한국만은 예외적인 존재였다. 일본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될 만큼 경제적으로 성장했지만 아직 남의 나라를 돕거나 영향을 미칠 만큼의 여력은 없는 묘한 위치, 그게 한국의 자리였다. 사무국을 맡고 있는 태국인이 농담처럼 일본은 저런데 한국의 코이카(KOIKA: 한국국제협력기금)는 무엇을 하느냐고 물어왔을 때 나는 낯이 뜨거워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몽골에서는 아직도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장애를 부끄러워한다. 그래서 다들 집에만 숨어 있는 거다.”
한번 가본 경험으로 짐짓 잘 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내가 그의 말을 받았다.
“지금도 말을 타고 가축을 기르면서 살아야 하는 곳이니까 그럴 거다. 그런 환경에서 장애인이 할 일은 별로 없지 않나? 우리 나라도 옛날엔 그랬다.”
어떻게든 움직이고 부지런히 일을 해야 간신히 입에 풀칠하던 6, 70년대 우리 장애인들은 상대적으로 얼마나 크게 따돌림을 당하고 차별에 시달렸던가. 지금도 그 상황이 크게 나아진 것은 아니어서 나는 그들의 말에 공감할 수 있었다.
“그래서 한국의 도움이 많이 필요하다. 형제의 나라 솔롱고스(무지개의 나라) 아닌가.”
과연 우리는 그들에게 무지개만큼 아름다운 나라인가. 쓴웃음을 짓게 되었다. 10남매 가운데 끝에서 둘째인 그는 아들 일곱과 딸 셋인 대가족의 구성원이었다. 울란바토르 대학 전산학과를 나온 최고의 두뇌를 가진 엘리트 청년이었지만 장애로 인해서 능력을 십분 발휘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게다가 형 가운데 한 사람도 청각장애인이라고 했다. 큰 고통이 한 집안에 두 번이나 거쳐갔던 거다.
그런 만남이 있은 다음날부터 그는 정상적으로 회의에 참여했고, 자기의 나라를 대표해서 간간이 발언을 하기도 했다.
그날 저녁 그와 나는 시내 관광을 나가기로 했다. 야경이 아름답다는 상해에서 밤에 나가지 못한다면 그것 또한 어리석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택시를 잡아탄 우리는 푸둥(浦東) 거리로 나갔다. 상해에서 가장 높다는 88층 짜리 건물 전망대도 올라가고 동방명주(東邦明珠) 탑도 구경하면서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한국 담배를 즐겨 피우고 있었다.
“이 담배는?”
“한국에 있을 때 많이 피웠다.”
“한국에 왔었나?”
“6개월 동안이나 있었다. 내가 한국에 갈 때는 휠체어를 타고 갔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걷게 됐나?”
“성모병원에서 한국 단체의 도움으로 수술을 받고 걸을 수 있게 되었다. 한국 선교사들은 정말 적극적이다. 내가 길을 가는데 붙잡고 말을 걸었고 내가 수술로 훨씬 좋아질 수 있다는 진단을 해주고 한국에도 오게 해줬다.”
어린 시절, 집 앞에 나와 앉아 있는 나를 보면 지나가던 승려나 장년의 여성들은 다짜고짜 우리 집으로 쳐들어와 어느 산의 어느 부처에게 빌면 낫는다든가, 교회에 나가 안수를 받으면 걸을 수 있다는 식으로 자신의 신념을 강요하곤 했다. 그들은 결국 자신들의 믿음을 이해해주지 않고 어떤 권유와 제안도 거부하는 어머니나 아버지를 지옥에 떨어질 사람이라도 보는 것처럼 안타까워하며 돌아가곤 했다.
아주 어렸을 적에는 정말 기적이 생겨 걸을 수 있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안 해본 것도 아니다. 그러나 한 번 손상된 세포는 영원히 회복 불능인 것이 자연의 섭리다. 장애라는 것은 그 상태가 영구히 지속되는 것이며, 결코 나아지거나 좋아질 수 없음을 나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장애를 벗어나서 기적적으로 멀쩡해지는 것이 아니라, 장애를 가지고서 이 땅에서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염원이 가슴속에 자리잡았다.
