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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는 이 글에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대해서 결론을 짓고 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 2장 20절과 고린도전서 13장 5절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이웃을 위해서 사는 존재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인은 믿음을 통하여 자신을 넘어 하나님께로 올라가고 하나님으로부터 다시 사랑을 통하여 아래로 내려감으로써 항상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무른다. 이것이 다른 모든 자유를 능가하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이다.
인간은 다른 사람과 관련 있다
26. 지금까지 일반적인 행위에 관하여,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육체에 행해야 하는 것들에 관하여 말하였다. 이제는 그리스도인이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하는 행위에 대하여 말해보겠다. 인간은 자기 육체 가운데 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아간다. 인간에게는 다른 사람을 향한 행위가 없을 수 없다. 그는 이웃과 대화하고 함께 일한다. 이러한 일이 자신의 의와 구원에 필요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그러므로 모든 행위를 할 때 그의 의도는 자발적이어야 하고 다른 사람들을 섬기고 그들에게 유익이 되는 것만 목표로 해야 한다. 그는 다른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만을 의도해야 한다. 이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여기서 믿음은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가르치는 것처럼(갈 5:6) 즐거움과 사랑으로 역사한다.
빌립보 교인들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모든 은혜와 넉넉함을 갖게 되었음을 가르친 바울은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계속하여 교훈하여 말했다(빌 2:1~4).
"너희가 그리스도 안에서 가진 모든 위로 가운데, 너희를 향한 우리의 사랑으로부터 가진 위로 가운데, 그리고 모든 영적이고 올바른 그리스도인과 가진 모든 교제 가운데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가 나의 마음을 온전히 기쁘게 하기를 원한다. 특히 너희가 장래에 한마음이 되고 다른 이에게 사랑을 보여주고 다른 사람을 섬기고, 각자 자기 자신을 바라보며 자신의 것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주목하며 다른 사람에게 유익한 것에 관심을 두고 그렇게 하도록 하라"(루터역).
보라,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모든 행위가 이웃에게 유익이 되어야 한다고 그리스도인의 삶을 규정한다. 그리스도인은 믿음 때문에 모든 것을 충분히 가지고 있고, 이웃을 자발적인 사랑으로 섬기도록 그의 처분에 맡겨진 여분의 행위와 삶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바울은 그리스도의 예를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빌 2:5~8).
“너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라.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본체이시며 스스로 충분하시기에 의롭게 되고 구원받기 위해 그의 삶과 사역과 고난이 필요하지 않으셨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단념하시고 종으로 행하시고 모든 것을 행하고 겪으셨고 우리에게 최상이 되는 것 외에는 어떤 것도 추구하지 않으셨다. 또한 자유하셨지만 우리를 위해 종이 되셨다"(루터역)."
하나님이 그리스도에게 하신 것처럼 그리스도인도 이웃에게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머리가 되는 그리스도처럼 자신의 믿음에 온전하고 충분히 만족해야 하고, 생명과 의와 구원이 되는 믿음을 점점 자라게 해야 한다. 믿음은 위에서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와 하나님이 가진 모든 것을 내어준다. 이와 상응하게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말한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리스도인은 온전히 자유하기에 이제는 거꾸로 이웃을 돕기 위해 기꺼이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신에게 행하신 것처럼 이웃에게 행하며 함께 교제해야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값없이 해야 하며 하나님의 기뻐하심 외에는 다른 것을 추구하지 말고 다음과 같이 생각해야 한다.
"자, 하나님께서 나같이 가치 없고 저주받은 인간에게 어떤 공로 없이, 값없이 순전한 자비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충분한 의와 구원을 부여하셨다. 앞으로 내게는 이러한 사실을 믿는 일만 필요하다. 이제 거꾸로, 나는 넘치는 재화를 쏟아부어 주신 아버지 마음에 드는 일을 자발적으로, 즐거움으로, 값없이 행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웃에게는 내게 행하신 그리스도와 같은 그리스도인(제2의 그리스도)이 되고자 한다. 나는 이웃에게 필요하고 유익하고 도움이 되는 것만을 행할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충분히 갖고 있기 때문이다."
