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이에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허다한 무리. 무리라는 말 속에 많다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많다라는 말 앞에 허다한 이라는 말이 붙었으므로 매우 많다라는 뜻이 있다.
사람들은 구원의 복음을 갈망한다. 병들고 지친 자신의 삶의 구렁에서 건져 내 줄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사람의 구원은 하나님의 손길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해 주지 않으시면 사람은 구원을 받을 수 없다. 하나님은 자신의 구원을 사도들에게 맡기셨다.
사도란 말을 전하는 사람들이다. 바울과 바나바는 예수님의 직계 제자인 사도가 아니라도 하나님의 구원을 알리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사도라고 호칭된다.
2그러나 순종하지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거늘
모든 사람에게 환영 받을 수는 없다. 하나님이 손 내밀어 주실 때 받아들이는 사람들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은 서로 완전히 다른 반응을 보인다. 이런 것을 호불호가 분명히 갈린다고 표현한다.
유대인들은 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 들일 수 없었을까? 그것을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에 대하여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 말에 대하여 믿지 않으면 그 말을 하는 사람을 거짓말하는 자로 몰아갈 수 밖에 없다. 우리가 복음을 전해 들었을 때는 분명히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믿고 받아들이든가 거짓말로 몰아 세우든가.
3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시니
사도들의 임무는 핍박을 해도 입을 닫지 않는 것이다. 반대하는 사람들이 악감을 품고 도사리고 있는 가운데서도 주눅이 들지 않고 오래 있어서 자신들이 아는 바를 자연스럽게 사람들에게 알렸다. 담대히라는 말은 거리낌 없이, 자연스럽게, 당당하게 라는 의미가 있다. 말하는 자는 억지로 말한다든가, 꾸며대면서 말을 한다든가, 자기의 말에 확신이 없이 말해서는 안된다. 자기도 믿지 않는 말을 다른 사람에게 하다는 것은 쓰레기를 먹으라고 주는 것과 같다.
4그 시내의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따르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따르는 자도 있는지라
5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리들이 두 사도를 모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
말로 이길 수 없는 사람들은 언어 폭력과 폭력을 사용할 수 밖에 없다.
6그들이 알고 도망하여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그 근방으로 가서
7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
초대 교회 성도들이 사도들에 대하여 기도한 것은 오직 하나였다. 입을 닫지 않고 담대히 복음을 말하며 다니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사도들이 감금당하고 매질 당하고 협박 당할 때 교회는 이렇게 기도했다.
(행 4:29)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행 4:30)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행 4:31)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사람이 이사를 한다는 것은 정말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오면 하는 것이다. 직업을 옮기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이주해 왔다는 것은 정말 큰 결심과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바울과 바나바는 이고니온에서 활동을 하다가 어쩔 수 없이 도망쳐야 되는 상활이 왔기 때문에 도망쳤다. 우리도 어떤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도망칠 수 밖에 없을 때 도망치는 것이다. 인생은 하나님의 바람이 몰아가는 배와 같다. 옛날 배는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바람이 배를 움직여가는 것이다. 자신의 인생에서 어떤 상황이 되서 기존의 삶의 장소나 방식을 떠날 수 밖에 없을 때는 미련없이 떠나야 죽지 않을 수 있다.
8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앉아 있는데 나면서 걷지 못하게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 자라
9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10큰 소리로 이르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일어나 걷는지라
말을 하는 사람은 말을 듣는 사람의 얼굴을 보고 말을 한다. 상대방이 자신의 말을 잘 듣고 있는지 아닌지 얼굴을 보면 알 수 있다. 얼굴에는 그 사람의 마음의 모든 것이 드러나 있다. 바울이 그 장애인의 얼굴을 보았을 때 바울이 전하는 말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그래서 바울은 그에게 일어서라고 말한 것이다.
믿음이 없는 사람,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에게는 설교가 아무 의미가 없다. 오히려 설교로 통해서 원수가 된다. 목사의 설교를 듣고 목사를 비방하는 관계라면, 교우 관계가 아니라 잘못된 관계이다.
