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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빤지에서 널빤지로 나는 디뎠네 |
I stepped from Plank to Plank
Emily Dickinson
I stepped from Plank to Plank
I knew not but the next |
널빤지에서 널빤지로 나는 디뎠네
에밀리 디킨슨
널빤지에서 널빤지로 나는 디뎠네
나는 알지 못했어 |
위의 시는 '인생의 길'에 관한 이야기이다. 인생의 길은 항상 위험하고 불안하며, 그 앞길을 예측할 수 없다. 시인 디킨슨은 인생의 여정을 얇은 널빤지로 비유하여 그 험난함과 위태로움을 이야기하고 있다. 널빤지(Plank)는 얇게 자른 나무판으로, 굳은 땅이 아닌 허공에 가설(假設)된 구조물을 뜻한다. 널빤지는 의미상 살얼음판과 동일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우리가 잘 쓰는 사자성어에 여리박빙(如履薄氷)이라는 말이 있는데, "마치 살얼음판을 밟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또 다른 비슷한 경우로, '일엽편주(一葉片舟)', 또는 '외줄타기' 등의 표현이 있다. '일엽편주'는 망망대해에 떠 있는 한 조각 잎과 같은 불안한 형국을, '외줄타기'는 정신을 놓으면 나락으로 떨어지는 불안한 처지를 비유하는 데 쓰인다.
미국의 여류 시인 디킨슨(Veily Dickinson:1830-1886)은 심성이 여리고 예민한 작가였다. '뉴잉글랜드의 신비주의자'라고 불렸던 그녀는 엄격하고 보수적인 동부 애머스트(Amherst)지역에서 자란 탓에 청교도주의(Puritanism)의 감정에 지배되었으며, 그만큼 종교에 대한 회의와 갈등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의 시기는 전근대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였다. 그녀가 태어날 무렵 뉴잉글랜드 지방에는 이미 정신적·문화적 풍토에서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남북전쟁의 위기가 절정에 달하고 있었으며, 산업혁명으로 인해 이미 사회는 물질화·획일화로 치닫고 있었다. 1850년 경에 물질적인 풍요가 최고조에 달하여 뉴잉글랜드 지역은 세계 각국의 문화와 국제적인 지성이 집결하여 지적 풍토에 거대한 회오리가 일고 있었으며, 신앙심으로 공동체를 유지해 가던 뉴잉글랜드의 전근대적 문화는 사라지고 있었다.
이에 디킨슨은 자신의 뿌리이자 전통인 퓨리터니즘이 더 이상 지탱할 힘을 잃었음을 감지하고 그것에 대치할 새로운 가치를 찾았으나 어릴 적부터 영혼에 깃들어진 종교전통의 깊은 뿌리는 새로운 탐구를 방해하였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심한 회의와 불안을 느끼면서 상실감과 정체성의 혼란을 떨어내지 못했다.
마운트 홀리요크(Mount Holyoke) 여자신학교에 다닐 당시 학우들 가운데 오직 그녀만 신앙고백을 하지 못했는데, 이는 자신의 정신적 지주였던 전통적 신앙이 현실의 인생과는 상반된 것임을 감지했기 때문이었다. 신앙고백 거부의 사건은 그녀의 의식을 곤혹스러움과 부담감으로 내면에로 침잠(沈潛)케 했고, 이후의 생애동안 그녀는 정식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 살았다.
신학교를 졸업한 후 그녀는 조부(祖父)가 이사장으로 있는 애머스트 대학에 입학하였다. 그런데 이 대학의 설립목적은 사라져 가는 캘빈주의 신학의 이념과 전통을 보존하기 위해 설교사나 교사를 육성하는 것이었다. 그 건학이념과 교육과정은 자유로운 영혼을 지녔던 그녀에게 맞지 않았다. 그녀는 고민을 거듭하다가 대학을 중퇴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애머스트 대학의 존슨 예배당 전경
그녀는 생애 단 한번 마음에 그리는 이를 만났는데, 1855년 의회에서 일하는 아버지를 만나려고 여동생과 함께 워싱턴 D.C.로 여행을 떠났을 때, 필라델피아에서 찰스 워즈워스(Charles Wordsworth) 목사의 설교를 듣게 된 이후 그의 열렬한 예찬자가 되었다. 그녀는 수십 차례에 걸쳐 워즈워스 목사와 서신을 주고 받았으며, 그의 존재와 서신의 글들은 그녀에게 큰 위안과 삶의 의지가 되어 주었다. 그러나 첫 사랑이자 우상이었던 워즈워스 목사는 뉴잉글랜드를 떠나 캘리포니아로 떠나 그 곳에서 영면(永眠)하여 그녀의 마음을 슬픔에 사무치게 하였다.