보라, 그렇게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즐거움은 믿음에서 흘러나온다. 그리고 이 사랑으로부터 자발적이고 남을 도와주기를 즐거워하는 삶이 흘러나와 이웃을 값없이 섬기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서 곤경 가운데 있던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했던 것처럼, 우리 이웃도 곤경에 처해 있고 우리의 잉여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값없이 도우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몸과 행위로 이웃을 도와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얼마나 고귀한지를 보게 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러한 삶은 오늘날 세상에서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더 이상 알려지지 않거나 설교되지 않는다.
성서의 예
28. 누가복음 2장 22절은 이러한 의미로 읽어야 한다. 처녀 마리아는 불결하지 않으며 정결해야 할 의무도, 정결의 필요성도 없지만 율법에 따라 6주 후에 성전에 가서 다른 여인들처럼 정결 의식을 행했다. 그녀는 다른 여인들을 경멸하지 않고 단지 이들과 함께하기 위해 자발적인 사랑으로 그렇게 행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할례를 받게 한 것도 이런 의미에서이다(행 16:3). 그것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믿음이 약한 유대인이 오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반면 디도에게는 할례를 받지 않게 했는데(갈 2:3), 이것은 사람들이 디도의 구원을 위해 할례가 필요하다고 강요했기 때문이다.
제자들이 세금을 내라는 요구를 받았을 때, 그리스도는 왕의 자녀의 세금 면제 특권에 대해 베드로와 대화하셨다(마 17:24~27). 베드로는 세금이 면제된다고 대답했지만, 오히려 그리스도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며 바다로 가라고 하셨다. “우리가 그들이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마 17:27). 그리스도는 자신과 제자들은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은 자유로운 왕의 자녀이지만 자진해서 복종하고 섬기고 세금을 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가르치신 것이다. 이 행위가 그리스도에게 필요하지 않았고 그의 의와 구원에 어떤 기여도 하지 않은 것처럼, 그리스도의 다른 행위와 그리스도인의 행위는 구원과 무관하다. 단지 그것은 다른 사람을 위한, 다른 사람의 향상을 위한 자발적인 섬김에 해당한다.
성직자와 수도원, 그리고 종교재단의 모든 행위 역시 이러한 의미로 행해야 한다. 각자 자기 신분과 교단에 따른 행위를 하되, 오직 다른 사람을 만족시키고 자신의 몸을 제어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또한 몸을 제어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모범을 보여 그들도 그렇게 행하도록 해야 한다. 여기서 항상 유념해야 할 것은 이를 통해 의롭게 되고 구원받고자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의와 구원은 오직 믿음의 능력 안에 있기 때문이다.
바울 역시 이런 의미로 로마서 13장과 디도서 3장에서 명령한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권력에 복종하고 기꺼이 따라야 한다. 이를 통해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과 당국의 뜻을 사랑과 자유의 마음으로 행하고 그들을 자발적으로 섬기기 위해서이다. 이것을 이해하는 자는 교황과 주교, 수도원과 종교재단, 그리고 군주와 영주의 수없이 많은 계명과 율법에 쉽게 대처할 수 있다. 그러나 몇 명의 어리석은 가톨릭 성직자들은 이러한 계명과 율법을 마치구원에 필요한 것으로 해석하고 부당하게 교회의 계명으로까지 부른다.
그러나 자유한 그리스도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금식하고 기도하며 명령받은 이것저것을 행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필요하거나 이것을 통해 의롭게 되고 구원받고자 함이 아니다. 오히려 교황, 주교, 공동체 혹은 나의 동료, 나의 주인에게 모범이 되어 섬기며 인내하기 위함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자신에게는 전혀 필요 없는 엄청난 일들을 나를 위해 행하고 겪으신 것과 같다. 폭군들이 부당하게 그러한 일을 요구할지라도 하나님께 대항하는 일이 아닌 한, 그것은 내게 전혀 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쌍방 간 돌봄의 책임관계
29. 이러한 사실에 근거하여 우리는 모든 행위와 계명에 대해 확실한 판단과 구별을 할 수 있다. 어떤 고위성직자가 눈멀고 제정신이 아닌지, 누가 이성적인지를 식별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을 섬기는 행위를 하지 않거나 이웃의 뜻(이것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지 않는 한)을 감당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결코 그리스도인의 선한 행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교회재단, 수도원, 제단, 미사, 유언장 등은 거의 기독교적이지 않으며, 금식과 성인들에게 하는 기도 역시 마찬가지다. 이것들을 통해 우리가 단지 자신의 것만을 추구하며 자기 잘못을 속죄하며 구원받고자 하지 않나 걱정스럽다. 이 모든 것은 믿음과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한 무지 때문이다. 몇몇 눈먼 고위성직자들이 그렇게 행하는데, 사람들에게 면죄부로 치장하도록 조장하고 또한 이 일을 찬양한다. 그들에게 믿음의 가르침은 없다.
