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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YNXwlo3Opcc
법륭사금당벽화
法隆寺金堂壁畵
호류사금당벽화
고구려의 담징(曇徵)이 그렸다고
전해지고 있는 벽화
내용
그러나 호류사(法隆寺)의 금당벽화는
금당의 건립 연대,
벽화의 제작자에 대하여
여러 가지 문제가 있어
쉽게 단정하기 어렵다.
본래 호류사는
쇼토쿠태자(聖德太子)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창건 연대에 관해서는
598년설과 606년설로 엇갈리고 있으나
7세기 초에는 이미 건립되었던 것이 확실하다.
일본학계에서는
690년 낙뢰로 말미암아
호류사가 불타 버린 뒤,
재건되었다는 주장(再建論者)과
재건되지 않았다는 주장(非再建論者) 사이에
논쟁이 뜨겁다.
그리고 재건 연대에 관하여서도
덴무 연간(天武年間, 673∼686년)부터
시작되었다는 설과
지토 연간(持統年間, 687∼696년)에
이루어졌다는 설이 엇갈리고 있다.
그러나 1926년에 실시된
탑지 발굴(塔址發掘)과
1939년에 실시된
호류사 후몬원(普門院) 뒤편
와카쿠사 가람(若草伽藍)의 발굴을 통하여
호류사는 본래의 위치에서
옮겨져 재건되었다는 의견이
우세하게 되었다.
호류사의 금당은 수리하던 중
1949년 1월 26일
화재가 일어나
내진(內陳) 위쪽 소벽(小壁)에 그려진
비천상(飛天像)을 제외하고는
모두 불타 버렸다.
따라서 호류사의 금당벽화에 대한 연구는
불타 버리기 전에 찍어 두었던
사진 자료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있다.
호류사 금당의 평면 구성은
외진(外陳)과 내진으로 구성된다.
금당의 중앙부에
수미단(須彌壇)이 자리한다.
이 수미단을
10개의 두리기둥이 둘러싸고 있는데
이를 내진이라고 한다.
이 10개의 두리기둥은
다시 각각 사각기둥이 2등분되어
모두 20개의 작은 벽을 이루고 있는데
이곳에는 벽면마다
비천도가 그려져 있었다.
이 비천도는 해체 수리 중에
일찍 분리되어서
화재를 면하고
그 원래의 모습을 보존하고 있다.
정면(남쪽 면) 5칸,
측면 4칸으로
역시 18개의 두리기둥으로
이루어진 외진은
남쪽 문이 3개,
나머지 동쪽·서쪽·북쪽은
각각 1개씩의 문이 나 있어
벽면은 모두 12개소가 된다.
이 외진의 벽에는
석가정토(釋伽淨土, 동벽)·
아미타정토(阿彌陀淨土, 서벽)·
약사정토(藥師淨土, 북벽의 동쪽)·
미륵정토(彌勒淨土, 북벽의 서쪽)와
여러 보살도 등이 그려져 있다.
이들 벽화는 공통적인 시대 양식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벽면에 따라
각기 다른 작가들이
나누어서 그렸던 것 같다.
호류사 금당벽화에는
인도나 중앙아시아 그리고
중국 당대(唐代) 미술의 영향이
함께 갖추어져 있다고 보아진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삼국시대
고구려·백제·신라의 영향을
배제할 수 없다.
즉, 고구려 고분 벽화에 보이는
중앙아시아적인 채색법이나
철선묘(鐵線描)를 위주로 한 묘법(描法)
그리고 이른바 우리 나라에서 유행한
사방불(四方佛) 사상 등으로 미루어 볼 때
호류사 금당벽화에
한국계 화사씨족(畫師氏族)의
참여 가능성은 매우 높다.
일본의 『반구고사편람, 班鳩古事便覽』에서
백제계(百濟系) 지리불자필(止利佛子筆)이라고
기록된 사실이나
고구려 담징 작이라고
구전되는 사실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보여 주는
한 예라 생각된다.
