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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파] ♣ 낙동강 1300리 종주 대장정(22)—내성천 봉화 (1)
생명의 물길 따라 인간의 길을 생각한다!
☆ [낙동강 종주] * 제9구간 (삼강→상주보) ① * [삼강 ←내성천 봉화]
2021년 11월 18일(목) [별도 답사]▶ 내성천 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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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奉化)·1
경북 봉화의 옛날 지명이 내성(乃城)이다. 조선 시대 내성은 큰 장이 열렸다. 동해안 울진 항구의 고등어와 해산물을 보부상들이 지게에다 지고 태백산맥의 험준한 십이령(열두 고개)을 넘었다. 그 고등어의 도착 지점이 내성 장이었다. 내성 장의 고등어가 다시 경북 내륙 일대로 분산되었던 것이다.
봉화의 지형과 자연환경
백두대간과 낙동정맥 사이의 산간지역
군(郡)의 북쪽에는 강원도 태백산에서 남하하는 백두대간이 깃대기봉에서 산줄기가 서쪽으로 이어져, 신선봉, 구룡산(九龍山, 1,346m), 도래기재(88번 국도, 봉화 춘양-영월), 옥돌봉(玉石山, 1,242m), 선달산(先達山, 1,236m), 갈곶산(966m)을 지나 영주시 구간인 소백산 산줄기(국망봉-비로봉-연화봉-죽령)로 뻗어간다. 그리고 군의 동쪽에는 낙동강 본류를 중심으로 하여 청옥산, 배바위산(968m)·오미산(梧味山, 1,071m)·비룡산(飛龍山, 1,129m)·죽미산(竹美山, 907m)·장군봉(將軍峰) 등이 솟아 있다. 지형적으로 이렇게 봉화군은 백두대간과 낙동정맥 사이의 산간지역이다.
봉화읍(奉化邑)을 중심으로 서부에는 봉황산(819m), 응방산(鷹坊山, 587m), 대마산(大馬山, 375n) 등이, 남부(南部)에는 만리산(792m), 문명산(文明山, 894m), 청량산(淸凉山, 870m), 산성산(山城山, 845m), 미림산(美林山, 686m) 등이 에워싸고 있다.
이 밖에 각화산(覺華山, 1,177m), 왕두산(王頭山, 1,044m), 문수산(文殊山, 1,206m), 화장산(華獐山, 859m), 월암산(608m) 등 군의 곳곳에 높은 산들이 우뚝 솟아 있고, 군소 산봉우리들이 첩첩으로 싸여 있어 경상북도 내에서는 가장 높은 산간지역이다.
봉화 각화산(覺華山)
각화산(1,177m)은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과 소천면 경계에 걸쳐 있는 산이다. 산의 남동에 왕두산(王頭山, 1,044m)이, 북쪽에 무명산(無名山, 1,172m)이 있어서 면계를 이루고 있으며, 남서쪽 사면에는 운곡천(雲谷川)이 흐르고, 동쪽의 사면은 현동천(縣洞川)의 상류를 형성하며, 남쪽 사면은 자하천의 지류에 의하여 침식을 받고 있다. 각화산은 구령산(九靈山), 조록암봉, 청옥산(靑玉山), 옥석산(玉石山) 등과 함께 백두대간의 봉화의 산군이면서도 넓은 지역에 산세가 중후하고 모난 데가 없는 육산의 풍모를 보이며, 1,000m급 산들이 즐비하다. 각화산과 왕두산 일대는 계곡이 깊고, 수량이 풍부해서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물이 마르지 않아 여름철 계곡은 청정하고 싱그럽다. 각화산과 왕두산 산줄기의 아래(절골)에 천 년 고찰 각화사가 자리잡고 있다.
각화산(覺華山)이란 지명은, 본래 춘양면 서동리의 보물 제52호로 지정된 ‘삼층석탑(三層石塔)’이 있는, 지금의 춘양중학교 자리에 있던 남화사(覽華寺)를 서기 676년(신라 30대 문무왕 16년)경에 원효대사가 이곳으로 이전하고 ‘남화사를 생각한다’ 하여 각화산이라 명명한데서 비롯되었다 한다.
각화사(覺華寺) 아래에는태백산 사고지(太白山 史庫址, 사적 제348호)가 있는데, 태백산 사고지는 한양의 춘추관 및 강화도, 묘향산, 오대산의 사고(史庫)와 더불어 조선 후기 5대 사고 중의 하나로 1606년에 건립하여 왜정시대인 1913년까지 약 300여년 간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역사적인 장소이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은 당시 조선총독부에 의해 경성제대학으로 옮겨졌다가 현재는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보관 중이다. 사고 건물은 해방 이후 원인모를 불로 완전히 타버렸다.
봉화의 행정구역
봉화(奉化)는 강원도 태백산에서 영주 소백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白頭大幹) 남쪽에 위치한 산간 지역으로 경상북도에서 최북단에 위치해 있다. 북쪽은 강원도 영월군·삼척시·태백시와 접하고 있고 서쪽은 영주시, 동쪽은 울진군, 남쪽은 영양군, 안동시와 접해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봉화는 서진하는 백두대간과 남진하는 낙동정맥 사이에 위치해 있는 산간지방이다.
▶ 봉화군의 북쪽은 태백에서 영주로 이어지는 해발 1,000m가 넘는 백두대간의 산줄기가 동서로 뻗어있고, 그 백두대간 옥석산(玉石山, 1,242m)에서 남으로 분기한 문수산(1,207m)—만리산(792m) 산줄기가 군(郡)을 동서로 나누어, 서쪽은 내성천 영역인 물야면, 봉화읍, 봉성면, 상운면이고, 동쪽은 운곡천·현동천 영역의 춘양면, 소천면, 법전면, 명호면이 있으며, 태백산-청옥산 산줄기 동쪽에 석포면이 있고, 낙동강 동쪽에는 낙동정맥에서 발원한 재산천이 흐르는 재산면이 자리하고 있다.
봉화, 낙동강 지천의 발원지
내성천 / 병오천, 석포리천, 광비천, 운곡천, 현동천 …
장엄한 백두대간이 태백의 구봉산(902m)에서 낙동정맥이 분기(分岐)하면서 그 매봉산 너덜샘에서 낙동강의 본류가 발원한다. 그리고 두 산맥 사이에서 발원하는 모든 산곡의 물이 유입하여 낙동강 본류를 이룬다. 태백시 매봉산 너덜샘에서 발원하여 내려온 황지천(낙동강 본류)이 석포면—소천면을 경유하여 명호면에 이어지고 나서 남쪽으로 안동시 영역으로 흘러내린다. 태백시 남쪽에 위치한 봉화군 영역에서는 석포리천(石浦里川)·광비천(廣比川)·재산천(才山川), 운곡천, 현동천이 낙동강에 유입된다.
백두대간 옥석산에서 남으로 분기한 문수산-만리산 지맥은 봉화군의 중앙을 지나면서 동서의 분수령을 이룬다. 문수산-만리산 동쪽에는 백두대간 구룡산에서 발원한 운곡천(雲谷川)이 봉화군 춘양(면)을 경유하여 명호(면)에서 낙동강에 흘러들고, 백두대간 깃대기봉과 청옥산 서쪽의 산곡에서 발원은 현동천은 소천면 현동(역)에서 낙동강에 유입된다. 백두대간 깃대기봉과 청옥산 동쪽의 산곡에서 발원한 병오천은 수려한 백천계곡-대현사를 경유하여 석포면 육송정 삼거리에서 낙동강에 흘러든다.
낙동정맥 백병산(1,153m) 서쪽의 산곡에서 발원한 석포리천(石浦里川)은 석포리에서 낙동강에 유입되고, 낙동정맥 통고산—일월산 동쪽의 산곡에서 발원한 광비천(廣比川, 회룡천)은 울진군 금강송면과 봉화군 분천면과 경계를 이루며 영동선 양원역과 비동역 중간지점에서 낙동강에 유입된다. 그리고 영양 일월산 서쪽에서 발원한 재산천(才山川)은 재산(면)을 경유하여 갈산리 합강나루터에서 낙동강에 흘러든다. 석포리천과 광비천 그리고 재산천을 낙동강 동쪽에서 유입되는 지천이다.
▶ 백두대간 옥석산 서쪽에 있는 선달산(물야면)에서 발원하는 내성천(乃城川)은 봉화읍을 경유하여 영주, 예천 지역의 평야지대를 형성하면서, 예천의 삼강(三江)에서 낙동강에 흘러든다.
