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10:13-16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
* 예수와 어린이(막10:13-31)
예수 당시에 어린이들은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로 대우받지 못하고 부모들에게 복속(屬)된 소유물로 취급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예수는 어린이에게 진정한 관심을 보여 준 최초의 위대한 선생이시다. 다시 말해서 예수는, 성인으로 성숙할 수 있는 가능성의 존재로서의 어린이가 아닌 어린이 자신을 중요시하고 칭찬하신 것이다. 인간애로 충만한 예수의 모습은 당시 어린이들의 마음을 사로잡고도 남았을 것이며, 그분의 표정은 딱딱하고 메마른 유대교 지도자들과는 달리 온화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유유상의 이치와 마찬가지로 깨끗한 천성을 지닌 어린이들은 주님께 이끌리게 마련이었다.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우리는 어릴 적의 동심의 세계를 점점 상실해 간다. 동심의 세계 중에는 유치하고 비현실적인 것도 많지만, 보다 값지고 숭고한 삶을 위해 일평생 보존해야 할 부분도 많다. 예수께서 칭찬하고자 하신 어린이의 특징적 성품들은 다음과 같다.
① 솔직성 : 어린이는 마음속에 있는 바를 숨기지 않고 그대로 노출시킨다. 이는 거짓과 위선에 익숙해진 어른들의 표리부동(表裏不同한 마음과 대조된다. 이처럼 솔직한 마음이 있을 때에야 비로소 자신의 죄악된 상태를 직시하고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게 된다.
② 겸손 : 어린이는 부모를 깊이 신뢰할 뿐만 아니라 어른들에게 공손하고 겸손하도록 교육받는다. 이처럼 어른들을 섬기는 자세를 예수 천국을 받드는 자세에 비유하신 것이다(15 절).
③ 예민한 감수성 : 어린이들의 마음은 순수하고 깨끗할 뿐만 아니라 주위 환경의 영향에 매우 민감하다. 성인들은 세파에 시달리는 과정에서 온갖 사악한 사상적 방법에 익숙하여 그러한 방법을 세상살이의 능사(事)로 생각할 가능성이 많다. 그래서 예수의 순수한 진리의 말씀이 그들의 완고한 마음을 뚫고 들어가기는 힘들다. 반면에 어린이들의 마음은 때 묻지 않은 깨끗하고 순수한 상태이기 때문에 예수의 말씀이 오히려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
이상에서 우리는 어린이들에게서 본받을 만한 특징들을 살펴보았거니와, 우리가 어린이들에게도 복음을 적극적으로 전하고, 또한 그들에 대한 신앙 교육을 강조해야 하는 이유는, 어린이도 어른과 동일하게 구세주의 은총을 받아야할 영적 갈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른이나 어린이나 거듭나는 것은 오직 성령의 역사이며, 신앙은 지성의 문제라기보다는 영혼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출처: 『톰슨III 성경주석』, 마가복음 10장.
첫댓글 좋습니다^^ 어설픈 설교의 묵상보다 이렇게 정확한 해설을 타붙하는 것이 더 좋을 수 있어요.
<호크마 주석>, 마가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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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 마태와 본서의 낱말은 갓난 어린아이를 가리키나 누가의 용어는 약간 큰아이를 뜻한다. 또 이동사는 미완료 과거형으로 계속 데리고 오던 것을 묘사한다 . 저들을 데리고 오다가 제자들의 꾸지람을 받은 것이다. 당시 유대인 아이들은 회당에서 납비에게 축복을 받는 풍속이 있었고 (Carr). 자녀들을 축복할 때 그머리위에 손을얻는 풍속도 있었다. (창48:14). 예수를 숭앙한 추종자들이 예수께 축복을 받고자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온것도 제자들의 자연스런 행동이다. 아이들을 경시하고 귀찮은존재로 억누른 것은 고대 사회의 공통성 이었다. 스팔타에서는 자녀의 생살여탈. 권은 아비에게 있었고 , 고대중국에서는 아이를 돈받고 파는수도 있었다.
=====10:14
분히여겨 - 본서에만 보이는 첨가로 감정묘사에 예리한 저자의 필치를 보이는 것이다. 제자들의 당치 않는 행동을 강하게 제지 하신 것이다 . 예수께서 보시기에는 어린아이들이 가장 순수하였고 , 그들의 오는 것을 가장 반가왔는데 이런 스승의 뜻을 모르고 함부로 그들을 꾸짖는 제자들에게 실망과 의분을 표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자의 것이니라 - 예수께서는 이미 어린이의 위치를 높여줘 주 자신과 같이 두셨다(9:36-37). 여기에서 다시 어린이를 하나님의 나라의 주인이라고 하신다 . 이는 물론 문자적인 의미보다 어린이의 성품이 하나님의 시민의성품인 것이다 . 어린이의 성품은 여러 가지로 지적되나 중요한 것은 순결과 겸손과 신뢰(신앙)일 것이가. 이런 요소들이 하나님의나라 시민의 성품인 것이다. 하여튼 부모들은 단순한 축복을 바라고 아이들을 데리고 왔으나 예수께서는 하나님의나라 시민에게 까지 그들을 올리시고 또 축복하신 것이다.
