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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루터 루터,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하여』셋째 부분 -겉사람: 자유로 하는 행위(하)
코람데오 추천 3 조회 225 24.12.16 08:18 댓글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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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24.12.16 08:23

    첫댓글 위 포스팅을 보면 십계명의 2 구조가 떠오릅니다. 1-4계명은 하나님을 대하는 문제이고, 5-10계명은 사람을 대하는 문제인데, 5-10계명에 해당하는 문제를 루터가 잘 설명해준 것 같습니다.

  • 24.12.16 13:11

    네, 공감해요. 그런 구도인 것 같습니다.

  • 24.12.16 09:49

    루터의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관한 결론은 칭의 후 성화까지를 포함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믿음을 통하여 자신을 넘어 하나님께로 올라간다."(칭의) "하나님으로부터 다시 사랑을 통하여 아래로 내려간다."(이웃 사랑) "그러나 그는 항상 하나님 안에,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무른다."(성화 또는 그리스도와의 연합)... 그런 의미를 지니는 것 같습니다.

  • 24.12.16 13:14

    네, 개혁주의 구원의 서정과 유사한 흐름이 루터에게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 24.12.16 08:31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호크마 주석>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 본 구절은 본서의 여러 곳에 거듭 언급되는 내용으로(1:4;3:1,13;6:12,14)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초대 교회의 가르침의 초점이었음을 보여준다. 아울러 본절은 예수님을 핍박했던 바울 자신의 개인적인 삶의 변화와 율법으로부터 단절되었다는 신학적인 논증을 나타낸다. 실로 그토록 교만하고 자존심 강한 유대인 중에 유대인이요,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었던 바울이 예수와 함께 죽었다고 고백하는 것은 유대교에 철저했던 그에게 있어 종래의 모든 삶과 사랑에 대한 부정이요 새로운 삶을 향해 전환(轉換)을 이루는 실로 엄청난 변화였다. 이 변화된 삶은 그리스도께서 지셨던 십자가를 지고 고난 가운데서도 자기를 부인하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삶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이후에 그가 지고 가는 십자가는 궁극적으로 고통의 삶이 아니라

  • 24.12.16 08:31

    오히려 영광과 승리의 삶이었다(W.G.Coltman). 한편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쉬네스타우로마이'(* )는 성도가 그의 십자가를 짐으로써 그리스도의 죽음에 영적으로 동참하였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본서에 처음 등장하는 '십자가'는 율법의 요구를 완성하는 의미로 나타난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율법의 요구를 이루려 함이며(롬 8:4), 또한 실존적으로 구약의 모든 율법적 요구들을 완성한 역사적 사건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힘으로 이제까지 자기가 메고 있던 율법의 요구들로부터 자유와 해방을 얻었다.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 이 짧은 구절 안에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모두 언급되고 있다. 바울은 십자가 위에서 율법의 모든 요구를 완성하시고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롬 6:4). 그리스도와 바울의 완전한 연합은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는 것이며 그 결과 그리스도의 풍성한 열매를 맺는 것이다. 옛 사람의 자기 교만과 바리새인의 자존심을 버리는 것이 잠시 동안 자신에게 패배감과 고통을 안겨주었지만,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사심으로 인하여 얻은 자유와 평화는

  • 24.12.16 08:32

    그 고통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이었다(롬 8:18).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 본절에는 세 가지 변화가 나타난다. (1) '나' 대신에 '그리스도',(2) '율법' 대신에 '믿음',() 과거의 '옛 사람' 대신에 현재의 '새 사람'으로의 변화가 그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바울로 하여금 모든 변화를 경험하게 했다. 즉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율법 아래서 종노릇하는 것으로부터 해방되어 의와 사랑의 종이 되었으며(롬 6:19), 비록 제한된 육체 가운데 살지만 더 이상 자신을 위한 삶을 살지 않으며, 성령을 좇는 삶을 살게 되었다(롬 8:4).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 그리스도인의 삶은 '믿음 안에서'사는 것이다. 이는 과거에 율법을 지켜 행함으로 의롭게 되려고 애썼던 삶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예수께서는 '내 말이 너희 안에'(요 15:7)라고 말씀하셨지만, 바울은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라고 말한다. 이는 주께서 우리 안에 계실 때에는 말씀으로 존재하시며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믿음으로 그를 따른다는 의미이다.

  • 작성자 24.12.16 12:05

    @장코뱅 호크마 주석의 풍부하고 정확한 설명이 은혜를 끼쳐 주네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와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의 의미를 마음에 새깁니다.

  • 24.12.16 16:51

    @코람데오 공감합니다.