봉화의 역사
봉화는 삼한시대에 진한의 기저국에 속하였고 삼국시대에는 현재의 봉성면 일대가 고구려의 내기군 고사마현에 속하였으며, 신라 5대 파사왕(80~112) 때 신라 영토에 속하였습니다. 신라 35대 경덕왕(742~765) 때 내령군 옥마현으로, 고려 8대 현종(1010~1031) 때 안동부 봉성현으로, 고려 말 1390년(공양왕 2)에 감무(監務)가 설치되어 비로소 중앙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게 되었는데, 별호(別號)는 봉성(鳳城)이었다. 고려 후기에는 이곳을 본관으로 하는 금의(琴儀) 및 정도전(鄭道傳)과 관련되어 주목받기도 하였다.
한편, 고려 후기 이래 이곳 봉화를 본관으로 하는 금씨(琴氏)와 정씨(鄭氏)가 중앙정계에서 큰 활약을 하면서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고, 조선 중기부터는 안동지역의 사족(士族)들이 이곳으로 이동해 왔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유곡(酉谷, 닭실)으로 이주해온 충재(沖齋) 권벌(權橃)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 한양을 거쳐 강원도에 진격한 왜군이 경상도로 남하해 오자 유종개(柳宗介) 및 윤흠신(尹欽信)·윤흠도(尹欽道) 형제를 중심으로 의병 수백 명이 현 동쪽 소천(小川) 지역에서 적을 방어하다가 열세에 몰려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실록의 보관을 위해 사고(史庫)가 정비되자, 1606년(선조 39) 이곳 태백산(太白山)에도 사고(史庫)·선원각(璿源閣)·실록각(實錄閣)이 남화사지(覽華寺址) 부근에 설치되었다. 1895년(고종 32)에 봉화현을 봉화군(奉化郡)으로 개칭하였다.
봉화의 유물·유적
불교문화재
봉화의 불교문화재로는 666년(문무왕 6) 원효(元曉)가 명호면 북곡리에 창건한 청량사(淸凉寺)와 청량사유리보전(淸凉寺琉璃寶殿,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7호), 같은 해 의상(義湘)이 물야면 개단리에 창건한 축서사(鷲棲寺)와 축서사석불좌상부광배(보물 제995호), 봉화 축서사 괘불탱(보물 제1379호)가 있다. 또, 676년 원효가 춘양면 석현리에 창건한 각화사(覺華寺)와 각화사귀부(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89호)·삼층석탑·석구 등도 있다.
축서사 석불좌상부광배(보물 제995호)
▶ 축서사(鷲棲寺) 석불좌상(石佛坐像)은 문수산(文殊山) 정상 가까이에 자리잡은 축서사 대웅전(大雄殿) 서벽(西壁)에 봉안되어 있다. 불상의 높이는 1.08m이며, 얼굴은 가는 눈, 꼭 다문 입, 반듯하고 넓은 신체에서 고요함과 안정감을 느낄 수 있다. 현재 불상 뒤에 나무로 만들어진 광배(光背, 보물 제995호)가 있는데 여기에는 화려한 꽃무늬와 불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이것은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고, 원래의 돌로 만든 광배는 윗부분만 남아있다.
불상으로는 신라통일 직후의 작품인 봉화북지리마애여래좌상(국보 제201호), 오전리석조아미타여래좌상(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54호)이 물야면에, 봉화의양리석조여래입상(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31호), 소로리석불입상, 서동리석조여래좌상이 춘양면에 있다.또, 봉성면에 봉화봉성리석조여래입상(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32호), 천성사석조여래입상(千聖寺石造如來立像,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33호), 법전면에 소천리석조여래좌상, 재산면에 봉화동면리마애비로자나불입상(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73호) 등의 불상이 다수 남아 있다.
봉화북지리마애여래좌상(국보 제201호)
봉화 북지리에 있는 마애여래좌상(磨崖如來坐像)은 원래 감실 안에 본존불로 조성한 보기 드문 신라시대의 거대한 마애여래좌상이었으나 그 동안 감실의 돌벽이 무너지고 불상도 군데군데 훼손되었으나 부처님의 위용은 여전하며 원각에 가까운 도들새김으로 조성되었기 때문에 위엄이 있다 오른손을 가슴에 들어 시무외인(施無畏印)을 하고 왼손은 무릎에 내려 여원인(與願印)을 하고 있는 두 손의 모습은 이 불상의 위용을 한층 더한다.
이 불상은 보물 제45호인 익산 연동리 석조여래좌상에서 본 마애불상을 거쳐 보물 제221호 영주 가흥동 마애여래삼존상 및 여래좌상로 이어지는 흐름이 발견되고, 불상의 얼굴 및 몸체에 드러나는 부드러운 조각력을 고려해보면 실제 제작 시기는 대략 7세기 후반기로 추정하고 있다. 7세기 중엽의 위엄과 자비로운 불상의 아름다움을 잘 보여줄 뿐만 아니라 큰 본존불답게 신라석조물 조각사에 거대한 발자취를 남겨주고 있다. 영주와 봉화 일대의 불상을 대표할 만한 작품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아 1980년 9월 16일에 국보 제201호로 지정되었다.
* 여원인(與願印)은 손바닥을 편 오른손을 들어 손가락이 위를 향하도록 하여 밖으로 향하는 자세를 말하고 시무외인(施無畏印)은 손바닥을 펴고 밖으로 향하여 물건을 전하는 듯한 자세를 말한다. 양손으로 두 수인을 취하는 경우가 많아 시무외여원인이라고 합쳐서 부르거나 통인(通印)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이 밖에 천성사삼층석탑(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34호)과 축서사삼층석탑(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57호)·축서사석등(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58호)이 있고, 특히 춘양면의 봉화서동리삼층석탑(보물 제52호) 내부에서는 탑과 같은 모양의 토탑(土塔) 99개가 출토되기도 하였다.
유교문화재
춘양면 석현리에는 태백산사고지(太白山史庫址, 사적 제348호), 봉화읍 유곡리에는 조선 중종 때 예조참판을 지낸 권벌의 충재일기(冲齋日記, 보물 제261호)와 충재권벌종손가소장전적(보물 제896호)·충재권벌종손가소장고문서(보물 제901호)·충재권벌종손가소장유묵(보물 제902호), 그리고 영조가 권벌의 후손에게 하사한 근사록(近思錄, 보물 제262호)이 전한다.
유교문화재로는 봉화읍의 거촌리쌍벽당(巨村里雙壁堂, 중요민속자료 제170호), 화천리의 구만서원(龜灣書院,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54호), 몽화각(夢華閣,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55호), 유곡리의 서설당(瑞雪堂,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04호), 물야면의 가평리계서당(佳坪里溪西堂, 중요민속자료 제171호), 봉성면 봉성리의 봉화향교(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53호) 등이 있다.
▶ ‘봉화향교’ 대성전(大成殿)에는 공부자(孔夫子)를 비롯한 오성(五聖)과 송조(宋朝)의 사현(四賢) 및 우리나라 십팔현(十八賢)의 위판(位版)을 봉안·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었다. 1579년(선조 12)에 봉화현감 조목(趙穆)이 중건하였고, 1925년에 군수 서병린(徐丙麟)이 중수하였다. 1950년에는 향교내에 봉성고등공민학교(鳳城高等公民學校)를 설치하였다가 1975년에 폐교되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6칸의 대성전, 팔작지붕에 홑처마로 된 6칸의 명륜당, 5칸의 동재(東齋), 4칸의 서재(西齋), 6칸의 누각, 내삼문(內三門), 유교문(由敎門), 주사(廚舍) 등으로 되어 있다.소장전적은 거의 산실(散失)되었으며, 《봉화향교임록 奉化鄕校任錄》·《입재록 入齋錄》·《사마록 司馬錄》·《향교원임록 鄕校原任錄》 등은 이 지방 향토사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현재 전교 1명과 장의(掌議) 수명이 운영을 담당하고 있다.
또한, 봉화의 정자(亭子)로는 물야면 오록리의 장암정(藏庵亭,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50호), 청간당(淸澗堂,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51호), 상운면 문촌리의 무진장재(無盡藏齋,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52호), 구천리의 야옹정(野翁亭,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53호), 법천리의 이오당(二吾堂,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56호) 등이 있다. 그 밖에 춘양면 의양리의 봉화한수정(奉化寒水亭, 보물 제2048호), 봉화읍 거촌리의 도암정(陶巖亭,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54호), 상운면 문촌리의 종선정(種善亭,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64호), 명호면 북곡리의 청량정사(淸凉精舍,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44호), 봉화읍 적덕리의 두릉서당(杜稜書堂,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53호) 등의 문화재가 많다.
