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끝내 사과 안했다” 서빙고 분실서 JP의 오열 (83)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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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안사 서빙고 분실에 갇혀 있던 46일 동안 눈물을 흘린 적이 있다. 1980년 6월 18일 계엄사가 발표한 부정축재 조사 결과를 수사관으로부터 전해 들었을 때였다.
내가 216억4648만원을 축재한 것으로 돼 있었다. 운정(雲庭)장학재단에 출연한 농장·목장까지 내 개인 재산에 포함시켜 부풀렸다.
제주도 감귤농장과 서산 삼화축산은 나의 오랜 꿈과 땀이 녹아 있는 결정체였다. 그것이 한꺼번에 부정축재로 매도돼 무참히 짓밟혔다. 도대체 무엇이 부정축재란 말인가.
나는 살아오면서 운 적이 몇 번 되지 않는다. 79년 박정희 대통령 영결식장에서 울었고, 얼마 전 내 아내가 세상을 떴을 때 울었다. 80년 6월 서빙고 분실에서의 울음은 내 꿈과 야망을 빼앗겼기 때문이었다. 분노와 허탈, 회한과 좌절이 뒤범벅된 눈물이었다. 35년이 지난 일이지만 나는 감귤농장과 서산목장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1968년 11월 김종필(JP) 전 공화당 의장이 일본 시코쿠 농장에서 감귤 재배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68년 정계 은퇴를 선언한 JP는 버려진 땅을 개간하고 목장을 만드는 일에 몰두했다. 학교 재단 설립을 위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제주 감귤농원은 68년 8월, 서산 삼화축산은 69년 1월 설립됐다.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68년 5월 말 민주공화당 당의장이었던 나는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모든 공직에서 물러났다. 나는 정치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 국가에 봉사하겠노라고 마음먹었다. 중학교 2학년 때 읽은 서양사 책의 한 구절이 나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1815년 영국 웰링턴 장군이 워털루에서 나폴레옹을 격파한 뒤 “어떻게 그 유럽의 망나니를 이길 수 있었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난 이튼 정신을 가지고 싸웠다. 워털루 전투의 승리는 이튼 교정에서 얻어진 것이다.”
‘이튼(Eton)’이란 말이 내게 깊이 박혔다.
그래, 한국에도 이튼 스쿨 같은 학교를 한번 세워보자. 새로운 세상을 이끌어갈 후학을 길러보자. 그것이 내 포부였다. 그래서 나는 대전사범 강습과와 서울대 사범대에 진학해 교육자가 되려고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