그러나 나는 당신에게 다음과 같이 조언한다. 만일 당신이 기부하고 기도하고 금식하고자 하면, 자신을 위해서 선한 일을 행하고자 하지 말고 다른 사람이 그것을 통해 유익을 얻도록 자유로이 주고 행하라. 그러면 당신은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믿음 안에서 모든 것을 주셨다. 믿음 안에서 충분히 가진 당신에게, 몸을 제어하고 부양하고도 남은 당신의 재화와 선행이 더 이상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보라, 이러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재화들은 한 사람으로부터 다른 사람에게 흘러가야 하고 공동의 것이 되어야 한다. 각자는 자기 이웃을 마치 자기 자신처럼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를 자신인 것처럼 받아주신 그리스도로부터 우리에게 하나님의 재화는 흘러온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로부터, 그것을 필요로 하는 다른 사람에게로 흘러가야 한다. 심지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 믿음과 의를 이웃에게 제공하여 그의 죄를 덮고 그 죄를 우리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행하신 것처럼 그의 죄를 마치 내 죄인양 다루어야 한다.
보라, 이것이 사랑의 본성이며 참된 사랑일 때 이루어지는 일이다. 하지만 사랑은 믿음이 참된 곳에서만 참되다. 이와 관련하여 바울사도는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이란 자신의 것을 추구하지 않고 이웃의 것을 구한다고 말한다(고전 13:5).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관한 결론
30. 이 모든 것에서 다음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 안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이웃 안에서 산다. 그는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을 통하여 이웃과 함께 산다.
그는 믿음을 통하여 자신을 넘어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나님으로부터 다시 사랑을 통하여 아래로 내려간다. 그러나 그는 항상 하나님 안에,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무른다. 그리스도가 요한복음 1장 51절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보라, 이것이 모든 죄와 율법과 계명으로부터 마음을 자유하게 하는 참되고 영적인 그리스도인의 자유이다. 이 자유는 하늘이 땅을 능가하듯이 다른 모든 자유를 능가한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이 자유를 바르게 이해하고 간직할 수 있게 해주시기를 기원한다. 아멘.
마틴 루터 저, 권진호 해설 및 번역, 『루터, 구원을 말하다』(서울: 신아사, 2023), pp. 46-53.
첫댓글 위 포스팅을 보면 십계명의 2 구조가 떠오릅니다. 1-4계명은 하나님을 대하는 문제이고, 5-10계명은 사람을 대하는 문제인데, 5-10계명에 해당하는 문제를 루터가 잘 설명해준 것 같습니다.
네, 공감해요. 그런 구도인 것 같습니다.
루터의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관한 결론은 칭의 후 성화까지를 포함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믿음을 통하여 자신을 넘어 하나님께로 올라간다."(칭의) "하나님으로부터 다시 사랑을 통하여 아래로 내려간다."(이웃 사랑) "그러나 그는 항상 하나님 안에,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무른다."(성화 또는 그리스도와의 연합)... 그런 의미를 지니는 것 같습니다.