봉화의 고가(古家)
봉화의 고가옥으로는, 법전면 척곡리에 봉화법전강씨종택(奉化法田姜氏宗宅,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40호), 봉성면 원둔리의 오고당구택(五高堂舊宅,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52호), 봉화읍 거촌리의 경암헌고택(畊菴軒古宅,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53호), 해저리의 해저만회고택(海底晩悔故宅, 중요민속자료 제169호) 등이 있다.
봉화읍에는 석평리의 송석헌(松石軒,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95호), 문단리의 빈동재사(賓洞齋舍,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97호), 의양리의 권진사택(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90호) 등이 있으며, 소천면에는 분천리도토마리집(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07호)·분천리까치구멍집(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08호), 상운면에는 설매리겹집(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09호)·설매리삼겹까치구멍집(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10호) 등이 잘 보존되어 있다.
또한, 봉화읍 유곡리의 내성유곡권충재관계유적(乃城酉谷權冲齋關係遺蹟, 사적 및 명승 제3호)을 비롯해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청량산 등 많은 명승지가 있으며, 봉화 석포면의 백천계곡 열목어서식지(熱目魚棲息地, 천연기념물 제74호)도 유명하다.
교육·문화
조선시대 교육기관으로는 세종 때 봉성면 봉성리에 봉화향교가 창건되었다가 1579년(선조 12) 현감 조목(趙穆)에 의해 중건되었다. 1588년(선조 21)에는 봉화읍 삼계리에 삼계서원(三溪書院)이 설립되어 권벌의 위패를 봉안했고 1660년(현종 1)에 사액서원이 되었다. 이 서원은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가 1960년에 다시 복원되었다.
1596년(선조 29) 봉화읍 화천리에 구만서원(龜灣書院)이 설립되어 금인(琴靭), 남몽오(南夢鰲), 박선장(朴善長), 권호신(權虎臣) 등을 배향하다가 1868년(고종 5)에 철폐되었고, 1967년에 복건되었다. 1804년(순조 4) 물야면 수식리에 건립된 행계서원(杏溪書院)은 김강(金鋼), 김홍제(金弘濟)를 배향하다가 1868년에 철폐되었으며, 1931년에 복건되어 김용(金湧)을 추가 배향하였다.
봉화의 유서 깊은 집성마을
내성천 상류의 영주 봉화는 안동, 경주를 중심으로 보면 산간오지일지 몰라도 문화적으로 변방은 아니다. 신라 사람들이 신성시한 태백산 아래에 있고 고구려, 고려의 문물이 죽령을 넘어 처음 닿는 고을이 영주, 봉화다. 영주에 '태백산부석사'를 세우고 봉화에 태백산을 향해 앉아있는 ‘북지리마애불’을 새겼다는 사실은 의미가 깊다. 특히 봉화는 조선 중기에 이르러 안동의 사족(士族)들이 들어와 집성마을을 이뤘다.
천혜의 자연조건을 갖춘 봉화에는 양반문화와 선비정신이 변질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는, 유서 깊은 마을이 여럿 있다. 봉화읍 유곡리 ‘닭실(마을)’, 해저리 ‘바래미(마을)’, 거촌2리 ‘황산마을’, 거촌1리, 3리에 ‘외거촌’이 있다. 물야면 오록리에는 ‘창마(마을)’이, 법전면 법전리에는 ‘버저이(마을)’이 있다. 모두 봉화에서 손꼽히는 오래된 집성마을이다.
이들 중 ‘닭실’을 빼고 봉화를 얘기하기 어렵다. 봉화읍 유곡리 ‘닭실’은 안동권씨 집성마을로 봉화와 인근에서 알아주는 명문이다. 내성천 상류의 삼계서원을 시작으로 석천계곡의 ‘석천정사’, 닭실의 ‘청암정’은 물론, 멀리 춘양면 ‘한수정’까지 모두 안동권씨 집안과 관련 있는 옛집들이 있다.
석천계곡 석천정사
닭실마을로 이어지는 산수맑은 계곡
예로부터 경상북도 ‘봉화(奉化)’, ‘영양(英陽)’, ‘청송(靑松)’을 가리켜 ‘대한민국의 3대 오지(奧地)’로 꼽힌다. 어떤 이는 이 지역의 알파벳 머리글자를 따서 ‘B·Y·C’라고 하기도 했다. 지금은 교통이 많이 좋아졌지만, 세 지역이 모두 주변에 1,000m고지의 산들이 솟아 있고 산의 높이만큼 골이 깊어 옛날에 B·Y·C에 가려면 험한 산을 넘고 깊은 물을 건너가야 했다.
봉화의 ‘석천계곡(石泉溪谷)’은 내성천(內城川) 상류에 있다. 봉화읍에서 915번 지방도로를 타고 가다가 삼계2교 건너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이어지는 ‘가계천’을 따라가면 석천계곡이다. 가계천은 문수산(1,207m)에서 발원하여 봉성면 금봉저수지를 경유하여 내려와, 동쪽의 성불산에서 발원하여 창평저수지를 경유하여 내려오는 창평천과 합류하여 내성천의 본류를 이룬다. 창평천 유역에는 봉성면 창평리에 ‘충효당’이 있고, 아래로 내려오면 봉화읍 유곡리에 유서 깊은 ‘닭실’이 있다. 닭실마을 앞을 지나, 곡류(曲流)를 이루면서 아름다운 절경을 이루는 가계천이 바로 ‘석천계곡’이다.
석천계곡(石泉溪谷)은 울창한 숲 사이로 난 협곡은 아주 좁게 파여 S자형으로 큰 굽이를 이루고 있다. 마치 태극의 문양처럼 휘돌아 흐르는 사행천(蛇行川)이다. 봉화읍에서 아름다운 석천계곡을 따라 난 옛길을 거슬러 오르다가 한 굽이 왼쪽으로 돌면, 곧바로 고졸(古拙)하고 청량하기 그지없는 풍광을 만나게 된다. ‘석천정사(石泉精舍)’이다. 여울 건너로 길게 자리한 석축 위의 푸른 솔에 싸인 아름다운 정자가 한 폭의 풍경화처럼 시야에 들어온다. 정사 앞의 계곡은 커다란 너럭바위, 깨끗한 강자갈과 모래, 그리고 수정같이 맑은 계류가 순수한 자연의 경치를 그대로 간직하며 흐르고 있다.
석천정사는 닭실의 충재 (沖齋) 권벌(權橃)의 아들 권동보(權東輔)가 세운 정사(精舍)로 학문을 강학하고 풍류를 즐기던 곳으로, 계곡의 암반 위에 석축을 쌓은 뒤 지어진 팔작지붕의 한옥이다. 맑은 계곡물이 흐르고 뒤로는 창송으로 우거진 능선이 배경이 되어, 인공의 정자와 순수한 자연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석천정사의 난간에 기대면 계곡을 한눈에 들어온다. 맑고 이름다운 절경이다.
‘靑霞洞天’(청하동천)
도깨비들이 놀라서 달아난 날렵한 초서체 글씨
석천계곡 암벽에 초서체로 쓴 ‘靑霞洞天’(청하동천) 글씨가 새겨져 있다. 충재(冲齋) 권벌의 5대손 권두옹이 쓴 글씨로 ‘신선이 사는 깊은 계곡’이라는 뜻이다. … 옛날 이곳 석천계곡에는 도깨비들이 찾아와 놀았다. 이 때문에 석천정사에서 공부하던 유생들이 두려움을 호소하자 이에 권두옹이 바위에 ‘靑霞洞天’(청하동천)이란 글자를 새기고 붉은 색을 칠해, 필력으로 도깨비를 내쫓았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아직 주서(朱書) 흔적이 남아 있다. 신선이 노닐던, 아름다운 계곡을 도깨비들이 탐내서 놀이터로 알고 설쳤던 것이다. 초서(草書)로 쓴 글씨도 또한 도깨비가 춤추는 것과 같이 신묘하다.