하지만 토골도르처럼 수술을 통해 장애의 상태가 호전되고, 보다 많이 활동할 수 있게 된다면 그것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한 경험이 있는 토골도르였기에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호감과 감사함이 그의 태도와 행동에서 절절이 배어나고 있었다.
일주일 전, 그에게서 한국에 개인적인 용무로 가는데 만나볼 수 있느냐는 전화가 왔다. 못 만날 것도 없다는 생각에 나는 그러라고 했고, 그는 이렇게 서울에 와서 엉뚱하게도 병원에서 전화를 한 거였다.
그는 병원 구내의 건물 사이를 연결한 구름다리 아래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가볍게 클랙슨을 두들기자 담배를 문 채 그는 내 차에 올랐다. 담배연기가 차안에 가득했지만 불쾌한 내색을 할 수 없었다.
통상적인 인사를 나눈 뒤 나는 차를 몰아 병원을 빠져나오며 물었다.
“건강에 문제가 있는 건가? 병원엔 왜 왔나?”
“그저 인사하러 왔을 뿐이다. 나는 6개월간 이 병원에 있었다. 그래서 의사와 간호사들을 많이 안다.”
“나는 지금 내 집필실로 가는 길이다.”
“거기가 마장동에서 가까운가?”
“멀지 않다.”
“그러면 거기까지만 나를 데려다주기 바란다.”
“일단 내 집필실에 가서 얘기를 좀 하자. 점심도 먹고.”
“좋다.”
과연 그가 무슨 일로 날 만나자고 했는지 궁금했지만 잠시 동안 우리는 별 말이 없었다. 그 역시 어두운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차가 강변북로에 진입해 본격적으로 질주하기 시작하자 그는 벼르고 있었다는 듯 입을 열었다.
“왜 당신네 단체에서는 우리와 더 이상 교류하지 않는가?”
그건 그와 나 사이에서 한번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였다.
“당신이 우리 나라에 교류단을 데리고 왔을 때 벌어진 사건 때문이다. 당신네가 과연 우리 상대역으로 한·몽 간의 교류를 할 만한지 아닌지, 혹은 계속 이 교류를 진행할 수 있을지 없을지 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우리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런 상태에서 몽골로 한국 장애인들을 끌고 갈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그러다 보니 사업이 중단되었고 그 때문에 우리들도 피해를 많이 입고 있다. 이해하겠는가?”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지금도 미안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본의가 아니었다.”
상하이의 회의가 끝난 뒤 그와 나는 헤어졌다. 각자의 나라로 가서 몽골 장애인과 한국 장애인의 교류 사업을 맡아 진행하기로 약속을 맺은 채…. 그후 몇 번의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연락을 취한 결과, 일단은 우리가 먼저 그들을 초청하기로 했다. 교통비는 자신들이 부담하고, 체재비는 우리가 부담하는 형식이었다. 대개의 교류 사업이 그러한 형식을 취하고 있었다. 거의 매일 오고가는 이메일을 통해서 그와 나는 필요한 행정적인 절차들을 밟아 나갔다. 확인해 본 결과 몽골 주재 한국대사관에서는 몽골인의 한국 비자 신청의 90% 이상을 반려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몽골인들이 한국으로 가면 눌러앉아 불법체류를 해버리기 때문이다. 몽골의 지식인과 상류층 사람들 몇 만 명은 아예 한국에 와야 만날 수 있다는 우스개가 돌 정도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아무리 장애인들이지만 몽골인 여러 명을 한꺼번에 초청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그들이 한국에 남아봐야 일할 수 없는 장애인이라는 점이 설득력 있었다. 지리한 행정 절차에 대한 검토를 마치고 필요한 서류들을 구비한 뒤 우리들은 초청장을 보냈다. 입국 신청자 일곱 명 가운데 두 사람이 제외되는 우여곡절 끝에 작년 봄, 그들은 드디어 비행기표를 구입했고 최초의 한·몽 교류단이 우리 나라에 도착하게 되었던 것이다.
