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항 업이 일어나는 상
두 번째로 業相이 일어나는 것을 밝힌다.
제1목 善業
업이 일어나는 것에는 앞뒤가 없다. [이 말은 과거의 업이라느니 미래의 업이라느니 하는 것이 없다는 말이 아니고, 어떤 업이 먼저 일어나고 어떤 업이 늦게 일어나는가 하는, 업의 발생의 순서라는 것이 없다는 말임. 예컨대 구업이 신업보다도 먼저 일어난다느니 하는 따위의 순위가 없다는 것임] 잠시 말[語]의 형편을 좇아서 먼저 善이 일어나는 것을 밝힌다면 그 相에 여섯 가지가 있다. 첫째, 報果[업보의 결과]의 相이 나타나는 것이고, 둘째, 習因[훈습의 원인]의 相이 나타나는 것, 셋째, 報果가 앞서 나타나고 習因이 나중에 나타나는 일, 넷째, 습인이 먼저 나타나고 보과가 나중에 나타나는 일, 다섯째, 습인과 보과가 동시에 나타나는 일, 여섯째, 보과와 습인의 앞뒤가 정해지지 않는 일이다. 모든 업이 나타날 때 차별을 헤아리면 온갖 품목이 있지만, 이러한 여섯 가지 뜻을 알기만 하면 분별하는 데 오류가 없을 것이다.
어떤 것을 習因, 習果라고 하는가? 「아비담론」의 사람이 말하였다.
“習因은 自分因[스스로의 본래 성품의 분야에서의 因. 다시 말하여 그것이 인으로 되어 나오는 果의 성품과 因의 성품이 같은 성품이라는 뜻]이다. 習果는 依果[依報라고도 하는 것으로서, 자기가 지금 처하고 있는 모든 환경세계가 다 자기의 숙세의 업에 의하여 얻어진 과보라는 뜻]다. 또한 習은 習續[習氣의 相續]을 이름 한 것이니 自分의 종자[씨]가 相生되어 나중의 상념의 마음이 일어나서 앞의 것[앞의 상념의 마음]을 습속하는 것이다. 앞의 상념을 因이라 하고 뒤의 상념을 果라고 한다. 이 뜻은 三性[선, 악, 無記의 세 가지 성질]에 공통이다.”라고.
그러나 論家[所依가 경전이 아니고 논전이기 때문에 논가라고 함. 여기서는 성실종의 사람들을 말함]는 다만 선과 악에만 있고 無記[선도 악도 아닌 것]에는 습속이 없다고 한다.
報因, 報果라는 것은 다른 세간에 관한 것이다. 앞의 습인, 습과는 모두 다 報因이라 한다. 이 因은 내세의 果를 끌기 때문에 “報”라고 하고 이것을 구분하여 이름을 “報因”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중에는 五道[중생계 五道]의 몸을 받는다. 이것이 바로 報果다.
지금의 이 과보의 몸으로 다시 선악의 習續이 일어나는데, 習因이나 習果를 총체적으로 前世와 견주어 본다면 이 습속은 果이지만, 만일 후세와 견주어 본다면, 이 습속은 因인 것이다. 「數家」[數論은 소승을 대표하는 설일체유부를 말한다. 소승은 특히 法數를 존중하기에 數論家라고 한다.]는 報得[업보로서 자연히 얻는 것. 修得의 반대말]의 비둘기나 참새의 몸은 報果이고 多淫은 習果라고 밝히고 있다. 「논가」는 비둘기의 몸 및 多淫은 모두 다 報果라고 한다. 淫은 탐욕으로부터 일어나고 탐욕은 習果다. 또한 지금의 생에 번뇌가 일어나는 것을 習因이라 하는데, 업이 이루어지면 바로 報因이다. 후생에서 번뇌가 일어나는 것을 習果라고 하고, 고통을 報果라 한다. 만일 좌선 중에서 여러 相을 보기만 한다면, 이것을 報果의 상이 나타난 것이라고 하지만, 옛날의 因으로 말미암아 있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報因이라고도 말할 수가 있는데, 또한 能起[능히 일으킬 수 있는]의 因이 後報[후생의 과보]를 끌어온다. 서로 이름을 받고 있을 뿐이다. 지금 여기에서는 다만 판단하여 報果의 相 이라고 할 따름이다. 만일 좌선 중에서 여러 상을 보지 않고 무성하게 마음을 일으킨다면 이것은 習因이 일어난 것으로서 능히 來果를 끌어내기 때문이다. 또한 習果라고 이름 할 수도 있는데 옛날의 因의 보답이기 때문이다. 서로 이름을 받은 것이지만 지금 여기에서는 다만 習因이라고 판단할 따름이다.
