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의 글은
2014년 11월 16일 포스팅하였습니다.
한국 교회는 교회력에 따라
7월 첫 주에 맥추감절을 지키고 11월 셋째주에 추수 감사절을 지킵니다.
나름 말씀의 근거를 두고 교회력에 따른 절기를 지키겠지만
한국 교회가 드리는 교회력에 따른 절기는 사도를 비롯한 초대 교회는 전혀 절기로 지키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유대인 크리스챤과 할례문제로는 갈등하였지만
3대 절기인 유월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을 지키는 문제로는 전혀 갈등하지 않았습니다.
구약의 3대 절기는 메시야를 예표하였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로 구속이 완성되었습니다.
구약시대 가나안 땅의 이스라엘이 유월절을 지킨 것은
여호수아를 중심으로 가나안 땅에 발을 들여 놓았을 때 길갈에서 지켰고
그 후 히스기야와 요시야, 그리고 포로 귀환후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예수아 중심으로 지켰씁니다.
구약시대 가나안 땅의 이스라엘이 초막절을 지킨 것은
여호수아 이래로 포로귀환 후 에스라를 중심으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초막절을 지켰습니다.
오늘날 농촌 교회의 추수 감사절은 그나마 추수와 감사의 그림이 잘 그려지는데
도시 교회에서는 추수란 말조차 낯설기만 하였습니다.
7월 첫 주에 드리는 맥추 감사절은
도시 교회의 감사절로 정체성을 잃은지 이미 오래되었고 전반기 감사절이 되었습니다.
형식에 진정성을 담아 감사절로 지키지만
누구를 위한 감사절인지 모호하기만 합니다.
맥추 감사절은 세계의 그 어느 교회에도 없고
오직 한국 교회의 토착화된 민간 신앙으로 안착하였습니다.
가을에 추수 감사절을 드리다 보니
여름의 맥추 감사절을 덩달아 드리면서 전반기 감사의 성격을 띠게 되었습니다.
사실 맥추 감사절 설교를 들어 보면
맥추라는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으면서 전반기 감사라는 말은 수 없이 많이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맥추 감사절은 전반기 감사절이 되어
교회들마다 추경 예산으로 수입의 근거를 마련하였습니다.
전형적인 사이비 유사 기독교의 모습이요,
그 실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1월 셋째 주일에 드리는 추수 감사절도
도시 교회의 감사절로 그 추수의 정서를 잃은지 오래되었습니다.
문득 사도의 터 위에 세워진 신약의 교회는
부활절과 맥추 감사절과 추수 감사절과 성탄절을 지켜야 하는가에 대한
성경의 답은 무엇인가 궁금하기만합니다.
초대 교회가 지키지 않았던 신약의 절기.......
율법에 대한 복음적인 이해의 완성도가 높았던 신약 성경의 저자들이 참으로 위대하게 느껴집니다.
성경을 깊이 묵상하면 할수록......
한국 교회의 정체성에 대한 의혹은 유사 기독교의 늪을 그대로 가졌습니다.
복음에 깨어 있는 맑은 정신으로
도시 교회의 추수 감사절을 맞는 메마른 신앙의 정서를 안타깝게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추수에 대한 감격이 없고 가을의 풍성한 결실을 주신 은혜의 감사가 없는 도시의 추수 감사절은
영상 타이틀에 과일과 볏단 대신 갈대의 낭만이 가을의 향기로 자리 잡았습니다.
갈대의 영상 화면을 보면서 예배 드리는 동안......
풍성한 가을의 향기가 감사 아닌 공허로 느껴졌습니다.
추수 감사절의 유례가 성경의 수장절인가?
그래서 추수의 감이 먼 도시 교회에서도 매년 추수 감사절을 지키는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분명한 것은 사도적 터 위에 세워진 초대 교회는
추수 감사절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역사를 거슬러 ....유럽의 교회는
추수 감사절을 지켰는가 살펴보니 추수 감사절에 대한 개념도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추수 감사절의 유례는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는가?
그것은 바로 핍박에서 신앙의 자유를 얻어 신대륙을 발견하여 정착한
청교도 신앙의 흔적이었습니다.
오늘날의 미국을 세웠던 선조요, 조상이라고 할 수 있는 청교도의 탄성이
미국 교회의 추수 감사절이 되었습니다.
미국의 선교사에 의해 복음을 받아 세워진 한국의 교회는
미국의 선교사들이 지켰던 추수 감사절을 그대로 지키게 되었습니다.
추수 감사절의 근거를 구약 성경의 수장절로 이해를 하면.......
사도의 터 위에 세워진 신약의 교회가 무너집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해석한 사도들의 구약 이해는
완전한 성령의 계시였습니다.
바울과 복음서 저저의 관점으로
구약의 수장절을 추수 감사절로 이해할 수 있는가?
단연 없다는 답으로 히브리서의 관점으로 볼 때도......
율법을 비롯한 구약의 3대 절기는 완전 폐하여졌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도의 복음 안에서
율법의 그 모든 것이 완성되었습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얻는 구원의 은혜가
계시의 말씀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믿음을 계시라고 말씀하면서
구약의 율법은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만이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구속의 원리는
기독교 신앙의 전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율법주의는
신약 성경의 저자들의 관점에서 볼 때 완전 다른 교훈입니다.
율법주의의 대표적인 이단은
안식교이며, 또한 신천지 장막 성전입니다.
오늘날의 절기 신앙은 신약 성경의 산물이 아니며........
기독교 민간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추수 감사절이 미국의 토착화된 신앙이듯이
절기 신앙은 성경과는 상관없는 민간 신앙의 종교력일 뿐입니다.
