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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韓民族! 옛 제국을 찾아서... 원문보기 글쓴이: ŊΕΜΘ樂蓮
유목민족 몽고가 뭘 할 수 있는가. 이리저리 떠도는 민족에게는 절대 고도 문명이 있을 수 없다. 티벳고원 북부에서 대대로 살던 화하족도 무엇 하나 발명하고 개발해본 적이 없다. 중토로 들어간 우리민족마저 끝끝내 미개화된 귤화위지의 땅이다.
몽한은 고작 동녕부와 쌍성총관부를 우연히 얻은 결과, 장성 이북을 차지했을 뿐이다. 장성 이남은 고려 영토고, 장안성은 고려의 도읍이었다. 대대로 고려황제를 부마로 삼아, 그에 의지해 산 나라다.
그런 몽한이 몽고 제일주의를 내세울 수 있는가. 몽한은 지배층이 고려 여인과 혼인하기 위해 열광하던 나라다. 그렇게 해서라도 조선의 계승국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백제의 황성을 차지하고, 고려 황제를 사위로 삼자,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던 몽한이다.
물론 몽한 땅에서는 몽고 제일주의를 관철했다. 다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중앙아시아도, 서양도, 중토도 정복하고, 고려 영토도 가로챈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색목인이 몽한 계층의 하나를 이루었다는 건 날조다. 우선 회족은 7세기부터 중국 대륙에 개별적으로 들어와 고도 한문명에 경도되어 우리나라에 그대로 눌러 산 아라비아인의 후손이지, 13세기에 몽한이 데려온 서방인이 아니다. 고려의 인구가 2억이면, 황하 하류 이북에는 최소 수백만이 살았다. 색목인이 몽한의 계층을 이루려면 몇 명이나 있어야 하는가. 최소 수십만 명이다. 몽한이 색목인을 그만큼 끌고 왔단 건가. 몽한인을 다 합쳐야 그만큼이나 됐을까.
고려의 어시책이 몽한에서 과거 응시자들의 수험 참고서였다. 색목인이 우리나라 역사책과 문학을 배워 몽한의 과거시험에 합격하고 문무 각 방면에 중용됐단 말인가. 몽한을 이끌어간 것은 쌍성총관부에 살던 고려인이다. 고려인이 고려 역사책과 문학서적에서 출제된 몽한의 과거시험에 합격해 몽한을 떠받친 것이다.
몽한의 수도 대도(현북경)가 옆에 있는 쌍성총관부에 살던 사람들이 바로 고려인이다. 고도 문명 기술을 보유한 고려인들이 조상 대대로 살아온 바로 그 땅에 살면서 몽한을 위해 계속 일해야 했다. 몽한은 중국을 지배하는 수단의 하나로서 색목인에게 몽고인에 버금가는 준지배자로서의 특권을 주었고, 문무 각 방면에서 중용한 것이 아니라, 고려문물에 기대어 잘 먹고 잘 사는 수단의 하나로 고려인(漢人)에게 몽고인에 버금가는 준지배자로서의 특권을 주었고, 문무 각 방면에서 중용한 것이다.
색목인이 만들어낸 중국 문화가 어디 있는가. 몽한은 1206년에서 1368년까지 존속한 나란데, 이 당시 서양에 무슨 문명이 있었단 말인가? 하기야 달랑 천막 하나 가진 유목민들도 거창한 문화를 만들었다고 우기는 형편이니까.
색목인이 한 거라곤, 고작 마르코 폴로가 ‘세계 경이의 서’(동방견문록)를 쓴 것밖에 더 있는가. 마르코 폴로가 쓴 ‘세계 경이의 서’도 우리나라가 5200년간 만든 문명을 보고 쓴 거다. 서양이 정말 문명화되었다면, 마르코 폴로는 ‘세계 경이의 서’를 쓰지 않았다.
마르코 폴로는 서양인에게는 미지의 세계를 최초로 여행한 사람이다. 그 외에는 달리 동아시아를 아는 서양인이 없다. 그럴 경우 길을 잃고 헤매다 고도 문명의 땅에 이르렀다고 하기보다는 그곳을 다스리는 황제가 자신을 우대해줬다, 그곳의 고위관리로 임명되었다고 과장하지 않겠는가.