善의 相은 여러 가지로 많지만, 잠시 육바라밀에 관련시킨다.
보시바라밀을 일으킨다는 것은, 만약 좌선 중에 문득 福田[실천함으로써 복덕을 얻는 대상을 복전이라고 하는데 부처님/성인(예류과 이상의 성문, 연각, 보살)/和尙/아사려阿闍黎/스님/ 아버지/ 어머니/ 病者임. 앞의 일곱은 敬田이라 하고, 마지막은 悲田이라 함]의 수승한 경계, 三寶의 形像, 聖衆, 대덕[고승], 부모, 師僧, 有行의 사람이 나의 공양을 받는 것을 보거나, 혹은 悲田이 공양을 받는 것을 보거나, 혹은 두 가지 복전[敬田과 悲田]이 공양은 받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모두 환희하는 것을 보거나, 혹은 모든 복전이 공양을 받거나 받지 않거나 하는 것은 보지 않고 다만 보시된 것이 구체적으로 나열되어 가득 펼쳐진 것을 보거나, 혹은 施物은 보지 않고 다만 청정한 경지를 보거나, 혹은 금생의 보시의 報相을 나타내거나, 혹은 옛 생에서의 보시의 보상을 나타내거나, 혹은 좋게 보시를 행하는 사람이 그 앞에 이르러 보시, 희사를 칭찬하는 것을 본다거나 하는 일들은 모두 보과가 일어나는 상인 것이다. 다음으로 모든 그런 여러 상을 보지 않고도 다만 마음이 울연하여[무성하게 일어나는 모습] 惠施[은혜로운 보시, 보시와 뜻이 같음]를 행하려고 하여 三寶와 부모와 師僧에게 공경, 공양하거나, 혹은 빈곤하여 고생하는 것을 가엽고 불쌍하게 생각하여 구제하려 하거나, 혹은 보시의 법문을 통달하여 한결같이 스스로 밝게 깨닫는 것이거나, 이와 같은 것들의 마음은 모두가 다 習因이 일어난 상이다. 혹은 먼저 이 마음을 일으키고 도리어 그 報相을 보거나, 혹은 우선 보상을 보고 도리어 이 마음을 일으킨다거나, 혹은 함께 일으키거나, 혹은 不定으로 일으키는 것도 가히 그 뜻을 알 수가 있을 것이다.
戒의 상이 일어날 때도 역시 여섯 가지 뜻이 있다. 만일 열 분의 스님이 의발衣鉢로 단장壇場에서 갈마羯磨[교단에서 수계나 참회할 때의 작법을 말함]를 하고 환희로 愛念하는 것을 보거나, 혹은 이 相을 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의상이 정결하고 그 威儀가 대중을 덮음을 보거나, 또는 항상 계를 지키고 있는 사람이 얼굴과 눈에 광택이 있고 그 거동이 안정되고 상서로우며 계를 거기에 와서 칭찬하는 것을 보는 것 등, 이와 같은 상은 모두 持戒의 보과가 일어난 것이다. 어떤 때는 모두 이런 상을 보지 않아도 울연히 지계의 마음이 일어나서 스스로
“계는 청정하여서 篇聚[스님들의 구족계를 분류하면 篇門과 聚門으로 나뉘는데 그것을 한꺼번에 말한 것임. 구족계 전체를 이르는 말이기도 함]도 가히 지니기에 충족하지 못하다.”
고 말하거나, 또는 모든 파계자를 똑바르게 바로잡아서 모두 법 그대로 되게 하려고 하여 스스로 계율의 글을 깨치고 戒部에 정통한다면, 이것은 습인이 일어난 상인 것이다. 혹은 先後와 俱雜[넓을 구/잗달 잡; 광역의 것과 세역의 것을 말하는 것임]이 있으니 가히 뜻을 알 수가 있을 것이다.