출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나라 호류지(법륭사) 이야기
내가 묵고 있는 곳은
‘게스트 하우스는 디어 나라'인데
Dear Nara가 아닌
Deer Nara다.
나흘 머무는 동안
주인 얼굴은 한번도 못 보았고
종업원은 부킹닷컴에서
예약 취소하고
현금으로 달라는 부탁을 하는 등
이상한 곳이지만...
싼맛에 묵고있다.
하루에 2만 7천원~3만 5천원
정도를 받으니
배낭여행자에게는
이보다 좋은 장점이 있으랴.
나라역에서 내려서
구글 지도만 보고
우연히 찾아든 집이다.
며칠 더 묵기로 하니 시간이 남는다.
그래서 오후에는 나라역에서
15km 정도 떨어져 있는
법륭사(호류지)에 가보기로 하였다.
나라역 앞에서
98번 시내버스를 타고 가야 한다.
버스가 여러 곳을 들리는 바람에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법륭사는 시골에 위치해서 그런지
이제까지 내가 다녀본 사찰중에서
가장 절다운 냄새가 난다.
대 강당에 옆에는
방문객이 잠시 앉아있도록
의자가 준비되어 있다.
다른 사찰 법당에는
못 들어 가게 해놓고
관람객들이 쉴 수 있는 휴게소도 없다.
그런데 법륭사는
강당에 의자가 있어서
잠시 쉴 수도 있고
방문객들이 쉬어갈 수 있는
휴게소도 만들어 놓았다.
절에 가면 스님이 반겨주지는
못 하더라도
차는 못 주더라도
잠시 앉았다가도록
의자라도 있어야 되는게 아닌가?
이렇게 가는 데마다
관람료를 받고 입장료를 받으면
그돈으로 다 무엇을 하는가?
나는 승복을 입었다고
여기도 무료로 입장은 했지만
불자들이나 방문객들은 참 불만이겠다.
법륭사 종무소가 보여서
종무소에 찾았다.
종무소 직원에게
하루 묵어갈 수 있냐고 물으니
안 된다고 해서 스님을 불러 달라했다.
젊은 스님이 나오길레
같은 부탁을 하였다.
그는 단호하게 'No!'라고 말했다.
생각도 안 해보고
'No!'라고 말하는게 괘씸해서
같은 부처님의 제자인데
왜 내가 이 절에서
잘 수 없는 거냐고 다시 물었다.
그는 난처해 하면서
다시 안 된다는 말만 되풀이 했다.
묵는 것은 안 될 것 같아서
이번에는 법륭사가 백제스님들이
불교를 전해주어 창건 된 사찰이냐고 물었다.
'Maybe'라고 그는 대답한다.
그는 중국에서
불교를 받아 들인 것이라고 했다.
설득을 시키는 것은 불가능하고
그래도 승려라고 입장료를 받지 않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법륭사 정류장에 내려서
좁고 길고 아득한 소나무 길을 따라
사찰로 걸어 들어간다.
소나무 길은 좁고 긴데
옆으로 상가가 밀집해 있어서
일본사람들은 보통
상가옆 길을 걸어간다.
가장 먼저 만나는 남문(南門)을 통과하면
웅장한 중문(中門)이 나온다.
이 중문옆에 잘생긴 금강역사
두 분이 지키고 있다.
왼쪽의 금강역사는 눈이 무섭고
오른손을 떨 듯이 펴고 있어
긴장감과 동시에
그가 얼마나 분노하고 있는지를
느끼게 해준다.
기발한 착상이다.
나는 일본여행을 하기전까지는
일본의 불교는
백제에서 전해 주었기에
일본불교는 백제 불교의
아류라고 생각하였다.
이것이 한국인으로서
일종의 문화적 우월감을 갖게 했다.
그러데 일본의 사찰을 다니면서
그 우월감은 산산히 깨지고 말았다.
가는 곳마다 탁월하고 감탄스러운
문화재가 발에 치인다.
크기가 얼마나 큰지
세계최대라는 타이틀
세계 최고라는 타이틀이 붙어있다.