공항 입국장에 나타난 토골도르 일행은 한 명이 시각장애인, 또 한 명은 거구의 여인으로 휠체어를 타고 있었다. 또 한 사람은 왜소한 지체장애인으로 그녀 역시 휠체어였다. 여러 개의 가방을 카트에 싣고 밀며 따라온 자원봉사자 청년 하나가 유일한 비장애인이었다.
그들의 숙박 장소는 우리 사무실이 있는 여의도 근처의 장급 여관이었다. 신축한 건물이어서 엘리베이터에 장애인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경사로가 갖추어져 있다는 것이 선택의 이유였다.
여관방에 들어가 여장을 풀자 그들은 만족한 표정이었다. 깨끗하고 시설이 좋다는 거다. 내가 봐도 그 정도 수준이면 몽골의 특급호텔과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긴 했다. 토골도르가 특히 좋아한 것은 방방마다 고속 통신망에 연결된 컴퓨터가 있다는 점이었다.
그날 하루 휴식을 취한 그들은 다음날부터 우리 측에서 준비한 다양한 행사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들은 서울 시내를 다니면서 보는 것마다 경탄을 금치 못했다. 우리 나라의 작은 구 하나 정도밖에 안 되는 울란바토르가 몽골 제일의 도시였으니 국제적인 도시 서울의 규모는 그들을 압도하고도 남음이 있었으리라. 흔하게 보는 산과 숲에 그들은 감탄해마지 않았다.
“정말 산이 아름답다.”
“나무가 많고 숲이 깊다.”
그들의 탄성을 다른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몽골을 가봤던 나는 공감했다. 초원지대인 몽골에서는 우리의 동네 야산 정도의 숲도 쉽게 구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날 저녁, 식사를 마치고 그들의 여관으로 찾아간 나는 적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비좁은 여관방에 방마다 대여섯 명씩 낯선 몽골인들이 들어차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이 사람들은 누군가?”
“우리 방문단의 일가 친척, 친지들이다. 다 한국에서 일하고 있다.”
토골도르가 약간은 겸연쩍은 얼굴로 이야기했다. 한국에 들어와 공장 등에서 일하던 몽골인들이 모처럼 서울에 온 친척을 만난다고 찾아온 거였다. 고급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양복 정장에 넥타이까지 매고 있었다. 대부분 공장을 다니거나 인쇄소 등지에서 일을 한다고 했다. 목축 국가인 몽골에서의 특기를 살려 마장동의 도축장에서 칼질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 사이에도 자원봉사자 청년은 부지런히 이방 저 방 다니면서 뒷수발을 하고 있었다.
“저 친구는 이름이 뭔가?”
“이르카다.”
얼굴에 여드름이 아직 가시지 않은 이르카 역시 토골도르와 마찬가지로 한국 사람과 흡사한 용모를 가졌다.
다음날도 준비된 프로그램에 따라 장애인 시설과 각종 단체들을 방문하는 일정이 이어졌다. 토골도르는 한 복지시설의 널찍한 컴퓨터실을 보더니 눈을 반짝였다. 그의 소원이 몽골에 컴퓨터실을 만드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컴퓨터만 있으면 집에 갇혀 있는 장애인들을 밖으로 유인해낼 수 있고, 그들이 컴퓨터를 통해서 인터넷이나 각종 프로그램들을 다루게 되면 세상과 교류를 시작할 수 있다는 거였다. 우리는 중고 컴퓨터를 모아 보내주면 어떨까를 논의했다.
그러나 순조롭던 교류단의 일정 진행은 마지막 날 아침 발생한 문제로 풍비박산이 났다.
“이사님, 큰일 났습니다.”