한인(漢人)은 중노가 아니라, 고려인이다. 고려시대에도 고려인이라 하지 않고 한인이라 했다. 우리민족은 언제나 한민족이었다. 시대에 따라 조선인, 고구려인, 백제인, 신라인, 대진국인, 고려인이라 부르지 않고 한인이라 했던 것이다. 漢은 오로지 우리나라만을 가리키는 말이다. 몽한이 고려인에게 무기 휴대를 엄금한 것은 사실이다. 하도 무용이 자자한 우리나라니까, 무기 휴대를 허용하면, 몽한을 내쫓을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티벳고원 북부는 몽한의 정복한 땅이지만, 그 땅의 화하족은 추잡하다고 중토에서 나오지 못하게 봉쇄해버렸다. 중토 안에서 화하족이 무기를 휴대하던 말던 상관치 않았을 것이다. 무기를 가지고 있을 때도 언제나 이민족의 지배를 받던 중노니까.
몽고제일주의를 표방하면서 엄한 민족차별로 중국을 지배, 남송인(?)을 격하, 소외하고 억압, 차별했다고? 몽한에 의해 가장 멸시를 받고 소외받았던 종족이 송을 비롯한 중노였다는 건 사실이다. 티벳고원 북부에 사는 종족이 하도 미개해서, 대우해줄 가치를 못 느꼈던 것이다. “흙 침상에서 자며 토굴을 파서 아궁이를 만들어 그 위에 눕고, 신자의 두 배의 옷감을 반으로 접어 중간에 구멍을 뚫어 머리를 넣고 앞과 뒤를 매어서 입”는 중노를 대우해줄 인간이 세상에 어디 있는가. 남녀가 들에서 함부로 야합을 하며 냇물에서도 그 짓을 하는데(티벳고원 북부는 강수량이 적기 때문에 그런 냇물을 식수로 사용해야 했다.), 누가 차별하고 멸시하지 않는단 말인가.
몽한사 식화지에서 농상, 경제를 강조하고 있다? 유목민족 몽고가 농상을 중시한 것은 쿠빌라이 즉위(1260) 이후부터였다? 사막을 경작하고 살았나. 사막조차 경작했다는 몽고가 어째서 유목민으로 회귀했던가. 몽고고원은 사막에 비하면 천국이다. 단숨에 유목민족에서 농경민족으로 변신, 세계 최고의 문명국을 자랑했다가 또 다시 일시에 유목민족으로 추락했다고? 몽고는 처음부터 오늘날까지 변함없는 유목민족이다. 농경민족이었던 적이 없다.
몽한의 화폐제도는 지폐 중심으로 은과 전의 사용을 금지했다고? 지폐를 사용해본들, 몽한의 지폐가 고려에서 통용될 수 있는가. 고려 후기의 경제 개혁이다. 고려의 지폐를 몽한이 사용했으면 모를까, 그 반대는 될 수 없다.
몽한이 금한사, 요한사를 편찬했다고? 금한과 요한은 사초조차 쓰지 않았을 게 분명한 미개종족이다. 몽한은 고작 거란과 예맥족을 타림분지와 채달목분지 방어에 투입한 나라다. 동족이라고 봐준 게 아니다. 이성계 역시 자신의 신분을 아는 동족에게 황하 이남을 주었으나, 자신의 신분을 모르는 나머지 동족은 고구려 장성 이북에 팽개쳐두었다. 거란 역시 타림분지에 처박아 두었다. 금한사, 요한사는 명이 고려사를 분해해서 만들었다. 상상 속의 문명대국을 건설한 화노를 지배한 나라들이다 보니까, 화노는 자신들을 지배한 미개종족마저 문화종족으로 변신시키는 우수종족으로 날조하다 보니까, 요한사, 금한사도 문명국사로 만들어줘야 했던 것이다.
몽한이 송사를 써줬다는 대목에 이르면 가관이다. 억압, 차별하고 멸시한 나라의 사서까지 편찬해주는 나라가 어디 있단 말인가. 홍건적의 봉기 원인이 몽고인과 색목인 우대 정책에 따라 격하, 소외된 종족들에 대한 억압 및 차별 정책에 의해 생겨난 것이라고 하지 않았나? 몽한에 의해 가장 멸시를 받고 소외되었던 지역과 종족들은 남송(?)을 비롯한 중노였다고 하지 않았나?