이후 그녀는 이층집에서 꽃밭을 키우며 은둔하였다. 항상 흰 옷만 입었고 집으로 찾아온 사람도 거의 만나지 않았는데, 그 비밀스러운 은거를 충실한 여동생이 잘 지켜주었다.
그러나 그녀가 마냥 단조롭고 폐쇄적인 삶을 살아간 것만은 아니었다. 같은 공동체 내의 사람들과는 접촉을 꺼려했으나 몇몇 친분이 두터운 사람들과 편지를 통해 더욱 친밀한 관계를 매었다. 그녀는 어느문인들보다 많은 편지를 남겼다. 그녀의 편지는 그녀에게 정신적인 교감과도 같은 외부와의 링크였다. 실제로 그녀는 자신의 시들을 "세상을 향해 보내는 편지"라고 하였다.
그녀는 살아 생전 시집을 편찬하지 않았다. 그녀의 시는 단 일곱 편만 출판되었고, 그 외 1,770여 편에 달하는 시는 디킨슨이 세상을 떠난 뒤 간행되었다. 그러나 그녀가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출판을 거절할 목적으로 시를 쓴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편지에 의하면, 1858년 디킨슨은 어린 시절 이종사촌 루이스 노크로스(Louise Norcross)와 함께 시를 꾸준히 지은 뒤, 1862년에 문예비평가 허긴슨(Thomas Wentworth Higginson)에게 자신의 시에 대한 평을 부탁하는 편지를 썼다. 당시 허긴슨은 <대서양 문예월보:Atlantic Monthly>라는 글에서 "젊은 기고가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 디킨슨과 여러 예비작가들의 마음을 창작의 열정으로 약동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녀와 허긴슨의 문학관은 너무 달랐다. 허긴슨은 운율과 형식이 정제되어 있는 정통적인 시를 존중했고, 디킨슨은 보다 자유로운 시인관을 가지고 있었다. 히긴슨은 디킨슨의 다듬어지지 않은 듯 보이는 시들을 "돌출된 발걸음"이라 표현하였다. 자신의 시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것을 안 디킨슨은 결국 히긴슨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었다.
김 단 작, <슬픔 속으로>
"나는 당신이 내 시의 출판을 미루자고 제안했을 때 웃었습니다. 내 생각에는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뜻밖이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명성이 나에게 속한 것이라면 나는 그것으로부터 도망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나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을 좇느라 오랜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내 강아지마저 나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차라리 맨발로 서 있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그녀는 살아있을 때의 일시적 명성을 포기하고 최후의 영원한 승리를 기약하며, 출판을 포기하고 무명의 길을 걸어갔다. 어릴적에 그녀를 짓누른 종교체험은 그녀를 한동안 괴롭혔으나 그녀는 그 번민과 고통을 시작(詩作) 활동을 통해 극복해 내려 했다.
그녀는 더 이상 자신을 지탱시켜 줄 수 없는 문화적 전통으로부터 떨어져 새롭게 비상하기 위해 철저하게 자신의 경험과 주체적 인식에 관한 시들을 창작하였다. 그러기에 그녀의 시들은 그의 고백록이요 문학으로 반영된 거울이었다. 디킨슨의 삶은 그 자체가 역설이었다. 그녀가 세상을 향해 표출한 거부나 포기는 시인으로서, 또한 고난의 생을 살아가는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생명을 지탱해가기 위한 방책이었다. 이와 같은 디킨슨의 생애는 그녀의 삶이 세상의 진정한 가치와 의미를 끝까지 탐구하는 과정이었음을 보여주며, 그녀가 지녔던 맑은 영혼과 예리한 통찰력은 어떤 시대의 시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이미지와 사상을 오늘날에까지 전해주고 있다. 삶의 진정성이 강조되면 고통과 시련도 따르는 편이다. 그녀의 시 창작이 격조를 띄어 갈수록 그녀 자신이 겪었던 마음의 양면성과 그 혼란 또한 커졌다. 그래서 우리는 그녀의 시를 통해 한 지성인의 불안과 회의를 발견하지만, 보다 깊이 나아가면 세상의 변화를 추구하지 않고 올바른 인간관을 세우려는 그녀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김명식 작, <팝 플라워>
디킨슨의 시에서 널빤지(Plank)라는 단어는 도처에 발견되고 있다. 그 중에 주목할 만한 것들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괄호 안의 번호는 디킨슨 시의 목록 번호이다.
(243)
나는 한 하늘을 알았다, 어떤 텐트 같은
그 빛나는 안뜰을 감싸기 위해
그 말뚝을 뽑고 사라진다.