아침 일찍 직원에게서 집으로 전화가 왔다.
“무슨 일이야?”
“몽골 사람 가운데 한 친구가 사라졌습니다.”
“뭐? 누가?”
“자원봉사자로 따라왔던 친구가 잠적했습니다.”
허둥지둥 여관으로 달려가 보니 모두들 망연자실한 표정들이었다. 나는 최대한 흥분을 가라앉히려 애쓰며 토골도르에게 물었다.
“어찌 된 일인가?”
상기된 얼굴로 그가 대답했다.
“모르겠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이르카가 자기 짐을 가지고 사라졌다.”
“이러면 곤란하지 않나? 앞으로 우리가 계속 교류를 해야 하는데….”
“우리도 몽골 정부에 각서를 쓰고 왔다. 다섯 명 전부 다 무사히 돌아가기로…. 그래야만 정부의 지원을 받고 계속 사업을 이어나갈 수 있는데 이런 일이 발생했다.”
참으로 황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친구는 믿을 만한 사람이었나?”
“그렇다. 이르카는 옛날에 내가 홍콩이나 중국을 갈 때도 함께 갔던 친구다. 하지만 한국에 와서 이렇게 없어지다니 믿을 수가 없다.”
이미 그의 형이 우리 나라에 들어와 일하고 있고, 며칠 전 친척 방문에도 왔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르카가 갈 곳은 어디든 있을 터. 그는 장애인들을 돕는다는 명목으로 들어와 돌아갈 시점에서 사라진 거였다.
따로 대책회의가 열렸지만 이미 도망간 사람을 찾아올 수도 없는 일이고, 범죄가 아니니 경찰에 신고할 수도 없었다. 주변에 알아본 결과 그렇게 사라진 외국인에 대해서는 취할 수 있는 뾰족한 방법이 없다는 거였다. 앞으로 우리 단체가 하는 모든 사업에는 제동이 걸릴 거라는 회신만 출입국관리소에서 왔다.
몽골로 돌아간 토골도르는 그 뒤 몇 번이고 이메일을 보내왔다. 미안하다는 뜻과 함께 아직도 그와 연락을 취하지 못했다는 내용이었다. 돈 벌러 한국에 온 그가 자신의 연락처를 알릴 리 없었다.
그 사건이 있은 지 한 달 후에 우리에게 몽골로 방문해 달라는 초청장이 토골도르로부터 날아왔다. 하지만 그들을 믿고 우리가 몽골에 간다는 것은 모험이 아닐 수 없었다. 갔다가 어떤 곤란한 처지에 놓일지 아무도 몰랐다. 결국 교류 사업은 그렇게 흐지부지되고 말았으며 나는 그들에게 나중에라도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 직접 가서 몽골의 상황을 확인하고 사업을 추진할지 여부를 판단하겠노라는 메일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걸로 더 이상의 교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도망간 그 친구는 몽골로 돌아갔나?”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럴 줄 알았다. 한국에서 돈을 벌고 있는데 쉽게 몽골로 돌아갈 마음이 들겠는가?”
“…….”
“몽골의 당신네가 이렇게 신뢰를 깼기 때문에 내가 사람들을 이끌고 몽골에 가지 못하는 거다. 무엇을 믿을 수 있단 말인가?”
“미안하다. 할말이 없다.”
“괜찮다. 당신 잘못이 아니지 않은가?”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어느새 자동차는 광장 사거리를 거쳐 구의동의 상가에 있는 내 집필실 주차장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딱 하나 마련된 장애인용 주차 공간은 관리인이 단단히 지키는 덕에 다른 차들이 대지 못해 늘 비어 있다.
휠체어를 조립해 탄 뒤 나는 그를 작은 상가 건물의 1층 구석에 있는 내 집필실로 이끌었다. 시간은 이미 점심 시간이 한참 지난 2시가 다 되었다. 육류를 주식으로 하는 몽골인인 그에게 마땅히 배달시켜 줄 음식이 생각나지 않은 나는 일단 아쉬운 대로 중국 음식점에 전화를 걸었다.