뿐만 아니라 조건 감사의 신앙은
본질적인 복음의 탄성을 저해하는 민간 신앙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빛으로 새롭게 된 성도의 정제성입니다.
그러나 조건 감사의 신앙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오히려 욕되게 하고 자기의 덕을 세우는 일탈 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한국 교회는 감사의 잡화점을 만들어
무한 수입원의 근거를 마련하여 세속 교회의 위상을 철옹성으로 만들었습니다.
복음의 본질에 대한 은혜의 탄성보다
생활의 감사를 치부하는 것은 곧 기복 신앙의 발판이 되었습니다.
감사의 조건이 많으면 많을수록
기복 신앙은 발전하고 개혁주의 신앙의 본질을 잃어버립니다.
참된 믿음의 본질은
믿음의 주체가 대상이듯 감사의 주체도 자아가 아닌 대상이 될 때
오직 내 안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온전히 사는 것입니다.
한 때 "웃으면 복이와요"라는 코메디 프로는
코메디의 전설이 되었고 안방의 웃음으로 넘치는 행복 지킴이가 되었습니;다.
"웃으면 복이 온다"는 긍정의 가치는
마침내 감사하면 행복해 진다는 기복 신앙의 종교적 멘트가 되었습니다.
감사의 능동적 가치는
성공 신화를 이룩하는 경영학의 원리이자, 긍정의 힘이 되었습니다.
감사의 역동성으로 마음의 혁신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
인본주의 실존 신앙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감사하라는 말은
어느덧 긍정의 가치로 최고가 되었습니다.
긍정의 가치로 최고가 된 감사의 미덕은
흠과 티가 없는 완전한 언어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완전한 낱말인 감사는
은혜의 종속적인 개념입니다.
은혜를 뛰어넘는 감사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감사는 햇빛과 같은 자체 발광의 에너지가 아니라
달과 같은 반사 에너지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보다 감사가 강조될 때........
인본의 가치로 긍정의 에너지가 됩니다.
종교에서 은혜보다 감사가 강조되면......
기복 신앙과 사이비 종교의 늪으로 빠져듭니다.
신흥 종교나 이단 종교의 교주는
은혜보다 감사가 더 강조된 돌연변이 종자입니다.
수행의 하나로 강조되는 감사는
인본주의 신앙의 종교적 정체성을 갖습니다.
특히 설교를 통한 감사에 대한 종교적 강조는
은혜의 댓가를 지불하라는 강요, 그 자체입니다
이렇게 완전한 언어일 것 같은 감사의 실상은
은혜의 빛으로 감정할 때 부실 덩어리, 그 자체입니다.
그러므로 감사보다 은혜가 믿음의 삶으로 더 넘친다면......
감사의 부작용을 모두 극복할 수 있습니다.
사실 감사는 은혜의 속성으로
은혜, 그 자체는 감사를 머금고 있습니다.
은혜에 깃든 감사는
은혜를 감사하는 것 보다 더 완전한 감사입니다.
베풀면서 하는 감사는
받으면서 고마와 하는 감사보다 더 온전합니다.
은혜를 감사로 베푸는 경지는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입니다.
참된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의 그 모든 은혜를 감사의 믿음으로 고백하는 것이요,
감사의 찬양으로 믿음을 고백하며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곧 구원으로서의 예배입니다.
도시 교회 추수 감사절의 설교는
추수의 감격과 탄성은 물론 구약의 3대 절기의 정신 마저 잃어 버렸습니다.
그렇다고 미국의 토착화된 신앙에 깨어 있는
청교도 신앙의 중심도 없습니다.
감격과 탄성을 잃어 버린 감사의 교훈이나 강조는
감사하면 행복해 진다는 긍정의 에너지는 될지언정 맛을 잃은 소금에 불과합니다.
감사의 능동성을 수동화시키는 강조는
감사의 본질과 탄성을 잃어버린 억지 강요일 뿐입니다.
맥추 감사절 설교에 맥추라는 말이 한마디도 들어 가지 않고
추수감사절 설교에 추수라는 말이 한마디도 들어 가지 않는 설교는 다반사입니다.
맥추와 추수 그 자체는
초실의 탄성으로 성령의 처음익은 열매를 부활 신앙으로 결실하였습다.
구약의 3대 절기는 흠 없는 어린 양을 드려 그리스도의 구속을 완성시켰고
초실의 첫 단을 드려 성령의 처음익은 열매로 결실하는 부활 신앙의 탄성을 낳았습니다.
무교절 이튿날 보리 이삭의 첫 단을 드렸던 초실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고
칠칠절의 초실절은 오순절 성령의 강림으로 교회가 탄생하였습니다.
장막과 함께 한 광야 생활을 기념하였던 수장의 장막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장막이 천상의 성도들과 함께 있어
새 하늘과 새 땅의 영광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영원히 누립니다.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율법과 3대 절기는
하나님의 자기 백성 삼으시는 구속의 경륜을 영원한 예수의 하나님의 나라로 완성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음의 탄성으로
하나님의 영원한 백성이 되어 영광의 찬송으로 하나님과 함께 영생을 누립니다.
본질적 감사의 탄성을 잃어 버린 추수 감사절은
추수에 대한 감격은 물론 추수에 담겨진 궁극의 은혜에 대한 탄성의 기쁨을 잃어 버렸습니다.
참으로 감사하는 성도는
은혜와 진리로 충만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깨어 있는 탄성으로 넘칩니다.
생활의 조건으로 넘치는 감사는
본질적인 개혁주의 신앙의 감사를 기복 신앙으로 변질시켰습니다.
참된 개혁주의 신앙의 감사는
은혜의 탄성이 창조의 탄성으로 이어지는 천상에 울리는 찬양의 곡조요, 그 메아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