일본은 섬나라여서
외적의 침입을 받은 적이 없어서
목조건물도 이렇게 오래
살아 남아 있나보다.
그 중에서 법륭사 법당은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교과서에서 보아서
친숙한 이름이기도 하다.
백제의 솔거, 고구려의 담징 등
백제의 숨결이 가장 많이 느껴지는 절이다.
중문을 통과하면
5중목탑(五重木塔)과
금당이 평행선으로 서있다.
이러한 구조는 어디서도 찾아 볼 수 없다.
오중석탑은 법륭사의 상징 같은 것.
내부를 관람하기 못 하게 막아놓아서 아쉽다.
철망으로 막아 놓지 말고
관람객을 위해서
유리로 막아 놓으면 좋을 텐데.
이 목탑과 금당은
일본으로 건너간 도래인(渡來人)들에 의하여
건립되었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백제를 百濟로 쓰고
‘구다라’라고 읽는다.
신라를 新羅로 쓰고 ‘시라기’,
고구려를 高句麗로 쓰고
‘고쿠리’라고 읽는 것은 납득이 되지만
백제를 '구다라'라고 읽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고 한다.
그래서 '구다라'는 백제의 음사가 아니라
‘큰 나라’가 '구다라'로
음역된 것이라고 본다.
백제인이 바다를 건너 왔다고 하여
도래인(渡來人)이라 하는데
이것을 짧게 '도리'라고.
이번에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관륵(觀勒)스님이다.
스님은 일본에 달력의 역법,
천문학, 지리학 등을 가르쳤고
쇼토쿠 태자는 매우 존경하여
602년
관륵스님을 법륭사의 초대 주지로
임명하였다 한다.
일본의 최고 오래된 사찰의 주지가
백제스님이라니...
1993년
일본의 천문학자
후루카와 기이치로(古川麒一郞)
도쿄천문대 교수는,
그 당시 자신이 발견한
우주의 소행성에다
관륵 스님의 이름
‘간로쿠’(KANROKU, 관륵)라는
이름을 붙여서
국제천문연맹(IAU)에 등록했다고 하니
관륵스님이
일본에서 얼마나 존경을 받아왔는지 알겠다.
관륵 스님에 이어서
610년에는 고구려 학승
담징 스님이 건너왔다.
일본의 유명한 종교철학자이자
미학자(美學者)인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1889~1961)는
그의 저서 『조선과 그 예술』에서
"일본의 국보로서 세계에 자랑삼고
세계의 사람들도 그 미(美)를 시인하고 있는
작품의 대부분은
과연 누구의 손에 의하여 만들어졌는가?
그 중에도 국보라고 부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의
거의 전부는
실로 조선의 민족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그것들은 일본의 국보라 부르기보다는
정당하게 말하자면
조선의 국보로 부르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일본인 중에서도
용감하게 이런 말을 한 사람도 있다고 하니
나중에라도 '야나기 무네요시'라는
사람에 대해서 알아 보아야겠다.
웅장한 법륭사가
소박하고 정감있게 느껴지는 이유중의 하나는
절의 담이 흙담이기 때문이라고본다.
흙으로 만든 담장에
기와 지붕을 얹었는데
어떻게 만들었는지
그 흙담은 표면이 매끄럽다.
우리네 울퉁불퉁한 초가집 흙담이 연상되어
친근하게 느껴진다.
흙담은 관리하는 일이 쉽지 않을 텐데
오랫동안 흙담을 고수하는
법륭사에 박수를 보낸다.
아래 소개하는 내용은
사찰에서 나누어준 한글 팜플렛과
인터넷에서 구한 자료들을
내가 임의대로 편집한 것이다.
금당에 동조 약사여래좌상(국보)의
광배명(光背銘)에
'요메이 천황이 스스로 병 구완을 위해
가람건립을 발원했으나,
요메이 천황이 얼마 안 가 사망했기 때문에
유지를 받든 스이코 천황과
쇼토쿠 태자가
607년 불상과 절을 완성했다.'는
기록이 있다.
