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류꽃은 도발적이다. 가녀린 어깨에 조그마한 얼굴을 한 청순한 소녀 같지만, 주홍빛 붉은 입술을 반쯤 벌리고 있을 때면 현기증이 일 듯 농염한 여인이다. 명징한 꽃의 색은 대놓고 손짓하는 천진함까지 갖추어 매력을 더한다. 순수한 맨 얼굴이 이러할 진데 알큰한 술 한 잔이 더해진 날 꽃을 본다면 취하지 않고 버틸 재주가 없다.
석류꽃 피는 집에 모녀가 이사를 왔다. 오십 대 후반쯤의 어머니와 이십 대의 딸은 쬐끔한 석류꽃과는 이미지가 확연하게 다른 넉넉한 몸집을 가진 모녀였다. 처음 집을 구하러 왔을 때 한 남자와 동행을 했다. 어딘가 낯익은 남자를 기억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는 다름 아닌 내가 주로 거래하는 아파트에서 자주 보던 술꾼 아저씨였다. 술 취한 모습으로 비틀거리며 승강기 입구에서 마주치곤 하던 남자는 아파트 입구에서 공인중개사사무실을 운영하는 나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그들은 처음에는 부부인 척 행세를 하더니 나중에는 친척 오빠라고 둘러댔다. 전세보증금으로 돈이 모자라자 자신이 마련해주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그 후 자주 그 둘이 어울리는 것이 목격되었다. 그 남자가 사는 층에서 승강기가 멈추었다. 둘이 같이 승강기 안으로 들어왔지만, 눈길을 접고 들어오는 그들은 나를 알아채지 못했다. 인사를 하는 내게 건성으로 답을 할 뿐이다. 다시 식당에서 마주쳤다. 둘은 연인처럼 다정하게 눈빛을 나누었다. 그러다 여자의 눈이 정확히 나와 마주쳤다. 황망히 얼굴을 돌리는 그녀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후 남자의 집을 들락거리던 여자를 승강기에서도 지하 주차장에서도 마주쳤다. 남자의 아파트 바로 앞 주택에 집을 얻은 여자의 속내는 무엇일까.
도대체 남자의 부인은 어떻게 된 것일까. 손자 돌보는 일로 바쁘던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궁금증이 극에 달할 때쯤 부인이 돌아왔다. 타 지역에 사는 딸이 아이를 낳아 돌봐 주려 몇 달 갔다 왔다고 한다. 아주머니에게 말을 해 주어야 하나, 누군가 물어보아야 하나 하고 고민이 깊어갈 때 셋이 함께 승강기를 타는 것을 보았다. 석류나무집 여자는 나를 보자 때 이른 석류꽃이 핀 듯 홧홧해 했다. 하지만 남자는 흔들림 없이 담담했다.
매일 갈등하며 하루를 보내는 사이 달이 바뀌고 해가 바뀌었다. 둘이 또는 셋이 간간이 보이던 그들 중 남자가 서너 달 보이지 않았다. 그동안 석류나무 집 여자는 술을 배웠는지 가끔 휘청거리며 대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술 잘 먹는 남자랑 어울리더니 어느새 술꾼이 되어 가는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뒷모습에서 송이째 떨어진 꽃처럼 막막한 슬픔을 본 듯 했다.
사무실에 사람들이 경매 나온 집에 문의를 하려 들락거렸다. 알고 보니 남자의 집이었다. 등기부를 떼어보니 대출금을 갚지 못해 경매신청이 되어있었다. 그녀에게 빌려준 돈보다는 몇 배는 되는, 아파트 매매금액과 맞먹는 돈이 대출되어 있었다. 어려워진 사정의, 남자의 부인을 생각하니, 마음이 복잡해졌다.
그즈음 석류나무 집 여자가 술에 잔뜩 취해 사무실을 찾았다. 음료수를 가득 들고 들어선 여자는 남자가 죽은 지 몇 달 되었다고 하며 허허거렸다. 웃음에 배인 슬픔보다 다른 뜻이 있는 듯 했다. 종잡을 수 없는 마음을 읽힌 것인가. 그날 이후 그녀는 술만 먹으면 사무실에 비싼 음료수를 사다 날랐다.
남자의 부인이 석류나무 집을 찾는 모습을 보았다. 손주를 업고 여자와 다정하게 대문 앞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돌아서는 부인에게 이 집 아주머니랑 어떻게 아는 사이냐고 슬쩍 물었다. 고향의 후배라고 한다. 부인은 자신이 집을 비운 사이 그녀가 도둑고양이처럼 들락거린 것도 연인처럼 밥을 먹고 드리이버를 즐긴 것도 남편이 약간의 보증금을 보태어준 것도 전혀 모르는 듯했다. 남편이 가고 없는 적막한 날 막역한 고향 후배에게 하소연이나 하러 온 물정 모르는 여자일 뿐이었다. 순박한 여인에게 몇 푼의 돈의 행방을 확인하라고 차마 말하지 못했다. 차라리 모르는 것이, 그녀에게 나을 것이란 확신이 섰고 거래고객과의 비밀유지의무가 무엇보다 큰 직업의 특성 탓이기도 했다. 혹여 말했다 해도 차용증을 주고받았을 리 만무한데 해결되는 것 없이 마음만 복잡해질 일이었다. 아니 갚았다고 하면 그만인 일이고 정말 갚았을 수도 있지 않은가.
두어 번의 유찰 끝에 집의 주인이 바뀌었다. 주인이 바뀐 아파트에 부인은 아직 살고 있다. 자식의 명의나 친인척의 명의로 집을 낙찰받았을지 모른다. 아니면 월세나 전세로 살기로 했을 수도 있다. 석류나무 집 여자는 말이 나지 않을 거란 믿음 때문인지 한동안 사무실 쪽으로는 발길을 하지 않았다.
선홍의 입속을 드러내며 웃는 석류는 바라보기만 해도 입안에 침이 고인다. 터진 골에 박힌 홍 보랏빛 보석은 진저리쳐지는 전율이다. 끓어오르는 정염을 이기지 못해 살풋 풀어헤친 여인의 앞 가슴인 양 조금은 달뜬 분위기마저 연출한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석류나무 집 여인이 울고 있다.
“미안하데이, 내가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다.”
죽은 남자에 대한 그리움인지, 부인에 대한 미안함인지, 아니면 사정을 알고 있는 이웃에 대한 변명인지 분명치 않다. 가랑이 사이에 신발을 벗어 끼우고 퍼질러 앉아 허공에 뱉어내는 말들이 진홍빛이다.
석류 속에는 많은 방들이 있다. 결과 칸으로 이루어진 방들마다 열매들이 들어차 있다. 간혹 비어버린, 혹은 덜 여문 알맹이도 있다. 피어난 꽃들이 모두 열매가 되지 못하듯 사람의 인연도 마찬가지다. 각 인연의 방마다 보석처럼 반짝이는 순간도 있지만 숨기고픈 기억, 가슴 칠 후회가 바닥을 알 수 없는 깊이로 가라앉아 있다. 사람들은 그것을 무엇이라 부를까.
속절없이 가을이 조금씩 스러지는 날이다. 그리움에 가슴이 저절로 탁탁 터져버리는 날, 석류나무 아래서 술 한잔에 취해 발버둥 치며 우는 한 여자가 있다. 아니 두 여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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