널빤지 소리 없이
혹은 못 터진 곳이나 목수없이 --
하지만 바로 응시의 먼 거리가
한 구경거리의 퇴장을 돋보이게 한다.
북아메리카에서 --
이 시 구절에서 디킨슨은 텐트같이 빛나는 새로운 하늘을 발견한 뒤, 그 말뚝을 뽑는다. 한 시대가 저물고 새로운 신천지가 개막되는 현장에서 널빤지의 삐걱대는 소리조차 들려오지 않는다. 이 요동치는 북아메리카에서 옛 시절 구경꾼들은 저 멀리 사라진다.
(1433)
부둣가의 다리는 너무나 약해
우리 믿음이 밟고 다니기엔,
어떤 다리도 아래가 그리 흔들리지는 않지.
아직 그러한 군중들은 오지 않았어.
신(神)처럼 오래 된 다리
정말 그이가 만들었지.
그이는 널빤지를 시험하라고 그이 아들을 보냈어.
이 구절에서는 불안한 시대에 보여지는 현상들, 즉 자신들을 지탱하는 본질이 허물어지고 그 굳건했던 전통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는 것이 나타나고 있다. 과거의 도그마(Dogma)만 강조하는 절대자는 변심한 포도밭 일꾼들에게 자신의 아들을 보내나, 이미 그들은 '신의 아들'을 인정하지 않고, 널빤지도 이미 세상의 버팀목이 되지 못하고 있다.
(1198)
부드러운 바다가 집 주위에 밀려왔다.
여름 공기의 바다는
마술 널빤지를 올리고 떨어뜨렸다.
걱정없이 항해했다.
나비가 선장이었고
벌이 조타수였다.
그리고 온 우주가
기뻐하는 승무원이었다.
이 구절에서 시인은 새로운 마술 널빤지를 바다에 던지며 항해를 시작한다. 희망과 근면을 상징하는 나비와 벌이 동행하고, 온 우주의 피조물들은 시인의 거침없는 여정을 기뻐한다.
(280)
하늘이 하나의 종이듯
존재는 하나의 귀였고
나와 정적은 이상한 종족이었다.
여기 홀로 조난당한,
다음엔 이성의 널빤지가 부서졌고
나는 아래로 아래로 떨어져
세상에 내동댕이쳐졌다.
그렇게 앎은 끝났고, … 그 다음엔 …
그러나 시인은 새로운 항해에서 '정적(靜寂)'이라는 모진 세파를 만난다. 조난을 거듭하고 급기야 바다 한가운데서 널빤지를 잃어버린다. 세상을 향한 그녀의 과감한 실험은 이제 종료되었고, 그녀는 좌절과 상실감 속에서 죽음만을 기다린다.
장미정 작, <무의식의 정원>
디킨슨의 생의 본질과 이상을 향한 극적인 탐색은 세상의 냉대와 무관심으로 돌아왔다. 이 무심하고 절망적인 상황에서 우리는 김기림의 시 <바다와 나비>를 떠올린다.
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 준 일이 없기에
흰 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두렵지 않다.
청(靑)무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公主)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이 시에서 바다는 현실의 냉혹함을, 나비는 순수한 영혼을, 청무밭은 그 영혼이 꿈꾸었던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세상을 의미한다. 시인 디킨슨은 세상의 무심함과 그 압박감을 알지 못하고 새로운 경지를 찾아 내려갔으나, 그것은 자신이 꿈꾸던 모습이 아니었다. 아직 그녀의 시대는 개화하지 않았던 것이다. 처절하고 외로운 마음에 마음 한 켠이 새파랗게 멍들어 그녀는 다시 무심한 세상으로 돌아와 날개를 접고 은둔하였다.
여류 시인 디킨슨의 생애와 작품들은 그녀가 세상을 떠난 얼마 뒤에 빛을 보게 되었다. 오늘날 디킨슨은 휘트먼(Walt Whitman)과 함께 미국 현대시의 선구자요, 위대한 미국의 여류시인으로 기록되고 있다.
대체로 마음이 올곧고 순수한 사람들이 더 많은 번민과 갈등을 겪게 된다. 세상과 타협하는 이들은 삶의 진정성에 대한 숙려(熟廬)없이 미끄러지듯 세파(世波)를 피하며 살아간다. 그렇지만 세상을 진심으로 통찰하고 진리의 방향을 모색하는 이에게는 하찮은 유혹이나 시련을 크고 중대한 요소로 여기며 고민하고 방황한다. 시인을 비롯한 문학가들이 이와 같은 이들이다. 그들이 먼저 고뇌하고 앞서서 불안한 널빤지 길을 헤쳐 나갔기에 우리는 그들로부터 많은 인생의 교훈을 배우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