자신들을 억압하고 멸시한 나라의 역사책까지 써줬다는 대목에 이르면 더욱 가관이다. 억압과 멸시를 지극히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태도가 아닌가. 날조를 위해서가 아니면, 명이 몽한사를 편찬해줄 이유가 있는가. 중국 대륙을 중토로 날조하다 보니까, 현황하 이북에 있던 몽한도 문명대국으로 만들어줘야 했던 것이다.
화하족의 나라를 확장해주고, 중국사 날조에 지대한 공헌을 한 청이 멸망한지 백년이 다 되도록 청사조차 써주지 않고 있다. 이게 상식이다. 그런데 몽한이 송사를 써주고, 명이 몽한사를 써주었단 말인가. 중노사가 우리나라 역사를 훔쳐서 쓴 책이라 청사는 써줄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청은 피지배종족의 나라라는 중국의 왕조 가운데 우리나라 역사를 훔칠 수 없었던 유일한 나라다. 청 당시는 이씨조선이 있었으니까. 청이나 이씨조선이나 무능하고 비열한 에맥족이 세운 나라니까, 그 역사의 열등함에 있어서도 우열을 가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씨조선사 가운데 중노가 탐낼 만한 역사가 없다.
예맥족의 나라 이씨조선은 앙부일구가 몽한의 천문기구 제작자 곽수경이 만든 앙의를 모델로 해서 제작했다고 날조했다. 한 번으로는 부족했던지, 제가역상집과 국조역상고에서 두 번에 걸쳐 날조했다. 천막과 짐승 몇 마리가 전 재산인 유목민족 몽고가 천문기구를 만들 수 있는가. 곽수경이 화하족? 명 때도 역법을 베껴야 했던 화하의 나라가 천문기구를 만들 수 있는가. 곽수경은 고려인이었다.
몽한의 문화를 발전시켜야만 했던 고려인 중에 천문기구 제작자까지 끼어 있었을 정도(곽수경이 몽한에 살았건, 고려에 살았건 현북경에도 기원전 1916년 이래로 고정 천문대가 존재했으니까, 천문기구 제작자가 있었던 건 사실이다.)면, 고려의 문화가 하나 남김없이 몽한에게 이식되었다는 것은 너무도 분명하지 않은가. 고려 태조, 광종, 성종에게 거듭 쫓겨나야 했던 미개 숙여진이 쌍성총관부도 아니고 동녕부에 도로 들어가 산 지 백년만에 고려인과 구분가지 않을 정도로 변신했다면, 이성계조차 고려인으로 둔갑해서 우리나라 통치자가 되었을 정도면, 고려의 문화가 아낌없이 몽한에게 이식되었다는 것은 너무도 분명하지 않은가.
단지 일본에 있는 문화재라서 왜가 만들었다는 일본이나, 단지 중국에 있는 문화재라서 화하족이 만들었다는 중국이나 이씨조선이라는 나라는 웃기는 나라 아닌가. 중국도, 일본도 다 우리나라 땅이었다.
삼국지는 위, 촉, 오가 멸망하고 천 년이 지나서 쓴 소설이다. 우리나라 땅을 배경으로 썼다. 몽고의 침입으로 자존심이 구겨진 한위노가 민족적 긍지를 되찾고자 쓴 소설이라는 것은 거짓말이다.
우선, 구겨질 자존심도 없었다. 중노가 언제는 이민족의 지배를 받지 않았던가. 중국사는 이민족의 정복사다. 그런데 유독 몽고 지배 하에서만 자존심이 무너졌던가. 그 옛날 자신들을 지배한 한민족국가 배달, 조선처럼 지배할 땅을 찾아 티벳고원 북부로 차례차례 모여든 종족들의 역사가 이른바 중국사다. 중토를 봉쇄했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구겨질 수도 있겠다. 그러나 몽한이 고려군에 쫓겨나자, 중토를 차지하겠다고 너나없이 벌 떼처럼 일어난 화하족이다. 몽한이 그 땅을 지배할 때는 숨죽인 듯 조용히 있었다.
삼국지는 중노가 몽고의 지배를 받던 때가 아니라, 주원장이 양자강 이남을 차지하고 나서 썼다. 중노가 역사왜곡 차원에서 구겨진 ‘자존심’을 들먹거리며, 대대로 우리나라 영토를 차지하고 있었노라고 우길 속셈으로 쓴 소설이다.