석천정사(石泉亭舍)는 충재 권벌의 큰아들 청암(淸岩) 권동보(權東輔, 1517-1591)가 1535년에 세웠다. 권동보(權東輔)는 중종 37년인 1542년에 사마시에 합격해 벼슬길에 올랐다. 명종 2년인 1547년에 ‘양재역 벽서사건’에 관련된 혐의로 아버지 권벌(權橃)이 평안북도 삭주로 유배돼 1년 만에 죽자, 관직을 버리고 20년 동안 두문불출했다. 선조 때 아버지의 무죄가 밝혀져 복관됐지만 벼슬을 사양하고 향리에 돌아와 전원의 계곡 위에 석천정사를 짓고 산수를 즐기면서 글을 읽으며 여생을 보냈다.
석청정사는 울창한 소나무 숲에 싸여 있다. 정사는 계곡에 면한 원래 지형을 최대로 살려 자연과 조화를 이루었다. 계곡 옆에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정자를 지었다. 자연석 암반 위에 세워진 정사와 소나무, 물길, 나무 징검다리 등이 어우러진 풍경이 일품이다. 마루는 완전히 개방된 형태가 아니라 판장문(板牆門)을 두어 필요에 따라 문을 여닫아 공간을 폐쇄하기도 해 자연과 소통할 수 있게 했다.
석천정사 현판
정사의 문을 열면 계곡 풍경이 그대로 들어온다. 선경(仙境)이 따로 없다. 현판 ‘石泉精舍’(석천정사)는 조선중기 문신이자 서예가인 송재(松齋) 송일중(宋一中, 1632~1717)이 썼고, 추녀 끝에 있는 ‘水明樓’(수명루)와 ‘溪山含輝’(계산함휘) 현판은 철종 때 경상도 관찰사와 공조판서를 지낸 송벽 이정신(李正臣, 1792-1858)의 글씨이다. ‘수명루(水明樓)’는 물과 같이 맑은 행실과 덕행을 닦고자 하는 의미이고, ‘계산함휘(溪山含輝)’는 시내와 산이 싱그럽게 빛을 머금고 있다는 뜻이다.
석천정사 앞 나무징검다리
다리는 모가 나지 않고 투박하기 이를 데 없는 나무다리다. 그것도 암반을 기반으로 두 개를 자연스럽게 연결해 놓았다.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길이 있을까? 아름다운 경치도 경치지만 가슴에 맑은 기운이 고일 정도로 공기가 청정하다. 시원한 한 줄기 바람이 옷깃을 스치면 우화이등선(羽化而登仙) 신선이 되어 날아오르는 기분이다. 커다란 너럭바위, 깨끗한 자갈과 모래, 그리고 수정같이 맑은 계류는 정사(精舍)에서 살았던 강호처사[東輔]의 선비정신이 투영되어 있다.
석천정사를 시제(詩題)로 지은 시구(詩句)가 새겨진 시비(詩碑)를 지나, 왼쪽 징검다리를 건너 올라서면 너른 들판이 나오고 마을 전체가 한눈에 들어온다. '닭실(마을)'이다.
노송 사이로 펼쳐진 석천정사 본가(本家)인 ‘닭실의 종택’으로 길을 잡는다. 석천정사와 석천계곡은 금닭이 알을 품고 있는 천하의 명당자리로 되돌아가는 대문 역할을 하는 곳이다. 현재의 ‘닭실’은 봉화읍에서 울진 방향으로 가는 국도에서 진입하게 돼 있지만, 예전에는 충재(冲齋)의 위패를 모신 삼계서원(三溪書院)이 있는 삼계리에서 올라오는 길이 주 진입로였다고 한다.
'닭실마을' '달실'
천혜의 명당 금계포란의 풍수
봉화8경 중 제3경에 올라있는 ‘닭실마을’은 오늘날 봉화읍 유곡리(酉谷里)이다. 유곡(酉谷)이란 ‘닭실’을 한자로 그대로 옮긴 말로 ‘금계포란(金鷄抱卵)’의 풍수형국에서 유래한 마을 이름이다. 현지에서는 ‘달실’이라고 발음하고 표기한다. 닭실마을의 동쪽에 있는 옥적봉은 수탉, 서쪽의 백운령은 암탉을 닮았다고 한다. 현재 닭실마을은 봉화읍에서 울진 방향으로 난 신작로인 36번 국도에서 마을로 들어가지만, 예전에는 석천계곡을 지나는 길이 주된 진입로였다. 내성천의 지류, 가계천를 따라 올라가는 길이었다. 봉화읍에서 내성천을 따라 북쪽으로 200m 정도 거슬러 올라가면, 물길이 두 갈래로 갈라진다. 여기서 우측의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석천계곡이다.
석천계곡은 닭실마을의 동쪽과 서쪽으로 흐르는 기계천과 북쪽에서 흘러오는 동막천이 마을 앞에서 합류하여 하나가 된 후에 물이 빠지는 수구(水口)를 감추듯이 돌아 나가는 곳에 위치해 있다. 이처럼 수구가 닫혀 있기 때문에 닭실마을의 상서로운 지기가 유실되지 않고 응축되어 명당지세의 터전이 된다고 한다.
닭실마을은 전통한옥으로 구성되어 있어 영남 지방의 기품 있는 반촌의 전형을 잘 보여준다. 이곳은 조선 중기의 지리학자 이중환(李重煥, 1690~1752)의 《택리지(擇里志)》에서 ‘경주 양동마을’, ‘안동 내앞마을’, ‘풍산 하회마을’과 더불어 삼남의 4대 길지(吉地)로 꼽았던 바로 그 ‘봉화 닭실마을’이다. 마을을 감싼 부드러운 산세와 위엄 있는 기와집들, 그리고 너른 들판이 어우러져 넉넉하고 고아(古雅)한 풍경을 이룬다.
충재종택
닭실마을 안동권씨 종가
닭실마을은 안동 권씨(安東權氏)들이 모여 사는 봉화의 대표적인 집성촌이다. 이곳에 안동 권씨들이 모여 살게 된 것은 충재(冲齋) 권벌(權橃, 1478~1548) 이후이다. 닭실은 안동권씨 세거지로 가문에서도 ‘닭실권씨’라는 독립적인 세력을 이루었고 종가인 충재의 고택(古宅)을 중심으로 다수의 한옥이 마을을 이루고 있다.
충재종가(冲齋宗家)는 마을의 서쪽에 위치한 규모가 큰 기와집이다. 종가 대문을 들어서면 전면에 사랑채가 있고 중문을 들어서 안채가 자리한, 전형적인 영남 반가의 □자형 집이다. 마당 맞은편에 종가가 있고 서쪽에 박물관이 자리 잡고 있으며 그 안쪽으로 충재가 지은 청암정(靑巖亭) 일곽이 있다.
현재 종택에는 충재 18대 종손 권종목씨가, 1943년에 종가에서 태어나, 조상을 받드는 일을 천직으로 여기며 종손으로서 70여 년째 종가를 지키고 있고, 충재 19대손 권용철(43)씨는 충남 천안 독립기념관에서 근무하다가, 7년 전에 ‘충재박물관’을 지으면서 내려와, 아버지에 이어 다음 종손으로서 종가의 고택과 박물관을 관리하고 있다. 종부는 5년 전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장
차 종부가 될 권용철씨 부인 권재정(41, 예천권씨)씨가 종가의 살림을 이어가고 있다.
충재종가에서는 임금께서 충재 권벌 내외에 내린 ‘불천위(不遷位)’ 제사(祭祀)를 드린다. 불천위제사는 음력 3월 26일 닭실마을 이 종가에서 거행되는데 기제사의 특수한 형태이다. 불천위란 4대를 지나도 사당에서 신주(神主)를 ane지 않고 자손대대로 영원히 제사를 모시는 신위를 말한다. 국불천위는 국가에 큰 공헌을 한 공신이 주로 그 대상이 되었으므로, 나라에서 불천위를 인정받는 것은 그 후손과 가문의 큰 영광이며 권위의 상징이 되었다.
충재(冲齋) 권벌(權橃)
권벌(權橃, 1478년(성종 9)~1548년(명종 3))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안동권씨의 본향인 안동시 북후면 도촌리에서 태어났다. 자(字)는 중허(仲虛), 호(號)는 충재((冲齋)) 또는 훤정(萱亭), 송정(松亭) 등이며, 작위는 ‘길원군(吉原君)’이고,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중종 때 조광조(趙光祖), 김정국(金正國) 등 기호사림이 중심이 되어 추진한 개혁정치에 영남사림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으며, 명종 때는 이언적(李彦迪) 등과 함께, 소윤이 대윤을 제거하려 할 때 사림(士林)을 구하려다가 실패했다.