  • 24.12.16 08:36

    고전13:5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호크마 주석>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 이 두가지 말씀도 역시 서로 통함이 있는 한 뭉치이다. "무례"란 말(* )은 합당치 안헥 행함이다. 그것은, (1) 공중(公衆)을 위한 예의(禮儀)가 없이 행함을 가리킬 수 있다. 신자는 그리스도의 지체요 고립(孤立)되어 자행 자지(自行自止)할 사람이 아니다. 그는 개인(個人)이면서도 그리스도의 몸(하나님 백성)의 모든 지체들과 함께 살줄을 알아야 된다. 속죄의 사랑을 받은, 사랑의 사람은 인륜상(人倫上) 질서도 더욱 강화(强化)할 지언정 약체화(弱體化)시키지 않는다. 사람에 대한 책임을 다 할줄 모르는 자가, 어떻게 하나님을 바로 섬길 수 있으랴?(요일 4:21). 하나님을 공경하노라 하면서 부모를 박대한 바리새인은 실상 하나님을 바로 공경하지 못한 자였다(마 15:5,6). 사람에게 대한 예의(禮儀)와 하나님에게 대한 경외(敬畏)는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눅 18:4에 불의한 법관의 말도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라고 하여,

  • 24.12.16 08:39

    양자(兩者)의 관련성을 암시한다. (2) 권위(權威)를 존중히 하지 않음이 역시 "무례"에 속한다. 이 세상에는 권위라는 것이 있다. 실례를 들면, 부모는 자식의 권위요, 선생은 제자의 권위요, 노인은 젊은 자들이 권위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여 주셨다. 사람이 땅의 권위들을 존경하도록 된 것은, 그들이 그 방법을 통하여, 하나님 경외(敬畏)에 이르는 훈련을 받도록 한 것이다. 레 19:32에 말하기를, "너는 센 머리 앞에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니라"고 하였다. 권위를 존경할줄 모르는 자에게는 하나님을 알게 하기가 곤란하다. 존경 의식(尊敬意識)은, 어떤 의미에선 경건을 돕는다고 할 수 있다. 사람들 중에 존경할 자를 존경하는 것이 우리의 경건도 증진(增進)시킨다.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이것은 상습적(常習的)으로 개인적 유익만을 구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속죄의 사랑을 받은 사랑의 사람은, 벌써 독생자와 함께 모든 것을 받아 가지고 나온다. 그는 욥과 같이 "주께서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를 의뢰하리니"라고 한다(욥 13:15 脚註). 그는 사람에게 무엇을 받으려고 행하지 않고,

  • 24.12.16 08:40

    그는 사람에게 무엇을 받으려고 행하지 않고, 사람에게 무엇을 주려고만 행한다. 그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이유는, 자아(自我)가 없어진 까닭이 아니다. 그에게 자아라는 것은 분명히 있다. 그러나 자아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음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 이 두 마디 말씀도 서로 유사(類似)한 방면을 가진 한 쌍(雙)이다. 성내는 것이나, 악한 것을 생각함은 둘 다 악독한 심리를 발함이다. 성내는 것은 잠재(潛在)하였던 증오(憎惡)가 폭발(爆發)함이니 그것이 곧, 살인독(殺人毒)이다. 분노는 남을 죽이려는 마음의 발작(發作)이다. (1) 이것은 영생의 생명운동을 방해하며(요일 3:15), (2) 하나님의 사랑을 내 마음에서 내쫓으며(요일 3:17), (3) 분노하는 자 자신이 죽는데 나아간다(요일 3:14). 남을 죽이려다가 먼저 자기를 죽이고 만다. 속죄의 사랑을 받은, 사랑의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없다. 요일 3:16에 말하기를,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하였다. 성내는 죄를 이기는 비결은 무엇인가? (1) 남들로 말미암아 괴롭힘을 당할 때에 분노하나,

  • 24.12.16 08:40

    그때에 우리가 생각하여야 될 것은 이것이다. 곧, "내가 그 형제를 위하여 죽을 책임까지 있는데 그 형제의 그만한 괴롭힘을 당하지 못하랴"하는 생각이다. 그렇게 생각함이,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죽으신 것을 그대로 믿는 믿음을 지니는 생각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속죄의 사랑을 입으로는 받는다고 하면서, 행위로는 그것을 받지 않은자처럼 행하면 안 된다. 말로만 믿는 다하고 행위로 그렇지 않으면, 이는 그리스도의 속죄의 사랑을 정성스러이 받지 않는 불행이다. (2) 분노를 이기는 또 한가지 비결은 성령 충만의 은혜를 받음에 있다. 성령 충만은 누구든지 간절히 원할 때에 받아진다. 사도 바울은 성령 충만을 받으라고 에베소 교인들에게 명령하였다(엡 5:18). 특별히 성내기 잘하는 사람으로서는 그 성질 하나가 자기를 망치는 줄을 깨닫고 그것 하나 고치기 위하여 전심으로 기도하여야 한다. "약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이것은 기독자가 억울함을 당하였을 때에 가해자(加害者)에게 복수(復讐)를 안 할뿐 아니고 그 받은 손해를 생각하지도 않음을 의미한다. 벧전 4:8에 말하기를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하였다. 우리가 받은 속죄(贖罪)의 사랑은,

  • 24.12.16 08:41

    사죄의 사랑이니 이 사랑을 받은 사랑의 사람이 어찌 복수 사상(復讐思想)을 가지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사랑은, 우리가 그의 원수되었을 때에 우리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죽음심이었다(롬 5:10).

  • 작성자 24.12.16 12:11

    @장코뱅 호크마 주석의 이 부분도 너무 좋네요.무례히 행하는 것과 자기 유익을 구하는 것, 분노 등에 대한 설명에서 은혜를 받습니다. 아멘입니다.

  • 24.12.16 13:17

    @코람데오 공감합니다.

  • 24.12.16 13:18

    루터의 좋은 글을 공유해 주시고 좋은 댓글들이 더해져서 유익한 독서를 할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 24.12.16 16:56

    공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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