법륭사 사적기에 따르면
'중문의 인왕상과 5중탑 1층에 안치된
소조 조각군은 711년 제작되었다.'
팔각지붕의 몽전을 중심으로 하는 동원 가람은
738년
승려 교신(行信)이 건립한 것이다.
『일본서기』 27권에
'덴치 천황 9년(670년)에
호류지는 한 채도 남김없이 소실되었다.
(夏四月癸卯朔壬申 夜半之後
災法隆寺 一屋無餘)'는
기록이 있다.
925년에는
대강당, 종루가 다시 소실되고
1435년에는
남문(南門)이 소실되는 등,
몇번의 화재를 겪지만,
산 전체가 소실되는
대화재는 겪지 않고
건축물, 불상을 비롯해
각 시대의 많은 문화재를
오늘날에 전하고 있다.
근대에 들어서는 폐불훼석의 영향으로
절을 유지하기가 곤란해져
1878년(메이지 11년)에는
쇼토쿠 태자의 화상(唐本御影)을 비롯한
300여 점의 보물을
당시 황실에 헌납해
금 1만엔을 하사받았다.
이 보물들은 "호류지 헌납 보물"로 불려
그 대부분은
도쿄 국립 박물관의
호류지 보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도쿄박물관을 가야 하는 이유가 생겼다.
법륭사 금당 벽화
금당은 탑과 함께
사찰의 서원에 위치해 있다.
금당은 2층으로 지어져 있는데,
1층에 한 겹의 지붕이
추가적으로 지어져
마치 3층인 것처럼 보인다.
이 추가한 지붕은
8세기 지어진 것인데,
당시 1층의 기와지붕이
위의 하중을 이기지 못 하고
점차 벌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란다.
1934년부터 금당, 5중탑을 비롯한
여러 건물의 수리가
반세기 가량 계속되어,
1985년에 완성 되었다.
수리 해체중인 1949년
금당에서 화재가 발생해,
금당 1층 내부의 기둥과
벽화가 손상되었다.
금당의 벽화 중에서는
유명한 고구려의 승려 화가
담징이 그린 것이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담징은 614년 영양왕 때에
일본인 승려 법정(法定)과 함께
일본에 가서
오경, 채화, 공예를 가르치고
종이, 먹, 칠, 맷돌 등을
만드는 법을 가르쳤고
금당에 '석가정토도', '아미타정토도',
'미륵정토도', 약사정토도'를 그렸다.
1949년 1월
내부 수리 공사중 화재가 나서
비천도 등의 그림들이 불에 그을렸다.
화가들이 깔고 앉았던
전기 담요에 불이 붙었던 것이다.
불탄 것은 지하 창고에 보관되어 있고,
현재는 일본 화가들이
재현한 모사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에서 문화재보호법이 제정되었다.
모사한 그림도 철망 사이로 보아야 하기에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관광가이드는 후라쉬를 비추어주며
설명하는데 사진은 못 찍어도
후라쉬는 비추어 볼 수 있게 한다.
현재의 호류지는
7세기 후반에 재건된 것이다.
일본 학계에서는
한 사람의 수법이 아닐 뿐 아니라
요철법(凹凸法), 채색법, 인물의 묘사법 등이
서역화풍에 토대를 두고
당풍(唐風)으로 변형된 특징을
반영하고 있다 하여
담징의 작품으로 인정하지 않고,
7세기 후반경의
하쿠호시대(白鳳時代)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법륭사 오중 목탑
탑은 사찰의 서원에 위치해 있다.
총 5층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탑은
그 높이가 32.45m이고,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들 중 하나이다.
목탑의 중앙에는
거대한 심주(중앙 기둥)가 있는데,
연대 측정 결과 약 594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 중앙 기둥은 기반석 아래로도
3m 정도 박혀있어
탑이 바람에 흔들리지 않도록 했다.
목탑 하부 부분에는
부처의 사리가 함께 묻혀져 있고,
그 주위에는 부처의 삶을 묘사한
네 개의 벽화가 사면을 둘러싸며
그려져 있다.