권벌(權橃)은 1496년(연산군 2) 생원진사시에 합격하고, 연산군 때에 정시에 급제했지만 연산군의 비위를 거슬러 합격이 취소되었다. 1507년(중종 2년) 문과에 급제, 1513년 사헌부지평 재직 중, 그 당시 신윤무(辛允武), 박영문(朴永文) 등의 역모 사실을 알고도 즉시 보고하지 않은 정막개(鄭莫介)를 규탄, 당상관 품계를 삭탈하게 하여 강직한 신하로 명성을 얻었다.
1514년(중종 9년) 이조정랑, 호조정랑이 되고, 영천군수로 부임하였다. 1518년 승정원동부승지, 도승지, 예문관직제학 등을 거쳐, 1519년(중종 14년) 예조참판이 되었는데, 바로 그해 왕도정치를 주장하는 조광조가 훈구파를 비판하자 조광조를 지지하는 사림파와 훈구파 사이를 중재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그래서 정쟁을 피하고자 부친의 연로하심과 자신의 풍병을 이유로 들어, 외직인 강원도 삼척부사로 나갔다. 이때 고향을 거쳐 가면서 어머니 묘소가 있는 ‘닭실’을 찾았는데, 닭실의 경관에 매료되어 나중에 이곳에서 안거하리라 생각하고 삼척으로 떠났다.
그해 11월, 1519년(중종 14) 11월에 중종이 훈구파 심정, 외척 홍경주, 온건 사림파인 남곤, 김전 등을 부추겨서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키고 조광조 일파를 제거할 때, 연루되어 파직(罷職)당하고 귀향하였다. 1520년(중종 20년) 안동부 내성면 유곡(酉谷), 즉 닭실에서 1520년 지금의 종택(宗宅)을 짓고 15년간 은거했다. 1533년 복직하여, 밀양부사, 한성부좌윤 등을 역임했다. 1539년(중종 34년) 3월 병조참판, 6월 한성부 판윤 등을 거쳐 1539년 7월 중종의 특명으로 종계변무 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에 임명되어, 동지사 임권(任權) 등과 함께 연경에 가서 명나라 대명회통에 태조 이성계가 이인임의 아들로 잘못기록된 것을 바로 잡고 돌아왔다. 1540년 2월 명나라에서 돌아와 춘추관지사(春秋館知事)에 임명되어 세자우빈객(世子右賓客)을 겸하여 세자 인종(仁宗)을 가르쳤다. 그는 독서를 좋아하여 자경편(自警篇), 근사록(近思錄) 등을 항상 품속에 지니고 다녔다.
1540년 병조판서, 1541년 예조판서, 의정부좌참찬 등을 거쳐 의정부우찬성과 판의금부사를 겸하였다. 1545년 어린 명종(明宗)이 즉위하자 원상(院相)에 임명됐다. 이때 문정왕후 소윤(윤원형) 일파가 장경왕후 대윤(윤임)을 공격하면서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키자, 윤임을 구하려고 왕에게 계사를 올렸으며 사화가 끝나자 위사공신(衛社功臣)에 책록 되고 길원군(吉原君)에 봉해지기도 했으나 정순붕, 이기 등의 반대로 공신록에서 삭제되고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파면되었다. 1547년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구례로 유배되었다가 얼마 뒤 태천으로 바뀌었으며 다시 함경도 삭주로 옮겨졌다가, 이듬해 1548년 배소에서 생(生)을 마감했다.
★ [양재역벽서사건] ☞ 당시 외척으로서 정권을 잡고 있던 윤원형(尹元衡)세력이 반대파 인물들을 숙청한 사건이며, 정미사화라고도 불린다. 중종(中宗) 말년부터 경원대군(慶源大君)의 외숙인 윤원로(尹元老)·윤원형을 중심으로 한 소윤(小尹) 일파와 세자의 외숙인 윤임(尹任)을 중심으로 하는 대윤(大尹) 일파 사이의 대립이 심화되었다. … 중종의 뒤를 이은 인종(仁宗)이 재위 8개월 만에 병으로 죽고 경원대군이 즉위[명종(明宗)]하는 한편, 윤원형의 누이인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수렴청정을 실시하자, 소윤 세력은 역모를 씌워 대윤을 중심으로 한 반대 세력을 숙청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을사사화로, 그 과정에서 사림(士林)계열의 인물들까지도 많이 희생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소윤 세력이 자신들에 대한 정적으로서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잔존 인물들을 도태시키려고 일으킨 것이다.
1547년(명종 2) 9월 부제학 정언각(鄭彦慤)과 선전관 이로(李櫓)가 경기도 과천의 양재역에서 ‘위로는 여주(女主), 아래에는 간신 이기(李芑)가 있어 권력을 휘두르니 나라가 곧 망할 것’이라는 내용으로 된 익명의 벽서를 발견해 임금에게 바쳤다. 윤원형·윤인경(尹仁鏡)·이기·정순붕(鄭順朋)·허자(許磁) 등은 이전의 처벌이 미흡하여 화근이 살아 있는 까닭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지난날 윤원형을 탄핵한 바 있는 송인수(宋麟壽), 윤임 집안과 혼인 관계에 있는 이약수(李若水)를 사사하고, 이언적(李彦迪)·권벌(權橃))·정자(鄭磁)·노수신(盧守愼)·정황(鄭熿)·유희춘(柳希春)·백인걸(白仁傑)·김난상(金鸞祥)·권응정(權應挺)·권응창(權應昌)·이천계(李天啓) 등 20여 명을 유배하였다. 이 중에는 사림계 인물들이 많았다. 또한, 중종의 아들인 봉성군 완(鳳城君岏)도 역모의 빌미가 된다는 이유로 사사되었으며, 그 밖에 사건의 조사 과정에서 희생된 인물들이 많았다. ― 1565년 소윤 일파가 몰락함으로써 노수신·유희춘·백인걸 등이 다시 요직에 등용되었으며, 선조가 즉위하고 사림 세력이 중앙 정계를 장악한 뒤로는 벽서사건 자체가 무고로 공인되는 한편, 연루된 인물들에 대한 신원과 포장이 여러 단계에 걸쳐 행해졌다. 이 사건은 익명으로 쓰여진 것을 문제삼았다는 절차상의 잘못이 많이 지적되기도 하였다.
충재(冲齋)는 1567년(명종 22) 신원(伸寃)되었고, 선조 즉위 후 권벌(權橃)의 억울함이 밝혀져 직첩을 돌려받고 1568년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불천위에 선정되었다. 1588년 삼계서원(三溪書院)에 제향되고 후에 현종 때 사액이 내려졌다. 선조 즉위 후 공신 책록 경력으로는 추성정난위사공신(推誠協翼炳幾定難衛社功臣) 2등과 광국원종공신 1등이다. 종계변무가 성공하자 1591년(선조 24) 종계변무에 힘쓴 공로로 광국원종공신 1등에 녹훈되었으며, 증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고 불천위(不遷位)에 선정되었다.
청암정(靑巖亭)
충재종택 옆에 지은 아름다운 정자
봉화 닭실마을 ‘청암정(靑巖亭)’은 석천계곡(石泉溪谷)과 함께 대한민국 명승(제60호)으로 지정되었다. 석천계곡은 문수산을 분수령으로 남서류하는 창평천과 닭실마을 뒤에서 흘러내리는 동막천이 합류하는 곳에 위치한다.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석천계곡에는 석천정사가 있는데, 이 주변은 닭실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한다. 이처럼 ‘靑巖洞天(청암동천)’이라 불리는 수려한 석천계곡의 경치는 길지로 평가되는 닭실마을과 함께 명승지를 이룬다.
청암정(靑巖亭)은 권벌이 닭실마을에 종가를 지으면서 조성한 정자다. 1526년(중종 21)에 종택에 붙여 지은 정자로, 거북 모양의 너럭바위 위에 세워져 있다. 바위 주변에 못을 파고 냇물을 끌어 들여 못물을 채워 놓았으며, 장대석을 걸쳐 놓아 좁고 긴 돌다리를 축조해 청암정에 다다를 수 있도록 조성해 놓았다. 청암정은 바위를 평평하게 다듬지 않고 자연 모습 그대로 살리면서 주춧돌과 기둥 길이를 조정하여 지은 집으로써, 주초의 높이가 각각 다른 구조를 가지고 있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그대로 활용하여 정자를 세운 옛 사람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자연암반을 이용하여 정자를 짓고, 암반 주위에 연못을 만든 정원조성수법은 매우 탁월한 조경기법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정자 주변에는 향나무, 왕버들나무, 소나무가 우거져 정자의 운치를 한껏 살리고 있다. 정자를 올려다보거나, 정자 마루에서 아래쪽 충재(沖齋)를 둘러보면 옛사람들의 빼어난 미적 감각을 느낄 수 있다. ‘충재(沖齋)’는 권벌이 독서하던 별당 서재이다.
