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에서의 마지막 날 짐을 챙긴 후 서울로 올라가기 전 체크아웃 후 호텔에 짐을 맡겨둔 채 땅끝마을로 유명한 '해남'으로 가기 위해 터미널을 다시 찾았다. 웬만한 곳들이 대략 1시간 30분 정도 안으로 소화가 가능해 원활한 여행이 가능했다. 그렇게 날 태운 버스는 해남으로 내달리기 시작했고, 이동하는 동안 어릴 적 가족들과 함께 찾았던 땅끝 마을의 어렴풋이 떠오른 추억의 순간들이 내 머리를 한껏 채우며 지루하지 않게 만들어 줬다.
서울 그리고 광주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와 마주침도 잠시 해남 버스 터미널 앞에 정차된 택시를 타고 이번 여행의 목적지 대흥사로 바로 달렸다. 잠시나마 읍내를 거닐며 돌아봄직 했지만 서울에서부터 부처님의 품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사찰이라는 수식어구가 내 호기심을 강하게 자극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민에서 선택으로 이어지기까지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택시 기사님의 대흥사는 처음이냐는 물음에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고 그 덕분에 편하게 입장권을 구매한 후 대흥사 본당 앞 주차장에 편하게 도착할 수 있었다.
한적한 산 중턱에 자리한 사찰 주차장에는 그 흔한 인기척도 전혀 보이질 않았고 내리쬐는 뙤약볕 아래 들리는 소리라곤 시원하게 부는 산바람 소리와 내 발걸음 소리뿐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멀리서부터 나를 반겨주는 듯한 소쩍새의 울음소리는 주변을 아우르는 적막감을 관통한 채 내 분위기를 완전히 바꿔 버렸고 처음 겪는 또랑또랑한 그 지저귐에 반해 경쾌한 발걸음과 함께 대흥사 가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1. 사찰의 특이한 구성
간간이 들려오는 소쩍새의 지저귐을 뒤로한 채 사찰의 중심 대웅보전이 위치한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대웅보전이 자리한 곳으로 들어서자 다른 사찰들과는 다른 특이점들이 바로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보통의 다른 사찰들은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가람들의 배치가 진행되지만 북원과 남원 구획 사이를 명확히 가르는 금당천을 사이에 두고 부처님은 스스로의 권위를 살포시 내려놓은 채 경내 가장 낮은 곳에서 그의 뜻을 전달하려는 의도를 간직한 듯 한결 접근하기 수월한 위치에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건너편에 어렴풋이 보이는 남원 구역과 함께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자연적으로 경계를 이루는 금당천의 모습을 바로 담을 수 있었다. 수심이 그렇게 깊지 않았고 물살도 거세지 않아 한창 강렬하게 내리쬐던 햇빛을 피해 잠시 호흡을 고를 수 있었다. 마곡사를 여행하기 전 자연적으로 형성된 경계를 두고 사찰 하나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특징들을 처음부터 보여주면서 사찰에 대한 흥미로움과 호기심이 동반 상승하면서 기대감으로 치환되는 것을 바로 자각할 수 있었다.
더불어 북원 지역에 잠시 올라가 주변을 살펴보면 사찰 전반을 포근하게 감싸 안고 있는 분지 형태의 두륜산을 바로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었는데 이 모습이 마치 부처님이 누워 계시는 와불에 빚대어 대흥사 전체에 부처님의 온화함과 자애로움이 전반에 펼쳐져 있는 듯 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실제로 대흥사로 들어오기 위해 꽤 길게 이어진 숲길을 통과해야 이곳으로 도달할 수 있다는 특징에 세상으로부터 고립된 불가의 공간이라는 그 특별한 기분이 이 공간을 더욱 매력 있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2. 분야를 가리지 않았던 고승 '초의선사'
금당천을 지나 돌다리를 건너면 바로 앞에 대흥사 '대웅보전'을 바로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웅장하다 라는 느낌보다는 작지만 강한 느낌과 더불어 정사각형 모양의 현판이 눈에 바로 들어왔다. 동대문역 바로 앞에 위치한 흥인지문에 달려 있는 정사각형 현판을 본 이후로 사찰에서 해당 현판을 본건 처음이었지만 대웅보전 자체에서 풍겨져 나오는 친숙함에 매료된 채 건물 주변을 거닐며 열심히 구석구석을 눈에 담았다.
대흥사가 창건된 이후 사찰을 대표하는 인물들 중 북원 지역 대웅보전과 함께 깃든 '초의선사'에 대한 이야기가 정말 매력 있게 다가왔다. 대흥사의 13번째 종사 조선 후기의 고승으로 불가에 몸을 두고 있으면서 배움에 한계를 두지 않고 다도(茶道)를 포함해 위리안치의 형을 살던 다산 정약용과 사제의 관계를 맺으며 유학에도 몰두하며 자기 계발이 화두가 되고 있는 현대의 사람들에게도 영감을 선사해 주고 있었다.
