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겨울 강한 추위가 몰려 올 것으로 전망되면서 경유를 연료로 사용하는 경유차에 비상이 걸렸습니다. 추위가 심해지면 경유 내 함유된 파라핀이 연료필터를 막아 시동이 걸리지 않을 수 있는 것이죠. 이에 따라 지식경제부와 정유업계, 자동차업계가 머리를 맞대고 논의했지만 이해가 첨예하게 대립되면서 속 시원한 해결책을 찾지 못했습니다. 결국 지난해 일부 지역에서 연료내 파라핀 성분이 필터를 막아 시동이 걸리지 않았던 문제가 올해도 재현될 수밖에 없는 것이죠. 물론 기온이 많이 내려가는 일부 지역에서만 발생하겠지만 혹한이 점차 심해지는 점을 감안하면 국내도 대책은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해당 문제가 발생할 경우 소비자 입장에선 마땅한 보상방안이 없으니 말입니다.

▲ 논란은 경유의 연료필터 막힘점
혹한기 경유차 시동불량의 원인은 연료에 있습니다. 경유는 엔진 내 윤활을 위해 파라핀 성분이 포함돼 있죠. 하지만 기온이 떨어지면 파라핀이 서로 엉켜 큰 입자를 만들고, 부유하던 파라핀이 연료필터 또는 인젝터를 막게 됩니다. 강추위가 올 때마다 경유차의 시동이 걸리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죠.
이를 방지하기 위해 국내에 공급되는 동절기용 경유는 연료필터 막힘점(CFPP)이 정해져 있습니다. 지난 11월1일 지식경제부가 발표한 '석유제품의 품질기준과 검사방법 및 검사수수료에 관한 고시'에는 혹한기(11월15일부터 이듬해 2월28일)에 공급되는 경유는 필터막힘점이 영하 18도로 규정돼 있는데, 다시 말해 정유사가 공급하는 경유가 영하 18도까지 내려가도 필터가 막히면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지난해 일부 지역(강원도 철원)의 기온이 영하 19도 이하로 내려가기도 했고, 내륙 산간 지방은 이보다 더 낮은 기온으로 떨어져 필터막힘 현상이 나타나 논란이 됐었죠.
물론 해결은 간단합니다. 경유의 필터막힘점 온도를 더 내리면 됩니다. 하지만 온도를 내리기 위해선 와피(wafi)라고 하는 첨가 물질 외에 여러 추가적인 화학제품이 더해져 비용 상승이 수반되죠. 이런 이유로 현재 국내 대부분 정유사들은 혹한기 경유의 필터막힘점 기준 온도를 내리는데 난색을 표하고 있는 겁니다. 그나마 GS칼텍스가 자체적으로 영하 24도까지 견뎌낼 수 있는 경유를 공급할 뿐 SK 등은 지식경제부 고시 기준인 18도 이하에 맞춰 공급한다고 전해 왔습니다.
이와 관련, 한국석유관리원 관계자는 "기준 온도인 영하 18도는 국내에서 별 다른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며 "날씨의 경우 예측 불가이고, 그나마 지난해 문제가 제기돼 올해 기준을 낮춘 것"이라고 설명하더군요. 지식경제부 석유산업과 관계자도 "기온이 18도 이하로 내려가 필터막힘 현상이 발생하면 이는 불가항력"이라는 입장을 나타냈죠. 게다가 일부에선 필터막힘을 연료 문제로만 몰고 갈 수 없다는 주장도 펼치고 있는데, 자동업계도 동반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죠.
하지만 자동차업계는 "현재 자동차회사가 연료필터 내 코일 열선을 넣어 혹한기 연료 온도를 일부 상승시키고 있다"며 "그렇다고 커먼레일 시스템 전체에 열선을 넣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고 항변하더군요. 자동차업계로서도 코일 열선을 추가할 경우 그만한 비용 부담이 생길 수밖에 없어 해결은 쉽지 않다는 얘기입니다.

라세티 프리미어 디젤엔진
같은 디젤인데 유럽은 문제 없는 이유
현재 국내와 동일한 디젤 엔진을 사용하는 유럽의 경우 혹한기 경유로 인한 문제는 거의 없습니다. 이는 혹한기 경유를 별도로 공급해 오고 있기 때문인데, 러시아의 경우 필터막힘점을 영하 16도로 정하되 최저 영하 44도에도 문제가 없도록 경유를 등급별로 나눠 공급합니다. 중국도 최저 기준을 영하 44도로 보고 정유사가 지역별로 나눠 공급하죠. 혹한이 심한 북유럽은 스웨덴 영하 36도, 핀란드 영하 43도, 노르웨이 영하 50도입니다.
혹한이 매서운 북유럽은 그렇다 해도 전반적으로 기온이 따뜻한 남유럽도 한국보다 필터막힘점 기준 온도가 낮다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죠.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등도 최저 영하 21도 이하의 기준을 정해 놓고 겨울철 경유를 공급 중이고, 1월 평균 기온이 한국보다 6도 이상 높은 네덜란드도 경유의 필터막힘점 기준은 영하 29도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유럽 내 혹한기 경유 보급이 잘되는 이유는 오랜 기간 경유를 자동차 연료로 사용해 왔던 데다 정유사와 자동차업계가 합의를 통해 소비자 문제를 해결했기 때문이죠. 반면 국내는 자동차업계와 정유업계가 한치의 양보도 없는 기 싸움을 펼치면서 책임 소재가 불문명하고, 중재자인 지식경제부는 기준 온도를 2도 낮추는 것만으로 양보를 유도한 겁니다.
▲업계 싸움에 소비자 등 터져
자동차업계는 기본적으로 필터막힘점 기준 온도를 영하 24도에 맞춰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이 기준으로 혹한기 경유를 공급하면 문제될 게 없다는 입장이죠. 하지만 정유업계는 영하 18도를 삼아도 국내 평균 기온을 감안할 때 충분하다는 논리를 굽히지 않고 있습니다. 혹한기에 해당되는 1월과 2월의 평균 기온이 영하 6도에 불과한 만큼 필요 이상으로 기준 온도를 낮추는 것은 불필요하다는 것이죠.
하지만 자동차업계는 기온 급강하가 언제 다시 찾아올 지 모른다며 그에 대한 대비를 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줄기차게 쏟아내고 있습니다. 게다가 정유사가 군용으로 공급하는 경유는 이미 영하 30도 이하에도 필터막힘이 없는 제품을 공급하는 만큼 정유사가 소비자 피해 구제 차원에서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말이죠. 자동차업계 관계자는 "기본적으로 문제의 본질은 경유 자체에 있는 만큼 정유사가 의지를 가져야 한다"고 전하더군요. 그는 이어 "만약 기온 급강하에 따른 연료 문제로 시동불량이 발생할 경우 소비자는 어디에도 하소연할 곳이 없다고 했습니다.
실제 올 겨울 혹한이 찾아와 시동 불량 현상이 발생할 경우 소비자로선 구제받을 방법이 현재로선 없습니다. 정유사는 고시를 근거로 영하 18도 기준에 맞춰 공급하면 책임이 없고, 자동차회사는 연료 문제인 만큼 책임질 수 없다는 것이죠. 지식경제부는 기준을 정할 뿐 역시 책임 없다는 자세입니다. 소비자로선 결국 기온 급강하가 오지 않기를 바라는 게 전부인 겁니다. 대책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