또한 탑이 5층 건물이기는 하지만,
실제로 위로 올라갈 수는 없는
구조로 지어져 있다.
백제 관음(구다라 카논)
법륭사 대보장전(大寶藏殿)에 전시된
높이 2미터 9센티의
목조 백제관음은
'동양의 미로의 비너스다'라고 불린다.
프랑스의 작가 앙드레 말로는
“만일 일본 열도가 침몰할 때
단 하나의 작품만 가지고 나가게 허락한다면
나는 백제관음상을 갖고 가겠다”라고 극찬하였다.
정말 그정도인가?
내가 보기에는 백제관음은
동양의 비너스라고 부를 정도는 아니다.
다만 그 얼굴에서
묘하게 끌리는 정이있다.
우리 어머니를 닮아서 그런가 하는
생각을 잠시 해보았다.
일본에서는 30년 전까지만 해도
백제관음상을
법륭사의 한 구석에 전시하고
별로 눈을 돌리지 않았었다.
그 후 일본인이 쓴
『고사 순례(古寺巡禮)』란 책에
백제관음상이 가치가 기술되었고
『백제관음』이란 책이 나와
상세히 설명되고부터
일본사람들은 백제관음에 대해서
미적 안목을 갖게 됐다고 한다.
백제관음상의 좌우에
자비를 상징하는 관세음보살과
지혜를 표방하는 대세지보살이
입상으로 있다.
이 불상은 백제왕이
일본의 성덕태자(서기 574~622년)에게
보낸 것이라고 한다.
일본 사람들은 백제관음을
애칭으로 “술 사러 가는 보살”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구세관음상(救世觀音像)
나라(奈良)의 법륭사(法隆寺)에는
팔각원당(八角圓堂)으로 만들어진
몽전(夢殿)이 있고
그 안에는 오랫동안 비불(秘佛)로
공개되지 않은 불상이 있는데,
그 불상이 구세관음상이다.
전각 이름이 몽전(夢殿)인 것은
이 절을 창건한 쇼토쿠태자가
고구려 혜자(慧慈)스님과
백제의 혜총(慧總)스님으로부터
몽전에서 경전을 배웠다.
그후 태자 혼자서 법화경을 공부하다가
어려운 대목이 나오면
꿈에 귀인이 현몽하여
경전을 풀이해주어서
몽전이라 하였다.
호류지의 고문서인 성예초(聖譽鈔)에는
백제 성왕의 아들인 위덕왕이
성왕을 기리기 위해
그의 모습을 본따 제작한
구세관음상(높이1m 78cm)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威德戀慕父王像 所造顯之尊像卽
救世觀音像是也)
몽전 구세관음상은
외부에 공개하지 않는 비불(秘佛)로
메이지 시대까지 천에 싸여
상자에 넣어진 채
절대 공개되지 않았는데
동경미술대학 교수로 있던
어네스트 페놀로사가
메이지 정부로부터
사찰들을 연구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고
각지의 유물을 조사하다가
승려들의 반대를 무릅쓰면서
상자를 열고 천을 풀어
발견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페놀로사는
구세관음과 만나고 난 다음 해
1886년 32세때
그는 기독교를 버리고,
불교도로 개종하였다.
구세관음상은
처음에는 법흥사(法興寺) 금당(593년)에
안치시켰다.
나중에 법륭사로 옮겼는데
이같은 기록은 '성덕태자전력'과
'부상략기', '성예초(聖譽抄)'
일본측 자료에서 나온다.
'부상략기'에
구세관음은 백제국왕이 서거한 뒤에
국왕을 몹시 그리워 하면서
만든 불상이다.
(威德戀慕父王像 所造顯之尊像卽
救世觀音像是也).
성왕이 죽은 뒤 환생한 분이
일본의 쇼토쿠태자이다라고 믿고
“上宮王(쇼토쿠태자) 관세음보살”로
불리워왔다.
쇼토쿠태자는 49세로 입적한다.
백제는 27대 위덕왕 때,
일본에는 성덕태자(聖德太子)가
누이를 대신해
섭정을 하고 있었다.
