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전 당시 청년들이 전쟁에 나가 싸울 수 있게 무기를 달라며 시위를 하고 있다. 스탈린은 모택동과의 약속을 저버리고 한국전을 비밀리에 지원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는 소련이 중공의 대만침공을 지원하게 될 경우 미국과의 직접 전쟁이 붙는 상황을 우려한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한국전쟁비화, 모택동은 스탈린에게 속았다
6.25전쟁 비밀에 부치고 대만침공시 소련공군 출동 약속도 어겨, 중소분쟁 씨앗 한국전 당시 인해전술로 북한의 생명줄을 구한 중국이 실상은 전쟁 발발까지 전쟁계획사실을 모르고 있었으며 한국전 발발과 비슷한 시기에 대만침공을 준비하고 있던 중국의 모택동은 공산주의 형제국이었던 소련의 스탈린으로부터 배신을 당했다는 비화가 뒤늦게 밝혀졌다.
중국에서 최근 발간된 <모택동(毛澤東)과 항미원조>라는 책과 러시아에서 나온 역사서 <애매한 파트너>라는 책에 근거해 일본 <산께이신문>이 이같이 보도했다.
한국전 당시 모택동과 스탈린은 중국의 대만침공과 관련 협상을 통해 전투기 등 약 1200여대에 달하는 소련공군의 지원이 합의됐으나 스탈린과 김일성은 한국전쟁을 위해 모택동에게 한국전쟁계획을 숨겼고 중공군에 대한 공군지원도 해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만침공에 소련 공군이 개입하게 되면 미국과 소련의 직접 대결상황이 우려돼, 스탈린은 중대만침공계획보다 한국전에 지원을 하기로 한 것으로 러시아 역사학자 콘차로프는 분석했다.
북한의 핵개발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열릴 6자회담 협의 참가국은, 1953년에 이루어진 휴전협정의 관계국으로도 중요하다. 휴전협정으로부터 50년이 지난 지금 이들 관계국의 입장과 목표는 많이 변했지만, 소련, 중국, 북한이라는 공산측 3국의 당시의 생각이나 전략은 지금도 상당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지금의 위기를 검증하는 일도 겸해서, 당시의 상황을 전하는 자료를 바탕으로 해서 한국전쟁휴전에 관한 에피소드를 소개한다.
"스탈린에게는 정말 실망했다. 우리는 소련공군의 출동을 바랬지만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다."
1970년 10월, 중국의 모택동 주석은 북경에서, 한국전쟁에 대하여, 북한의 김일성(金日成) 수상(당시)에게 말했다. 동석한 주은래 수상도 "스탈린의 반대가 결정적이었다"며 분개했다.
1953년 7월의 한국전쟁 휴전으로부터 17년이나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모택동, 주은래 라고 하는 중국의 최고수뇌부가 일치하여, 스탈린을 비판하고 있는 데에는, 사안의 심각성이 엿보였다. 전쟁의 장본인이었던 金日成은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중앙문헌출판사(베이징)刊 <모택동(毛澤東)과 항미원조>에 나오는 에피소드다. 전선의 중조(中朝)양군으로서는, 무기라든가 식량 등 물자가 풍부한 미군에 대항하는 데에는, 소련공군의 출동은 절대로 필요한 조건이었다. 그러나, 스탈린은,"공군(空軍)은(中朝국경의)압록강을 넘을 수 없다"며 공식 출동을 거부했다.
중국 측의 자료에 의하면, 모택동은 한국전쟁발생과 거의 동시기인 1950년 여름에 대만침공을 계획하고 있었다.
모택동은 스탈린에게 이를 전하고, 동의를 얻었다. 중국군으로서 전투력이 불안한 空軍에 대하여, 모택동은 지원을 구했다. 1950년 2월의 중소수뇌회담에서, 모택동이 스탈린에게 요청한 전투기 등 비행기는 모두 1214대였다. 상해(上海)라든가 남경(南京), 서주(徐州) 등에 空軍 몇 개 연대를 배치, 소련군의 파일럿이라던가 지상 정비원 등 러시아인 약 1500명이 파견되게 돼있었다.
미국무성 등의 예측에 의하면, 1950년 초의 시점에서, 대만의 해안인 중국 복건성에는, 중국인민해방군이 최대로 15만6000명이 집결, 空軍力은 미그 등의 소련제 전투기 이외, 구 일본군의 제로 전투기라든가, 미군의 C47수송기 등을 포함하여 약 200대. 러시아인 파일럿이 조종하고 있은 것은 20대였다. 또 중국군은 4000 척의 목제의 소형정으로 “함대(艦隊)”도 구성됐다. 각각 40밀리 포를 적재하고 있었다고 한다.
'대만 해방'작전은 중국인민해방군 제3 야전군이 담당하고, 착착 준비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런데, 스탈린은 金日成에게, 대만침공작전의 결행직전인 6월 25일, 한국전쟁의 개시를 허가했다.
한국전쟁 발생 2일 후, 미군이 대만해협에 제7함대를 출동시킴으로서, 중국軍의 대만침공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중국측의 자료에 의하면, 스탈린과 金日成은 북한軍의 남진(南進)에 대하여, 중국에 비밀로 했다. 모택동이 대만침공을 이유로, 반대할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스탈린은 소련空軍의 출동(出動)을 거부했는데, 가령 대만침공작전이 결행되었더라면, 소련 空軍이 참가함으로써, 미소가 직접대결하는 상황도 벌어질수 있었고 스탈린이 이를 고려하지 않았을 리가 없었는데도 소련 공군을 대만침공전에 파병한다는 약속을 한 것은 모순된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러시아의 역사가 S N 콘차로프는, 그의 저서<애매한 파트너>에서 스탈린은 대만침공 후, 美中 양국이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등의 밀접한 관계로 되는 것을 경계했다. 모택동이 바라는 대만해방에의 지원보다도, 金日成이 추구하고 있는 한국전쟁에의 지원을 우선시 했다고 지적했다. 그것은, 美中관계를 결정적으로 악화시켰고, 동시에 전쟁에서의 쌍방의 국력 약화를 기대했다. 그에 의하여, 중국은 소련 편에 서기를 촉진하려했다.
그 후, 돌연한 스탈린의 죽음은 한국전쟁에 커다란 계기를 가져와, 휴전이 실현되지만,'승리 없는 싸움'이었던 한국전쟁은, 그 후의 중소관계의 파국의 원인이 되는 등, '中朝소 사회주의 삼각형'관계에 커다란 상처를 준다.(大阪 本社地方部 相馬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