그들 중 반 표지교로 어울렸던 인물이 이곳 대웅보전의 현판과 얽힌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바로 흔히 조선시대의 명필로 유명한 추사 김정희의 이야기다. 초의 선인은 추사가 제주도에 유배를 갔을 시절에도 위로차 방문했을 정도로 깊은 관계를 유지했는데, 제주도로 유배를 떠나던 김정희가 잠시 대흥사에 들러 대웅보전에 걸린 현판의 글씨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걸 이유로 현판을 내리게 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 후 제주도에서의 유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대웅보전에 다시 그 현판을 걸게 했다는 일화가 녹여져 있었다.
분명 좋지 않게 볼 수 있는 대목도 존재하지만 한편으론 한 시대의 풍미했던 명필 문장가의 자신감이 한가득 담겨 있는 일화를 듣고 대단하구나 라는 생각도 절로 들었다. 게다가 초의선사의 폭넓은 활동 반경 덕분에 관심이 가는 이야기들과 더불어 그 사실을 유념한 채 대흥사 곳곳에 남겨진 그들이 필체와 흔적들을 함께 즐길 수 있었다.
추사 김정희와 더불어 조선시대 말 실학자로도 유명한 정약용과의 관계를 다룬 이야기도 어렴풋이 들을 수 있었다. 다산 정약용이 전남 강진에 머물던 유배 시절 자신의 친구 추사 김정희와 함께 다산초당을 찾아 그를 스승처럼 섬기며 유학 경서를 읽고 실학정신을 계승했다고 한다. 본인의 영역을 불가에 국한시키지 않고 배움의 지평을 넓혔던 초의선사와 조선시대의 불교를 업신여겼던 사회적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그를 맞이했던 정약용 두 사람의 성향과 인품을 생각해 볼 수 있는 일화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게다가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우리나라의 '차(茶)' 문화를 집대성 한 인물로도 유명하다. 실제로 초의선사는 한국의 다경이라고 불리는 "동다성"을 지어 우리의 차 문화를 예찬하고 다도의 멋을 전하고 있다. 아직까지도 이를 계승하기 위한 '초의문화제'가 대흥사에서 열리고 있는데 지금은 코로나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 문제로 열리지 않고 있으나, 매년 9월에서 10월 사이에 열리고 있다.
3. 호국불교의 본산 그리고 "서산대사"
북원 지역을 돌아본 뒤 남원 지역으로 자리를 옮기면 저 멀리서부터 서산대사의 흔적과 숨결이 닿는 듯하다. 묘향산에서 서산대사가 마지막 설법을 마친 후 입적했을 때도 그의 금란가사와 발우는 '대흥사'로 옮기라 는 말에 따라 지금도 대흥사 성보박물관에서 다른 유적들과 함께 고이 모셔져 있었다. '만년 동안 훼손되지 않을 땅' 그리고 '전쟁을 비롯한 삼재가 미치지 않을 곳'이라는 말 때문일까 한국전쟁 이 한창일 적에도 해남이 점령당했을 때도 대흥사는 화마가 미치지 않아 본래의 모습을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었다.
서산대사는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조의 부름을 받고 전국에 흩어진 승려들을 병력으로 모집하기 시작한다. 당시 70의 나이에 승병장으로 활약하며 대흥사를 승병 총본영으로 삼고 의병 활동을 이어갔다. 당시 활약했던 인물들을 기리기 위해 대흥사 남원 권역에 '표충사'라 불리는 사당이 세워져 있었다. 종묘를 돌아봤을 때도 구석에 공민왕 사당이 모셔져 있었던 것처럼 처음엔 당시의 시대상을 생각해 봤을 때 사뭇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위에 언급했던 배경들을 알고 나니 종교와 사상 없이 본질적 목표가 무엇인지 가장 잘 알고 있었던 그들의 노고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태극무늬가 새겨진 문을 지나 표충사 안쪽으로 들어가면 임진왜란 당시 활약했던 승병장 서산대사를 비롯해 그의 제자 사명당 그리고 처영 스님을 함께 모시고 있었다. 초의 문화제와 더불어 그들의 호국정신을 기리기 위한 춘추제향 행사가 아직도 치러지고 있으며, 사당 내 모든 문은 볼 수 없도록 닫혀 있었지만 그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 비각 앞에서 잠시 묵념의 시간을 가졌다.