=====10:15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 눅18:17과 문자적으로 같으나 마태에서는 다른경우에 다른 말씀을 주셨다. (마18:3). 여기 내가 너희에게 진실로 이르노니 귀와 더불어 (3:28주참조)또 이중의 부정사와 더불어 뜻은 극히 강하다 . 전절을 받고 이를 부정적으로 반복하시면서 강조 하신 것이다.
=====10:16
안고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 부모들의 요구(13절)보다 훨씬 더 많이 하셨다(Bengel).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자의 그림자인 어린 아이들을 마음껏 축복하신 것이다. 축복하심은 미완료형이므로
얼마 동안 계속된 것을 뜻한다. 아이들을 하나 씩 품에 안으시고 축복하셨다. (Bruce)그러므로 그 시간은 한참이나 걸리셨을 것이다.
<매튜 헨리 주석>, 어린이들을 축복하심 (마가복음 10:13-16)
이 기사는 어린아이들을 친절과 사랑의 마음으로 돌아보라는 지시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리고 이 지시는 우리 주 예수 안에서 더욱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어린아이들이 아주 어릴 때에 자기 자신들을 그리스도에게 드리는 일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성인들이라도 자신들이 연약하고 아이들같이 무능력하고 무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일으켜 주는 것이다.
Ⅰ. 어린아이들을 예수에게 데리고 나옴(13절). 그 아이들의 부모들이나 그들을 돌보는 연고자들이 예수에게 그들을 만져 주시기를 바라고 데리고 나온 것이다. 예수께서 그들을 만져 주심은 축복해 주시는 표가 되는 것이다. 그들이 병들어 병 고침을 받으러 데리고 온 것도 아니고 가르침을 받게 하고자 데리고 나온 것도 아닌 것 같다.
1. 그 어린아이들을 돌보는 자들이 그들의 영혼에 대해서 관심이 많은 자들이었다. 어린 자녀들에 대한 그 부모들의 기본적인 관심은 그들의 영혼들에 대한 것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기본적인 부분이고, 그들의 영혼들이 건전할 때에 그들이 건전할 수 있는 것이다.
2. 그들은 그리스도의 축복이 그 아이들의 영혼들에게 유익함을 믿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양친들이 아무 것도 그들에게 말해 줄 수도 없고, 해 줄 수도 없고, 미칠 수도 없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심령을 축복하실 수 있음을 알기 때문에 그들은 어린아이들을 예수께서 만져 주시기를 바라고 데리고 나온 것이다 지금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계시지만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을 그리스도에게 드릴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거기에서부터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축복하실 수 있고, 거기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의 충만함과 확장에 대해서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항상 믿음의 자손들에게 대한 은혜와, 아브라함과의 언약의 취지와, "우리와 우리 자녀들에게" 대한 약속, 특히 "그의 신을 우리 자손에게 그의 복을 우리 후손에게 내리리"(사 44:3)라고 약속에 대한 친절한 암시를 주신 것이다.
Ⅱ. 어린아이들을 그리스도에게 데리고 나옴에 대하여 제자들이 준 실망. "제자들이 꾸짖거늘"(13절). "소자 하나라도 멸시하지 말라"는 주의를 얼마 전에 예수에게서 들었음에도 마치 그들은 이 일에 대한 주님의 마음을 잘 아는 듯이 행동하였다.
Ⅲ. 여기에 대해서 그리스도께서 힘을 북돋아 주심.
1. 예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이 그들을 금하는 것을 불쾌하게 여기시었다. "예수께서 보시고 분이 여겨"(14절). 아마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었을 것이다. "너희가 무엇 때문에 그들을 금하느냐? 너희는 내가 선을 행하는 것을 방해하느냐? 이 자라나는 세대들을 위해서, 이 어린양들과 같은 어린아이들을 위해서 선을 행하는 것을 방해하려느냐?"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에게 나아오는 자들이나, 당신에게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나오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대하여 대단히 노하시었던 것이다.
2.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그들을 방해하는 어떤 말이나 행동을 삼가라고 명령하시었다. 어린아이들이 가능한 속히 내게 나와서 그들의 구할 것을 구하고 내게 가르침을 받을 수 있도록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라." 어린아이들이 "호산나"를 부르며 은혜의 보좌 앞에 나오도록 환영하라.