“고기 많이 들어가는 메뉴 뭐가 있죠?”
“글쎄요. 중국 음식에 고기가 많이 안 들어가는데 탕수육 같은 건 어떨까요?”
탕수육 하나를 시켜 놓고 둘이 먹기엔 너무 양이 많았다. 결국 나는 고기를 좀더 넣어 달라고 부탁하며 잡채밥을 두 그릇 시킬 수밖에 없었다.
전화를 끊자 그는 메고 온 배낭에서 작은 포장 꾸러미를 하나 꺼내 내밀었다.
“이게 뭔가?”
“당신에게 주는 작은 선물이다. 우리 몽골에서는 이렇다 하게 선물할 게 없다.”
그것은 가죽으로 병을 감싼 징기스칸 보드카였다. 병의 허리에는 징기스칸 얼굴의 청동 부조상이 붙어 있었다.
“또 징기스칸인가? 후후. 나는 당신에게 이걸 받을 자격이 없다.”
“아니다. 몽골에선 진정한 친구나 형제에게 이 보드카를 선물한다. 당신은 나의 형제다.”
그의 형제라는 말에 나는 더 이상 사양 못하고 그 선물을 받았다.
주문한 식사가 온 뒤 그와 나는 말없이 밥을 입에 넣는 것밖에 할 일이 없었다. 식사가 끝나자 그는 나에게 한국에 온 사정을 이야기했다.
“나에겐 전에도 말했던 청각 장애인 형이 하나 있는데 그가 곧 죽게 생겼다. 그래서 한국의 도움을 얻고 싶어 온 거다.”
“그런 일이 있었나?”
문제의 형은 열심히 공부해서 고등학교를 마쳤고, 러시아에 있는 사관학교에 입학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곳에서 군복무를 하면서 만성 신부전증이라는 병을 얻었다. 여러 번의 수술을 받고 조처를 취했지만 지금까지 신장투석을 받아오고 있는데 이제 그의 신장은 기능을 완전히 상실해 잠도 못 잘 정도로 고통받고 있는 모양이었다. 신장이식만이 살 길인데 비싼 수술비가 있을 리 없었다.
“몽골 사람들은 이런 병을 중국에 가서 수술을 받는다. 왜냐하면 그 비용이 다른 나라보다 싸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국에서는 신장 기증자를 찾는 것도 큰 문제가 아니다.”
“비용은 얼마나 드나?”
“수술비용은 2만 불에서 2만 5천 불 정도다. 재정적인 도움을 얻기 위해 몽골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흡족할 만한 결과를 못 얻었다. 이런 큰 돈을 몽골에서 마련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여기 오는 비용도 큰 돈 아닌가?”
“그 돈은 꿨다.”
“꿨다고? 어떻게 갚으려고?”
“다른 방법이 없다. 형을 위해 나는 최선을 다하고 싶을 뿐이다. 우리 보는 앞에서 그가 죽어가는 걸 볼 수가 없다.”
그의 말을 들은 나의 마음은 착잡했다. 몽골보다 한국이 잘 산다고는 하지만 한국이라고 해서 어디 눈먼돈이 굴러다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뜻은 잘 알겠다. 당신 형을 도와줄 온정이 필요하다는 것 아닌가?”
“맞다 우리 형을 꼭 살리고 싶다. 우리 형도 나와 같은 장애인이다. 우리 몽골 장애인계를 이끄는 지도자다.”
그의 형인 지나미드르는 청각 장애인으로 몽골 장애인계에서 국회의원인 간디 다음 가는 실력자라고 한다. 간디는 장애인도 아니면서 장애인 단체의 지도자 역할을 하는 사람이기에 실제적으로 장애인 당사자로서는 토골도르의 형이 지도자인 셈이었다.
