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눙 작가의 첫 산문집 『이허와 저저의 밤』(푸른사상 산문선 49).
작가는 삶의 일상에서부터 사회, 문학, 예술, 철학 등의 문제를 진지하게 이야기한다. 틈새에 눈을 대고 세상을 살피는 작가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이 세계를 보는 지혜로움을 체득한다.
2023년 3월 20일 간행.
■ 작가 소개
경기도 여주에서 나서 서울에서 자랐다. 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했다. 2013년 『무등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천국으로 가는 계단」이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단편소설집 『타임피싱』, 장편소설 『시간의 춤』을 펴냈다.
■ ‘글지의 말’ 중에서
밤이 깊습니다.
신독(愼獨),
자약(自若),
적멸(寂滅)의 날은 언제일까요?
또 다른
이허(裏許)와 저저(這這)를 기다립니다.
■ 추천의 글
이 책은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다. 또한 삶의 일상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다. 삶은 어떻게 이야기가 되고, 이야기는 어떻게 삶을 만드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은 다시 글쓰기라는 정제된 삶의 기념비를 만들어가기 위해 세상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봐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작가는 “글을 짓는 일은 틈새에 눈을 대고 세상을 살피는 일”이라고 말한다. 틈새는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틈새는 견고한 기성관념과 고착된 관습과 제도에 대한 일탈과 전복을 통해서 생긴 균열이다. 작가는 스스로 글쓰기를 통해서 틈새를 만들어가는 사람이며, 그 틈새를 보는 눈을 제대로 가질 때만 세계에 대한 인식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릴케가 ‘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하고, 시인 커밍스가‘ 눈이 눈을 떴다’고 말하듯이, 작가 역시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 예술의 거장들을 통해서 치밀하게 탐색해간다. 이웃에 사는 평범한 할머니의 말에서 마르케스의 마술적 언어까지, 들뢰즈 철학에서 프루스트의 예술론까지 종횡무진 넘나드는 작가의 지적 노마드가 경이롭다. 작가의 가슴속에 이제 막 쓰여지기를 기다리는 작품이 어떻게 태동하는가를 엿보는 재미도 덤으로 주어진다. ― 백무산(시인)
■ 산문집 속으로
인간의 말이 세상에 넘치고 넘쳐 어지러운 시절, 신들이 모여 회의를 했다. 세상을 조용하게 만들 방법을 연구했다. 어떤 신이 문자를 주자고 이야기했다. 문자로 소통하는 동안 침묵하지 않겠느냐는 희망 섞인 말과 함께. 또한, 말은 흩어져 없어지지만, 문자는 그 반대이니 말이 없어지고 침묵이 가득 찰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인간에게 문자를 주느냐 아니냐를 두고 격론이 이어졌다. 말이 넘쳐흐르는 인간에게 문자까지 준다면 세상이 더 시끄러워질 거라는 의견과 문자를 줘서 그들을 침묵시켜야 한다는 의견이 팽팽하게 맞섰다.
고심 끝에 신들은 인간에게 문자와 침묵을 함께 주기로 했다. 허나 시간이 흘러 인간은 침묵을 거세해버리고 말을 뱉으면서는 현재를, 문자로는 기록을 남기는 수단으로 삼으면서 과거와 미래를 다스리기 시작했다. 세상은 또다시 수많은 말과 문자로 들끓었다. 신들은 다시 회의를 위해 모였다. 한숨이 오고 가는 신들 사이로 오랫동안 침묵이 흘렀다.
(「말과 침묵 사이」, 34~35쪽)
바뀐 세상을 몸으로 느끼는 요즘, 하루 24시간의 물리적인 시간 속에서 내가 느끼는 심리적인 시간은 더디기만 하다. 몸에 익을 때까지 한참을 기다려야 할 것 같은 예감에 잠시 숨을 고르며 하늘을 본다. 보랏빛이 감도는 파란 하늘은 여전하다. 그 여전함에 까닭 모를 안도감이 밀려온다. 그러다가 이내 작은 한숨을 쉬는 나를 발견하고 만다. 능구의 길은 누구에게도 쉽지 않다던 철학자의 일갈을 떠올리며 발걸음을 내딛는다.
악기 연주자들이 조율을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세심하게 줄을 당기고 풀면서 음을 잡는 조율의 과정은 불협화음처럼 들린다. 연주가 시작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악기의 음색은 서로 어우러지고 조화를 이룬다. 조율의 과정은 멋진 연주의 주춧돌이지 싶다. 지금 나는 아직 조율의 시간을 보내는 중. 능구를 거치면 멋진 연주를 할 수 있으리.
(「다시 ‘능구(能久)’」, 12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