청암정(靑巖亭)이 놓여 있는 너럭바위는 물속에 든 거북으로 비유된다. 마치 물속에 거북이가 자리하고 있고, 그 위에 정자가 놓인 형상으로 풀이된다. 정자 한쪽에 마련된 방에는 온돌이 아니고 마루가 깔려 있다. 청암정을 이 바위 위에 처음 지을 때, 이 방은 온돌방으로 꾸며졌으며, 바위 둘레에는 연못도 없었다고 한다. 집을 짓고 난 후 온돌방에 불을 지폈는데, 바위가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괴이하게 느껴오던 차에 한 스님이 이곳에 오게 되었는데, 스님은 이 바위를 가리켜 ‘거북바위’라고 했다. 정자의 방에다가 불을 지피는 것은 거북이 등에다 불을 놓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하여, 아궁이를 막은 다음 주변의 흙을 파내고 물을 담았다고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거북이에게 물을 주어 청암정을 등에 지고 있는 거북이가 살기 좋은 지세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거북바위에 지어진 청암정은 날아갈듯 날렵한 모습으로 바위 위에 올라 앉아 있다.
▶ 조광조(趙光祖)를 위시한 급진 사림파와 중종반정(中宗反正)의 훈구파가 극심한 대립을 하고 있을 때, 중종 조의 문신으로 온건 사림인 권벌(權橃)은 두 세력의 중재를 꾀했으나, 42세 때 기묘사화( 己卯士禍)로 파직을 당하자 이곳으로 내려와 집을 지어 닭실마을의 터를 잡았다. 권벌이 청암정(靑巖亭)을 지은 것도 이때 14년의 은거생활 중이었다.
충재(冲齋)는 1533년, 56세에 복직했다가, 68세에는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윤임 등을 적극 구하는 계사를 올렸다가 다시 파직을 당했다. 수난은 계속되었다. 2년 후 70세에 이른바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함경도 삭주로 귀양갔다가 유배지에서 71세 나이로 운명했다. 이 사건은 을사사화의 승자인 소윤(윤원형)의 집권세력이 나머지 잠재적 정적들을 말살하기 위해 조작한 역모사건이었다.
퇴계 이황 ‘청암정제영시(靑巖亭題詠詩)’
충재(冲齋)가 유배지에서 운명한지 20여년이 흐른 뒤 65세의 퇴계 이황(李滉, 1501~1570)이 이곳을 찾아와 ‘청암정에 붙이는시(靑巖亭題詠詩)’〈寄題酉谷靑巖亭〉(기제유곡청암정)을 남겼다.
我公平昔抱心衷 아공평석포심충 충재공께서는 예전부터 깊은 뜻을 품었는데
依杖茫茫一電空 의장망망일전공 끊임없는 화와 복은 순간의 번개같이 공허하구나
至今亭在奇巖上 지금정재기암상 지금껏 정자는 기이한 바위 위에 있고
依舊荷生古沼中 의구하생고소중 의구한 연꽃은 오래된 연못 속에 있구나
滿目煙雲懷表樂 만목연운회표락 눈에 가득한 구름에서 본래의 즐거움을 찾고
一庭蘭玉見遺風 일정난옥견유풍 뜰 한쪽에서 자라는 난에서 남겨진 풍취를 보네
取生幾誤蒙知獎 취생기오몽지장 못난 나는 거두어줌에 힘 입었는데
白首吟詩意無窮 백수음시의무궁 늙은 몸으로 읊은 시는 그 뜻을 다하지 못하는구나
酉谷先公卜宅寬 유곡선공복택관 충재공이 닭실에 짐터를 점지하여
雲山回復水灣環 운산회복수만환 구름산 둘러서 있고 다시 물굽이 고리처럼 둘러있네
亭開絶嶼橫橋入 정개절서횡교입 외딴섬에 정자 세워 다리 가로질러 건너도록 하였고
荷映淸池活畵看 하영청지활화간 연꽃이 맑은 연못에 비치니 살아있는 그림보는 듯하네
稼圃自能非假學 가포자능비가학 채마밭 가꾸는 일 배우지 않아도 능했고
軒裳無慕不相關 헌상무모불상관 벼슬길 연모하지 않아 마음에 걸림이 없네
更憐巖穴矮松在 경련암혈왜송재 바위 구멍에 웅크린 작은 소나무가 애틋하지만
激勵風霜老勢盤 격려풍상노세반 풍상의 세월 겪고 암반 위에 늙어가는 모습 더욱 사랑스럽네
퇴계(退溪)는 충재(冲齋)의 행장(行狀)도 지었는데 ‘충재와 내외종 간으로 오랫동안 이끌어주고 깨우쳐준 은덕을 입었고 조정에 계실 때 크게 빛나는 절개를 마음속에 기억하고 있어 공의 충의와 풍절을 후세에 전할 군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린다.’고 칭송하기도 했다.
‘靑巖亭’(청암정) ‘靑巖水石’(청암수석) 현판 이야기
청암정에는 남명 조식(曺植 1501~1572)이 쓴 ‘靑巖亭’(청암정)이라는 당호 현판과 함께 ‘靑巖水石’(청암수석)이라고 새긴 미수(眉叟) 허목(許穆, 1595~1682)이 쓴 전서체(篆書體) 편액이 걸려있다. 미수가 그 내력을 적어놓았다. “청암정은 춘양 권충정공(權忠定公, 권벌) 산수에 있는 옛집이다. 골짜기 수석(水石, 자연)이 가장 아름다워 절경으로 칭송되고 있다. 내 나이 늙고 길이 멀어 한 번 그 수석 간에 노닐지는 못하지만, 항상 그곳의 높은 벼랑과 맑은 시내를 그리워하고 있다. 특별히 ‘靑巖水石’ 네 글자를 큰 글씨로 써 보내니, 이 또한 선현을 사모하는 마음 때문이다. 그래서 이 사실을 기록해 둔다. 8년 초여름 상완에 태령노인 쓰다.(靑巖亭者 春陽權忠定公山水 舊墻 洞壑水石最佳絶景僕年路遠 不得一遊其間 懷想常在高壁淸溪 特書靑巖水石四大字 亦慕賢之心也識之 八年孟夏上浣台嶺老人書)”
여기서 8년은 숙종 8년이니 미수(眉叟) 88세(1682) 되던 해, 초여름에 접어드는 시기였다. 힘을 모아 편액의 휘호(揮毫)를 마치고는 자리에 누워 며칠 뒤 세상을 떠났다. 이런 까닭으로 340년 전 미수 허목의 마지막 글씨가 이곳에 걸리게 된 것이다. — 안동 임하의 ‘내앞마을’, 반변천의 정자에 걸린 ‘白雲亭’(백운정)의 편액이 미수(眉叟)의 전서체(篆書體) 글씨다. 허목은 조선 시대 후기의 남인의 영수로, 역사가이자 교육자 겸 정치인이며, 화가, 작가, 서예가, 사상가이다.
▶ ‘청암정’은 근래 ‘드라마 촬영지’로 각광받고 있다. 드라마 '바람의 화원' 에서 신윤복(문근영), 김홍도(박신양)가 물그림자를 드리우고 서있던 돌다리가 바로 청암정 돌다리였다. 또 드라마 '동이' 에서는 밤에 홀로 나와 고민에 빠진 숙빈(한효주)의 모습을 찍은 곳이 바로 이곳 청암정이고, 드라마 '정도전'에서 정도전(조재현)과 정몽주(임호)가 허심탄회하게 시국을 논의하는 장면 역시 청암정이었다.
이렇게 드라마로 인해, 닭실마을이 널리 알려지면서 한옥마을의 특징인 고즈넉한 분위기, 한옥과 흙담, 꽃의 그림 같은 풍경으로 많은 사람들이 한번 가보고 싶어 하는 명소가 되었다.