경제가 낙후해 장애인에 대한 개념조차 없는 몽골에서 그는 장애 인권가로 우뚝한 사람인 것 같았다. 수년 전엔 자신의 동료들과 함께 장애인 인권을 위해 울란바토르 대통령 궁 앞에서 강력한 시위를 했는데 그 비용은 울란바토르 시내에 있는 자신의 아파트를 팔아서 댈 정도였다고 한다. 그때 그는 노숙 시위로 몇 달씩 정부에 대항해 투쟁했고, 잦은 언론 보도로 인해 몽골에서는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라는 거다. 투쟁의 결과 장애인 최초로 대통령을 만나 정책 건의까지 했다는 대목에선 토골도르의 얼굴에 자랑스러움이 넘쳤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의 마음에도 깊은 슬픔의 앙금이 일었다. 그것은 장애를 가진 사람이면 누구나 겪는 차별이 주는 설움이 켜켜로 쌓여 생긴 앙금이었다.
안경 쓴 사람은 장애인인가 장애인이 아닌가 하는 질문을 나는 종종 사람들에게 던지곤 한다. 장애인이라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다는 사람도 있다. 정답은 둘 다 맞는 것이다. 눈의 기능이 저하된 면에서 보면 분명 안경 쓴 사람은 장애인이다. 그러나 안경 하나만 쓰면 그 기능이 정상으로 올 수 있기에 사람들은 안경 쓴 사람을 장애인으로 여기지 않는다.
다른 장애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장애로 인해 결핍하거나 기능이 떨어지는 부분이 보조기나 여타의 방법으로 보완이 가능하다면 그들은 장애를 느끼지 못하며 살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을 장애인으로 만드는 것은 이 사회의 인식과 시스템인 것이다. 휠체어를 타고 가다 턱이나 계단을 만나면 그때 바로 장애인임을 깨닫게 된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 토골도르를 돕고 싶다는 생각에서 인터넷을 통해 신장기증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했다. 비록 한글은 모르지만 그는 내 곁에서 심장재단이나 각종 구호 단체의 홈페이지에 접속해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한동안의 웹 서핑 끝에 신장병의 경우 우리 나라에서도 10년씩 장기 기증자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전화도 걸어보았지만 대개의 경우 내국인에 한해 도움을 준다는 거였다. 토골도르에게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이 모든 사실을 있는 그대로 알리는 수밖에.
“토골도르. 우리 나라의 구호 단체나 재단의 도움을 받는 건 불가능할 것 같다. 게다가 한국의 경제가 요즘은 좋지 않아서 남을 도울 만큼 사람들의 마음에 여유가 없다. 어찌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
토골도르는 어두운 얼굴이었다. 끝없는 절망의 그늘이 그의 얼굴에 드리워지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가끔 우리나라 언론에 몽골 사람들이 딱한 처지에 놓인 것에 대한 기사가 나오곤 한다. 그러면 사람들이 온정을 베푸는 경우를 봤다. 몇 년 전에도 몽골 사람이 일해서 번 돈을 사기 당했는데 어떤 독지가가 나서서 도와주기도 했다.”
내 말을 들은 그의 얼굴엔 금세 화색이 돌았다.
“그런 도움을 어떻게 받을 수 있나?”
“글쎄, 신문이나 방송에 소개되면 가능한데….”
“당신이 도와줄 수 있나?”
“잘 아는 기자나 프로듀서가 없어서 확신할 수 없다. 대신 내가 당신에 대해 글을 써서 인터넷에 올리고 제보를 하면 어떠냐?”
“그게 가능한가?”
“해볼 수는 있다. 그러나 누가 관심을 가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당신이 해주기만 하면 고맙겠다. 해주는 것만으로도 나에게 큰 도움 주는 거다.”
실낱같은 희망으로 그는 나에게 매달렸다. 결국 나는 그를 내 옆자리에 앉히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기사제보
형제의 나라 장애인 여러분, 도와주세요.