4. 부처님의 자애로움이 느껴지는 공간
대흥사 내 사당 권역을 돌아본 뒤 두륜산을 오를 수 있는 코스와 함께 스님들이 수양을 이어가시는 공간들이 정말 많았기에 다른 전각들을 자세히 돌아볼 수 없어 아쉬웠다. 하지만 한 개라도 더 담기 위해 아래로 내려와 일반에 열려 있는 천불전을 발견해 내부를 자세히 돌아보고자 안으로 들어갔다. 분위기는 사뭇 달랐고 건물 양식도 조금 달라 보였다. 안쪽으론 스님께서 한창 불공을 드리고 계셨기에 사진을 담진 않았고 조그마한 불상들이 즐비해 있었고 건물 전반적으로 푸른빛이 감돌고 있었다. 신비하고 영 엄했던 현장의 분위기는 사찰의 이름과 얽힌 설화들을 듣고 바로 납득할 수 있었다.
천불전을 재건한 뒤 쌍봉사의 화승이던 풍계 스님께 경주 불석산에 있는 옥돌로 천불들을 마디도록 했다 한다. 석공들이 장장 6년에 걸쳐 천불들을 제작한 뒤 배 세 척에 나눠 싣고 해남을 향해 항해를 하던 중 풍랑을 만나 그중 한 척이 일본 나가사키로 흘러 들어갔는데, 옥불이 잔뜩 실린 배를 보고 사찰을 지어 모시려고 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그들의 꿈에 불상은 본래 대흥사로 가던 길이니 이곳에서 머물 수 없다는 메시지를 전했고, 1818년 사찰에 옥불들이 되돌아왔다고 한다. 당시 일본에 갔다 돌아온 768개의 불상들의 아랫면에 죄다 일(日) 자를 표기해 넣었다고 한다.
아쉬웠던 점은 남원 구역 사찰 건물들 대부분이 승려 분들이 머무는 공간 또는 한창 복원 공사가 진행 중이라 방문객들이 들어가서 볼 수 있는 공간은 한정돼 있다는 점이다. 대신 구역을 벗어나기 전 사찰 건물 바로 앞에 조성된 연못 주변을 돌며 사람들이 없는 공간에서 나 혼자 이 세상에 남아 있는 듯 한 기분 또한 마음껏 누릴 수 있었다. 서서히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천천히 그리고 부지런히 사찰 주변을 거닐며 어느새 땀으로 흠뻑 젖은 몸을 시원하게 식혀주고 있었고, 대흥사 주변을 감싸 안고 있는 형상 덕분에 부처님의 자애로움이 스며들어 순간을 상당히 평화롭게 만들어 줬다.
드문드문 스님들의 발걸음 소리와 이곳을 찾은 방문객들의 싫지 않았던 소음은 오롯이 순간에 집중할 수 있도록 자연산 화이트 노이즈를 선사해 줬고, 순간 떠올랐던 서산대사의 "만년 동안 훼손되지 않을 땅"이라는 문구와 함께 현실로부터 동 떨어진 듯 머릿속을 가득 채우던 평상시의 고민과 번뇌를 내려놓은 채 대흥사를 떠나기 전 목욕재계 한다는 기분으로 만족스럽게 여정의 방점을 찍을 수 있었다.
부처님이 가져다주셨던 만족스러운 순간을 뒤로한 채 광주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길을 천천히 걸어 내려왔다. 중간에 대흥사에서 배출한 역대 선사 분들을 모셔둔 공간을 지나 소쩍새가 반겨줬던 곳으로 천천히 걸어 내려갔다. 본래 목적은 시간이 허락한다면 순천에 들러 선암사까지 돌아보는 것이 최종 목적이었지만 시간의 흐름을 잊은 채 대흥사에 흠뻑 취해 있어 방해될 까 봐 과감히 일정을 취소해 버린 채 오롯이 순간을 즐겼다.
기다랗게 늘어진 숲길을 천천히 걸어 내려올 때 마치 해리포터 킹스크로스 역 9와 4분의 3 승강장을 통해 현세로 돌아오는 것처럼 잃어버렸던 현실 감각이 되돌아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대흥사 내부를 돌아다닐 때 들리지 않던 소쩍새 소리도 배경음악으로 깔리기 시작하며 잊지 못할 기억을 만들어 줬는데 시간만 괜찮다면 들어가거나 나올 때 경사도 그렇게 높지 않아 걸어가도 괜찮겠다 라는 생각도 절로 들었다. 그렇게 대흥사 입구에서 택시를 잡아 타고 광주로 가는 버스터미널에서 여정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초의선사와 서산대사가 가져다준 메시지를 생각하며 사색에 잠긴 채 버스는 광주 버스터미널에 도착해 있었다.