위덕왕은 신라와 격전을 펼치고 있었다.
성왕은 전쟁터에 있는 태자를
격려하기 위해 나섰다가
신라군에 포위되어 참살당하고 만다.
자신 때문에 부왕을 잃은 죄책감에
태자는 출가를 결심하지만
대신들의 만류로 돌아선다.
그 대신 청년 100여 명을 출가시켜
성왕의 명복을 기원하고
부친을 향한 애틋한 마음을 담아
성왕을 모델로 불상을 조성했다.
이것이 일본 법륭사 몽전에 있는
구세관음이다.
성덕태자는 선대부터 펼치던
법륭사 불사를 위해
백제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때 백제의 건축, 와당, 도자기, 불상 등
다양한 전문가들이 대거
일본으로 건너간다.
성덕태자의 후원으로
법륭사는 물론 광륭사, 사천왕사 등
아스카 7대 사찰을 건립한다.
지난 1993년
부여 능산리 사지에서 발견된
백제 금동대향로와
일본의 일본 법륭사(法隆寺) 몽전(夢殿)에
비밀스럽게 전해지는 구세관음.
한국과 일본을 대표하는
이 두 가지 불교문화재가
원래는 백제 성왕을 기리기 위한
성물(聖物)이었다.
법륭사 강당
대강당에도 많은 국보가
전시되어 있다.
그런데 강당의 건물은
그리 오래되어 보이지 않는다.
사진에는 보이지 않지만
이 강당 옆에는 쉬었다 가기 좋은
의자가 놓여있다.
긍강산도 식후경이라고
다리 아프고 지칠 때는
의자가 얼마나 고마운가?
같은 승려로서 당부하노니
일본 승려들은 문화재만 팔아먹지 말고
관람객을 위해서 편의 시설을
준비해 놓기 바란다.
중궁사(中宮寺) 태자 반가사유상
주구지 절은
쇼토쿠 태자의 모친
아나호베노 하시히토 황후의
발원에 따라
아스카 시대에 창건한 절이다.
당시에는 지금보다 동쪽으로
500m 정도 떨어져 있는 곳에 있었다.
옆의 호류지 절은 비구 절.
중궁사(주구지) 절은 비구니 절이었다.
가마쿠라 시대에는
천수국만다라를
호류지 절 보물창고 내에서 발견하여
되찾아오는 등
어느 정도 원래의 모습을 복원하였다.
그 후, 자주 화재가 발생하여
호류지 절 동원(東院)의
현재지로 옮겼으며
모모야마 시대에
손치 황녀가 입적한 이 후에는
여성황족들이 비구니가 되어
법통을 이어받고 있다.
나중에 알았는데
2016년에는
우리나라 반가사유상과
일본의 태자 반가사유상이
번갈아 일본과 한국에서
전시회를 가진바 있다.
이곳의 반가사유상이
한국에서 전시될 때
이 절의 비구니 주지스님도 같이 왔었다.
이 반가사유상은
'세계 3대 미소상'으로
일컬어진다고 하는데
젊은 총각의 미소가 아름답긴하다.
법륭사 주변 걷는 코스
1. 세 탑이 있는 옛길 코스
2. 쇼토쿠 태자의 낭만이 서려 있는 코스
(아래 지도 사진을 참조)
기타 사진들
화재 당시의 금당 모습
흙담을 배경으로
자전거를 타고 가는 여인을 보면
여기가 중국인가 하는 착각을 하게 한다.
나무 조각이 통나무인데
5중목탑의 동서남북 문도
모두 통나무로 되어있다.
나무창살도 오래되어서
이 회랑도 국보다.
스님들은 나막신을 싣고 다닌다.
법륭사 서원가람과 동원가람 안내지도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
금당에 기둥에 있는 용
청자 모양의 이색적인 수각
중문으로 올라가는 길
오중 목탑의 문들이
모두 통나무로 되어있다.
관람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있는 휴게소
'술 사러 가는 보살'이라는 애칭은
여기서 나왔다.
옮겨온 글 편집
청산 노승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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