반면 우리나라 사람들의 역사인식은 몽고족도, 예맥족도 우리민족으로 만들고 만다. 5천 년간 우리나라의 지배를 받았다고 저들이 세운 나라가 우리나라라는 식이다. 일례로 “방이 없고 땅을 파서 나무를 걸치고 흙을 덮어 그 속에서 살며 수초를 찾아다녔으므로 언제나 정처없이 옮겨 살았”던 생여진을 마의태자 후손이 토지를 개간하고 곡물을 재배하면서부터 집 짓는 제도가 생겼다(고려사)고 하여 우리민족이란다!
지금의 중국사가 성립된 것은 청나라 때의 일이다 그 이전의 중국사는 이른바 중화민족의 역사(중화민족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티벳고원 북부에는 대대로 이민족들이 정복해서 나라를 세웠다. 민족이라는 말조차 성립할 수 없는 것이 중국이다.)였다. 몽고는 물론 거란(요), 여진(금)의 역사는 중국사가 아니었다. 이들 역사를 중국사에 편입시킨 것은 청나라였다. 청은 후금이요 여진의 나라였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잃어버린 우리 역사를 되찾아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의 후손이 생여진을 지배했다고 청이 우리나라? 그러면 전세계가 다 우리나란가. 메국, 잉글랜드, 프랑스 등에 우리나라 사람들 엄청 많이 가서 산다. 화하족도 5천 수백 년간 우리나라의 지배를 받기는 마찬가지다. 그럼 중국이 우리나란가. 일본 역시 우리 조상들이 줄줄이 지배하던 나라다. 고작 창해에 피 한 방울 섞었다고 창해가 될 수 있는가? 아무도 그런 생각에 동조하지 않는다. 우선 중노와 왜노부터 그런 생각에 단호히 반대한다. 왜노와 화노와 예맥족은 우리나라 영토와 역사까지 가로챈 배은망덕한 원수다.
중토에 선 나라를 모조리 중국사로 둔갑시킨 것은 중노가 피지배종족이라서 내세울 나라가 없어서 편법으로 고안해낸 것이지, 하나의 민족사라든가, 하나의 국가사가 아니다. 그러니까 중국사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허상이다.
우리나라가 아니라고 역사왜곡까지 했다. 미개 중노라고 역사왜곡까지 해서 중국사를 끝없이 부풀렸다. 우리나라가 아니라고 우리나라 영토도 다 가로챘다. 생여진을 아무리 우리민족이라고 우겨봐야 청은 우리나라가 되지 않는다. 하긴 북애도 생여진을 동족이라 그랬다. 그러나 생여진은 숙여진이 세운 청에서 피지배종족으로 있었다. 청이 생여진을 필요로 했던 건 생여진을 만주족으로 둔갑시키고, 자신들은 한족으로 변신하기 위해서였다.
중국은 우리나라 문화에 기생하며 우리나라 문명 속에 빠져 허우적대면서 세계 4대 문명을 외치고 중화사상을 외친 노예종족의 나라다.
일본 천황이 신상제에서 제사드리는 신은 신라신인 원신(園神) 1좌와 백제신인 한신(韓神) 2좌이다. 즉 모두 세 분의 한국신을 모시고 카구라(神樂)라고 부르는 제례무악(祭禮舞樂)을 연주하면서 천황궁의 신전에서 제사를 지냈다.(테이칸 기시키)
백제신은 왜 최초왕인 응신과 왜에 불교를 전한 백제의 성제라고 한다. 원신 우두천황 스사노오노미코도(須座之男命)는 신라신이라는데, 원래 우수하가 있었던 사천분지는 백제 영토였다. 한반도 춘천에 우두산에서 유래한 명칭이라는데, 한반도 역시 백제 땅이었다. 그렇다면 스사노오노미코도는 백제신인가. 아니다. 날조하지 않고 그대로 둔 것은 하나도 없다.
웃기는 건 일본왕이 일본인들 몰래 숨어서 신상제를 지낸다는 사실이다. 패전 직후 1947년부터 신상제날을 근로감사의 날로 정하고 일본인들이 놀 때, 비밀리에 제사지내고 있다. 18세기부터 벌써 쉬쉬하고 지냈을 게 분명하다. 정말 응신과 성제, 우두천황에게 제사를 지낸다면 일본인들 몰래 할 필요는 전혀 없다. 더구나 메이지나 히로히토, 아키히토는 백제가 아니라, 중국왜 출신이다. 응신과 성제, 우두천황에게 제사를 지낼 이유조차 없는 것이다. 불교를 전파해준 성제에게는 제사드리면서 일본 최초의 국가를 세워준 아신제에게 제사를 드리지 않는 건 뭔가. 메이지는 불교탄압을 혹독하게 한 자다. 그런 메이지가 불교를 전파해줘서 고맙다고 성제에게 제사를 드렸을 것 같은가. 응신은 백제 식민지의 후왕이다. 어쨌거나 24대 천지는 의자제의 3남인데, 백제 황제와 나란히 후왕에게 제사지냈단 말인가.