11무리가 바울이 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 질러 이르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하여
12바나바는 제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헤르메스라 하더라
13시외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환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
14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 질러
15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
16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민족으로 자기들의 길들을 가게 방임하셨으나
17그러나 자기를 증언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여러분에게 하늘로부터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만족하게 하셨느니라 하고
18이렇게 말하여 겨우 무리를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못하게 하니라
복음은 두 가지 종류이다.
1)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복음
2) 하나님의 아들로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복음
바울이 지금 말하고 있는 복음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에 대한 복음이다.
19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
바울은 정당한 재판 없이 처벌을 받았다. 바울이 스데반을 죽일 때는 적절한 재판 순서를 밟아서 스데반을 죽였다. 스데반이 자신을 변명할 수 있는 기회도 주었다. 그러나 지금 바울은 자신을 변호할 수 있는 기회도 박탈되고 살해를 당할 위기에 있었다.
20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그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제자들이 바울을 둘러서 있는 것은 시신을 수습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보는 앞에서 바울은 그들 앞에서 일어나서 다시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사람들이 사는 도시 안으로 들어 갔다. 보통 이런 경우는 자신이 죽을 뻔 한 그 장소에 가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군인들이 제대를 하면 자신이 군생활 하던 곳을 보며 오줌도 싸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바울은 놀랍게도 자신이 죽을 뻔한 그곳으로 다시 간 것이다. 왜 갔을까? 그곳에는 바울이 전도한 형제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랑은 두려움을 초월하게 한다. 사랑으로 두려움을 이길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위험한 일을 당하면 그 장소로 뛰어 드는 경우도 있다. 사랑을 한다는 것은 두려움을 이긴다는 것이다.
요한일서 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21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바울은 다시 자신이 위험을 당햇던 루스드라와 이고니온, 안디옥을 들렀다. 그렇게 안좋은 기억이 있는 곳으로 들러 간 이유는 형제들을 만나서 설교를 하고, 그들 중에서 지도자를 세우기 위함이었다.
22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23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 하며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위탁하고
초대 교회에는 교인이 된다는 것은 핍박을 각오해야 되는 일이었다. 지도자가 없는 교회는 위험하다. 물론 당시 장로들은 초신자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초신자라고 해도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서 교회를 위해 봉사할 수 있는 것이다.
24비시디아 가운데로 지나서 밤빌리아에 이르러
25말씀을 버가에서 전하고 앗달리아로 내려가서
26거기서 배 타고 안디옥에 이르니 이 곳은 두 사도가 이룬 그 일을 위하여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라
안디옥 교회는 바울과 바나바를 보냈다. 보냈다는 말은 자유를 주었다는 말이다. 그들이 바울과 바나바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기도하면서 떠나보내는 수 밖에 없었다.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에 있어서 가장 필요한 두 지도자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떠나 보내서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을 하게 하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그들을 떠나 보낼 때, 안디옥 교회는 그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별로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에 그들을 맡기고 자유를 주어 떠나 보내는 수 밖에 없었다.
자녀를 키우는 방법도 마찬가지이다. 부모가 자식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 그래서 자식에게 자유를 주고 떠나보내면서 그 길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다.
27그들이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보고하고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 교회에 다시 돌아 왔을 때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에 대하여 말할 수 있었다. 우리도 지난 날을 돌이켜 보면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에 대하여 말할 수 있다.
28제자들과 함께 오래 있으니라
오래 있었다는 말은 환영 받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 만나면 환영하는 사이가 되어야 한다. 함께 오래 있어도 질리지 않는 사이는 악으로 성립되지 않는다.
멋있는 친구들은 서로 의리와 선행으로 사귄다. 나는 청년들 중에서 멋진 청년들이 몰려 다니는 것을 가끔 본다. 그들은 서로 존중하고 말을 신중히 하고 진심으로 충고한다. 반면에 불량한 청년들은 만나면 술먹고, 담배 피우고, 욕설을 입에 달고, 자랑하며 교만하며 험담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배신하고 상대를 무시하고 폄하하고, 존중하지 않는다. 친구는 의리와 예의와 예절로 사귀어야 한다. 그래야 서로에게 도움이 된다. 오래 함께 있어도 질리지 않는 사이는 친구 양측을 다 성장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