충재박물관(沖齋博物館)
보물 5개 482점을 포함 3,000여 점의 유물
경북 봉화군 닭실마을 북쪽 종가 옆에 충재박물관(冲齋博物館)있다. 충재(冲齋) 권벌이 남긴 문서와 유품을 비롯하여 그의 후손들이나 당대의 문인들과 교류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2007년에 개관한 ‘충재박물관’에는 보물 261호 권벌의 〈충재일기〉 6책, 보물 262호 《수진근사록》 4책, 보물 896호인 ‘충재종가의 전적(典籍)’ 15종 184책, 보물 891호 ‘충재종가의 고문서(古文書)’ 15종 274점, 보물 902호 충재종가의 유묵(遺墨) 8종 14점 등 보물급 문화재 5개 482점을 포함 3,000여 점의 유물이 있는데, 이중 전시품은 일부밖에 안 된다. 당대 문인과의 교류를 보여 주는 유물로 명나라에서 가서 당대의 명필로부터 받은 글씨 등 다양한 교류의 흔적을 보여주는 유물들이 있다.
《충재선생문집(冲齋先生文集)》은 충재 권벌의 글과 교류했던 유명인사 및 후대의 명사들의 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목판본이다. 특히 권벌이 직접 쓴 보물 261호 〈충재일기〉(6책)도 중요한 자료이다. 〈충재일기〉는 권벌의 《충재선생문집》에도 실려 있으며, 《중종실록》 편찬할 때 기초자료의 하나로 채택되었다. 조선시대 관료로서 당시 생활의 실태와 조정의 일상행사가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은 임진왜란 이후에는 〈증정원정기〉가 남아있어, 선조 이전의 것은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져 유희준의 《미암일기》, 이이의 《석담일기》와 함께 귀중한 사료가 된다. 뛰어난 권별의 필체와 문장이 돋보이는 기록이다.
충재박물관에는 미수 허목이 쓴 ‘靑巖水石’(청암수석) 전서체 글씨(보물)는 청암정에 걸려 있었던 현판이다. ‘청암정제영시(靑巖亭題詠詩)’는 퇴계 이황이 청암정을 주제로 지은 시판. 원래 청암정 내부에 걸려 있던 것이다. ‘석천정사제영시(石泉精舍題詠詩)’는 충재선생의 장남인 권동보의 시로 석천정사를 주제로 읊었다. ‘石泉精舍’(석천정사) 현판과 함께 석천정사 내부에 있던 것이다.
보물 262호 《수진 근사록(袖珍近思錄)》(4책)은 고려 때 제작되었으며, 충재가 손수 쓴 《근사록》이다. 중종 임금과 관련된 유명한 고사가 있는 책이며, 정조(正祖)의 어제서문이 있다. 성리학의 기본이 되는 내용을 요약해 놓은 문서로 초기 성리학을 연구하는 자료로서 가치가 높다.
특히 전시된 ‘충재종가의 전적(典籍)’ 15종 184책은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향계축’ 보물896-1호 / ‘홍치 9년 병진 윤3월 사마방목’ 보물896-2호 / ‘정덕2년 3월 문무잡과방목’ 보물896-3호 / ‘광국원종공신녹권’ 보물896-4호 ‘신편고금사문유취’ 보물896-5호 / ‘역학계몽 요해’ 보물896-6호 / ‘대학연의보’ 보물896-7호 / ‘근사록’ 보물896-8호 / ‘주자대전’ 보물896-9호 / ‘유향설원’ 보물896-10호 / ‘을사정난기’ 보물896-11호 / ‘충재일기’ 보물896-12호 / ‘춘양일기’ 보물896-13호 / ‘심경’ 보물896-14호 / ‘근사록’ 보물896-15호
보물 896-9호 《주자대전(朱子大典)》은 중종 38년(1543년). 중국 송나라의 학자 주희(朱熹)의 시문을 모아 엮은 책이다. 이 책은 중종 38년(1543)에 왕이 당시 좌참찬 권벌에게 하사한 것이다. 표지 뒷면에는 ‘내사기(內賜記’가 있다. ‘내사기’는 임금이 신하들에게 책을 주면서 ‘언제 누구에게 무슨 책을 주었다’는 기록이다. 책의 첫 장 상단에 ‘내사인’(책을 준 사람의 도장)이, 하단에는 ‘권두인’이란 소장자(권벌)의 도장이 찍혀 있다. 현재는 전질 가운데 5책이 빠져있다. (문화재청, 2010년)
보물 896-10호 《유향설원(劉向說苑)》‘’은 성종 24년(1493). 충재가 신묘년(1531)에 감사 임사균에게 받은 것으로, 한나라 유향(劉向)이 중국 고금의 기문과 일화들을 20편으로 엮은 책이다. 이 책은 중종 26년(1531) 이전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된다. 표지 뒷면에는 그 해에 감사 임사균이 권벌에게 주었다는 기록이 있고, 책머리 첫 장 하단에 소장자의 도장이 찍혀 있다. 하지만 보존상태가 좋지 않아 판독이 불가능하다. (문화재청, 2010년)
보물 896-14호 《심경(心經)》은 정조가 《근사록》과 함께 충재종가에 하사한 책이다. 이 책은 중국 송(宋)나라 영종 때의 문신 진덕수(眞德秀)가 심(心)에 대해 논한 성현들의 격언을 모으고, 또 여러 선비들의 섬세하면서도 주요한 의논을 모아 주석으로 삼은 책으로, 우리나라 유학자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책 가운데 하나였다. 이것은 정조(正祖)가 춘저(春邸)에 있을 때 퇴계 이황이 수정한 《수진심경(袖珍心經)》을 구현한 바가 있었다. 정조는 《심경(心經)》과 《근사록(近思錄)》은 의례(依例)가 서로 반대되는 책이고, 권벌과 이황의 수진사적(袖珍事蹟) 또한 서로 비슷하다 하여 특별히 《심경》도 아울러 충재(沖齋)가 예전에 살던 집에 내린다고 책의 머리말에서 밝히고 있다. 이 책은 4권 2책으로 되어 있다. (문화재청, 2010년)
보물 896-15호 《근사록(近思錄)》은 중국 송(宋)나라의 주희·여조겸이 함께 편찬한 것으로, 주돈이·정호·정이·장재 등의 저서나 어록에서 일상 수양에 긴요한 장구를 모아 엮은 책이다. 책 표지 안쪽 면에 영조 22년(1746) 남태온이 임금의 뜻을 받들어 쓴 ‘내사식기’(內賜識記, 임금이 신하들에게 책을 주면서 쓴 누구에게 무슨 책을 언제 주었는가에 대한 기록)」가 있고, 권 머리에 정조 18년(1794) 서영축이 임금의 뜻을 받들어 쓴 《어제충정공권벌 수진근사록(御製忠定公權橃袖珍近思錄)》과, 영조가 권벌의 옛집에 내린 《근사록》을 가져다 보고 감회를 적은 것으로 서영보를 시켜 책머리에 붙여 권벌이 예전에 살던 집에 되돌려 보낸 것이다. (문화재청, 2010년)
▶ 《근사록(近思錄)》은 송나라 주희·여조겸 등이 함께 편찬한 것으로, 성리학의 기본이 되는 주돈이의 〈태극도설(太極圖說)〉과 장재의 〈서명(西銘)〉 등에서 중요한 부분을 골라 만든 성리학의 독본이다. 이 책은 권발이 애독하던 것으로 늘 소매에 넣고 다녔으며, 중종 때에는 경연에서 강의까지 하던 것이다. 고려본이 희귀한 상황에서 중국판을 따라 다시 새긴 것이라 하더라도 매우 귀중한 가치를 지니며, 조선시대 성리학을 연구하는데 있어 반드시 정독해야 할 도서이다. 특히 정조가 친히 머리글을 지어서 붙였다는 것만으로도 더욱 가치가 높다고 할 수 있다. (문화재청, 2010년)
보물 902호 〈권벌수적(權橃手蹟)〉은 권벌의 자필 간찰 및 황보인, 이수광 등의 필적 등이 있다.
보물 902호 〈김구진묵(金絿眞墨)〉은 조선 전기 4대 명필 중의 한 사람인 김구(金絿)의 친필이다. 승지 김구는 절개와 지조가 있었다. 문장에 능하고 초서와 예서를 잘 썼는데, 일찍이 사마시의 생원과와 진사과에서 모두 장원을 차지했다.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예조참판에서 삼척부사로 좌천되어 가는 충재에게 써서 준 글이다. 기묘사화의 여러 현인들과 출처(出處)를 같이하여 김식(金湜). 김정(金淨). 기준(奇遵)이 화를 당할 때, 김구 또한 사현(四賢) 중에 들었다. 당시 사람들이 애석하게 여겼다.