신상제는 ‘일본왕가에서 가장 중요한 대제’로, ‘천손강림’의 고사에서 유래된 오래된 행사다.(평성의 황실사전, 매일신문사, 1995) ‘일본천황은 한국인이다’에서는 “신상제에 천조대신(天照大神)을 제신으로 제사했다는 가사가 없다” 했지만, 원신과 한신이 거짓이다. 가장 중요한 제사에서 하늘을 비추는 가장 큰 신에게 제사지내지, 고작 가공의 백제신, 신라신에게 제사지내나. 천조대신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의 실체는 한인 안파견이다.
우리 한(桓)의 건국은 이 세상에서 가장 오랜 옛날이었는데 한 신이 있어 사백력(斯白力)의 하늘에서 홀로 변화한 신이 되시니 밝은 빛은 온 우주를 비추고 큰 교화는 만물을 낳았다.(삼성기전 상편)
“한님은 일곱 대를 전했는데 그 연대는 알 수가 없다.”(삼성기전 상편) 백제 역사서를 베낀 고사기에는 원래 안파견, 혁서, 고시리, 주우양, 석제임, 구을리, 지위리 일곱 분의 한인이 기록되어 있었다. 18세기에 역사날조하면서 완전히 뜯어고쳤는데, 얼마나 역사날조에 열중했으면, 숫자는 깜박해서 일본의 신도 일곱이다.
안파견을 천조대신으로 바꾸면서 성별부터 해서 모조리 고쳤다. 그것도 불안했던지, 또 다시 원신, 한신으로 고친 것이다.
스사노오노미코도 우두천황. 배달 혹은 조선의 통치자 중에 우두라는 별명으로 불린 인물이 있었던 것이다. 자오지 한웅으로 추정된다.
원신과 한신의 실체는 바로 한인 안파견, 신시씨 한웅, 자오지 한웅이다. 조선시대까지도 우리나라 피지배종족을 구한에 포함시켜 이들의 우두머리(우리나라 사람이다.)를 모아놓고 제사지냈다. “무술 28년 구한(九桓)의 여러 한(汗)을 영고탑에 모이게 하여 삼신과 상제에게 제사지냈다.” “임자 35년 모든 한을 상춘에 모이게 하여 삼신을 구월산에서 제사케 했다.”(단군세기)
중국왜. 우리나라의 피지배종족조차 오늘날까지 한인 안파견, 신시씨 한웅, 자오지 한웅을 기리어 제사를 지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이씨조선을 강점했을 당시, 예맥족이 감춰둔 한단사를 혈안이 되어 훔쳐가고, 단군은 몽고항쟁기에 만들어낸 신앙이라고 날조했다.
일본의 신도 역시 한인 안파견, 신시씨 한웅, 자오지 한웅을 받드는 제사를 종교화한 거다. 원래 조상에 대한 공경에서 시작했지, 종교가 아니었다. 삼황에 대한 제사를 신도로 변질시킨 것은 신라도, 백제도 아니고, 18세기 이후다. 역사왜곡하면서 삼황에 대한 제사를 그대로 둘 수 없으니까, 신도라고 날조했다. 일본인들은 그런 사실도 모르면서 신도를 믿고 있다.
일본 각 지역에 있는 신사며 신궁에서는 해마다 거창한 제사(마쓰리)를 지내면서, 신령을 모신 가마를 메고 수십 명의 가마꾼들이 “왔소이, 왔소이”하는 구령을 소리 높이 외치며 큰 거리를 누벼대는데, “왔소이”는 “한국에서 신이 오셨다”는 뜻이다. 이 신 역시 한인 안파견, 신시씨 한웅, 자오지 한웅이다.