忍의 相이 일어난다는 것은 능히 참을 수 있는 사람을 보거나, 혹은 몸으로 참는 일을 행하는 것을 보거나, 혹은 스스로 그 몸이 단정하고 청정하고 청결하며 손발이 엄정한 것이 세상에도 希有[드물게 있음]하거나, 혹은 단정하게 참는 사람이 와서 忍을 칭찬하는 것을 보거나 한다면, 이것은 忍의 보과의 상이다. 혹은 직접 忍의 마음을 일으키거나 또는 인의 법문을 깨닫는다면 이것을 “인의 습인이 일어난 상”이라고 이름 한다. 前後거나 俱雜인 것도 가히 뜻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정진의 상이라는 것은 정진하는 사람을 보거나 혹은 자기의 精進事를 보거나, 몸이 기력이 많아서 성하고 건장하며 영득하고 웅장함을 보거나, 혹은 항상 정진을 행하는 사람이 밤낮을 그만둠이 없는 것과 정진을 칭찬하는 것을 본다면, 이것은 정진의 보과의 상인 것이다. 혹은 相은 보지 않고도 다만 정진의 마음을 일으켜서 초야, 중야, 후야에 스스로 몸을 아끼지 않거나, 혹은 정진의 법문에 통달하였다면 이것을 “정진의 습인의 상”이라고 이름 한다. 전후나 구잡은 가히 뜻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선정의 상이라는 것은 나중의 경지 속에서 널리 설하겠다.
지혜의 상은 보살의 경지 속에서 마땅히 널리 설할 것이다.
육바라밀의 習報가 이상과 같이 여섯 가지가 있었지만, 일체의 善法도 또한 이것과 같으니 만약 세밀하게 이 법들을 찾으면 더욱 더 오래 머물고 더욱 더 밝아질 것이다. 그러나 번거롭게 많은 설명은 하지 않겠으며 또한 많이 설할 수도 없으니, 口決[口決面授의 준말. 구전으로 얻거나 직접 면접으로 가르침을 받는 일임]을 받거나 하여 뜻에 따라 널리 논하라.
모든 대승의 스님들이 서로 전하여 이르기를
“三寶의 물품을 빚졌다면, 그 相[빚진 물품의 상]이 나타났을 때 결정적으로 응당 보상하는 일을 꼭 하여야 한다.”
고 하였다. 「南岳」[惠思, 천태대사의 스승]스님이 말씀하셨다.
“만일 스스로[본래] 물품이 있으면 갚는 것이 좋다. 만일 스스로 물품이 없으면 수행하는 법을 그만 두고서 사방을 달려서 구하려고 하여야 한다. 이것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중생은 그 옛날의 죄를 어찌 다 헤아릴 것이며 삼보에게 빚지고 빌린 것이 다만 한 가지일 뿐은 아닌 것이다. 아라한과 같은 이는 먼저 직접 도를 취하였기에 아직도 업을 갚기 위한 여유를 가질 수가 없다. 따라서 「저책觝責」[책임을 거역하다. 또는 책임을 내던져버리다]이라 이름 한다. 수행자가 만약 도량을 그만두고 걸개乞匃[구걸]를 행하여 紛動을 함이 여러 해가 된다면 어찌 그것이 마의 일이 아닐 것인가. 지금 잠시라도 아직 갚지 않았더라도, 다만 뜻을 결정하여 모든 부처님의 진실의 법을 수행하고서 「成立」[빚을 갚는 일을 이룬다는 말]을 펼치는 것이다. 成立의 成이라는 것은 번뇌를 파하고 無生忍에 들어가는 것을 기다리고, 法身地에서 널리 일체의 三寶에 공양 올리고 도리어 생사계에 들어가서 중생에게 갚는 것이니, 보살은 이 때를 「저책」이라고 이름 하지 않는다. 成立의 立이라는 것은, 공부가 현저히 원만하여져서 이름과 수행이 곧게 서서, 그 과보가 스스로 이를 때는 마땅히 삼보에 갚게 되는 것이니, 이것은 負債를 거절하여 갚을 마음을 이루지 않는 것이 아닌 것이며, 잠시 빌어서 말하여 展立[이루어짐을 펼치는 일]을 연기하는 것일 뿐이니 이것이 어찌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만일 수행법을 폐하여 도량을 나오면 이것은 결정적으로 모름지기 갚을 것이니, 독송하고 배움을 듣고서 자기의 무릇 업무를 하지 말고, 결정적으로도 응당 방편을 써서 재물을 구하여 이것을 갚아야 하는 것이다.”
이 풀이는 「우바새계경」과 같은 것인데, 「경」에서 말하길
“만약 삼보의 물품을 빚진 사람이 틀림없이 修道에 종사하여 수다원[예류과], 나아가서 아라한이 되기를 구한다면, 바로 반드시 (빚진 물품을) 갚을 필요는 없다. 그러나 도를 배우지 않는다면 응당 급히 갚아야 하는 것이다. 아라한의 사람이 만일 부처님의 물품을 쓴다면 이것은 곧 죄가 없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