그리고 보물 902호로 함께 지정된 〈장필진묵〉은 중국 명나라 홍치 연간(1465~1504) 명나라 문장가이며 초서의 대가로 불리던 장동해가 직접 쓴 글씨이다. 권벌이 개종계주청사(사신)로 명나라 연경에 갔을 때 구해온 진묵이다. 그리고 ‘忠’자 족자는 충재가 중국 사신으로 다녀올 때 받아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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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재(沖齋) 권벌의 학문과 절의
동래정씨 영의정 정광필(鄭光弼)은 ‘충재의 의(義)는 추상과 같아 죽음으로도 뺏을 수 없는 절의가 있다’고 했고, 규암 송인수는 ‘충재를 재상 중에서도 진정한 재상(宰相)’이라고 했다. 퇴계(退溪) 이황은 충재 행장(行狀)을 지었는데 '충재와 내외종 간으로 오랫동안 이끌어주고 깨우쳐준 은덕을 입었고 조정에 계실 때 크게 빛나는 절개를 마음속에 기억하고 있어 공의 충의와 풍절을 후세에 전할 군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린다'고 칭송했다.
봉화 춘양의 ‘한수정(寒水亭)’
‘寒水亭’(한수정)은 조선 선조 41년(1608) 권래(權來)가 조부인 충재(冲齋) 권벌의 학문과 절조를 기리기 위해 세운 봉화군 춘양(春陽)에 세운 정자이다. ‘와룡연(臥龍淵)’이라는 연못이 정자의 3면을 둘러싸고 있고, 연못과 정자 사이에는 ‘초연대(超然臺)’라는 바위가 있다.
동남향으로 위치한 T자형 평면의 건물은 중앙에 4통칸의 대청을 중심으로 양측에 각각 2통칸의 온돌방으로 두었는데, 좌측 온돌방과 그 전면· 후면 및 좌측은 우측보다 한 단 높은 누마루형식을 취하고 있다. 기단(基壇) 전면은 2단의 자연석 허튼층쌓기이나 후면은 자연석과 장대석을 혼용하였고, 초석은 모두 자연석 덤벙주초이다.
‘한수정(寒水亭)’은 ‘찬물과 같이 맑은 정신으로 공부하는 정자라는 뜻으로 이름 지었다. 독특한 평면 구성과 건축구조 및 연못의 조경 등으로 학술적 가치가 뛰어나다. 보물 제2048호로 지정되었다. 충재 권벌의 손자 권래(權來)가 지은 춘양의 ‘한수정(寒水亭)’은 은둔과 한사(寒士) 정자의 전범으로 보물이 되었으며, 충재의 5세손 권두경은 퇴계종택 사랑채인 ‘추월한수정(秋月寒水亭)’을 지었다.
삼계서원(三溪書院)
문화재자료 제417호
봉화의 삼계서원(三溪書院)은 봉화읍 닭실마을로 가는 초입에 자리하고 있다. 조선 중종 때 명신 충재((冲齋) 권벌(權橃, 1478∼1548)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당시 안동부사였던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 1540~1603)이 조선 선조 21년(1588)에 건립하였다. 선조 31년(1601)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사당을 ‘충정공사(忠定公祠)’, 강학공간인 강당을 ‘정일당(精一堂)’, 동재를 ‘사무사재(思無邪齋)’, 서재를 ‘무불경재(毋不敬齋)’, 정문을 ‘환성문(喚惺門)’, 문루를 ‘관물루(觀物樓)’라 각각 명명하였다. 그리고 현종 11년(1660)에 삼계서원(三溪書院)으로 사액을 받았다. 고종 5년(1868) 서원철폐령에 따라 충정공사, 환성문, 관물루가 훼철되었다가 1951년 복원하였다.
권벌(權橃)은 연산군 2년(1496) 진사가 되고 중종 2년(1507)에 문과에 급제하여 높은 관직(官職)을 두루 역임하였다. 명종 2년(1547)에 ‘양재역벽서사건’에 연루되어 평안도 삭주에 유배되었으며, 이듬해 그곳에서 생(生)을 마쳤다.
서원 앞쪽은 강학하는 공간[精一堂]이고, 뒤쪽은 제사를 지내는 사당[忠定公祠]으로, 전학후묘(前學後廟)의 구조로 짜여져 있다. 입구인 관물루(觀物樓)는 근래 새롭게 복원였는데, 당초의 모습을 볼 수 없지만, 문화재로서 충분한 역사적 가치가 있다.
삼계서원 경내의 전면 우측에는 1906년 사림에서 세운 신도비각(神道碑閣)이 있다. 비각 안에 충재 권벌 선생의 사후, 그 행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공적비인 신도비가 있다. 신도비 비문은 충재의 외예손(外裔孫)인 향산(響山) 이만도(李萬燾)가 짓고 이강호가 글씨를 썼다. 이만도는 퇴계 이황의 11대손으로 18살 때 봉화 유곡(닭실)의 안동 권씨와 결혼했다. 그의 장인 권승하(權承夏)는 아우인 권연하(權璉夏)와 함께 당대에 명성을 떨치던 저명한 학자였기에, 이만도는 이들로부터도 가르침을 받았다.
사동(沙洞) 추원재(追遠齎)
봉화군 봉화읍 유곡리 사동(沙洞)에 있다. 추원재(追遠齎)는 충재(冲齎 權橃)의 손자인 권래(權來)의 묘소을 관리하기 위하여 장자인 권상충(權尙忠)이 1621년에 세운 재사(齋舍)이다; 처음 추원재를 건립하고 증손인 권두웅이 증축하는 등 수차례 중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추원재는 상실(上室)과 동루(東樓)로 이루어져 있으며, 동루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2층 누각 건물로 심벽 없이 판벽으로만 구성되어 있어 특징적이다. 또한 이건물은 독립운동사에서 독특한 자취를가지고 있는데 성재 권상익(省齋 權相翊)이 1919년 기미 『파리장서』가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일부 유림들이 다시 외교활동에 나설 계획을 세워 중국의 유력한 인물에게 독립청원서를 보내기로 하고 1920년에 『제 2차 장서를』를 작성한 곳이 바로 이 사동 추원재이다. 2006년 경상북도 기념물 제157호로 지정되었다.
닭실마을과 을미의병
닭실마을의 위세를 말해 주는 이야기는 많다. 명성황후 시해(弑害)로 일어난 을미의병(乙未義兵)에 안동 봉기가 가장 치열했다. 이때 안동의진 의병자금을 각 문중으로 할당했는데 닭실은 하회(풍산류씨), 무실(전주류씨)과 함께 천 냥을 냈고, 닭실의 권세연(836년(헌종 2)~1899년(고종 36))이 의병장을 맡았다. 권세연은 상하이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의 외삼촌이다.
1895년 민비시해사건과 단발령에 격분한 안동지역 의병들은 안동관찰부를 점령하였다. 유지호(柳止浩)·김흥락(金興洛) 등 참모진은 권세연(權世淵)을 안동의 의병장으로 추대하였다. 이에 권세연은 격문을 발표하여, 각지의 의병부대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고 민심을 크게 격려, 고무시켰다. 이 격문에는 침략자 일본(日本)에 대한 적개심과 거기에 부화뇌동하는 자에 대한 증오심이 설득력 있게 표현되어 있어, 의병규합에 큰 몫을 하였다. 또한, 이것이 계기가 되어 1896년에는 예안의 이만도(李晩燾), 영양의 조승기(趙承基), 문경의 이강년(李康秊) 그리고 유시연(柳時淵), 김도화(金道和), 김도현(金道鉉) 등 각지의 의병장들과도 긴밀한 유대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그러나 1월 28일 안동으로부터 도망쳤던 관찰사 김석중(金奭中)이 많은 관군을 끌고 공격하여 의병들이 패배하였다. 권세연은 패배의 책임을 지고 의병장 직을 사퇴했고, 김도화(金道和)가 그를 대신해 대장을 맡았다. 그 후 권세연은 자택에 은거하여 지내대가 몇 년 후 병세가 깊어져 1899년 12월 10일 사망하니, 향년 64세였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 [계속] ☞ 내성천 봉화(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