네, 개혁주의 구원의 서정과 유사한 흐름이 루터에게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호크마 주석>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 본 구절은 본서의 여러 곳에 거듭 언급되는 내용으로(1:4;3:1,13;6:12,14)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초대 교회의 가르침의 초점이었음을 보여준다. 아울러 본절은 예수님을 핍박했던 바울 자신의 개인적인 삶의 변화와 율법으로부터 단절되었다는 신학적인 논증을 나타낸다. 실로 그토록 교만하고 자존심 강한 유대인 중에 유대인이요,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었던 바울이 예수와 함께 죽었다고 고백하는 것은 유대교에 철저했던 그에게 있어 종래의 모든 삶과 사랑에 대한 부정이요 새로운 삶을 향해 전환(轉換)을 이루는 실로 엄청난 변화였다. 이 변화된 삶은 그리스도께서 지셨던 십자가를 지고 고난 가운데서도 자기를 부인하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삶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이후에 그가 지고 가는 십자가는 궁극적으로 고통의 삶이 아니라
오히려 영광과 승리의 삶이었다(W.G.Coltman). 한편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쉬네스타우로마이'(* )는 성도가 그의 십자가를 짐으로써 그리스도의 죽음에 영적으로 동참하였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본서에 처음 등장하는 '십자가'는 율법의 요구를 완성하는 의미로 나타난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율법의 요구를 이루려 함이며(롬 8:4), 또한 실존적으로 구약의 모든 율법적 요구들을 완성한 역사적 사건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힘으로 이제까지 자기가 메고 있던 율법의 요구들로부터 자유와 해방을 얻었다.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 이 짧은 구절 안에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모두 언급되고 있다. 바울은 십자가 위에서 율법의 모든 요구를 완성하시고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롬 6:4). 그리스도와 바울의 완전한 연합은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는 것이며 그 결과 그리스도의 풍성한 열매를 맺는 것이다. 옛 사람의 자기 교만과 바리새인의 자존심을 버리는 것이 잠시 동안 자신에게 패배감과 고통을 안겨주었지만,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사심으로 인하여 얻은 자유와 평화는
그 고통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이었다(롬 8:18).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 본절에는 세 가지 변화가 나타난다. (1) '나' 대신에 '그리스도',(2) '율법' 대신에 '믿음',() 과거의 '옛 사람' 대신에 현재의 '새 사람'으로의 변화가 그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바울로 하여금 모든 변화를 경험하게 했다. 즉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율법 아래서 종노릇하는 것으로부터 해방되어 의와 사랑의 종이 되었으며(롬 6:19), 비록 제한된 육체 가운데 살지만 더 이상 자신을 위한 삶을 살지 않으며, 성령을 좇는 삶을 살게 되었다(롬 8:4).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 그리스도인의 삶은 '믿음 안에서'사는 것이다. 이는 과거에 율법을 지켜 행함으로 의롭게 되려고 애썼던 삶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예수께서는 '내 말이 너희 안에'(요 15:7)라고 말씀하셨지만, 바울은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라고 말한다. 이는 주께서 우리 안에 계실 때에는 말씀으로 존재하시며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믿음으로 그를 따른다는 의미이다.
@장코뱅 호크마 주석의 풍부하고 정확한 설명이 은혜를 끼쳐 주네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와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의 의미를 마음에 새깁니다.
@코람데오 공감합니다.
고전13:5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호크마 주석>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 이 두가지 말씀도 역시 서로 통함이 있는 한 뭉치이다. "무례"란 말(* )은 합당치 안헥 행함이다. 그것은, (1) 공중(公衆)을 위한 예의(禮儀)가 없이 행함을 가리킬 수 있다. 신자는 그리스도의 지체요 고립(孤立)되어 자행 자지(自行自止)할 사람이 아니다. 그는 개인(個人)이면서도 그리스도의 몸(하나님 백성)의 모든 지체들과 함께 살줄을 알아야 된다. 속죄의 사랑을 받은, 사랑의 사람은 인륜상(人倫上) 질서도 더욱 강화(强化)할 지언정 약체화(弱體化)시키지 않는다. 사람에 대한 책임을 다 할줄 모르는 자가, 어떻게 하나님을 바로 섬길 수 있으랴?(요일 4:21). 하나님을 공경하노라 하면서 부모를 박대한 바리새인은 실상 하나님을 바로 공경하지 못한 자였다(마 15:5,6). 사람에게 대한 예의(禮儀)와 하나님에게 대한 경외(敬畏)는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눅 18:4에 불의한 법관의 말도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라고 하여,