3.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유대교 교인들이었던 것처럼 당신의 교회의 교인으로 삼으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기 위해 오셨다.
그러므로 이 기회를 기해서 천국이 이런 어린아이들을 신민으로 받아들인다고 선포하고 그들에게 천국 시민의 특권을 부여한 것이다. 아니 천국은 이런 자들에 의해 존속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어린아이일 때에 영접하여, 이 후로 그들이 안전하게 보호를 받으며 그리스도의 이름을 붙들고 나갈 수 있는 것이다.
4. 그리스도께서 소유하시고 축복하시는 모든 사람들에게서 어린아이 성품과 기질이 보여지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15절). 그 말은 곧 어린아이들이 그들의 부모들과 유모들과 선생들을 따르듯이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아이들과 같이 호기심을 가져야만 하며, 아이들과 같이 배우지 않으면 안 되며, 배운 것을 믿어야만 하는 것이다. "배우는 자는 믿어야만 한다"는 말이 있다. 아이의 마음은 흰 종이와 같다. 거기에다 당신이 원하는 대로 기록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도 복된 성령의 펜에 대해서 그러해야 한다. 아이들은 누구의 지배하에 있는 것이다. 우리도 그와 같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린 사무엘이 한 것처럼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삼상 3:9, 10)라고 말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들의 부모의 지혜와 돌보심을 의지하는 어린이들은 그 부모들의 손을 잡고 어디로 인도하든 따라가는 것이며, 그들에게 무엇을 마련해 주든지 그것을 받는 것이다. 그와 같이 우리도 우리 자신을 겸손히 예수 그리스도에게 드리고, 우리의 힘과 의에 있어서나 교육과 의식주 문제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영접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5. 예수께서 어린아이들을 영접하고 그들이 바라던 소원을 이루어 주셨다. 예수께서 "그 어린아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16절). 예수께서 그 부모들의 소원에 넘치게 주신 것을 보라. 그들은 만져 주시기를 바랐지만 예수께서는 저들을 안고 축복해 주시기까지 하신 것이다.
(1) 예수께서 "어린아이들 안고." 여기에서 이사야 40장 11절의 예언. "그는 양 무리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가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스도 자신이 어린아이일 때에 시몬의 품에 안기웠던 것인데(눅 2:28) 여기에 지금 예수께서 모세와 같이 짐이 된다는 불평이 없이 이 어린아이들을
품에 안으시며"가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스도 자신이 어린아이일 때에 시몬의 품에 안기웠던 것인데(눅 2:28) 여기에 지금 예수께서 모세와 같이 짐이 된다는 불평이 없이 이 어린아이들을 품에 안으시고 기뻐하신 것이다. 모세는 "이 모든 백성을 내게 맡기사 그 짐을 지게 하시나이까" 불평하면서 "내가 그들을 생산하였기에 양육하는 아비가 젖 먹는 아이를 품듯 그들을 품에 품으라" 하느냐고 항의하는 말을 하였다(민 11:11, 12). 만일에 우리가 정중하게 우리의 자녀들을 그리스도에게 데리고 나오면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능력과 섭리의 품속에 그들을 안아 주실 뿐만 아니라 그의 동정과 은혜의 품에 안아 주시는 것이다(겔 16:8).
(2) 예수께서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이것은 그들에게 성령을 부여하심을 나타내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손은 주님의 손이고 주님은 스스로 성령을 그들에게 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
(3) 예수께서 그들에게 신령한 복으로 "축복하시"었다. 주님께서 이 신령한 축복을 부여하시기 위해 오신 것이다. 만일에 우리의 자녀들이 그들의 분량에 따라 중보자이신 예수의 축복을 받는다면 그들은 행복한 것이다. 예수께서 이 어린아이들에게 세례를 주셨다는
말씀을 볼 수 없음은 사실이다. 세례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부터 비로소 교회에 입교의 관문으로 베풀어지도록 정해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교인이 되는 자격을 주장하시었는데 그것은 다른 증거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축복이 임할 것임을 말씀하시었다. 그것은 우리나 우리 자녀에게 약속된 것으로 세례를 받음으로 따르는 성령의 인인 것이다(행 2:38, 39).
주석에서 어린 아이들의 특징을 솔직, 겸손, 예민한 감수성을 꼽았군요. 하늘나라를 이런 어린 아이들과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을 무겁게 받아들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사회적 통념을 깨시고 힘 없는 자들, 죄인들, 마음이 가난한 자들에게로 향하시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 같습니다.
네, 좋은 댓글의 내용에 공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