―몽골에서 온 장애인이 도움을 청해
5월 20일 우리나라를 방문한 몽골 장애인 토골도르가 딱한 사정을 나에게 호소해 왔습니다. 내가 그를 알게 된 건 2002년 상하이에서 열린 DPI 아시아지역 총회 및 세미나에서였습니다. 그는 몽골 대표로, 나는 한국 대표로 만난 것입니다.
휠체어를 타야만 하는 지체장애인인 그는 한국 성모병원에서 여러 차례의 수술을 받고 걸을 수 있게 된 사람입니다. 그후 그와 나는 한국과 몽골 장애인 교류사업을 진행시켰고 몽골 장애인 5명이 한국을 방문한 적도 있습니다.
그런 그의 형인 지미나드르가 만성신부전증으로 절명의 위기에 빠졌다고 합니다. 곧 수술을 받지 않으면 죽는다며 형제의 나라인 한국으로 무작정 날아와 도움을 찾겠다고 나에게 온 겁니다.……
구구절절이 그의 이야기를 써서 파일로 저장한 뒤 나는 각 신문사와 방송국 홈페이지에 들어가 만에 하나 기자의 눈에 띄길 바라며 글을 올렸다. 어떤 곳은 회원 가입을 해야 했기에 작업은 거의 5시가 다 되어서야 끝이 났다.
“정말 고맙다.”
그는 홀가분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내 손을 덥썩 잡고 흔들었다.
“고맙긴. 오히려 내가 미안하다.”
“이제 마장동 친구 집으로 가야겠다.”
“가는 법은 아는가? 내가 태워다 줘야 하는 거 아닌가?”
“아니다. 당신 시간 더 뺏고 싶지 않다. 지하철역 가는 길만 알려달라.”
구의역은 300미터 정도 떨어져 있었다. 죽 큰 길 따라 걸어가기만 하면 되었다. 나는 집필실 문을 잠그고 건물의 입구까지 따라갔다. 그는 묵묵히 양쪽 지팡이만 번갈아 놀리며 앞만 보고 걸었다.
“고맙다. 나중에 또 보자.”
그는 길가에서 굳센 손을 나에게 내밀었다. 그는 나와 굳은 악수를 나누고 돌아서 걷기 시작했다.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에서 과거 가난했던 시절의 우리 장애인들을 보았다. 어느 누구도 돌보지 않는 소수자의 힘없는 삶.
“토골도르!”
나는 그를 황급히 불렀다. 저만치 가던 그가 고개를 돌렸다.
“잠시만 기다려라.”
나는 휠체어를 굴려 그에게 다가갔다.
“이건 나의 성의다. 미안하다. 오늘따라 돈이 별로 없다.”
나는 지갑 안의 만원짜리 예닐곱 장을 전부 꺼내 그에게 건넸다. 그의 굳은 턱이 가늘게 떨리는 걸 보았다. 빨개지려는 눈으로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고맙다. 친구. 평생 너의 고마움 잊지 않겠다.”
그는 머뭇거리며 뭔가 말하려다 그냥 돌아서 갔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다는 얄팍한 자위감이 들었다.
다음날 저녁 한 통의 전화가 집필실로 걸려왔다.
“여기 성동경찰서입니다. 몽골에서 온 토골도르라라는 사람 아십니까?“
“예. 어제 만났습니다만….”
“그 사람이 이르카라는 같은 몽골사람을 폭행해서 사건 조사중입니다.”
“네? 무슨 말씀이신지….”
“이르카란 사람이 불법 체류하면서 번 돈의 반을 토골도르에게 주기로 했다는데 약속을 어겨서 그렇게 된 모양입니다. 조서를 쓰는데 어제 만나셨다고 해서….”
“…….”
정신이 아득해지려 해 고개를 들자 책장에 얹어둔 징기스칸 보드카가 눈에 들어왔다. 청동 부조상의 강인한 인상을 가진 노인이 나를 마주보고 처연한 미소를 짓는 듯했다. 그건 옛 영화에 대한 돌이킬 수 없는 그리움 바로 그것 같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