양자(兩者)의 관련성을 암시한다. (2) 권위(權威)를 존중히 하지 않음이 역시 "무례"에 속한다. 이 세상에는 권위라는 것이 있다. 실례를 들면, 부모는 자식의 권위요, 선생은 제자의 권위요, 노인은 젊은 자들이 권위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여 주셨다. 사람이 땅의 권위들을 존경하도록 된 것은, 그들이 그 방법을 통하여, 하나님 경외(敬畏)에 이르는 훈련을 받도록 한 것이다. 레 19:32에 말하기를, "너는 센 머리 앞에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니라"고 하였다. 권위를 존경할줄 모르는 자에게는 하나님을 알게 하기가 곤란하다. 존경 의식(尊敬意識)은, 어떤 의미에선 경건을 돕는다고 할 수 있다. 사람들 중에 존경할 자를 존경하는 것이 우리의 경건도 증진(增進)시킨다.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이것은 상습적(常習的)으로 개인적 유익만을 구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속죄의 사랑을 받은 사랑의 사람은, 벌써 독생자와 함께 모든 것을 받아 가지고 나온다. 그는 욥과 같이 "주께서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를 의뢰하리니"라고 한다(욥 13:15 脚註). 그는 사람에게 무엇을 받으려고 행하지 않고,
그는 사람에게 무엇을 받으려고 행하지 않고, 사람에게 무엇을 주려고만 행한다. 그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이유는, 자아(自我)가 없어진 까닭이 아니다. 그에게 자아라는 것은 분명히 있다. 그러나 자아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음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 이 두 마디 말씀도 서로 유사(類似)한 방면을 가진 한 쌍(雙)이다. 성내는 것이나, 악한 것을 생각함은 둘 다 악독한 심리를 발함이다. 성내는 것은 잠재(潛在)하였던 증오(憎惡)가 폭발(爆發)함이니 그것이 곧, 살인독(殺人毒)이다. 분노는 남을 죽이려는 마음의 발작(發作)이다. (1) 이것은 영생의 생명운동을 방해하며(요일 3:15), (2) 하나님의 사랑을 내 마음에서 내쫓으며(요일 3:17), (3) 분노하는 자 자신이 죽는데 나아간다(요일 3:14). 남을 죽이려다가 먼저 자기를 죽이고 만다. 속죄의 사랑을 받은, 사랑의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없다. 요일 3:16에 말하기를,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하였다. 성내는 죄를 이기는 비결은 무엇인가? (1) 남들로 말미암아 괴롭힘을 당할 때에 분노하나,
그때에 우리가 생각하여야 될 것은 이것이다. 곧, "내가 그 형제를 위하여 죽을 책임까지 있는데 그 형제의 그만한 괴롭힘을 당하지 못하랴"하는 생각이다. 그렇게 생각함이,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죽으신 것을 그대로 믿는 믿음을 지니는 생각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속죄의 사랑을 입으로는 받는다고 하면서, 행위로는 그것을 받지 않은자처럼 행하면 안 된다. 말로만 믿는 다하고 행위로 그렇지 않으면, 이는 그리스도의 속죄의 사랑을 정성스러이 받지 않는 불행이다. (2) 분노를 이기는 또 한가지 비결은 성령 충만의 은혜를 받음에 있다. 성령 충만은 누구든지 간절히 원할 때에 받아진다. 사도 바울은 성령 충만을 받으라고 에베소 교인들에게 명령하였다(엡 5:18). 특별히 성내기 잘하는 사람으로서는 그 성질 하나가 자기를 망치는 줄을 깨닫고 그것 하나 고치기 위하여 전심으로 기도하여야 한다. "약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이것은 기독자가 억울함을 당하였을 때에 가해자(加害者)에게 복수(復讐)를 안 할뿐 아니고 그 받은 손해를 생각하지도 않음을 의미한다. 벧전 4:8에 말하기를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하였다. 우리가 받은 속죄(贖罪)의 사랑은,
사죄의 사랑이니 이 사랑을 받은 사랑의 사람이 어찌 복수 사상(復讐思想)을 가지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사랑은, 우리가 그의 원수되었을 때에 우리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죽음심이었다(롬 5:10).
@장코뱅 호크마 주석의 이 부분도 너무 좋네요.무례히 행하는 것과 자기 유익을 구하는 것, 분노 등에 대한 설명에서 은혜를 받습니다. 아멘입니다.
@코람데오 공감합니다.
루터의 좋은 글을 공유해 주시고 좋은 댓글들이 더해져서 유익한 독서를 할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공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