일본의 모든 신사며 신궁 앞에 토리이(鳥居)라고 부르는 출입문이 있다. 신사의 경내에 들어서기 전에 세워져 있는 두 개의 기둥과 두 개의 가로대 나무로 만든 것이다. 토리이는 글자 그대로 ‘새가 사는 곳’으로 우리나라의 솟대다. 천신의 말씀을 땅에 사는 인간들에게 전해주는 새다.
우에다 마사아키도 솟대를 섬긴 조선의 천신신앙이 일본의 마쓰리라고 했다. 그러나 소도는 배달 시대에 벌써 있었다.
치우 천황이 이 땅을 개간하고 구리와 쇠를 캐내서 군대를 조련하고 산업을 일으켰다. 때에 구한은 모두 삼신을 한 뿌리의 조상으로 삼고, 소도를 관리하고 관경을 관리하며 벌을 다스리는 것 등을 모두 다른 무리와 더불어 서로 의논하여 하나로 뭉쳐 화백하였다.(삼성기전 하편)
(중노들은 조선은 귀신을 섬기고, 중노의 조상으로 삼은 은나라는 신정국가라고 우긴다. 그러나 은나라도 우리민족이 세운 나라로 “큰 나무를 세워 방울을 걸어놓고 귀신을 섬겼다.” “신축 2년 여러 한들은 조서를 받들고 소도를 증설하여 하늘에 제사지냈다.”(단군세기) 주나라라고 다르지 않다.)
중국왜조차 한인 안파견, 신시씨 한웅, 자오지 한웅을 해마다 제사지냈는데, 예맥족 이성계와 그 후손들은 우리나라 역사를 말살하고 티벳고원 북부에서 살다가 그 땅에 묻힌 기자묘까지 만들고 제사지냈다. 이도가 날조 평양에다 가짜 단군묘를 만든 것은 우리나라의 강역이 한반도라고 역사날조하기 위해서였다.
티벳도 티벳고원에 남아 있는 한 줌의 문명이 탐나서, 러시아도 동토의 대제국이라는 지위가 탐나서, 몽고도 중노가 날조해준 찬란한 역사와 몽고고원이 탐나서 원래부터 그 땅에 살고 있었다고 날조하는데, 동참했다. 동남아도 우리나라 속국이라는 사실을 은폐하고 독자문명을 건설한 나라가 되기 위해 중노의 역사날조에 협력했다. 5300년을 이어온 한제국은 피지배종족들에 의해 나라와 역사가 해체된 것이다.
우리나라는 1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갖고 고려 때까지 동아시아를 지배했지만, 지금 동아시아 땅 어디에도 한민족의 나라는 없다. 노예종족 중족이 동아시아를 휩쓸었다. 대한민국은 스스로 예맥족이라 여길 만큼 예맥화된 나라다.
1만년의 찬란한 역사를 갖고 고려 때까지 동아시아를 지배한 한민족도 미개종족과 섞이자, 미개화를 피할 수 없었다. 중토로 들어간 치우씨의 후예도, 중국왜와 섞인 일본도, 중노와 섞인 고려인도, 다 미개인이 되었다. 예맥족이 지배한 이씨조선도 미개의 나락으로 떨어지긴 마찬가지다.
노예종족이 역사를 뒤바꾸고, 우리문명의 주인 행세를 했지만, 한민족의 정신까지 물려받을 수는 없었다. 그 땅의 한민족도 스스로를 중노라 여긴 순간, 더 이상 한문명을 지탱할 수 없었다. 명, 청은 끝없이 추락만 한 나라다.
민족성이 바뀌고, 문화가 달라질 때에는 그럴 만한 계기가 반드시 존재한다. 찬란한 문명과 역사의 주인공이 갑자기 미개화될 수는 없다. 과거와 단절될 때만이 미개화도 가능하다. 몽고의 지배가 미개화의 계기가 될 수 있는가. 중노는 미개 몽고마저 자신들이 문명화시켰다고 했다. 실상 몽고의 지배로 중노의 미개화에 가속도가 붙지는 않았다. 역사가 단절된 사건이 발생하지 않은 날조 중국사에 의하면, 동양과 서양의 전세역전은 불가능하다. 이씨조선의 등장으로 동양의 과학기술 발전이 멈추고 말았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기술을 전수받은 서양이 동양을 추월할 수 있었다.
서세동점? 이성계와 주원장이 한문명을 추락시켰기 때문에 가능했다. 한문명이 절정에 도달한 고려가 존속했다고 해도 서세동점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한문명이 유럽으로 흘러들어가, 미개 유럽을 문명화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